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신진숙 문학평론가 |
도시 생활은 자유롭다. 도시에서는 특별히 주목받는 일이 많지 않다. 사람들은 어떤 제약 없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다. 타인들은 익명의 누군가로 존재한다. 얼굴이 있지만 식별할 수는 없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일일이 관심을 가지거나 느낌을 갖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아무리 근접한 거리라도 정서적 친밀감으로 전환되지 않는다. 타인이 나에 대해 혹은 내가 타인에 대해 사물처럼 존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롭다. 게오르그 짐멜이 말했듯, 도시 생활의 핵심은 이러한 정신적 둔감함에 있다.
그렇다면 도시에서 자유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익명적 관계는 어떻게 획득되는가. 익명적 삶은 동일성을 기반으로 한다. 그것은 적지 않은 경우 자본주의 사회가 생산하는 다양한 기호들을 동일한 수준으로 소비할 수 있는 능력과 연관된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에서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은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도시에서 소비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은 이러한 자유로운 분위기로부터 탈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의 소비란 극단적인 탕진과 무관하다. 가진 것을 모두 탕진하는 순간 우리는 자본주의적으로 파괴된다. 파멸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이든 돈이든 정념이든 소비하지만 극단적으로 탕진해서는 안 된다. 자유는 소비 능력에서 오며, 소비는 소유의 가능성에서 온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시는 탕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시인들은 가진 것을 모두 내어주고 파멸에 들어서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파멸은 일종의 선물이다. 시인들은 종종 파멸에 이르는 길을 시적 권리이자 책무로 받아들인다. 탕진은 자본주의적 소유에 이르는 길로부터 벗어난다. 자본주의적 삶 자체를 비판할 수 있는 상징적 근거로 활용된다. 그것은 왜 그러한가.
간드러지게 노래를 잘하던 외숙모 눈웃음이 예뻤던 외숙모 고만고만한 새끼들 다섯을 놓고 동네 사내랑 눈 맞아 도망간, 도망을 가도 하필이면 옆 동네라니 바람처럼 멀리멀리 날아가든지 바람 잘 날 없는 집에 시집와 바람으로 맞선 외숙모는 바람처럼 사내와 도망을 친다 뿌리를 흔드는 태풍은 못 되면서 소문만 무성하게 흩뿌려놓은 채 잡혀오기 일쑤였다
세들어 사는 동생네에 갓난이까지 줄줄이 맡겨놓고 미친 듯이 찾아 헤매는 외삼촌, 소주 됫병 나발 불고 동네방네 휩쓸고 다니다 마지막 길엔 어머니를 찾아와 깽판을 부리고 꼬꾸라지던, 마흔 즈음 먼저 바람이 되어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외숙모의 바람은 멈추었으나 큰아들이 바람을 잡아탄다 큰아들의 바람을 잠재운 두 딸들 그제야 바람도 같이 늙는다
도망간 남편을 기다린 여자에겐 바람의 욕망이 없었을까 그 여자의 남자에게 첫 순정을 내주었던 어머니는 바람의 욕망이었을까 한창 꽃 같은 시간들이 바람 따라 흩어져버렸다 아픈 시간들이었다 아팠기 때문에 견뎠을 바람 같은 삶 아프기 때문이 바람을 좇아 떠돌았던 아버지 내 핏속에도 스며 있을 바람의 씨앗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마흔을 넘어서니 독기가 옅어진다 발갛게 열이 오른다 내 자궁 속 바람의 씨앗이 꿈틀거리는 것일지도
— 김사이 〈바람〉(《창작과 비평》 봄호)
| |
 |
|
| 김사이 |
우리는 탕진에 관한 수많은 전설들, 이야기들을 듣고 자랐다. 때로는 낭만적으로 때로는 비극적으로 삶을 탕진하는 사람들을 통해 교훈을 가지도록 훈련됐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매체 속에서 용서할 수 없는 정념과 사랑의 탕진은 끊임없이 반복 재생산된다. 대개 삶을 탕진하는 사람들은 무용(無用)한 존재들이다. 탕진은 일상세계를 유지하는 도덕관념을 교란시킬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삶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수많은 서사 속에서 탕진은 삶을 교란하는 낭만적 사건이지만 일시적인 것으로 기입된다. 역으로 낭만적 탕진들은 결혼제도를 효과적으로 보호하고 또 유지시킨다. 자본의 생산과 소비를 계속될 수 있는 토대를 공고히 한다. 탕진은 사회질서 자체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계속적으로 소비된다.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탕진해 버리는 사랑은 결코 환영받은 바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는 탕진에 대해 결코 진지하게 성찰할 수 없다.
그러나 시인들은 탕진하는 삶을 성찰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기계적인가를 보여준다. 가령 김사이 시인의 〈바람〉이 그러하다. 위 시에서 보듯, 그녀가 표상하는 바람은 자연이다. 그것은 객관적 물리 현상이자 인간 속에 내재한 자연이다. 인식 이전에 존재하며 원초적이며 통제 불가능한 정념들. 시인이 “바람”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삶이 일상적인 궤도에서 벗어나 결국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탕진하게 만드는 존재 내부의 불가해한 욕동을 가리킨다. 시인은 방랑을 반복함으로써 삶을 탕진하는 “바람”의 유전을 성찰함으로써 정주할 수 없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되묻는다. 외삼촌과 외숙모의 사랑이 불러온 가족의 위기는 희화화되는 동시에 낭만적으로 그려진다. 시인은 비합리적인 삶의 욕동들을 시인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바람”을 부정하지 않는다. “내 자궁 속 바람의 씨앗이 꿈틀거리는 것”이라고 말하듯, 오히려 바람이 나라는 존재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비극으로 치닫는 바람의 존재들은 삶의 파멸을 마다하지 않으며 도주(逃走)를 겁내지 않는다.
하여 탕진하는 삶은 많은 경우 방랑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소유를 목적으로 프로그래밍된 삶에서 ‘흐름’을 존재의 형식으로 선택함으로써 세계에 저항한다. 탕진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사유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시들을 함께 읽어야 하리라.
박준 시인의 〈남행열차 2012〉를 읽어보자.
자리는 비좁고 나는 난민이었습니다 종일 앉아만 있어도 손톱 밑에 검어지는 마음이 가난한 나라의 국민이었습니다 열차는 오래전 죽은 영부인이 태어난 군(郡)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큰 바위 밑 석굴을 공양간으로 삼고 있다는 절도 그리 멀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해의 끝은 낡고 비려서 데워진 구들이라면 어디든 가서 눕고 싶습니다 곧 터널로 들어갑니다 슬퍼하고 있는 사람들의 몸은 언제나 느린 것이라 생각하다가도 달 구경하듯 별 구경하듯 객실의 흐린 독서등에 눈을 멀리 가져다 대었습니다
— 박준 〈남행열차 2012〉(《문학동네》 봄호)
| |
 |
|
| 박준 |
이 시에서는 “난민”이라는 단어를 수사(修辭)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난민은 국적을 상실한 채 경계 사이를 떠돌아다니는 존재를 이르는 정치적 표상이다. 자본주의와 국민국가의 틀에 포함되지 않은 배제된 삶을 재현한다. 이 때문에 난민이라는 말은 근대 민주주의와 주권에 대한 새로운 정치적 공론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물론 박준의 이 시가 이러한 정치적 함의를 전부 담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무의미한 일이기도 하다. 서정은 정치적 결말을 상정하지 않은 채 세계를 느낌의 기호로 번역할 때 비로소 정치적인 것이 된다. 가령 난민이란 객관 상황이라기보다는 상징적 시의 조건을 의미한다. 또는 파멸의 순간 쓰이는 시를 의미할 수도 있겠다. 시인이 “이번 해의 끝은 낡고 비려서 데워진 구들이라면 어디든 가서 눕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때, 서정이 향하는 것은 ‘다른’ 곳이다. 그것은 이색적인 장소와는 무관하다. 이색적이라는 것은 현재를 견디게 하는 색다른 경험일 뿐 근본적으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는다.
시는 탕진하는 삶을 선택하며 그것은 언제나 이미 전혀 다른 장소를 꿈꾼다. 따라서 그것은 생산성과는 거리가 멀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금욕적일 뿐만 아니라 변화에 대해 왕성하고 빠르게 적응하는 삶은 생산적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생산에 대한 환상이야말로 우리에게 계속해서 소비할 수 있는 권리를 준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삶이 생산적인 것이 되면 될수록 인간은 스스로를 속박하게 만다.
탕진은 속박을 벗어난다. 난민이 된 시인은 어떤 목적도 지니지 않은 채 세계를 방랑한다. 원근감이 사라진 곳으로 소멸하듯 나아간다. 시간 역시 해석 가능한 인과와 연속성에서 벗어나 존재한다. 시공간의 일상적인 규칙들이 무너짐으로써 일시적으로 의미들이 모호해진다. 언어는 정상적인 소용을 다하지만 사태는 더 흐릿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라는 기호는 착시에 가깝다. 영혼 없이 발설되는 수많은 언어들은 그 자체로 소비될 뿐 어떤 현실적 맥락들에 쇄신을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탕진에 대한 시적 환상은 위험한 상상이다. 시의 권리를 탕진할 수 있는 권리로 이해하는 순간, 모든 문맥들이 달라진다.
탕진의 의미는 낭만적 감성들과 결합할 때 더욱 분명하게 자신의 위치를 드러낸다. 탕진의 열망은 낭만적 감성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낭만적 문법은 이렇다. 이 세계와 불화하는 다양한 존재들의 마음속에는 삶을 탕진하고 바람과 같이 떠돌아다니는 방랑자의 혼(魂)이 있다. 방랑이야말로 일상적인 삶의 무의미를 극복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것 속에 담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추적한다. 그것은 세계와 불일치하는 시적 에너지다. 탕진과 방랑 역시 인간이 진실에 다가서는 또 다른 길이다.
다음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손현숙 시인의 〈바람 박물관〉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더 잘 이해된다. 그녀는 이제까지 시인들이 창조한 ‘바람의 계보학’을 잇는다
나무판과 나무판 사이 그 간극 위에 각 없는 지붕 하나 달랑 올렸다 헛것으로 채워진 헛간 문 없는 문 속으로 발 들이민다 조각조각 틈새로 스미는 빛의 잔상, 몸 없는 몸들이 쏟아진다 눈 감고도 환한 집
자명한 대답 속에 서있는 듯 무채색의 덩어리 한 채 바람은 우연히 제 몸집 부풀린다 빛과 어둠으로 얼룩진 바닥 제 목청껏 우는 울음소리에 바람은 앞뒤 없이 바람을 불러온다
그 바람에 하늘과 땅 비스듬히 섞일 때 꽃 한 송이 길 없이도 길을 연다 이 길 유유히 통과하는 동안이면 육신은 잿빛으로 반짝반짝 가벼워도 좋겠다
누구나 잠시 빌려 입는 바람의 말 평생을 이어놓은 긴 질문처럼 나는 지금 세상에 없는 이름으로 당신을 불러오는 중 백년을 걸어서 하루를 통과하는 여기, 앉아서 평생을 탕진해도 좋겠다
— 손현숙 〈바람 박물관〉(《유심》 5월호)
| |
 |
|
| 손현숙 |
이 시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박물관’이다. 박물관이란 어떤 사물을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분리하여 현재 속에 전시(展示)하는 장소다. 과거는 삶의 연속성을 실각하고 하나의 유물이 되어 현재 안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바람 박물관이란 바람의 계보를 증명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사물화된 에너지라는 것을 암시한다. 활동을 멈추고 어떤 종류의 가치 있는 변화를 가져올 수 없는 과거의 것. 바람을 잠재우지 않는다면, 세계는 유지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바람을 전시한다는 것 역시 가능하지 않다. 바람은 만질 수도 볼 수도 붙잡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바람은 본질적으로 수집할 수 없으며, 한 곳에 붙잡아 둘 수 없다. 바람은 지처(地處)를 지니지만 어떤 장소에도 묶이지 않는다. 그것은 “몸 없는 몸들”과 같다. “꽃 한 송이 길 없이도 길을” 여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여 시인은 “앉아서 평생을 탕진해도 좋겠다”고 고백한다. “바람”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의 내면을 상징한다.
즉, 탕진하는 삶은 바람이다. 기실 모든 존재는 ‘흐름’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본질적으로 삶은 ‘흐름’일 뿐이다. 바람이다. 어떤 실체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매순간 변화한다. 모든 존재는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소멸한다. 진정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삶이 바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바람에 대한 성찰이 탕진의 의미와 분리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것은 탕진에 대한 자본주의적 해석, 즉 자본의 낭비라는 일관된 관점에서 벗어난다. 그것은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내포하는데, 이 가능성은 탕진을 시적 권리로 해석할 때 보다 적극적으로 사유될 수 있다. 즉, 탕진은 단지 소멸하는 것에 대한 추구로 머물지 않는다. 탕진의 주체는 나르시시즘적 감옥을 넘어 다른 존재에게로 ‘이동’해 감으로써 새롭게 존재하기도 한다. 가령 탕진이 타인의 삶을 위해, 전적으로 타자를 향해 존재할 때 그러하다. 그것은 탕진이 개인적인 추구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순간이다. 타자에 대한 추구를 통해 탕진은 보다 윤리적인 삶의 문제로 진입한다. 자신의 것을 탕진함으로써 타자를 환대하는 원시 부족들의 포틀래치적 전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탕진이 하나의 시적 가능성과 윤리적 의미를 결합하는 때는 언제인가. 탕진은 어느 순간 인간적인 소비의 의미를 넘어, ‘여기 있음(il y a)’ 자체를 넘어, 타자와 함께, 타자를 통해 윤리적인 삶 혹은 죽음에 도달하는가. 이러한 물음 속에서 반칠환 시인의 〈오천 년의 포옹〉을 읽어 보자.
이탈리아 만바토시 부근 신석기 유허에서 두 남녀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이마가 닿을 듯 누워 네 개의 손으로 서로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두 사람의 포옹이 오천 년째라고 밝힌다. 부빌 입술도, 두근거리는 심장도 닳았지만, 오천 년을 속삭여도 처음 듣는 말이 있는지 남자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다. 척추에 꽂힌 화살이 흔들리지만 아픔과 원한 따위 잊은 지 오래. 두개골이 반쯤 무너진 여인은 더 크게 웃고 있다. 천국도, 지옥도, 환생도, 윤회도 관심 없다는 듯 서로 뒤섞인 정강이뼈 차르르― 던져 윷놀이를 하고 있다. 아무리 슬픈 인생이라도 살과 근육과 힘줄만 벗어버리면 웃지 못한 해골은 없다는 듯, 걱정 말고 미련 말고 맘껏 살고 오라는 듯, 한 쌍의 주검이 오천 년째 죽음을 홍보하고 있다.
— 반칠환 〈오천 년의 포옹〉(《시인수첩》 여름호)
| |
 |
|
| 반칠환 |
어느 날 “두 남녀의 유골”이 발견됐다. “이마가 닿을 듯 누워 네 개의 손으로 서로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는 이 두 남녀는, 살과 근육을 모두 벗어버린 형해의 모습이다. “두 사람의 포옹”은 “오천 년째”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존재함도 존재하지 않음도 아닌 어떤 풍경일 터인데, 시간은 존재와 부재 사이를 지나가고 있다. 만일 시간의 무한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열리지 않았을 풍경이다.
기실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처럼 긴 시간의 흐름일 것이다. 삶이란 하나의 육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만일 존재론적 기반이기도 한 이 육체를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타자를 사랑할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러나 시간의 영원성에 기입된 죽음은 웃는다. “부빌 입술도, 두근거리는 심장도” 없으나 “웃고 있다.” 척추에 화살을 꽂은 채 그 아픔도 잊은 채 “웃고 있다.” 이 웃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육체가 소멸한 이후에도, 시간의 무한한 흐름 속에서도 살아남는 사랑은 아닐까. 즉, 이 시는 육체가 지닐 수 있는 수많은 욕망과 고통, 슬픔을 모두 탕진한 그 이후를 보여준다. 존재의 근육들을 모두 잃어버리게 된 이후의 시간.
그러나 죽은 이후의 시간이 타자와 함께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에게 발견된다. 만일 이 두 남녀가 서로의 포옹을 풀어버렸다면 어때했을까. 나에 대해 네가, 너에 대해 내가 존재하지 않는 삶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발견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웃음은 윤리적인 전언이기도 하다. 죽은 자의 “웃음”은, 소유를 향한 현 인류의 끝나지 않을 집요한 몸짓들을 일순간 부질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신진숙 kkamsse@hanmail.net / 문학평론가. 2005년 《유심》으로 등단. 평론집 《윤리적인 유혹, 아름다움의 윤리》가 있음. 현재 경희대 국제지역연구원 HK연구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