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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109) - 기의와 기표의 충돌

문근영 2013. 12. 2. 01:09

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109) - 기의와 기표의 충돌

 

 

 

캘리포니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김산
 
당신의 언어는 바나나처럼 휘어져 있고
당신의 복장은 파인애플처럼 딱딱하고
당신의 머리통은 건포도처럼 메말랐고
당신의 혀는 살구처럼 시다
당신은 오렌지를 오렌지라 부르지 못하고
어렌지 오렝지 오렌치라고 반복할 뿐이다
당신의 발음은 부정확해서 내 귀를 두근거리게 하지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당신은 "새랑 했냐?"고 되물었다
새랑 뭘 했을까 여러 날을 고민했다
구관조 따오기 펠리컨 흰꼬리수리 따위를 생각했다
동물원에서 본 새들만 기억 속에 남았다
당신은 진지하고 장난스럽게 말씀하셨다
결국 사랑은 기억 속에 남은 흉터 아니겠냐고
바나나언어를 입속에 감추고
거추장스러운 파인애플옷을 입고
건포도머리통을 흔들며
살구혀를 가진 당신과 장을 보러 간다
배추는 비추 소라는 소리 소금은 손금 두부는 둔부
엉뚱한 것들을 장바구니에 담고 집에 왔다
먹을 수 없는 기호들로 방이 폭발할 것 같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당신은 당신의 세계로 증발했다
배추소라소금두부국 냄새가 온 세계에 가득하다  
 
# 진부한 세계에 대한 염오는 대개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문을 닫아거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몸을 던져 싸우는 일이다. 즉 개폐의 원리에 따라 대응 양식이 달라진다. 안은 어둠이고 밖은 빛이다. 어둠의 공간은 안온하여 몽환의 안개가 번식하기 좋은 곳이어서 주로 꽃과 나무들이 서식한다. 빛의 공간은 공포, 폭력과 맞서 싸워야 하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몇몇 젊은 시인들이 각개전투로 돌파하고자 하는 고루한 삶의 암벽들이 그곳에 있다.

 소통에 대한 욕망은 존재 구현의 발로이다. 그것이 실현되지 않을 때 좌절과 절망의 세계에 놓인다. 어긋남, 빗나감의 상황을 개성적인 육성으로 펼쳐놓은 시가 「캘리포니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시에서 당신의 언어는 이방의 언어이다. 소통되지 않는 두 사람의 관계는 불편하고 어색하다.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일 뿐이다.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고 장벽이 있다. 기표와 기의의 단절이다. 이러한 상황이 화자는 답답하고 화가 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임을 안다. 그러나 화자는 단념하지 않고  당신을 소망하고, 당신을 지향한다.

 사랑은 고백의 행위로 불붙기 시작한다. 그러나 시에서 고백은 다시 무위로 끝난다. 공염불이고 순간의 회오리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둘 사이는 계속 어긋나게 되고 각자의 방언으로 단절의 상황을 이어간다. 그리고 자위한다. “결국 사랑은 기억 속에 남은 흉터 아니겠냐”며 화자는 눈앞의 상황을 애써 이해하고 수용하려 한다. “파인애플옷” “건포도머리통” “살구혀”를 가진 당신과 함께 하는 시간은 지속되지만 단절로 인한 비극적 정서는 점점 고조된다. 시장에 가서 장바구니에 담아 가지고 온 것은 “먹을 수 없는 기호”일 뿐이다. 함께 나눌 수 없는 기호 앞에서 화자는 폭발 직전에 이른다.

 방언과 방언 사이의 단절은 분노로 이어지고,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한다. 결국 “당신은 당신의 세계로 증발” 하는 절망의 국면을 맞게 되고, 「캘리포니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그리고 듣도 보도 못한  “배추소라소금두부국”이라는 희한한 음식을 만나고, 세계는 그 냄새로 가득 차게 된다. 사라진 기표의 자리에 나타난 “냄새”는 새로운 삶의 징후이며 전조다. 기존의 기의로부터 일탈하여 엉뚱하게 태어나는 외계의 기표가 작동하는 순간이다.

 소통 대신 단절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지금, 누군가 또 다시 묻는다.
 
“새랑 했냐?”
 


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문화저널21'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이온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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