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군여애부, 우국약우가’ (愛君如愛父 憂國若憂家), “아버지 사랑하듯 임금을 사랑했고, 집안 걱정하듯이 나라를 걱정했노라”라는 짤막한 시 한 수는 바로 중종 때의 곧고 바른 선비이자, 큰 학자였던 정암 조광조의 시입니다. 그렇게 뛰어난 애국자이고 탁월한 학자가 역적 죄인의 누명을 쓰고, 전라도 능주 고을에 귀양와서, 마침내 사약을 받고 북향 사배(四拜)하고 죽음에 임해서 지었던 시의 한 짝입니다. 그런 억울한 죽음이 그대로 묻히지 않는 것은 역사원리입니다. 오래지 않아 정암은 신원되고 복권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정공(文正公)이라는 시호가 내려 학자로서의 최상의 대우를 받았고, 또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만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선비가 되었습니다. 조선왕조 시대에 가장 당쟁이 격화되었던 때는 숙종 때입니다. 서계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은 소론계열로 노론계의 우암 송시열과 맞서 강하게 대립했습니다. 그러던 차 반주자학의 학문적 입장에서 박세당은 사서(四書:논어·맹자·대학·중용)의 주자 해석에 반대되는 학설로 『사변록(思辨錄)』이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러면서 박세당은 송시열을 매우 심하게 폄하하는 글을 지어 세상이 요란해졌습니다. 그러던 때에 박세당의 아들 박태보(朴泰輔, 1654~1689)는 숙종비 인현왕후를 대신하여 장희빈을 왕후로 삼으려고 인현왕후의 폐비사건이 일어나자 결사반대하다 심한 고문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노론계에서는 박세당이 우암을 폄하했고, 주자학을 반대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죽이려 했는데, 송시열은 박태보 같은 정의로운 아들을 둔 박세당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여 변방으로 유배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정의는 묻힐 수 없고 진실은 숨겨지지 않아, 박태보는 높은 벼슬에 증직되고 문절(文節)이라는 시호를 받아 모두의 추앙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역사원리는 바로 그렇습니다. 황사영백서 사건으로 경상도에서 유배살던 다산은 다시 체포되어 서울에 와서 국청에서 국문을 받았습니다. 1801년 10월의 일입니다. 다산의 반대파들은 이번에는 다산을 반드시 죽여야겠다고 벼르면서, 온갖 모함으로 혹독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 무렵 황해도 관찰사의 직무를 마치고 조정으로 들어온 유신(儒臣) 정일환(鄭日煥)이라는 분이 떠들었습니다. 황해도에서 근무하면서 그 지방의 여론을 들어보니 황해도 곡산도호부사를 지냈던 정약용은 너무나 훌륭한 선정을 베풀어서 모든 백성들이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는데 정약용을 죽여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황사영백서와 다산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 법률상 죽일 수도 없었지만, 인민들의 여론으로도 다산을 죽일 방법이 없었다는 하나의 증거가 그 일입니다. 옳고 바르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일한 사람은 그렇게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도 좋은 역사적 교훈입니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야만의 정치는 사라져야 한다는 것도 이런데서 배울 수 있습니다. 다산도 뒤에 규장각 제학에 증직되고 문도(文度)라는 시호를 받아, 민족 최고의 학자, 사상가,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음이 모든 것을 증명해줍니다. 정의와 진리는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죽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박석무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