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111) - 사물의 방언 탐사 |
안개 그림자
김길나
너는 숨겨져 있다
유령놀이는 즐겁다. 오래된 우리의 숨바꼭질!
풍경을 장악하고 풍경을 무화시키는 이중의 폭력,
그것은 안개
불시에 쳐들어와 선명한 것들에게서 단조로운 권태를 지우고
형태의 완고성을 무산시키는 쿠데타,
그것은 안개
싱싱한 장미꽃이파리를 뜯어내고 먼 데서 모호한 구름을 끌어내려 꽃받침에 접붙인다. 장미를 죽였으나
장미의 재창조는 미완이므로 詩文의 행간에 쌓여 흐르는 환몽,
그것은 안개
‘나만을 바라봐 줘’ 사랑에 눈먼 에로스가 연인의 눈에서 타자를 지워버리려 한다
이기적인 성애의 비밀을 비밀 아래 감추는
그것은 안개
흑백과 천연색 꿈이 꿈밖으로 삐져나와 가상과 현실이 몽롱하게 뒤섞인다
꿈과 생시의 혼접, 환상과 실상의 혼돈,
그것은 안개
명료함을 감추는 취향은 차라리 미덕이라고, 안개가 안개의 어투로 웅얼거릴 때
펄럭이는 휘장에 가려진 아련한 것들이 눈물방울 같은 별빛을 끌어당기고
내 안개 그림자는 내 키를 넘어섰다
달콤한 숨결을 감고 잠이 엄습한 시간,
동침하는 잠과 죽음이 서로 그리움을 퍼내는 은밀한 몸짓으로 포개어진다
# 안개의 수사는 모호하다. 모호함으로 인하여 세계는 풍요로워진다. 이 반어에 역정을 내는 분도 있겠다. 시적 에피파니가 시의 중요한 동력이듯 안개는 세계에 대한 은유가 깊고 광활한 사물이다. 현실은 분명하고 또렷한 객관화된 풍경을 요구한다. 그러나 시는 운명적으로 모호한 장르다. 세계에는 답이 없다. 어떤 현상에 대해 이것이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머리에는 돼지똥 500g, 서른아홉 개의 돌멩이, 470g의 염소똥이 다글다글하다. 확정과 구획 속에 사물은 또렷한 모습으로 실체를 드러내는 것 같지만 그것은 지극히 일부의 기운이거나 편린이다.
안개는 게릴라이고 “형태의 완고성을 무산시키는 쿠데타”의 선봉장이다. 시인들의 생리와 가장 흡사하게 닮아있는 것이 안개인데 그걸 제대로 읽어내고 있는 시인이 김길나 시인이다. 안개의 변주를 통해 시는 풍성해지고 텍스트의 영역은 크게 확대된다. 시인의 시야가 그만큼 깊고 넓기 때문이다. 한때 미래파 시인들이 몰매를 맞을 때 일부 시인들은 젊은 시인들의 작품이 뭘 말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불평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 원죄는 안개에 있다. 미래파 시인들은 안개의 보법과 환몽의 어법을 가지고 고루하고 안온한 시단에 수천 톤의 폭발물로 테러를 가한 것이다. 그들은 안개 부족으로 지금도 시단의 공고한 질서와 각개전투로 싸우고 있다.
기존의 장미는 안개에 의해 소거되고 그 위로 환몽의 운율이 흐르면서 새로운 세계의 태동이 시작되고 있다. 아직은 미완의 과정이지만 가상과 실제가 뒤섞여 흐르면서 최초의 세계가 눈앞에서 보일 듯 말듯 지나가고 있다. 그러한 상황은 자주 혼돈과 무질서로 매도된다. 정확하고 반듯한 이미지를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모호함은 곧 타파해야 될 적이고, 가장 멀리 해야 할 금기인 것이다. 그러나 혼돈과 무질서가 똬리 틀고 있는 자리는 야생의 숨결이 뜨겁게 붐비는 곳이고 수천 도의 용암이 들끓고 있는 공간이다. 그곳이 바로 시의 탯자리다.
시인은 안개와 유령놀이를 하고 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것은 없고, 보였던 것조차 눈앞에서 사라지니 곧 유령인 것. 휘장 아래 감추어진 것은 “별빛”이고, 그 빛을 향한 지난한 몸짓이 여기까지 시인을 이끌고 온 힘이다. “잠과 죽음”이 “은밀한 몸짓으로 포개어”지는 순간은 환몽처럼 스며들고, 시인은 비로소 생사의 경계를 조용히 경험한다. 시인은 누구도 쉽게 볼 수 없는 찰나를 얼핏 보고야 만 것. 그러나 안개에 대한 변주를 통해 존재와 세계의 현상을 다양하게 읽어내면서 삶과 죽음의 지점까지 도달한 시인의 “혼접”의 순간은 하나의 경이이며 황홀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장미가 피어나고, 안개의 은밀한 방언은 더 깊고 넓게 외연을 확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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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문화저널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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