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3년 화성유수(華城留守)로 있던 범암 채제공이 영의정으로 임명되어 조정으로 들어왔습니다. 남인 중에서도 시파(時派)를 우대한 정조대왕, 남인 시파인 채제공의 영의정 제수(除授)는 남인 시파이던 다산에게도 희망이 보이던 일입니다. 그때 정조는 채제공에게 남인들 중에서 대관(臺官:사헌부나 사간원의 벼슬)을 시켜야 할 사람들을 추천해 올리라면서, 채제공의 같은 당파 후배들인 이가환·이익운·정약용 등에게서 추천을 받아 올리라는 밀명(密命)을 내렸습니다. 요직인 대관은 대체로 노론들의 독점물이었고, 남인들은 구색 맞추기로 겨우 1명 정도 대관으로 추천받을 때가 그 무렵이었습니다. 남인들이 대거 요직에 오를 기미가 보이던 때입니다. 그래서 다산은 엄밀히 조사하여 남인 시파에서 28명의 우수한 소장관료들을 대관으로 추천해서, 인사 발표가 났는데 그중에서 8명이나 대관이 될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는 인사가 날 때마다 남인들이 많이 들어가 오래지 않아 28명 전원이 대관에 오를 기회를 가졌다고 다산의 기록에 나옵니다. 그만큼 정조는 다산의 판단과 의사를 존중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오래도록 빛을 보지 못하거나, 요직에는 들어가지 못하던 남인들이 대거 요직으로 들어갔던 것은 정조의 의중이 중요했지만, 자기 당파의 세력을 확충하려는 다산의 올바른 판단이 주효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당심(黨心)이 강하던 다산이었지만, 의리나 학설, 진리에 관한한 자기 당파의 사람이 바르지 못한 학설이나 의리를 주장하면 다산은 결코 따르지 않았고, 남의 당 사람이지만 학설이 옳고 의리가 바르면 주저 없이 남의 당 학자의 학설이나 의리를 따랐던 열린 마음의 소유자가 다산이었습니다. 이기론(理氣論)에서도 남인들이 모두 따르던 퇴계 이황의 학설보다는 율곡 이이의 학설을 따랐습니다. 율곡은 모든 노론들이 따르던 학설을 주장했습니다. 남인들이 다산을 몹시 비난했지만, 진리의 추구에서 옳으면 옳다 하고, 그르면 그르다 해야지 자기 당파의 학설이라고 무조건 따르는 그런 편협한 생각을 지니지 않았던 사람이 바로 다산이었습니다. 다산은 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수백 권의 저서를 안고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평가받을 학자를 고르다보니, 소론이나 노론 쪽에 학자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노론의 대표적 학자이던 연천 홍석주, 대산 김매순 등과 학술교류를 통해 자주 만나고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소론의 석천 신작과도 많은 토론을 했습니다. 그렇게 되니 남인들은 다산에 대하여 불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대부들은 당파가 나뉜 이후로는 비록 통재(通才)·대유(大儒)라도 편파적으로 자기 당의 언론에 얽매어 있었다. 그러나 다산은 마음을 평탄하고 넓게 쓰는데 중점을 두어 오직 옳은 것만을 쫓아 배우기에 힘쓸 뿐 선배 학자들에 대하여 전혀 주관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남인들에게 경시당했다.”(『매천야록』·정다산 조항)라고 매천 황현은 써놓았습니다. 다산의 경시 당함, 참으로 영광스럽고 환영할 만한 경시당함이었습니다. 지금의 우리 정치판, 제발 당파성에만 집착하지 말고 타당이건, 자당이건,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했던 다산처럼 곧은 태도로 정치하면 어떨까요. 정당하는 사람들, 다산에 대해 공부도 하고 책도 읽는다면 안 되는 건가요. 박석무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