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 좋은 시' 2차 본선 10選 (시인명 가나다순)
1. 김명인 문장들 (계간『세계의 문학』(2010년 여름호)
2. 배한봉 복사꽃 아래 천년 (계간『시와 세계』(2010년 여름호)
3. 서안나 병산서원에서 보내는 늦은 전언 (계간『시로 여는 세상』(2010년 가을호)
4. 신용목 슬픔의 불 (월간『문학사상』(2010년 3월호)
5. 심보선 인중을 긁적거리며 (계간『세계의 문학』(2010년 여름호)
6. 이민하 거리의 식사 (월간『현대시』(2010년 7월호)
7. 이상국 혜화역 4번 출구 (월간『문학사상』(2010년 5월호)
8. 이영주 처음으로 타인의 뼈를 만지고 (계간『문학들 21』(2010년 가을호)
9. 이제니 나선의 감각 (계간『실천문학』(2011년 봄호)
10. 진은영 몽유의 방문객 (월간『미네르바』(201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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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장
김명인
1
이 문장은 영원히 완성이 없는 인격이다
2
가을 바다에서 문장 한 줄 건져 돌아가겠다는
사내의 비원 후일담으로 들은들
누구에게 무슨 감동이랴, 옆 의자에
작은 손가방 하나 내려놓고
여객선 터미널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면 바다는
몇 만 평 목장인데 그 풀밭 위로
구름 양 떼, 섬과 섬들을 이어 놓고
수평선 저쪽으로 몰려가고 있다
포구 가득 반짝이며 밀려오는 은파들!
오만 가지 생각을 흩어 놓고
어느새 석양이 노을 장산 갈아입고 있다
법사는 문장을 구하러 서역까지 갔다는데
내 평생 그가 구해온 관주(貫珠) 꿰어 보기나 할까?
애저녁인데 어둠 경전처럼 밀물져
수평도 서역도 서둘러 경계 지웠으니 저 무한대
어스름에는 짐짓 글자가 심어지지 않는다
3
윤곽이 트이는 쪽만 시야라 할까, 비낀 섬 뿌리로
어느새 한두 등 켜 드는 불빛,
방파제 안쪽 해안 등의 흐릿한 파도 기슭에서
물고기 뛴다, 첨벙거리는 소리의 느낌표들!
순간이 어탁되다, 탁, 맥을 푼다
끝내 넘어설 수 없었던 상상 하나가
싱싱한 배태로 생기가 넘치더니 이내 삭아버린다
쓰지 않는 문장으로 충만하던 시절 내게도 있었다
볼만했던 섬들보다 둘러보지 못한 섬
더 아름다워도
불러 세울 수 없는 구름 하늘 밖으로 흐르던 것을,
두 개의 눈으로 일만 파문 응시하지만
문장은 그 모든 주름을 겹친 단 일 획이라고,
한 줄에 걸려 끝끝내 넘어설 수 없었던 수평선이
밤바다에 가라앉고 있다
4
시원(始原)에 대한 확신으로 길 위에 서는
사람들은 어느 시절에나 있다
시야 저쪽 아련한 미답(未踏)들이
문득 구걸로 떠돌므로 미지와 만난다는
믿음으로 그들은 행복하리라
타고 넘은 물이랑보다 다가오는 파도가 더 생생한 것,
그러나 길어 올린 하루를 걸쳐 놓기 위해
바다는 쓰고 지운다, 요동치는 너울이라 고쳐 적지만
부풀거나 꺼져 들어도 언제나 그 수평선이다
5
일생 동안 애인의 발자국을 그러모았으나
소매 한 번 움켜잡지 못해 울며 주저앉았다는 사내,
그의 눈물로 문장 바다가 수위를 높였겠는가
끝내 열지 못한 문 앞에서 통곡한
사내에게도 맹목은, 한때의 동냥 그릇이었을까?
6
어둠 속에 페리가 닿고 막배로 건너온
자동차 몇 대, 헤드라이트를 켜자 번지는 불빛 속으로
승객들이 흩어진다, 언제 내렸는지
허름한 잠바에 밀짚모자, 헝겁 배낭을 맨 사내 하나
어두운 골목길로 사라진다
혹, 문장을 구해 서역에서 돌아오는 법사가 아닐까
그가 바로 문장이라면?
허전한 골목은 닫혔다, 바다 저쪽에서
또 다른 사내들이 해맨다 한들
아득한 섬 찾아내기나 할까?
일생 처녀인 문장 하나 들쳐 업으려고
한 사내의 볼품없는 그물은 펼쳐지겠지만
어느새 너덜너덜해진 그물코들!
나는 이제 사라진 것들에 대한 행방을 묻지 않는다
원래 없으므로 하고많은 문장들,
아직도 태어나지 않은 단 하나의 문장!
구름에 적어 하늘에 걸어 둔 그리움 다시 내린다
수많은 아침들이 피워 올린 그날치의 신기루가 가라앉고
어느새 캄캄한 밤이 새까만 염소 떼를 몰고 찾아든다
그 염소들, 별들 뜯어 먹여 기르지만
애초부터 나는 목동좌에 오를 수 없는 사내였다!
-계간『세계의 문학』(2010, 여름호)
-(2011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 좋은 시 賞 수상)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1 올해의 좋은시 100選』(아인북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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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복사꽃 아래 천 년
배한봉
봄날 나무 아래 벗어둔 신발 속에 꽃잎이 쌓였다.
쌓인 꽃잎 속에서 꽃 먹은 어린 여자 아이가 걸어나오고, 머리에
하얀 명주수건 두른 젊은 어머니가 걸어 나오고, 허리 꼬부장한 할
머니가 지팡이도 없이 걸어 나왔다.
봄날 꽃나무에 기댄 파란 하늘이 소금쟁이 지나간 자리처럼 파문
지고 있었다. 채울수록 가득 비는 꽃 지는 나무 아래의 허공. 손가
락으로 울컥거리는 목을 누르며, 나는 한 우주가 가만가만 숨쉬는
것을 바라보았다.
가장 아름다운 자기를 버려 시간과 공간을 얻는 꽃들의 길.
차마 벗어둔 신발 신을 수 없었다.
천년을 걸어가는 꽃잎도 있었다. 나도 가만가만 천년을 걸어가는
사랑이 되고 싶었다. 한 우주가 되고 싶었다.
(2011년 제26회 소월시문학상)
-계간『시와세계』(2010. 여름)
-『2011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작가, 2011)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1 올해의 좋은시 100選』(아인북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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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병산서원에서 보내는 늦은 전언
서안나
지상에서 남은 일이란 한여름 팔작지붕 홑처마 그늘 따라 옮겨
앉는 일
게으르게 손톱 발톱 깎아 목백일홍 아래 묻어주고 헛담배 피워
먼 산을 조금 어지럽히는 일 햇살에 다친 무량한 풍경 불러들여 입
교당 찬 대청마루에 풋잠으로 함께 깃드는 일 담벼락에 어린 흙내
나는 당신을 자주 지우곤 했다
하나와 둘 혹은 다시 하나가 되는 하회의 이치에 닿으면 나는 돌
틈을 맴돌고 당신은 당신으로 흐른다
삼천 권 고서를 쌓아두고 만대루에서 강학(講學)하는 밤 내 몸은
차고 슬픈 뇌옥 나는 나를 달려나갈 수 없다
늙은 정인의 이마가 물빛으로 차고 넘칠 즈음 흰 뼈 몇 개로 나는
절연의 문장 속에서 서늘해질 것이다 목백일홍 꽃잎 강물에 풀어쓰
는 새벽의 늦은 전언 당신을 내려놓는 하심(下心)의 문장들이 다 젖
었다
-계간『시로 여는 세상』(2010, 가을호)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1 올해의 좋은시 100選』(아인북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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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슬픔의 뿔
신용목
은빛 문을 닫고 하늘이 흘러간다 부드러운
경첩의 고요를 따고
꽃잎 하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왔다 가지에서 바닥까지
미닫이 햇살이, 드나드는 것들의 전후를 기록했다 오로지 구름의
필적으로
석양의 붉게 찍힌 이면지 위에
새의 이름으로만 허락된 통행,
문밖으로 추방된 사람들이 손등처럼 말아 쥔 머리를 세워
두드리면
주인은 꽃잎을 날리며 덜컹거리는 한 계절을 닫는다 철문의 마른
소리처럼
반짝이는 빗장 위로 적막이 스쳐갈 때
어둠보다 굳게 닫힌 허공의,
문을 뚫는 바람은 슬픔의 뿔
바닥에 뒹구는 꽃잎의 흰 등을 보면 어느 슬픔이 바람이 되는지
알리, 어느 바람이 뿔을 가는지
문틈에 찢겨 환하게 피 흘리는
석양의 눈 먼 독법으로
혹은 구름의 행갈이로
새가 날면, 차례차례 열리는 문 저 끝에서 먼 밖을 내다 보는 주인
의 두 귀에
울음으로 짠 밤의 그물을 펼치리
그리하여
경칩에 박힌 못처럼 별이 빛나고
사람들의 머리가 부풀고
밤하늘 아름다운 곡선을 따라 허공의 모든 문이 회전하기를, 그리
하여 햇살은
가지에서 바닥까지 슬픔의
-월간『문학사상』(2010, 3월호)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1 올해의 좋은시 100選』(아인북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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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인중을 긁적거리며
심보선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사가 엄마 뱃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네가 거쳐 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말을 끝낸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그때 내 입술 위에 인중이 생겼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잊고 있었다.
뱃사람의 울음, 이방인의 탄식,
내가 나인 이유, 내가 그들에게 이끌리는 이유,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
그 모든 것을 잊고서
어쩌다보니 나는 나이고
그들은 나의 친구이고
그녀는 나의 여인일 뿐이라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 뿐이라고 믿어 왔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어쩌다 보니, 로 시작해서 어쩌다 보니, 로 이어지는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났다는
사실을, 영혼 위에 생긴 주름이
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태어난 이상 그 강철 같은 법칙들과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어쩌다보니 살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보니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보니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나는 홀로 깨달을 수 없다.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추락하는 나의 친구들:
옛 연인이 살던 집 담장을 뛰어넘다 다친 친구.
옛 동지와 함께 첨탑에 올랐다 떨어져 다친 친구.
그들의 붉은 피가 내 손에 닿으면 검은 물이 되고
그 검은 물은 내 손톱 끝을 적시고
그때 나는 불현듯 영감이 떠올랐다는 듯
인중을 긁적거리며
그들의 슬픔을 손가락의 삶-쓰기로 옮겨온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
삼일, 오일, 육일, 구일……
달력에 사랑의 날짜를 빼곡히 채우는 여인.
오전을 서둘러 끝내고 정오를 넘어 오후를 향해
내 그림자를 길게 끌어당기는 여인, 그녀를 사랑하기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죽음,
기억 없는 죽음, 무의미한 죽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일랑 잊고서
인중을 긁적거리며
제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요,
전생에서 후생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뿐인 청혼을 한다.
* 탈무드에 따르면 천사들은 자궁 속의 아기를 방문해 지혜를 가르치고 아기가 태어나기 직
전에 그 모든 것을 잊게 하기 위해 천사는 쉿, 하고 손가락을 아기의 윗입술과 코 사이에 얹
는데, 그로 인해 인중이 생겨난다고 한다.
-계간『문학동네』(2010, 겨울호)
-(2011 웹진 시인광장 선정 제4회 올해의 좋은 시 수상)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1 올해의 좋은시 100選』(아인북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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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거리의 식사
이민하
하나의 우산을 가진 사람도 세 개의 우산을 가진 사람도
펼 때는 마찬가지
굶은 적 없는 사람도 며칠을 굶은 사람도
먹는 건 마찬가지
우리는 하나의 우산을 펴고 거리로 달려간다
메뉴로 꽉 찬 식당에 모여
이를 악물고 한 끼를 씹는다
하나의 혀를 가진 사람도 세 개의 혀를 가진 사람도
식사가 끝나면 그만
그릇이 비면 조용히 입을 닥치고
솜털처럼 우는 안개비도 천둥을 토하는 소나기도
쿠키처럼 마르면 한 조각 소문
하나의 우산을 잡고
한 켤레의 신발을 벗고
하나의 방을 가진 사람도 세 개의 방을 가진 사람도
잠들 땐 마찬가지
냅킨처럼 놓인 침대 한 장
-월간『현대시』(2010, 7월호)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1 올해의 좋은시 100選』(아인북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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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혜화역 4번 출구
이상국
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 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이다
내 조상은 수백 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 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 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 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 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숙박비 얼마를 낸다
그것은 나의 마지막 농사다
그리고 헤어지는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그 애는 나를 안아준다 아빠 잘 가
-월간『문학사상』(2010, 5월호)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1 올해의 좋은시 100選』(아인북스, 2011)
(문헉사상, 5월호)
-이은봉·김석환·맹문재·이혜원 엮음『2011 오늘의 좋은시』(2011,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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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처음으로 타인의 뼈을 만지고
이영주
기타를 빌려간 그녀에게. 우리는 음악보다는 창문을 감싸는 연기
가 되고 싶었습니다. 겨울에는 깊은 숨을, 여름에는 축축한 손을 잡았
죠.
아기의 배내옷을 보면 수의 같지 않니? 한번 죽고 난 다음에 새로
운 것을 배우는 일이 예정된 공포 같아. 초보 기타 레슨 책을 쥐어
주고 나는 건물 뒤로 돌아가 청바지를 찢습니다.
그녀는 침묵 아니면 도약. 모든 음표는 평행선이거나 수직선의
도표를 벗어날 수 없어. 스무 살에는 침을 뱉습니다. 이 악보에서는
어떤 음계가 부정어일까요.
그녀는 옆에서 잠든 가족의 갈비뼈를 더듬듯 조심스럽고 아무렇
게나 기타 줄을 튕깁니다. 처음으로 타인의 뼈를 만지고 떨림을 손
가락에 느끼던 날, 나는 껌을 씹고 단물을 삼킵니다.
목에 줄을 감고 생각했어. 어디서 태어났는지 알 것 같아.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밑으로 내려갑니다. 네가 가 본 구멍이 어둠의 전부
는 아니야. 우리는 서로 감싸 안고 몸을 둘굴게 말고 있습니다.
몹에는 광목천을 사고 가을에는 편지를 씁니다. 복도의 빨랫줄에
는 그녀와 나의 부정어들이 음표처럼 걸려 있습니다.
서를 살에는 목줄을 감아봅니다. 나는 기타보다도 음(音)의 외부
에 있고 싶습니다. 머리를 감을 때마다 수챗구멍이 어두워집니다.
젖은 머리칼로 그녀가 가 본 빈 방에 들어갑니다. 앉아서 조용해집
니다.
기타를 놓고 간 그녀에게. 뼈를 만집니다. 천천히 답장을 씁니다.
-계간『문학들 21』(2010, 가을로)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1 올해의 좋은시 100選』(아인북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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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나선의 감각
-빛이 이동한다
이제니
그때 나는 말없는 작은 짐승이 되고 싶었다. 나는 나의 두께를 들
키고 싶지 않았다. 종이와 연필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너는 얼굴
주름 사이로 몇 개의 시간을 감추고 있었다. 어두운 한낮, 너는 불
을 켜지 않는다. 드러날 때까지 기다립시다. 무엇이, 그 무엇이, 그
자신의 모습을, 그 자신의 그림자를, 그 자신의 침묵의 말을, 드리울
때까지, 거느릴 때까지.
빛이 이동한다. 다시 페이지가 넘어간다. 나의 가방엔 생각보다
더 많은 종이가 있었다. 종이 곁에는 연필이, 연필 곁에는 어둠이.
흑심은 무심히 반짝거리며 내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빛이 이동한다. 책장 넘어가는 소리. 다시 한 페이지가 넘어간
다. 우리의 두께를 드러내도록 합시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상상하도록 합시다. 상상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상상하도록 합시다.
너무 넓은 방은 필요치 않습니다. 여백은 채워져서는 안 될 것으로
만 채워져야 합니다.
빛이 이동한다. 고양이의 울음소리. 새들은 요란한 지저귐으로
자신의 재난을 알린다. 누군가는 지속적인 낮잠으로 자신의 재난
을 알린다. 빛이 이동한다. 단락과 단락 사이에서 노래가 들려온다.
두꺼워질 대로 두꺼워집시다. 날아갑시다. 두께 속의 공기를 느낍
시다. 우리는 불행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둡고 텅 빈 방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사람들이지요.
빛이 이동한다. 너의 이마 위로 어떤 문장들이 흘러간다. 찰랑이
다 출렁인다. 넘실거린다. 우리는 한 마디 말도 나누지 않는다. 이
제 밥을 먹읍시다. 잠들 시간입니다. 오늘은 내일보다 더 추울 겁니
다. 닫아둔 덧문 사이로 매서운 바람이 불어 들고 있었다. 나뭇잎과
나뭇잎이 서로의 몸을 비비고 있었다. 나의 그림자가 너의 그림자
쪽으로 기울어진다. 빛이 이동한다.
-계간『실천문학』(2011, 봄호)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1 올해의 좋은시 100選』(아인북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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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몽유의 방문객
진은영
너는 오겠지, 달의 해안에 꽃들이 하얗게 밀려오는 봄밤에
너는 오겠지, 부서진 간판의 흐느낌을 가로수 검은 가지로 건드리
는 여름밤에
오겠지, 추위와 얼음의 투명한 발톱으로 다듬어진 소박한 식탁에
부엌에서 다시 칼국수를 끓이려고
하얀 밀가루가 여주인 손톱 사이에 실날 같은 달로 떠오르는 밤에
초록색처럼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네, 아닌가
첫 눈송이의 흰 빛으로 너는 사랑스러웠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가을밤의 어두워가는 남청색 코트자락
에 기어들어가
별빛처럼 부드러운 국수 한 그릇을 나눠 먹었으므로
꿈 속을 걸으면서 너는 기억하네
여럿이 둘러 않아 먹을 수 있는 크고 둥근 탁자*
부드럽고 위태로운 장소의 이름 속으로
너는 들어오겠지, 둘러 앉아 우리 무얼 먹을까 궁리하며
전기 끊긴, 낭만적인 유사 별밤에서 노래도 몇 소절 훔쳐왔다네
아름답게 반쯤 감긴 눈으로 너는 기억할 수 있겠지
옛날에 한 술꾼 평론가가 먼 기차소리의 검은 아치 아래 등을 기
대던 곳
새벽의 투명한 술잔 속에서 시인이 떨어뜨린 한 점의 불꽃을 천천
히 마시던 곳
이젠 죽은 그가 천천히 걷다가 길 모퉁이를 돌며
다른 이들의 노래로 가엽게 굽은 등을 조용히 숨기던 밤의 근처
들
기다리며 책을 펼치네, 토끼며 사슴 눈동자로 가득한 페이지를
오고 있겠지, 너 오면 넘기자, 이빨이며 발톱으로 붐비는 날카로
운 뒷장을
너는 꿈에 취해 오겠지, 취기로 넘기자
네가 오지 않아 수서지려는 곳
건축업자가 청혼의 반지를 들고 기다리는 곳
기다리네, 술 취한 돌고래처럼
너는 오겠지, 너도 모르게
부서지려은 약속의 순간으로
오겠지, 아름다운 거짓말처럼
우리가 꿈 속에 서 있다
녹색과 붉은 잎을 다 떨어뜨린 뒤에 서 있는 나무처럼
사라지지 않는 두렴움이 서 있다
둥근 잎의 장소들을 떨어뜨리며
*두리반
-계간『미네르바』(2011, 봄호)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1 올해의 좋은시 100選』(아인북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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