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서규정] 안개

문근영 2013. 8. 9. 18:03

 

 

 

안개

 

서규정

 

 

  참답게 말을 해라 귀머거리에게도 들리는 말을 해라 삐라처럼 따라붙는 기억들을 수장시킬 이 순백의 해역에 갈매기 제 똥 위에 앉아 있어도 부장품은 없다 우린 같이 상처의 속도로 살아왔다 살아간다 사라진다

  다시 타는 목마름이다 바다는 물보다 왜 하얀 불을 먹이는 것이냐 차라리 열락의 솜꽃이 피는 목화의 城으로 가자 바람은 키를 낮춰 미풍으로 따라 오라 별빛도 깨끗이 지워진 위도에서 뿌우 뿌우 짙은 주황의 눈깔을 굴리며 항로를 찾는 어선 한 척 토악질을 하는 현창으로 누가 날 밀어 넣었지 이 따듯한 안개 속에 분간없이 묻어두기만 하면 끝나는 것인가 

 

 

-출처 : 시집『겨울 수선화』(고요아침, 2004)

-사진 : 다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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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 「안개」는 시집『겨울 수선화』에서 가장 절실한 어조를 보이고 있는 시다.

그만큼 삶의 진정성을 회복하려는 시인의 절심함이 열망이 표현되어 있는 시라 볼 수 있다.

안개라면 '공기 속의 수증기가 엉겨서 작은 물방울이 되어 지표 가까이에 연기처럼 끼는 자연 현상'이라고 보는데 여기서는 안개가 헤어날 수 없는 시궁창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일반적으로 어려움 없이 살아온 세월이라면  그 배경으로부터 내 몸에 베인 것이 난감함이라는 어조는 아닐 터이다.

난감한 삶에서 도망치듯 나아간 곳이 망망대해이고 대해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수단이 뱃일이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바다를 빠져나와야 하고 빠져나오기까지는 살기 위해 먹어야 하고 먹기 위해서는 일해야 하는 원초적이면서 처절한 삶의 현장, 그 바다.

조업하다 높은 파고에 쳐밀려 벼랑은 수도 없이 만났을 터.

생사의 갈림길에서 수 없이 아찔했을 이승에 대한 그리움.

그때 시인이 들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허공으로부터 마음에 전달된 그 말의 비밀을 시인은 소화했을까?

 

참다운 말, 귀머거리에게도 들리는 말은 삐라처럼 따라붙는 기억들을 떨쳐냈을 때 비로소 들리는 말이다.

그렇다. 참다운 말은 귀로 듣는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말이고 그 말을 올바로 듣기 위해서는 끈질기게 따라붙는 못된 기억들을 다 지워버려야 한다. 세속에서 내 몸에 붙어다닌 못된 말들은 쓰레기라 여겨도 좋겠다.

 

또다시 타는 목마름의 상태, 그 마음의 상태를 들으려면 다시 간절해야 한다는 것을 시인은 알고 있다.

뱃일에 몰두하는 것. 일을 통해서 과거의 삐라 같은 기억들을 다 쓸어내는 것.

뭍에서 풀지 못하고 가지고 간 억장이 무너지는 심사가 바다를 보는 순간 오히려 불로 보인다는 그리하여 난감한 내가 처절함과 싸워 이겨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으면 순명의 나날을 보내게 되는지.

바다는 감당할 수 없는 물의 화기를 식히고 끄는 것이 아니라 그 화기에 다시 불을 당기는 족으로 작용한다.

'토악질을 하는 현창으로 누가 날 밀어 넣었지 이 따듯한 안개 속에 분간없이 묻어두기만 하면 끝나는 것인'하는 탄식은 바다와의 한판 줄다리기에 나선 시인의 아픈 부르짖음이다.

자신과의 싸움을 위하여 일상에서의 탈출을 시도한 곳이 배고, 망망대해고, 뱃일이었다.

벼랑과 위기를 만든 자신과의 싸움에서 타협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을 통해서 자신을 꾸짖어가는 타협 외에 세상의 어떤 부조화와도 타협은 없는 것이다.

한 편 고통의 바다에서 이따금

'열락의 솜꽃이 피는 목화의 城으로 가자 바람은 키를 낮춰 미풍으로 따라 오라'고 권유하는 여유는 아이러니칼 하기도 하지만 망망대해에서 가질 수 있는 능청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가우/박창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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