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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93) - 무량한 시공의 적요

문근영 2013. 12. 27. 23:30

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93) - 무량한 시공의 적요

 

 

 

중년

장석남

봉숭아는 분홍을 한 필
제 발등 둘레에 펼치었는데
마당은 지글거리며 끓는데
하산한 우리는 된 그늘을 두어 필씩 펼쳐놓고서
먹던 물 대접 뿌려서 마당귀 돌멩이들 웃겨놓고서
민둥산을 이루었네
 
 
# 6행의 짧은 시지만 시 안에 많은 이야기가 붐비고 있다. 언어의 잔잔한 여진이 깊고 넓게 확장되면서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다. 간결하면서도 시가 함의하고 있는 공간은 무량하다.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로 흐르는 정서의 숨결이 곱고 정갈하여 고아한 기운마저 감돌고 있다.

 이 시는 외부는 대립의 구조로 되어 있다. ‘봉숭아’와 ‘우리’, 그리고 ‘분홍’과 ‘그늘’이 상반된 이미지로 충돌하고 있다. 즉 1-3행과 4-6행이 맞세워져 있다. 이러한 단순 구조는 자칫 시를 상투적이고 평면화 할 우려가 많지만 이 시는 그러한 위험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다. 공교한 솜씨가 한껏 발휘된 결과이다.

 봉숭아와 마당은 하나의 ‘사태’이다. 현재 살아 숨쉬는 사물의 심장이며 명제화 되기 이전의 황홀한 풍경이다. 대상의 아름다운 묘사가 대상을 넘어서는 순간 ‘봉숭아’는 새로운 광휘에 휩싸여 빛을 뿜는다. 봉숭아의 꽃잎이 분홍 치마로 전이되는 매혹적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끓는 마당’은 생의 열정과 이어지는 뜨거운 존재의 ‘몸’이다. 이처럼 시에서 동원된 사물들은 지시적 범주를 넘어 다양한 무늬를 이루어 물결처럼 어룽어룽 번져나간다.

 4연부터 시의 표정이 달라진다. ‘하산’ 이라는 시어가 전경(前景)의 허리를 끊는다. 열정과 아름다운 생의 열정을 불태우던 ‘우리’는 어느새 ‘된 그늘’이 되어 중년을 맞는다. ‘된 그늘’은 고되고 지친 삶의 무거운 흔적이다. 햇살은 식고 어느덧 그늘의 영역으로 들어선 ‘우리’는 ‘분홍’의 시절을 지나 ‘그늘’의 시간을 목도하면서 ‘먹던 물 대접 뿌려서 마당귀 돌멩이들 웃겨놓’는 것이다. 마당 한 귀퉁이의 돌멩이들은 결국 ‘우리’의 쓸쓸한 초상의 다른 이름인 것.
 
그 웃음은 허허롭고 마냥 허전한 것. 물에 젖어 얼룩진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잠시 히히덕거리다가 불쑥 ‘민둥산’ 하나 만나는 것. 아무 것도 없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하나 남아 있지 않은, 물 얼룩마저 사라진 존재의 알몸을 깨닫는 순간 전율과 함께 생의 뒤란은 적요해지는 것이다. 이때 화자는 소멸과 허망의 그림자가 수런거리는 마당 한가운데서 벌거벗은 실존을 마주하고 존재의 내밀한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 즉 ‘명제’가 아닌 생의 ‘사태’를 목격하는 찰나 삶은 또 다른 색과 모양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언어의 결과 무늬, 실핏줄까지는 만져지는 시가 ‘중년’이다. 섬세한 언어의 미감이 살아있는 시 속에서 ‘우리’ 역시 어쩔 수 없이 ‘분홍’이 사라진 ‘민둥산’임을 깨닫는 고적한 시간이다.


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문화저널 21'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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