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108) 우주적 존재론의 시 |
단지(斷指)
손 택 수
간밤에 못물이 얼어붙고 말 것을
너는 미리 알고 있었던 거다
못물 속에 잠긴 버들가지
손가락 하나가
얼음 속에 끼여 있다
피 한 방울 통하지 않도록
옴짝달싹 못하게 꽉 죄여 있다
손가락이 반쯤 달아나다 만
버드나무, 허연
속살을 드러낸 생가지
뭉툭해진 끝에서
뚝, 뚝, 노을이 진다
내일 모레면 입춘, 얼어터진
땅이 그걸 받아먹고 있다
# 이 시는 손택수 시인의 첫 시집 『호랑이 발자국』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좋은 시 만나는 일이 쉽지 않을 때 자주 뒤적거리는 시집 중 하나이다. 김수영, 김종삼, 박용래, 신현정 시집도 언제 읽어도 매력적이지만 젊은 시인들의 풋풋한 첫 시집 또한 마냥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미지의 새로운 세계를 온몸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호랑이 발자국』에 실려 있는 여러 편의 좋은 시 중 당시 필자의 눈을 가장 오래 머물게 했던 시가 「단지」다.
얼어붙을 못물은 얼어붙지 말아야 할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불가피하게 물은 얼어붙는다. 결빙은 곧 죽음이다. 그 죽음과 맞서는 일은 쉽지 않다. 죽음의 상황은 달리 말하면 현실의 부당한 폭력의 암유이고, 그 폭력과 불의의 현실을 타파하고자 하는 생의 의지가 도드라지게 드러난 시가 이 작품이다. 얼핏 단순하고 간결한 한 편의 서정시로 보아 넘기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 시에 내재된 사유의 맥은 뜨겁고 강렬하다. 혹한에 맞서 손가락 하나를 못물 속에 집어넣는 버들가지의 행위는 숭고하고 비장하다. 얼음 속에 박힌 버들가지는 죽음을 불사한 전사이다. 물과 버들가지는 동일한 의미의 선상에 놓인다.
그것은 여성성의 표징으로 부드러움과 유연함, 곧 가장 근원적인 생명의 속성이다. 그 속성이 결빙의 현실을 뛰어넘고자 하지만 곧 자기 한계에 봉착한다. 남은 건 “속살을 드러낸 생가지”일 뿐이다. 그러나 가지 끝에서 뚝뚝 붉은 노을이 흐르고, 그 노을은 곧 죽음의 땅을 생명의 영토로 바꾸는 붉은 피다. 입춘을 앞둔 땅은 혹독한 시간을 견딘 인고와 시련의 육체이고, 얼어터진 대지는 손가락이 잘린 버들가지의 피를 받아 새로운 생명의 에너지로 인드라망의 호흡을 시작한다. 결국 「단지」는 죽음을 부활로, 파괴와 폭력을 상생과 호혜의 관계로 전환하는 우주적 존재론의 진경을 묘사한 작품이다.
이 시는 당위성을 주장하지도 않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냥 편하게 생의 풍경을 조용히 보여줄 뿐이다. 최근의 내면 탐사의 현란한 수사시들과 비교할 때 오히려 낯선 느낌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직하게 현실을 읽고 그것을 형상화하는 모습에서 또 다른 우리 시의 미래를 볼 수 있다. 이처럼 통찰과 직관이 범박하게 상투화되지 않고 신선한 이미지로 살아 움직이는 시들을 접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시대의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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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문화저널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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