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116) - 존재의 틈새
틈
마경덕
적막을 오래 쓰다듬은 손바닥에 푸른 물이 들었다. 내 오른쪽 어금니처럼 한쪽이 닳아버린, 부르면 혀가 서늘한 적막. 소란한 틈으로 잠깐 뒤태를 보이고 사라진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불쑥 내 몸을 치고 사라지는 그 짧은 1초의 정전停電…내 몸의 플러그가 뽑힌, 그 1초.
떠밀리고 발등을 밟히는 사이, 방심한 내 어깨를 치는 순간, 울컥 혀끝에 닿는 찰나의 암전暗轉. 그는 인파 속에 나를 홀로 세워두고 길을 끌고 흘러간다. 세상과 불통이 되는 그 시간, 나는 누구에게도 나를 타전할 수 없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그 1초는 적막이 나를 다녀간 시간.
후박나무 빈 가지에 걸린 낮달을 보듯 그의 쓸쓸한 이마를 바라보고 싶었다. 계절이 한 페이지 넘어가고 공원분수에 물이 마를 즈음, 무릎에 원고지를 펼치고 그가 네모 칸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한동안 그를 오독하였다.
등 떠밀려간 노래방에서 흘러간 노래를 선곡하고 있을 때, 어쩌다 잡은 마이크를 들고 설쳐대고 있을 때, 그를 바라볼 수 없는 난감한 사이, 그 틈으로 반짝 적막은 출몰하는 것이었다.\
# 도심의 생활에서 발견할 수 없는 적막을 곰배령이나 내설악 깊은 계곡에서 만날 때가 있다. 그것이 너무 낯설어 한동안 적응하기 어려운 시간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적막이 내 몸 안에 자리 잡기 시작하면 존재는 투명해지고, 밤하늘의 별처럼 말곳말곳 반짝이기 시작한다. 얼마 전 점봉산 골짜기에서 본 초저녁의 별빛이 그러했다. 서울에서 볼 수 없는 오지의 별빛은 적막과 고요, 시원의 어둠이 빚어낸 것이었다.
그러한 빛과 적막을 도시 한복판에서 발견하는 시인이 있다. 최근에 『글러브 중독자』라는 시집을 펴낸 마경덕 시인은 존재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서늘한 적막을 전방위로 읽어낸다. 번잡한 도회지 생활에서 “잠깐 뒤태를 보이고 사라”지는 적막을 화자는 찰나의 “정전”으로 표현하고 있다. 블랙홀이다. 주변의 일상사를 끌어들여 무화시키는 존재의 틈새요 구멍이다. 대부분 그 틈을 간과하고 일상의 질서에 매몰되어 사는 것이 통상의 일이지만 화자의 감성의 레이더에 포착된 적막은 텍스트 안에서 변주를 통해 정서의 밀도를 높여가고 있다. 적막이 깃들어 있는 “틈”은 존재의 비의가 숨 쉬고 있는 우주의 자궁이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고, 듣지 못하던 것을 듣게 하는 성소이다. 그곳에는 태초의 신성한 어둠이 똬리 틀고 있는 곳으로 “세상과 불통이 되는” 곳이다. 그러나 순간의 불통은 새로운 전회를 예비한 소통의 전 단계이므로 설렘과 전율의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틈”은 열림의 통로이다. 밀폐되고 옹색한 삶의 공간이 숨 쉴 수 있는 자리이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의 소로이다. 그 길을 통해서 존재의 층위는 비약하고, 새로운 생의 영지에 발 딛게 된다. 또한 그 틈은 전신으로 신을 만나는 오롯한 자리이고, 적막과 고요가 함께 깃들어 호흡하는 곳이다.
한동안 화자는 “그가 네모 칸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적막을 “오독”하였다. 그러나 적막은 어느 날 갑자기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 신의 얼굴로 다가와 존재의 내밀한 공간을 슬쩍 보여주고 돌아서는 것. 그리하여 “적막을 오래 쓰다듬은 손바닥”은 “푸른 물이 들”고 척박한 삶의 영토는 비옥하게 바뀐다. 이처럼 두렵고 낯선 적막과의 조우는 곧 신의 숨결을 체감하는 순간이며 미지의 공간으로 진입하여 자신이 미지가 되는 홀림과 열림의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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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문화저널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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