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박상옥] 파종

문근영 2013. 8. 12. 11:34

 

 

 

 

파종

 

박상옥

 

 

흙의 맨살을 만진다.

만질수록 부드러워진다.

호미도 버리고 장갑도 벗어던지고

손바닥으로 손가락으로 비빈다.

여인의 속살이 이보다 부드러울까.

숨이 가쁘고 정신이 아득해질 때쯤

가볍게 혹은 깊게 씨를 넣는다.

이 어린 것들

흙 속에서 아랫도리 탱글탱글

불끈불끈 일어서는

무성한 여름날을 꿈꾸리라.

 

 

 

-출처 : 시집『허전한 인사』(만인사, 2005)

-사진 : 다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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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친화적 세계관이 승화된 에로티즘

-박상옥의 시 「파종」을 읽고

 

 일상에서 다녀온 길, 그냥 주고받은 말 이런 것들이 박상옥 시인에게 걸리면 여지없이 시가 된다. 대수롭지 않은 일상적 사물과 현상을 향해 열린 시 정신, 바로 이것이 박상옥 시의 핵심적인 창작 원리이다. 말하자면 그는 원리도 아닌 원리를 원리로 삼아 자연스럽게 시의 문맥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시를 쓰는 원리이며, 시와 삶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시인으로 살아가는 방법론이다.

 

 뒤늦게 출발한 시의 길이지만 첫 시집『내 영혼의 경작지』를 시작으로 서정시에 몰두하고 있다. 문청 시절을 함께 한 이기철 시인은 이 시집에서 그를 ‘작은 것의 행복’을 추구하는 시인이라고 명명하면서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박상옥, 그는 아직도 쉰살 난 소년이다. 쉰이 넘어도 맹물 같은 순수로 사는 사람이다. 나는 그를 만나면 언제나 풋순 같은 소년을 읽는다. ……그의 시에는 언제나 흘러가는 물소리가 있고 살랑대는 잎새 소리가 있을 뿐, 인공이 가해진 석유 냄새나 화약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것이 좋다 나쁘다이기 전에 그것은 다만 그의 체질이고 그의 감수성의 영역이다.”

 

 이기철의 직관은 정확하다 못해 거의 예언적이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박상옥은 아직도 예순 살 난 소년이며, 시의 행간에는 지금도 <흘러가는 물소리가 있고 살랑대는 잎새 소리가 있>다. 박상옥 특유의 순정(純情)과 청정(淸淨)의 삶이 그의 내면을 소년처럼 맑고 순수하게 지켜주었으리라. 그리고 이러한 감수성이 그의 시 세계의 기본이자 원형질을 이루는 원천이 되었으리라.

 

 그의 이번 시집 작품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서정시로 손꼽힐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파종」이다. 박상옥 특유의 자연친화적 세계관이 승화된 에로티즘으로 격조 높게 완성되고 있다. 에로티즘은 가장 원초적이고 생산적인, 가장 힘세고 아름다운 미학 이데올로기이다. 어쩌면 그것은 이데올로기 이전의, 존재 일체의 이념적 진공 상태일 수도 있다. 시의 첫행부터 대담하게 예각화 된 에로티즘으로 출발하고 있다.

 

 그는 <흙의 맨살을 만지>는 게 아니라 <여인의 속살>과 비교하면서 지독한 편애로 흙을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지는 것이다. 그리고 <숨이 가쁘고 정신이 아득해질 때>, 다시 말해서 도저한 액스터시의 정점에서 <깊게 씨를 넣는> 것이다. 이것은 대지(大地)와 시인(詩人)의 황홀한 성적 몰입에 다름 아니다.

 

 이 작품은 작품 자체로 영롱히 빛나고 있지만, 박상옥이 서정의 텃밭을 갈아엎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일련의 창작 메커니즘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텃밭시초」연작과 「잡초」류의 작품은 「파종」의 창작 원리가 적용된 작품들로서 박상옥 시의 가장 핵심적인 영역을 이루고 있다. 그는 창조주처럼 텃밭에 군림하면서 흙의 속살을 다스려 <씨를 넣>(「파종」)기도 하고, <제왕(帝王)처럼/이랑을 타고 앉>(「흑백론자」)기도 하며, <땅의 봉인을 풀고/세상 밖으로 나>온 새싹의 <여린 어깨에 기대어/더 아름다운 초록의 시를 쓰>(「씨를 뿌리며」)는 서정시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시인 김선굉 님이 쓰고 詩하늘에서 엮음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가우/박창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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