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삐라 -울음의 방식 채 선 물기 흥건한 냉장고 바닥을 닦는다. 며칠째 목을 가늘게 늘인 빗줄기 질척질척 여닫을 때마다 차가운 방식으로 고여 있던 빗줄기의 공중 조금씩 바닥으로 끌어내렸을 저 오래된 문 안쪽 허공 받아 넣어두었다는 걸, 깜박 칙칙한 구름으로 떠다니는 나를 넣어두었다는 걸, 살갗 긁어대면 피가 흐른다는 걸, 깜박깜박 빗줄기에 긁힌 공중 어떻게 다물어 검붉은 생각들 다시 띄우나. 한겨울 딱딱하게 앉은 피딱지의 가려움 무심 잠결 긁고 또 긁어 차가운 방식으로 피 흐르듯 드러나지 않는 내부에서 응고되는 것. 허공일까 빗방울일까 젖은 구름 모양 무거워진 입술 겨울 속에 밀어 넣고 낡은 문, 꽉 닫는다 # 누군가 뿌려놓고 간 삐라를 주웠다. 여러 장의 불온한 삐라를 모아놓은 시집 곳곳에 선연한 내상이 혈죽처럼 그려져 있다. 그동안 시인이 살아온 삶의 궤적들을 대면하면서 엄살이나 포즈가 아닌 온몸으로 독하게 우는 존재의 비극적 초상에 망연하였다. 시의 완성도나 미학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시인의 작품들은 상당한 자력과 흡입력을 갖는다. 그 힘의 근원은 무엇일까? 일상과 맞부딪쳐 살면서 존재와 상황에 대한 치열한 성찰이 관념을 육화했기 때문이다. 관념만 남고 실체가 휘발한 시들이 보여주는 공소함과 대조되는 특장이다. 「삐라」연작은 몸에 새겨진 상처의 기억들이 돌올하게 드러나 있는 시편이다. 도발적인 제목이 먼저 눈길을 끈다. 새롭고 동시에 불온하다. 그 불온성이 자아의 상처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동력이다. 화자는 세계를 향해 붉은 삐라를 살포하지만 실제로는 스스로가 갈급하게 찾는 구원의 표징이고 내면의 핏빛 정황이다. 냉장고는 불구의 삶이다. 어딘가 고장이 나서 당장 수리해야하는 물건이며 존재이다. 화자는 냉장고 앞에 서서 “빗줄기”를 끌어온다. 빗줄기는 상처이며 고통의 상관물로 작용한다. “목을 가늘게 늘인 빗줄기”는 화자 자신의 초상으로 모딜리아니의 목이 긴 여인처럼 고고한듯 하면서도 애잔한 슬픔과 쓸쓸함을 환기하는 사물이다. 화자는 고장 난 냉장고의 내부에서 구석구석 숨어 있는 내밀한 상처의 흔적들을 만난다. 자칫 감상의 덫에 빠지기 쉬운 대목이지만 시의 주체는 냉철한 성찰의 시선으로 상황을 직시한다. 화자는 계속 일정한 정서적 거리를 갖고 되작이며 내면의 풍경을 들여다본다. “칙칙한 구름으로 떠다니는/나” “딱딱하게 앉은 피딱지” 등이 하나의 실체로 눈앞에 나타난다. “빗줄기”가 “피”로 전화되는 지점에서 화자는 단호하게 “무거워진 입술”을 “겨울 속에 밀어넣고 낡은 문, 꽉 닫”고 다시 모딜리아니의 목이 긴 여인처럼 보이지 않는 먼 곳을 바라본다. 화자의 내면에는 “응고”되는 상처가 남아 있지만 더 이상 그 상처에 붙들려 있을 수 없는 것. 도려내고 잘라내면서 환부에서 돋아날 생살을 기대하는 것이다. 「삐라」연작은 무수한 상처의 곳간이다. 그러나 시적 주체는 “핏속에 울음을 가둔 벙어리”로 일상의 나날을 고통스럽게 견디면서 비극을 객관화하고 고통에 적극적으로 응전한다. 그것은 곧 자기 극복이며 고통스런 치유의 과정이다. 채 선 시인은 한 권의 시집으로 처연하고 아픈 과거의 삶을 장례지내고 새로운 시의 길에 들어섰다. “울음의 방식”을 바꾸어 내상의 어두운 골목에서 걸어 나온 그녀의 시선은 앞으로 더 깊고 그윽해질 것이다.
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
ㅡ 출처 : 문화저널 21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이온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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