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용(龍)오름?

문근영 2013. 5. 21. 07:32

 

용(龍)오름
강력한 회오리바람이 바닷물을 하늘로 말아올리는 `용오름' 현상이 지난 25일 오후 6시25분께 울릉도에서 약간 떨어진 죽도 앞바다에서 일어났다. 이날 용오름 현상으로 생긴 물기둥은 지름 20m, 높이 500m를 웃돌았으며 30여분 동안 계속되다 물기둥이 옅어지면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용오름 현상은 처음에는 가는 밧줄 모양이던 것이 수면에 물보라가 일며 거대한 물기둥으로 변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 물기둥이 굵어지면서 구름층으로 빨려들어가 장관을 이뤘다. 울릉에서 용오름 현상이 나타난 것은 13년 만의 일이다.(2003.10.27퍼옴)

 

님들은 용오름 현상을 자연현상으로만 보시겠지요?

 

자연현상은 우리에게 크나큰 메세지를 주고 있는것입니다.

 

땅과 하늘이 닿을수 있는 것은 위와같이 용오름 뿐입니다.곧 물뿐이지요.땅과 하늘의 다리가 물이라는 것입니다.

 

[스크랩] 한민족의 문명

(3311) KBS SPECIALS(특집)한민족 문명(1) <==클릭 하시면 영상을 감상 하실수 있습니다.
(3312) KBS SPECIALS(특집)한민족 문명(2)

(3313) KBS SPECIALS(특집)한민족 문명(3)

(3314) KBS SPECIALS(특집)한민족 문명(4)
(3315) KBS SPECIALS(특집)한민족 문명(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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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7) KBS SPECIALS(특집)한민족 문명(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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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우리| 원글보기

 

환웅, 웅녀의 실제 유골상과 물의 수호신 용이 있는 유적

 

여신들의 묘라는 안내판인데 여신이란 누구인가?

 

위 안내판 내용은 여신들 묘가 여러기 인 모양이고  그렇다면 글쓴이 추정은 이 여신들 묘가 고조선 유적지에 있다면 이는 지신족(地神族)  이었던 웅녀족 이었을 것이며 그렇다면 이 지신족들도 오래전 부터 이곳에 살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부도지 등에 써 있듯이 우리 하느님이 환인 하느님 하나뿐이 아니고 그 전서부터 북방계 몽골리안 중에 환족의 지도자가 다음 지도자를 골라 위를 넘기듯 이 웅녀족도 오래전서 부터  그 여신들이 다음 여신을 골라 전수 했을 것이니 그 여신들은 한명이 아니고 여러 명 이었을 수도 있다.

 

여신들이 묻혀 있는 유골. 여신뿐 아니라 동물의 뼈도 있는것 같다.

 

 글쓴이가 추정해  보면 이 여신묘에서는 곰의 유골도 같이 출토 되므로 이는 곰을 토템으로 삼았던 사람들이므로 웅녀족 이라는 확실한 근거 된다.

 

 

이상 글들과 다음글도 모두 글쓴이의 추리 이다.

 여신들은 그 유골뿐 아니라 그 상도 흙으로 만들어 구어 묻었던 모양인데 그렇다면 이 여신은 누구 인가?

 

 

아무래도 아래 얼굴상은 웅녀 할머니가 확실 하다고 본다.

 

이 상은 1984년 10월 31 일에 출토되었는데 세계적으로 놀랄만한 사건이었다 한다.

 

이 상이 웅녀라는 더 확실한 근거는 눈에는 옥을 밖았는 것인데 玉의 우리말은 구슬이고 구술은 굿을 할때 신께 바치는 귀중한 보물이다. 또 우리 말에 관직에 있는 사람을 구슬아치 라 하고 법정 등에서 변명 하는것을 구실을 댄다 하니 그 굿을 하는 무당은 행정 사법까지 도맞았던 사람들이다.

 

이 여신상은 곧 세계 언론과 학계에 보고 되었다.

 

또하나 실제 웅녀 여신의 유골로 추정되는 이유는 주위에 많은 옥기가 있다는 점이다.

 

 

옥기 중에는 나중에 신라 금관 곡옥(曲玉)이 되는 곰 머리에 용 모습을 한 웅룡(熊龍)도 있다.

  

또 웅녀의 유골이라는 증거는 여기에 같이 묻힌옥으로 만든 머릿빗만 보아도 여신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옥이란 후에 또 설명이 되지만 당시는 매우 귀중한 보물 이었다.

 

 다음 사진 가운데 큰 옥은  당시 생식만이 최 우선으로 생각하던 사회에서 남의녀 결합 을 상징적으로 조각한 옥 같은데 좌측은 사내의 남근이고 우측은 여음으로 성기를 과대하게 표현한것 같으며 그 아래 좌우에 있는  거북이 상은 아무래도 엎드린 암컷 거북 상이다.

 

위 거북이 후방위 교접을 하려는 엎드리 여자라는 말의 증거로 울산시 울주군 대곡리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 를 제시 한다.

다음 사진은 립박물관에서 캠코더로 촬영한 동영상을 캡춰 한것으로 당시 사람들은 모든 생명체가 그렇듯이 생식만이 삶의 최 우선이라고 생각했었다는 증거이다.

맨 위에 남근을 뻣친 사내가 있고 그 주위에 업드린 거북들은 엎드린 여인들을 상징이니 이는 당시의 성생활이 동물과 같은 후방위 교접 이었다는 것과 그 교합으로 새끼를 뱄다는것을 고래를 통하여 렌트겐 기법으로 표현했다.

 

 

 

그렇다면 그 옥 거북은 당시 후방위 교접을 하던 여음을 나타낸 그림이고  그것들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그 옥 거북은 여음을 상징하는 구멍 옆에 있다. 여시서 우리말의 뿌리를 보면 검둥이, 감둥이가 같드시 말이 부족하던 시절 아래아점 발음을 ?던 당시 사람들은 감,검,곰,굼이 같은 말 이었으며 그중 은 중세어로 여음이라는 구무가 되는데 이 구무가 지금 구멍이 된 것 이다. 따라서 아래 옥 거북 옆에 있는 구멍은 바로  여음을 뜻한다.

 

 

다음 유골은 역시 부근에서 출토된 것인데 그 부장품으로 보아 여신상이 아니고 남성 유골같으며 거기에 같이 묻혀있는 옥 유물은 터진데가 없는것으로 보아 곡옥도 아니고 웅룡도 아닌 하늘 천부인 ㅇ 을 뜻하는 ㅇ 들의 옥지환이 있는것으로 보아 환웅족 이었을 것으로 본다.

 

다음은 환웅을 상징하는 하늘 해를 향한 제단. 붉은 원통은 부근 깨진 질그릇을 보고 KBS가 추정 삽입한 그림으로 사내의 대표인 환웅의 빛이 구멍(여음)을 통하여 알(아기)이 많이 열리게 해 달라는 기원이 담긴것으로 본다.

 

이 원형 제단에 위 아기를 기원하는 질그릇 원통들이 수 없이 많은데 이 역시 고고 유물학자들의 설명을 듣고  KBS가 추정해 삽입한 그림이다.

 

그리고 아래 그림과 같이 하늘에 빌었을 것이다. 역시  KBS가 추정해 삽입한 그림

 

 역시  KBS가 흙으로 구은 여신상을 참고로 추정해 삽입한 웅녀 상. 따라서 이 그림을 웅녀 할머니로 봐도 좋다.

 

 그리고 이 웅녀 할머니는 하늘에 구름과 같이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역시  KBS가 추정해 삽입한 여신 그림

 

따라서 이 여신상이 있는 제단 부근은 그들에게 엄청난 성소 이었을 것이다.

항공대 교양학부 우실하 교수 의 말

 

 

 

 

이 시대는 대략 4.5 00 년을 전후로 하는 초기 문명시대를 말한다. 

 

이 곰족 웅녀 여신묘에서는 새 모양으로 구어 만든 흙도 출토 되는데 이는  새는 사+이로 바로 서고 솟는 ㅅ의 뜻을 가지며 이는 환숫과 사내의 남근을 의미 하기도 한다.

 

 

그곳 석관묘는 ㅁ 형도 있었는데

 

그 속의 유골 다리뼈가 x 자로 교차 고정 시켜 놓은곳이 꼭 한개 있다는데 이는 분명 환웅의 유골이 분명하다.

햇빛의 정기를 받는 나뭇가지. '하'.

 

그 빛을 누리(땅)인 곰네게게 전해주는 '나'

 

 

왜냐하면 신지녹도문 진본천부경 하나 둘 셋 ...열에서 하나의 '나' 는 환웅의  빛이 곰네 누리에 내리는 뜻 이기 때문에 여기에 다리의 뼈를 이렇게  x 로 고정시켜 놓은것은 아무 한테나 할 수 없는것이고 그래서 이런 유골은 이것 단 하나 이기 때문인데 여기에 웅룡이 있는것은 웅녀를 사랑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웅녀족과 결합 했음을 의미 할까?

 

환웅의 유골로 추정

 

이것을 근거로 글 쓴이는 흔히들 그리던 원방각 형을 다음과 같이 다시 그려 본다.

 

 

위 바깟 둥근원은 위 원형제단이고 그 속 口 는  口 형 석관이며 그안 X 는 바로  환웅의 누리에 내리는 빛을 상징하는 다리뼈로 보기 때문이며 이렇게 하면 口속에 가 4 개가 생기는데 이 네개 라는 네는 바로 웅여를 뜻하는 너+ 이 이기 때문이다.

 

아래 옥지환은 글 쓴이가 야후에서 퍼온 자료로 환웅의 빛이나 사상은 삼태극 이라는 점.

 

 그렇다면 이 여신묘 등에 써진 옥이나 후에 제시 되는 웅룡(熊龍)의 옥들은 어느곳 산인가?

 

다음은 북경대 고고학 교수이고 옥 전문가인 조조홍 교수의 말을 들어 본다.

 

 

 

 그러니까 고조선 유적지에서 출토되는 옥 들은 압노강 부근 수암산의 옥이며 이 옥은 강원도 고성에서도 출토 되었다는 말이다.

 

 

 玉은 바로 구슬 이고 구슬이란 굿을 할때 올리는 제물이다.

 

이 옥은 현대 기술로 가공해도 일주일 이상이 걸리는데

 

 

kbs 기자가 이 홍산에서 유물로 출토되는 옥을 홍산문화시대 가공법으로 가공하면 얼마나 걸릴것 같으냐고 옥가공 점문가에게 물으니

  

 이 옥들은 아래 손바닥에의 옥만 해도 한화로 무려 일억이 상이 나간단다.

 

 

 홍산인들은 당연히 옥 만드는 장인들이 따로 있었을 것이다. 

 

역시 KBS가 추정한 그림

 

북경대 고고학의 조조홍 교수는 그 옥을 소유했던 사람들의 신분에 대해 말한다

 

위치 권력 재산이 있었다면 이 옥을 소유하고 부장품에 까지 묻었던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비교적 복잡한 사회란 바로 나라가 성립되는 시기를 말하는데 이 시기도 대략 4.500 년 전후이니 단기와 잘 맞아 떨어진다.

 

3) 사해유적

 

 

 

 

 

 그렇다면 왜 이곳에 용의 유적이 있는가? 용은 우리말로 미르 이고 미르는 바로 무르> 물 이다.

따라서 물은 사람 사는데 필수 요건이기도 하겠지만 그 부근은 한반도와 달리 평지가 많고 만약 물 난리라도 나면 수십리 또는 수 백리를 뛰어야 살아 남는데 지금도 그곳은 물난리가 자주 나므로 물의 수호신 용을 섬기는 것이다.

 

 

 

 중국인들의 용 머리는 말 같다. 그러나 웅녀족의 용 머리는 곰이다. 따라서 웅룡(熊龍) 이라 한다.

웅룡은 옥 뿐 아니라 동으로도 만들었던 모양이다.

 

 

 

 

이 둘레가 터진 웅룡은 나중에 신라 금관의 곡옥(곡옥) 이 되기도 한다.

 

아래는 글 쓴이가 야후에서 퍼다 모았던 자료.

이런 왕관의 出 자는 당연히 신지녹도문자 셋에 나오는 환웅상이고 거기에 매단 곡옥은 웅녀의 웅룡(熊龍)이 시대에 따라 변한것으로 본다.

 

 이 융룡이 나오는 곳의 거주지다.

 

따라서 웅녀족은 신석기 이전 부터 이 부근에 살았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렇게 이른 시기 부터 여기서 곰과 용을 수호신으로 모시며 산 모양이다.

 

 들이 쓰던 씨를 갈아 벗기던 매돌 같은 석기로 보아 그들은 신석기 시대 부터 살았을 것이다.

 

신석기 시대 그들이 쓰던 석기

 

위와 같이 웅족만이 살던 땅에 환웅족이 들어왔는지  차츰 문화가 발달하고 성곽도 싸아진 모양이다.

 

 

 

   국제 뇌교육 종합대학원 대학교 국학과 복기대 교수의 말

 

 

그 성곽을 쌓고 살던 사람은 중국이나 한국 사서에서 고조선 밖에 없다는 것이다.

 

드디어 본격적 고조선 유물 출토다.

 

 

 

 

 

 

 당시 청동 철모를 ?던 모양이고

 

 청동 창도 썼으며

 

 

특히 사람 천부인인 세모뿔 청동창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비파형 동검의 원조로 본다.

 

야후에서 퍼온것. 이는 창이나 칼의 용도로는 부적당 했을 것으로 아마 제례 의식용으로 ?을 것이다.

 

 이 의식용 제기는 차츰 칼의 형태를 가춘다.

 

또 적봉시 삼좌점 산성에서는

 

 

 

 

 

 

 

 

 

 

 

 

출처:환웅, 웅녀의 실제 유골상과 물의 수호신 용이 있는 유적|새로 쓰는 우리 역사

 

우리 | 2009.09.25. 16:30 http://cafe.daum.net/chunbuinnet/qja/125

 

   

 

사찰(寺刹)에가면 龍과 연꽃을 표현한것이 많은데,우리에게 아래와 같은것을 깨달으라고 메세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용(龍) ==용(龍)을 상상의 동물이라고 알고 있으나,용(龍)은 물을 상징하며,연꽃 또한 물에서 수생하는 식물로서, 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용화세상이라함은 물의세상을 얘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왕을 다른말로 수신(水神)이라고 말하는것은,용은 물을 나타낸다는 표현이기 때문인 것이지요.

 

용화세상(龍華世上)은 ==>"물의나라" 를 말하며,사찰(寺刹)과 법당(法堂)은,물의나라 용궁(龍宮)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미륵전 [彌勒殿] : 요약 ; 불교 사찰에서 미륵불을 모시는 당우(堂宇). 미래불인 미륵보살이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상징하는 법당이다.

 미륵불에 의해 정화되고 펼쳐지는 새로운 불국토 용화세계를 상징한다고 하여 용화전(龍華殿)이라고도 하고, 자씨전(慈氏殿)·대자보전(大慈寶殿)이라도 한다.

 

미륵(彌勒)부처님(하느님)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설법에서 제도 받지 못한 제자들까지 모두 제도되어 지상낙원 용화세계(龍華世界)를 개벽하는 부처님이시다!

 

 

 


미륵보살(하느님)을 뵙고 가르침을 들으면 오랜업장을 소멸하고 위없는 깨달음의 길에서 물러나지 않게 된다!

 

불교 대웅전은 원래 환웅을 모시던 곳 (22부)
대시전--> 환웅전--> 대웅전으로 명칭변화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2/03/12 [19:32]
(원문) 11세 도해단군 재위 57년
경인 원년(B.C1891) 단제께서는 오가(五加)에 명을 내려 12개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의 소도(國仙蘇塗)를 설치케 하셨다. 그 주변에 박달나무를 많이 심고,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환웅상(桓雄像)으로 모시고 제사지내며 웅상(雄常)이라고 불렀다.
겨울 10월 대시전(大始殿)을 세우도록 명하고 크게 장려하였다. 천제 환웅의 유상(遺像)을 받들어 모셨는데 그 머리 위에서는 광채가 찬란하여 마치 큰 태양의 둥근 빛이 온 우주를 환하게 비추는 것 같았다. 박달나무 밑 환화(桓花) 위에 앉아계시니 하나의 살아있는 신이 둥근 원 가운데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 (이하생략)

정묘 38년(B.C1846) 백성들 가운데 장정을 뽑아 모두 병사로 삼았다. 선사(選士) 20명을 하나라 도읍으로 보내 처음으로 나라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써 위세를 보였다.

을해 46년(B.C1846) 송화강변에 관청을 세워 배와 노, 기물을 세상에 널리 쓰이게 하였다. 3월 산 남쪽에서 삼신에게 제사지낼 때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낸 후 밤에 특별히 술을 하사하여 백성들과 함께 돌려 마셨다. 모든 유희가 끝난 후 누각에 올라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설명하고 오가(五加)를 돌아보고 말씀하기를 “이제부터 살생을 금하며, 잡은 것을 놓아주며, 옥문을 열고, 거지에게 밥을 주고, 사형을 없애노라"하시니 나라 안팎에서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해설)
* 경인년 기사의 환화(桓花)에 대해서는 아래 글을 참조바랍니다.
인류 최초로 공화제를 실시한 조선 (17부)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799§ion=sc6§ion2=
* 정묘년 기사의 하나라의 도읍에 대해서는 아래 글을 참조바랍니다.
몽골은 단군의 후손으로 우리와 형제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782§ion=sc6§ion2=
* 을해년 기사의 오가는 저가(猪加), 구가(狗加), 양가(羊加), 우가(牛加), 마가(馬加)라는 관직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신하들에게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국선(國仙)과 소도(蘇塗) 

국선과 소도에 대한 <인터넷백과사전>의 설명은 다음과 같은데, 중국의 사서에서 우리의 고유한 소도에 대해 폄하한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우리 민족의 고유한 천제를 지내던 신성한 지역인 일컫는 소도를 설명하면서 귀신, 도망자 등의 표현을 쓴 것이 바로 그것이다. 소도는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신성한 구역이므로, 설사 죄인이라도 그곳으로 피신하면 잡으러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백과사전>에서는 국선은 예전에 화랑의 우두머리(?)를 이르던 말이고, 소도는 삼한시대 때 각 고을에 방울과 북을 단 큰 나무를 세우고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드리던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백과사전>에서는 “소도란 마한국 안에 신도 색채의 특수구역을 설치한 장소이다. <삼국지 위지 오환.선비.동이전 제30> 한조(韓條)에 귀신을 믿으므로 국읍에서는 각기 한 사람을 뽑아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했는데, 이 사람을 천군(天君=단군)이라 한다. 또 이들 모든 나라에 각기 별읍(別邑)이 있어 이를 소도라 한다. 긴 장대에 방울과 북을 달아놓고 귀신을 섬긴다. 모든 도망자가 이곳에 이르면 돌려보내지 않아 도둑질하기 일쑤였다. 소도를 세우는 뜻은 부도(浮屠)와 같은 점이 있으나 그 하는 일에 선악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원문) ?? : 古代???中所?置的含有神道色彩的特殊?域。?逃亡者至其中?可得到庇?。《三?志·魏志·?丸?卑?夷? 第三十》:“信鬼神,?邑各立一人主祭天神,名之天君。又??各有?邑,名之???。立大木??鼓,事鬼神。?亡逃至其中,皆不?之,好作?。其立??之?,有似浮屠,而所行善?有?。”   

이밖에 <후한서〉와〈진서〉 등에 비슷한 기록이 보인다. 즉 소도는 제사가 행해지는 신성한 지역으로 성역이 된다. 한편 소도는 입목(立木)과 간목(竿木)을 나타내는 '솟대' 또는 '솔대'에서 온 말로 읍락의 원시 경계 표시로, 신체 혹은 제단으로 건립되는 큰 나무의 명칭이라는 설도 있다. 나아가 고대국가의 형성과정에서 일어나는 신.구 양 문화의 갈등을 완화, 조절하는 제도적 장치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소도는 처음에는 나무 숭배사상에서 큰 나무를 의미하던 것이 후에 천신이 내려오는 계단 및 사는 곳 또는 신성지역을 뜻하는 것으로 점차 개념이 확대 변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상) 

▲ 하늘에 제사 지내던 권리는 원래 천손민족인 우리민족에게 있었으나 조선왕조 세조 이후로 명나라의 압력으로 중단되었다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광무황제위에 오르면서 원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일제 때 부서진 원구단이 아직도 복원되지 않고 있다.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소도는 제천행사를 지내는 신성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삼한에 옛 풍속이 있는바 모두 10월 상순에 국중대회를 열어 둥근 단(원구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지낸다. 천제를 지냄에 있어 반드시 임금이 몸소 제를 지내니 그 예법이 매우 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날 모든 사람들이 생산한 것을 바치고 북치고 나팔 불며 온갖 놀이를 벌이고, 여러 작은 나라들이 찾아와 특산물을 바치니 진귀한 물건이 언덕에 산처럼 쌓였다. 대저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으니 곧 영토를 넓히는 원인이 되었으며, 소도의 제천은 곧 구리(九黎)를 교화하는 근원이 되었다. 이로부터 화를 당하여 함께 힘쓰고 이웃을 위하며,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도우니 문명은 나라를 이루고 개화 평등하여 온 세상에 제사의 예를 숭상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또한 “소도가 서면 언제나 계(戒)가 있나니 바로 충(忠), 효(孝), 신(信), 용(勇), 인(仁)의 오상(五常)의 길이니라. 소도의 곁엔 반드시 경당(?堂)을 세우고 결혼하지 않은 사내들로 하여금 여러 사물을 익히고 연마하게 하였다. 대체로 글을 읽고, 활을 쏘며, 말을 타고, 예절을 익히고, 노래를 배우며, 격투기, 검술 등의 여섯 가지 기예를 말한다.”고 하여 단군조선과 신라의 화랑(花郞), 고구려의 조의(?衣) 등과 같이 국가의 간성을 길러내는 수련장이기도 했다. 국선(國仙)이란 바로 이들 선인(仙人)들의 최고 사부(師父)를 말하는 것이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상>에 “소도가 세워지는 곳마다 신의 형상의 웅상(雄常)이 세워지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듯이 마한의 소도는 부여의 영고(迎鼓), 예맥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東盟) 등과 같은 제천행사이다. 소도를 처음 세운 분은 11세 도해단군이 아니라, 3세 부루단군 기해년에 “소도를 세우고 삼윤구서(三倫九誓)의 가르침을 폈다. 이에 치화가 크게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으로 보인다. 

또한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하>의 기록에, “백성들을 위하여 금팔법(禁八法)을 만들었으니, 남을 죽이면 같이 죽여서 다스리고 소도를 훼손시키는 자는 가두어 두며..” 등이 있어 소도를 무척 신성시하고 중요시한 것으로 보인다. 즉 위 <중국백과사전>의 간략한 설명보다 더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 배달국을 개천한 1대 환웅천왕의 화상(김산호화백 작품). 배달국은 1,565년간 18분의 환웅에 의해 다스려진 나라였다.    

웅상(雄常) 

웅상이란 천제를 지내는 장소인 소도 주변에 박달나무를 많이 심고,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환웅상(桓雄像)으로 모시고 제사지낸 상을 불렀던 이름이다. 웅상에 대한 중국사서의 설명은 다음과 같은데, 아래의 백민을 백의민족의 약자로 해석해 "숙신국에는 백의민족이 있다”로 해석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백민이 지명이라는 것은 <단군세기> 43대 구물단군의 기록 중 우하충이 반란을 일으키자 백민성(白民城)의 욕살 구물이 어명으로 군사를 일으켰다는 대목으로 입증된다.  

(번역) <산해경 해외서경> “백민국의 북쪽에 있는 숙신국에 이름이 웅상인 나무가 있다. 옛날 팔대제(=삼황오제)가 여기에서 이를 취하였다.” 곽박의 주에 웅을 락으로 만들었다. <진서 사이전 숙신씨> “숙신에 락상이라는 나무가 있는데 중국의 성제 때 세워졌다. 그 나무의 껍질로 옷을 만들 수 있다.”
(원문)《山海?·海外西?》:“??之?在白民北 有?名曰雄常。先入伐帝,于此取之。” 袁珂 校注引 郭璞 注:“雄或作?。”。《晋?·四夷?·??氏》:“??氏有?名?常,若中?有?帝代立,?其木生皮可衣。”。
(주 : 先入伐帝는 先八代帝의 오기로 보인다. 先入伐帝로는 해석이 이상해진다.) 

또한 숙신국을 설명한 중국의 자료 중 눈길을 끄는 문구가 있어 소개한다.
(번역) 숙신국 : <해외서경>에 숙신의 나라는 <대황동경>의 숙신씨의 나라이다. 중국과 외국학자들은 “진나라 이전 옛 책에 기록된 숙신은 바로 지금 만족의 최고 오래된 조상이다. 숙신족의 기원은 오도등에서 나온다. 한나라 이후 왕조의 사서에 나오는 읍루(후한,삼국), 물길(북조), 말갈(수,당), 여진(요,금,송,원,명)은 숙신의 후예로 역시 만주족의 조상이다.
(원문) ??? :《海外西?》所?"??之?"?于《大荒??》"??氏之?"; 目前,中外?者公?的看法是,先秦古籍中的??人,就是今天?族的最早先民。??族起源于???。?代以后,不同朝代的史?上出?的邑?(后?,三?)、勿吉(北朝)、靺鞨(隋,唐), 女?(?,金,宋,元,明), 是??的后裔,也是?族的先民。 

즉 부여와 고구려의 주축을 이루는 읍루, 물길, 말갈, 여진족이 숙신(=조선)의 후예이며 현 만주족(=청나라)의 조상이라는 설명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이들을 같은 민족으로 보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조선왕조 500년간 명나라의 속국인 소중화(小中華)가 되어 오히려 이들을 오랑캐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이성계의 쿠데타로 시작된 조선왕조가 우리민족사에 끼친 해악이 참으로 크다 하겠다. 
 
▲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 모셔져 있던 환인, 환웅, 단군의 초상     

대시전 --> 환웅전 --> 대웅전으로 이름이 바뀐다. 

경인 원년에 세운 대시전(大始殿)은 천제 환웅의 유상(遺像)을 모신 곳으로 일명 환웅전이라고도 불렸다. 그런데 이 환웅전은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본전 자리를 내주고 뒷전인 삼성각(三聖閣)으로 옮겨가게 된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환인, 환웅, 단군의 삼인의 성인을 모시는 삼성각도 있다.  

중국에서는 사찰의 중심건물인 본전(本殿)을 대부분 대웅보전(大雄?殿)이라 부르고 있다. “대웅은 부처의 덕호이다. 대는 만 가지를 포함하여 있는 의미이며, 웅은 섭복마귀떼라는 의미이다. 불제자의 존칭을 대웅이라 했다(大雄是佛的德?。大者,是包含万有的意思;雄者,是?伏群魔的意思。因此佛弟子尊?他?大雄。)”라는 설명으로 대웅의 참 뜻을 숨기고 있다. 

<태백일사 신시본기>에서는 <고려팔관잡기>를 인용해 “불상이 처음 들어오매 절을 세워 이를 대웅(大雄)이라 불렀다. 이는 승도들이 옛 것을 세습하는 칭호로서 본래 승가의 말은 아닌 것이다. 또 가로대 승도와 유생(儒生)이 모두 낭가(郎家)에 예속되어 있다고 말함을 보아 알 수 있다.”라는 문구가 있어 현 사찰의 대웅전은 불교가 본당을 차지하면서 환웅전에서 이름이 바뀌어졌음을 알 수 있다.  
 
▲ 서울 조계사의 대웅전. 불교 사찰의 대웅전은 원래 환웅상을 모시던 곳이었다.    

 

가부좌상 마고여신상

 

 

                                                                                                 용왕(龍王)

 

나가(那伽)라는 말은 용(龍)을 뜻하는데, 부처님이 선정에 들어 자유자재하심이,

마치 용(龍)이 허공이나 바다에서 자유자재하게, 노니는 것과 같음을 비유하여 나가정(那伽定)이라고 한 것이다.

 

 

‘신라 월성 동족, 용궁 남쪽에는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다. 이곳은 바로 전불(前佛) 대의 절터다. 지금 황룡사 터는 일곱 절중 하나다.

<== 이시대 신라 왕궁을 용궁(龍宮)으로 부르고 있음을 알수있다,

 

[스크랩] 가섭불연좌석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

 <옥룡집(玉龍集)>과 <자장전(慈藏傳)>, 그리고 여러 문인들의 전기(傳記)에서 모두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라 월성(月城) 동쪽 용궁(龍宮)의 남쪽에 가섭불(迦葉佛, 부처의 이름. 과거 7불 가운데 여섯 번째 부처다)의 연좌석(宴坐石, 연좌는 좌선(坐禪). 좌선을 할 때 앉는 돌)이 있으니, 전불(前佛) 때의 절터다. 지금 황룡사(皇龍寺) 터가 일곱 사찰 가운데 하나다.”

<국사(國史)>를 살펴보면, 진흥왕 즉위 14년 개국(開國) 3년 계유(癸酉, 553) 2월에 동쪽에 신궁(新宮)을 지었는데, 여기에서 황룡(皇龍, 황룡(黃龍))이 나타났다. 그래서 왕이 이것을 의의하게 여겨, 신궁을 고쳐 황룡사(皇龍寺)라 하였다.

연좌석은 불전(佛殿) 뒷쪽에 있었다.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돌 높이는 5·6척이나 되었지만 둘레는 고작 3발밖에 되지 않았다. 우뚝하게 서 있는데, 위는 평평하였다. 진흥왕이 절을 창건한 이후 두 번이나 화재를 겪어서 돌이 갈라진 곳이 있다. 그래서 사찰의 스님이 여기에 쇠를 붙여 돌을 보호하였다.

 

(讚)한다.

 

불교가 침체한 지 얼마인지도 알 수 없는데 오직 연좌석만 그대로 남아 있구나.

상전(桑田)이 몇 번이나 창해(滄海)가 되었는지 안타깝게도 우뚝하게 아직 옮기지도 않았네.

 

이윽고 몽고(蒙古)의 큰 병란이 있고난 뒤로 불전(佛殿)과 탑이 모두 타버렸다. 그래서 이 돌도 흙 속에 파묻혀 겨우 지면처럼 평평해진 것이다.

<아함경(阿含經, 석가모니의 언행록. 소승불교의 경전이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가섭불은 현겁(賢劫, 세 주겁(住劫)의 하나)의 세 번째 부처다. 사람의 나이로 따져 2만 세 때 세상에 나타난다고 한다. 이에 맞춰 증감법(增減法)으로 계산해보면 언제나 성겁(成劫, 불교에서 말하는 가장 긴 시간의 하나. 세상이 생겨나 인류와 축생이 만들어지는 시기다. 4겁의 처음이다)의 초기에는 모두 무량세(無量歲, 한량 없는 수명)를 누렸다. 이것이 점점 줄어들어 8만 세에 이르면 바로 주겁(住劫)의 시작이 된다. 이때부터 또 100년마다 1세씩 감하여 10세가 되면 1감(減)이 되고, 다시 증가하여 사람의 나이 8만 세가 되면 1증(增)이 된다. 이렇게 해서 20번 감하였다가 20번 더해지면 1주겁이 되는 것이다.

이 1주겁 동안 1천 부처가 세상에 나타나는데, 지금 본사(本師)인 석가불(釋迦佛)은 네 번째 부처다. 네 번째의 부처는 모두 제9감(減) 중에 나타난다. 석가세존(釋迦世尊)이 100세의 수를 누린 때부터 가섭불이 2만 세를 누릴 때까지는 이미 200만여 세가 된다. 만일 현겁(現劫) 초기의 첫째 부처였던 구류손불(拘留孫佛, 부처의 이름. 과거 7불의 하나) 때까지 또 몇 만 세(歲)가 된다. 구류손불 때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겁초(劫初)의 무량세를 누리던 때까지는 또 얼마나 되겠는가. 석가세존으로부터 내려와 지금의 지원(至元, 원(元)나라 시대에 쓰였던 연호. 연대는 1264-1294) 18년 신사(辛巳, 1281)까지 벌써 2,230년인 것을 보면, 구류손불부터 가섭불을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는 또 몇 만 세가 될 것이다.

우리 고려의 명사(名士) 오세문(吳世文, 고려 명종 때 학자. 벼슬이 동각시학(東閣侍學)에 이르렀다)이 <역대가(歷代歌)>를 지었는데, 여기에 따르면 대금(大金) 정우(貞祐) 7년 기묘(己卯, 1219)에서 거슬러 헤아려 4만 9,600여 세에 이르면 반고씨(盤古氏, 중국에서 천지개벽 때 처음 세상에 나왔다고 하는 제왕)가 천지를 개벽한 무인년(戊寅年)이 된다고 하였다. 또 연희궁(延禧宮) 녹사(錄事) 김희령(金希寧)이 지은 <대일역법(大一曆法)>에 따르면 천지개벽한 상원갑자(上元甲子, 상수학(象數學)에서는 1백 80년을 1주(周)로 하고 그것을 3분한 상원갑자(上元甲子), 중원갑자(中元甲子), 하원갑자(下元甲子)로 했는데, 그 가운데 제1갑자 60년을 이름. 임금의 즉위를 종묘에 고하는 등 왕실이나 국가의 중대한 일을 행함에 있어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끌어다 쓴다) 때부터 원풍(元豊) 7년 갑자(甲子, 1084)에 이르기까지 193만 7,641세라 하였다. 또 <찬고도(纂古圖)>에서는 천지가 개벽한 때부터 획린(獲麟, 기원전 477)까지가 276만 세라 하였다. 여러 경들을 살펴보면 가섭불 때부터 현재까지가 이 연좌석의 나이가 된다고 했으니, 겁초(劫初)에 천지가 개벽했을 때와 비교하면 어린애 나이에 지나지 않는다. 삼가(三家)의 말이 이 어린 돌의 나이에도 이르지 못하니, 그들도 천지개벽의 설에 대해서는 꽤나 소홀했던 듯하다.

 

 

玉龍集及慈藏傳 與諸家傳紀皆云 新羅月城東 龍宮南 有迦葉佛宴坐石 其地卽前佛時伽藍之墟也 今皇龍寺之地 卽七伽藍之一也 按國史 眞興王卽位十四 開國三年癸酉二月 築新宮於月城東 有皇龍現其地 王疑之 改爲皇龍寺 宴坐石在佛殿後面 嘗一謁焉 石之高可五六尺 來圍僅三? 幢立而平頂 眞興創寺已來 再經災火 石有?裂處 寺僧貼鐵爲護 乃有讚曰 惠日沈輝不記年 唯餘宴坐石依然 桑田幾度成滄海 可惜巍然尙未遷 旣而西山大兵已後 殿塔?燼 而此石亦夷沒 而僅與地平矣 按阿含經 迦葉佛是賢劫第三尊也 人壽二萬歲時 出現於世 據此以增減法計之 每成劫初 皆壽無量歲 漸減至壽八萬歲時 爲住劫之初 自此又百年減一歲 至壽十歲時 爲一減 又增至人壽八萬歲時 爲一增 如是二十減二十增 爲一住劫 此一住劫中 有千佛出世 今本師釋迦是第四尊也 四尊皆現於第九減中 自釋尊百歲壽時 至迦葉佛二萬歲時 已得二百萬餘歲 若至賢劫初第一尊拘留孫佛時 又幾萬歲也 自拘留孫佛時 上至劫初無量歲壽時又幾何也 自釋尊下至于今至元十八年辛巳歲 已得二千二百三十矣 自拘留孫佛 歷迦葉佛時 至于今 則直幾萬世也 有本朝名士吳世文 作歷代歌 從大金貞祐七年己卯 逆數至四萬九千六百餘歲 爲盤古開闢戊寅 又延禧宮錄事金希寧所撰大一歷法 自開闢上元甲子 至元豊甲子 一百九十三萬七千六百四十一歲 又纂古圖云 開闢至獲麟 二百七十六萬歲 按諸經 且以迦葉佛時至于今 爲此石之壽 尙距於劫初開闢時爲兒子矣 三家之說 尙不及玆兒石之年 其於開闢之說 疎之遠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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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불시대 일곱 곳의 인연있는 절터

불교가 번성할 때의 신라 사람들은, 서라벌이야말로 전(前) 세상 부처님 시대로부터, 법수(法水)인 불교의 맥이 흐르는 곳이라고 믿었다. 전불(前佛) 시대부터 서라벌에는 일곱 곳의 인연있는 절 터 즉 ?7처 가람지허(七處伽藍之墟)?가 있는데, 이곳에 다시 절을 세웠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스님은 이 절 터를 일일이 적고, 상세하게 하나 하나 설명을 곁들인 협주(夾註)까지 달아 두었다.


열거한 순서는 창건 연대순과 같으니, 이는 후에 오면서 지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쇠다리 동쪽 하늘 거울 숲[金橋東天鏡林] 흥륜사(興輪寺)?이고, 둘째는 ?세 줄기의 내가 갈라지는 곳, 또는 모이는 곳[三川岐] 영흥사(永興寺)?이고, 셋째는 ?용궁 남쪽[龍宮南] 황룡사(黃龍寺 또는 皇龍寺)?이고, 넷째는 ?용궁 북쪽[龍宮北] 분황사(芬皇寺)?이고, 다섯째는 ?모래내 끄트머리[沙川尾] 영묘사(靈妙寺 또는 靈廟寺)?이고, 여섯째는 ?신선이 내려와 노니는 숲[神遊林] 천왕사(天王寺 또는 四天王寺)?이고, 일곱째는 ?사위 맞아들인 밭[胥請田] 담엄사(曇嚴寺 또는 曇巖寺)?이다.

 

  

나정과 포석정

나 정

나정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태어난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신라라는 나라가 되기 전 경주 일대는 진한< 辰韓 >의 땅으로 6부촌장<六部村長>이 있어 6개 구역으로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다.  기원전 69년 어느날, 6개 부락의 촌장이 알천언덕에 모여 화백회의를 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번갯불 같은 빛이 나정(蘿井)에 번쩍였다.  그곳을 살펴보니 백마가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절을 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촌장들이 다가가니 백마가 울부짖으며 하늘로 올라가고 촌장들중 고허촌장<高墟村長>인 소벌도리공<蘇伐都利公>이 이곳 우물가에서 붉은 빛이 나는 큰 알 하나를 얻게 되었는데 형의(形儀)가 아름다워 사람들은 그일을 놀랍고 기이하게 여겼다. 이 알 속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으며 동천(東川)에 몸을 씻겼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줄지어 따르며 춤추었고, 천지가 진동하고, 일월(日月)이 청명했으니, 촌장들은 하늘이 보낸 것으로 알고 아이를 잘 길렀다.  이 아이가 13살이 되던 해인 기원전 57년에 6부촌장이 모인 자리에서 추대되어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 이가 곧 신라<新羅> 제1대 임금이며, 나라이름을 서라벌<徐羅伐>이라 했고, 왕이 박과 같은 곳에서 나왔다는 점과 밝다는 뜻에서 성<姓>을 박<朴>이라 하였고 아울러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에서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세워져 있는 비석는 조선 순조<純祖> 2년(1802)에 세운 것으로 박혁거세왕을 기리기 위해 그 내력을 새긴 유허비<遺墟碑>이다.

 

 

 

포석정은 신라왕실에서 경주 서쪽 이궁원(離宮苑)에서 열리는 연회를 위해 만든 것으로 시냇물을 끌어들여 포어(鮑魚) 모양을 따라 만든 수구(水溝)에 흐르게 하고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시며 즐겼다고 한다.이와같이 한낮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즐기던곳으로 알거나,또한 이곳은 927년 경애왕이 왕비·궁녀·신하들과 놀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아 죽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신궁과 포석사는 어떤 곳이었을까?

 

포석정이 아니라 사당 사자를 써서 포석사 또는 줄여서 포사라 하고 있다. 포석사에서는 길례를 행하였다고 한다. 문노와 윤궁이 결혼을 할 때 진평대왕과 세종이 친히 포석사에 갔던 적이 있다. 만호 태후는 친히 신궁에 가서 만룡의 공주례를 행하고, 포(석)사에 나아가 길례를 행하였다. 또 춘추와 문희도 포(석)사에서 길례를 하여 결혼을 알렸었다. 그러니까 신라의 지배 세력들은 포석사에서 길례를 행했던 것이다.

그러면 포석사는 길례를 행하는 장소로만 쓰였을까? 무엇인가 또 다른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포석사에는 문노의 화상이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문노는 삼한을 통합한 후 사기의 종주로 받들어진 인물이었다. 그의 화상이 포석사에 모셔진 까닭은, 포석가사 나라의 안녕을 비는 행사가 치러지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경애왕은 927년 11월, 이웃한 고울부(영천)지역에 견훤이 쳐들어온 상왕에서 포석사에 가서 연오를 한 것은, 말 그대로 잔치를 베풀어 놀았던 것이 아니라, 위급한 상황에서 나라를 지켜 달라고 빌기 위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에는 일찍부터 시조묘가 세워졌다. <삼국사기>네는 남해왕 3년(6)에 시조묘를 세웠다고 나온다. 과연 기원후 6년에 시조묘를 세웠을지 단정하기 어려우나, 혁거세가 죽은 후인 신라 초기에 신라 건국 세력을 모신 사당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크다. 당시 시조묘는 경주의 남산 서북록에 세워?으리라 생각된다. 혁거세가 사로 6촌에 나타난 장소가 현재 나정으로 알려지고 있고, 그의 무덤이 오릉에 있는 것으로 전해 오고 있다. 이는 혁거세 세력이 자리잡았던 곳이 남산 서복록이었음을 의미한다. 아마도 시조묘 또한 혁거세 세력이 정착하엿던 나정이나 금성 지역에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포석사는 시조묘와 어떤 관련이 있는 장소였으리라 짐작된다.

1999년 4~5월 국립 문화재 연구소에서는 포석정 동남쪽 70M지점 일대에 대한 발굴을 하였고, 그 과정에 포석이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 몇 점과 지와무지를 확인했다. 이는 포석정이 단순히 유상곡주를 하는 놀이터가 아니라 포석사와 같은 사당이었을은 뜻한다. 포석사는 일정한 규모의 건물로 이루어진 사당이었음을 뜻한다. 포석사는 일정한 규모의 건물로 이우러진 사당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 안에 문노를 비롯한 나라의 중요 인물들의 화상이 있었고 길례를 행하거나 제사를 행하는 사당이 마련되어 있었다.



199년 발견된 포석이란 명문이 새겨진 기왓장

 
 
(포석 명문 기와)

 

 

포석정 [鮑石亭]  

 

통일신라 유적 | 브리태니커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경주 남산의 서쪽에 있는 석구(石溝).
 

사적 제1호. 〈삼국유사〉 권2 처용랑망해사조(處容郞望海寺條)에 헌강왕(875~885)이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南山神)이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용가>

東京明期月良, : 동경 밝은 달밤에

 

夜入伊遊行如可. : 밤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入良沙寢矣見昆, : 들어와 내 자리를 보니?

 

脚烏伊四是良羅. : 다리가 넷이로구나?

 

二?隱吾下於叱古, : 아아, 둘은 내 아내것이나

 

二?隱誰支下焉古. : 둘은 누구의 것이가

 

本矣吾下是如馬於隱, : 본디 내 것이다만

 

奪叱良乙何如爲理古. : 빼앗긴 것을 어찌하겠는가

처용가는 신라 헌강왕때 처용이 지은 향가를 발전시킨 노래입니다. 처용이 밤늦도록 놀다 집에오니, 전염병을 퍼뜨리는 역신이 부인과 함께 누워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처용은 화를 내거나 달아나지 않고 마당에서 춤을 추며 처용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처용가의 배경설화
 
제49대 헌강대왕 대에 서울로부터 바다 안쪽(변두리)에 이르기까지 집들이 즐비하고 담이 이어져 있으며, 초가집은 한 채도 없이, 풍악과 노래 소리가 길에 끊이지 않고, 비와 바람이 철마다 순조로웠다.

 

?이때에 대왕이 개운포에 놀러 갔다가 왕이 장차 돌아가려 할 때 낮에 모래톱 가에서 쉬고 있었다.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어둡게 끼어 혼미해서 길을 잃었다. 괴이하게 여겨 좌우의 신하에게 물으니, 일관이 답하였다. “이것은 동해용의 변괴입니다. 좋은 일[勝事]을 행함으로써 그것을 해결해야 합니다.”??이에 유사에게 명해 용을 위해 근처에다 절을 짓게 했다. 명령을 내리니,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사라졌는데, 이로 인해 「개운포」라 이름 했다.

 

동해용은 기뻐하여 곧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임금의 수레 앞에 나타나 왕의 덕을 찬미하고 춤을 바치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 한 아들은 수레를 따라 서울로 들어가 왕정을 보좌하니, 처용이라 불렀다. 왕이 미녀를 그의 아내로 삼게 해 주어 그의 마음을 잡아두고자 했으며, 또한 급간 직을 하사했다.

 

그 아내는 매우 아름다웠는데, 역신이 흠모하여 사람으로 변하고는 밤에 그 집에 들어가 몰래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처용이 밖으로부터 집에 도착해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곧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가사 생략…?이때에 귀신이 모습을 드러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제가 공의 부인을 흠모하여 지금 범했습니다. (그런데도) 공이 노여움을 보이지 않으시니 감동하고 찬미합니다. 맹세컨대 지금 이후로 공의 형용을 그린 것을 보면 그 문에는 들어오지 않겠습니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은 문에다 처용의 모습을 그려 붙여서 벽사(?邪)진경(進慶)하였다. 왕은 이 이윽고 돌아와 영취산 동쪽 기슭 좋은 곳을 점쳐 절을 세우고 ‘망해사’라 하고, 또한 ‘신방사’라 부르니 곧 용을 위해 세운 것이다.

 

포석정 [鮑石亭]의 메세지

 

헌강왕대에 신라 하대사회의 위기의식을 나타낸 기록이 보이고 있다. 879년에 왕이 나라 동쪽의 주군(州郡)을 순행하였을 때 어디서 온지를 모르는 네 사람이 어가를 따르며 춤을 추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산과 바다의 정령(精靈)이라 하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도 실려 있다. 헌강왕이 포석정(鮑石亭)에 갔을 때 남산신(南山神)이 나타나서 춤을 추니,헌강왕이 남산신(南山神)이 춤추는 모습을 보고 춤을추었고,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 御舞祥審〉(혹은 御舞山神)이라 한다.)

 

우리가 포석정[鮑石亭]이라 알고있는 것은,용(龍)을 형상화한것으로, 용왕(龍王) 또는 수신(水神)에게,국가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포석사(鮑石祠) 사당의 상징물이었던 것이며, 물에서 깨달으라는 선지식인에 이정표 인것입니다.

 

 

첨성대

 

 

어학사전

첨성대 [瞻星臺]

신라 때, 천문을 관측하던 대

첨성대(瞻星臺)는 경주시 반월성 동북쪽에 위치한 신라 중기의 석조 건축물로, 선덕여왕대에 세워진, 현존하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로 알려져 있다. [1]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었다.<==우리는 이렇게 알고 있다.

 

선덕여왕 말기(645~647)설: 선덕여왕이 첨성대를 건립한 이유는 "첨성대를 통해 제석신이 이 땅에 강림하여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기를 고대"했기 때문에 혹은 선덕여왕이 죽은 후에 "도리천으로 환생하기 위한 통로"로 세웠을 것이라고 했다.첨성대는 현실세계와 천상세계를 연결하는 상징적인 "우주 우물"이다.

 

첨성대(瞻星臺)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태어난 나정(蘿井)우물을 지상에 올려 우물을 상징하는 것으로,포석정에서 의식을 행했던것으로 보아서,이곳에서도 어떤 의식을 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그리고 선지식인이 물에서 깨달으라고 메세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현 황룡사지는 용궁지 입니다.

우편번호 | 2006-09-24 11:30 |출처: 황룡사지

 

제목 : 용궁지를 황룡사지로 잘못 발굴조사됨.

제보자 ; 청청 고운맘 스님(61세. 대한불교조계종 종로3가 대각사 전 총무)


언론에 보도자료를 밝히히게된 동기 : 1989년 3월부터 용궁지를 황룡사지로 잘못 발굴조사되엇다고 문화재관리국과 KBS. MBC. 한겨래신문. 불교신문. 민주일보. 경주신문 등등 각언론과 학계를 통하여 이를 알려왔으나 10년이 넘도록 아직것 이를 시정되지않고 근거도없이 왜곡된 억지 논리로 용궁지가 황룡사지로 둔갑하여 민족고대문화역사가 잘못 교육되고 대중들로하여금 인식이 계속되는것이 안타까워 다시 문화재청장님과 각 언론에 이를 밝히오니 보도참고자료를 자세히 검토하시어 이를 여론화하여 민족고대문화역사가 바로 잡혀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만에하나 이와같음이 참고되어 문헌에의한 월성 동쪽에 위치한 황룡사지가 발굴조사된다면 민족고대문화역사는 세계속에 기리 빛을 발하는 위대한 문화민족의 후손이 될것이 확실 합니다.

황룡사 밭이랑에 뭍혔다는 황룡사 대종만 ?게된다면 세계가 놀라는 민족고대문화유산이 빛을 발휘하게된다고 확신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현 황룡사지가 용궁이라는것이 역사적으로 고증 입증이 될시는 신라 천년의 서라벌 궁궐의 웅장함은 세계속에 가장 으뜸가는 내불당을 겸한 궁궐문화역사가 될것입니다.

언론인 형제 여러분!

하시는 엄무가 아무리 바쁘시드래도 잠시 시간을 내어서 경주 옛 서라벌 용궁지에 가셔서 자세히 취재하고 세밀히 분석하여 현 황룡사지는 문헌에의한 용궁지라는 사실을 반듯히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용궁지를 황룡사지로 잘못발굴조사여 황룡사지로 단정을 내린 결과 옛 서라벌 문화유산은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삼국통일의 정신적 중심 사찰 고대민족문화유산인 황룡사지와 사천왕사지를 철길과 자동차 대로길이 다니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월성 동쪽 황룡사지 유물은 관계당국의 무관심속에 알게모르게 많은 훼손을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국민 여론화하여 월성 동쪽 옛 황룡사지를 빠른 시일내로 발굴조사를 시작해야 된다고 봅니다.

언론인 형제 여러분!

민족고대문화역사를 위하여 최선을 다 하여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06년 9월 11일

활룡사지제조사운동 대표 청청 고운맘 스님 합장


황룡사지 발굴이 잘못되었음을 고증하는 옛 문헌자료

   

1.문헌에 의한 황룡사지 위치는 월성 동쪽입니다.

현 황룡사지는 월성 북동쪽 분황사지와 겁쳐있습니다.


1) 삼국사기 진흥왕조 : 14년(553) 봄 2월에 왕이 해당 관청을 시켜 월성 동쪽에 새 대궐을 짓게 했는데, 누런 용이 그 터에 나타났다. 왕이 이상히 여겨 대궐을 고쳐 만들고 이름을 황룡사(黃龍寺)라 하였다.

2)삼국사기 진흥왕조 : 35년(574) q2ha 3월에 황룡사의 장륙상(丈六像) 주조가 끝났는데, 구리쇠의 무게가 3만5천7근이요, 도금(鍍金)한 중량이 1만1백98푼 이었다.


3) 삼국유사 가섭불 연좌석(宴坐石)조 : 옥룡집과 자장전 그리고 제가의 전기(傳기)에는 모두 이런 말이 잇다. ‘신라 월성 동족, 용궁 남쪽에는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다. 이곳은 바로 전불(前佛) 대의 절터다. 지금 황룡사 터는 일곱 절중 하나다.

 국사를 살펴보면, 진흥왕 즉위 14년 개국 3년 계유(553) 2월, 월성 동쪽에 신궁을 세웠는데 여기에서 황(黃, 黃)용이 나타났다. 이에 왕은 의아스럽게 여겨 신궁을 고쳐서 황룡사로 삼았다. 했다. 연좌석은 불전 뒷면에 있었다. 전에 한번 본 적이 있는데, 돌의 높이는 5,6척이나 되엇으며 그 둘레는 겨우 세 발밖에 되지 않았는데 우뚝 서 있는 그 위는 편편했다. 진흥왕이 절을 세운 후 두 번이나 화재를 겪었으므로 돌이 갈라진 곳이 있다. 그래서 절의 스님들께서 쇠를 붙여 보호했다.


2. 옛 문헌에 의한 황룡사지 위치는 용궁 남쪽 이었습니다.

분황사와 황룡사지 가운데 있었던 용궁지가 없어지는 용궁지를 황룡사지로 잘못 발굴 조사한 오류를 범하는 현 황룔사지 발굴이 되어 버렸습니다.


1) 삼국유사 가섭불 연좌석(宴坐石)조 : 옥룡집과 자장전 그리고 제가의 전기(傳記)에는 모두 이런 말이 있다. ‘신라 월성 동족, 용궁 남쪽에는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다. 이곳은 바로 전불(前佛) 때의 절터다. 지금 황룡사 터는 일곱 절중 하나다.’

2) 삼국유사 황룡사 장육조 : 신라 제24대 진흥왕 즉위 14년 계유(553) 2월에 용궁 남쪽에 장차 대궐을 지으려 하였는데, 황룡이 나타나므로 고쳐 절을 지었다. 이름을 황룡사라 하고 기축(569)에 이르러 담을 쌓아 17년 만에 완성 하였다.

3) 조선왕조 경주인 정극후(1577-1658) 지음 동경잡기간오 : 불국사기(佛國寺記) 에는 분황사는 용궁(龍宮)의 북족에 잇고 황룡사는 용궁의 남쪽에 있다. 라고 하였는데 신라 사람들이 왕궁을 용궁이라고 한 것은 대개 임금의 얼굴을 용안(龍顔)이라고 한 말을 따라서 그렇게 한 것이다. 지금 분황사는 바로 안압지의 북족에 있으나 황룡사는 지금의 어느 곳에 있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이 동경잡기에는 월성의 동쪽에 있다 라고 하였으니, 대개 알 수 있다. 만약 지금 세속에 전하여지는 옛 황룡사라면 곧 월성의 북쪽이지 동쪽은 아닐 것이다. 지금 왕궁을 모두 용궁이라고 한 것을 보면 혹시 이 궁궐의 속칭이 용궁인 것은 양궁(梁宮) 대궁(大宮)과 같은 유(類)인 지도 모르겠다.


3.현 황룡사지 발굴 조사에서는 연좌석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1) 삼국유사 가섭불 연좌석(宴坐石)조 : 옥룡집과 자장전 그리고 제가의 전기(傳기)에는 모두 이런 말이 잇다. ‘신라 월성 동족, 용궁 남쪽에는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다. 이곳은 바로 전불(前佛) 대의 절터다. 지금 황룡사 터는 일곱 절중 하나다.

 국사를 살펴보면, 진흥왕 즉위 14년 개국 3년 계유(553) 2월, 월성 동쪽에 신궁을 세웠는데 여기에서 황(黃, 黃)용이 나타났다. 이에 왕은 의아스럽게 여겨 신궁을 고쳐서 황룡사로 삼았다. 했다. 연좌석은 불전 뒷면에 있었다. 전에 한번 본 적이 있는데, 돌의 높이는 5,6척이나 되엇으며 그 둘레는 겨우 세 발밖에 되지 않았는데 우뚝 서 있는 그 위는 편편했다. 진흥왕이 절을 세운 후 두 번이나 화재를 겪었으므로 돌이 갈라진 곳이 있다. 그래서 절의 스님들께서 쇠를 붙여 보호했다.


4. 황룡사 금당은 9층 목탑 좌우에 금당이 있었다.

  현 황룡사지는 목탑 후면 금당이다.

1)경주선생문안 동도역제자기 : 현덕 원년 갑인년(서기945) 황룡사의 9층탑과 좌우 금당의 1장 6척의 불상이 천화로 없어졌다. 이 해는 후주의 세종이 즉위한 해이다.


5. 현 황룡사지 발굴 조사에서 황룡사 대종을 ?아내지 못하였다.

1) 동경잡기. 금오승람 : 경덕왕 13년에 종을 부어 만들었는데 길이는 1장 3촌, 두깨는 9촌, 무게는 49만 7천5백81근. 속전에 지금 황룡사 밭이랑 사이에 뭍었다고  한다.


6. 현 황룡사지 목탑지는 높이 80m의 9층 목탑지를 세울 수 있는 면적이 되지 못한다.

 더 나아가서는 현 황룡사지 금당지와 목탑지 사이 거리는 25m 밖에 되지를 않는다. 금당지 정 남향 앞에 무리하게 80m 높이의 목탑을 세울 리가 없다.


7. 옛 황룡사지 목탑은 8각 9층 목탑 고구려식 목탑이었다.

1)경주선생문안 동도역제자기 : 현덕 원년 갑인년(서기945) 황룡사의 9층탑과 좌우 금당의 1장 6척의 불상이 천화로 없어졌다. 이 해는 후주의 세종이 즉위한 해이다.


8. 옛 황룡사지 9층 목탑지 심초구 사리는 탑이 불탄 후 그 열에 의하여 진신사리 4과외는 모두가 모래알처럼 부서져서 돌함 밖으로 나와 있었다.

사리가 모래알 처럼 부서질 정도의 높은 열이었다면 사리를 보안한 청동사리함 또한 강한 불의 열에 녹아흘러 내려 사리함의 본 모습을 유지할 수 없었다고 봅니다.

1) 삼국유사 전후소장사리조 : 또 속설에 이르기를, ‘황룡사 탑이 불타던 날 돌솥 동쪽면에 커다란 얼룩이 생겼는데 이것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때가 바로 요(遼)의 응력 3년 계축(936년)이요, 본조 광종 5(4)년 으로 탑이 세 번째로 불타던 때였다. 조계의 무의자(無衣子) 가 시를 남겨 말하기를, 듣것대 황룡사 탑이 불타던 날, 번져서 탄 한쪽에도 틈이없는네.‘ 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원 갑자(1264년) 이래로 원나라 사신과 본국 황화(皇華) 들이 다투어 와서 이 돌함에 절햇으며,사바의 운수(雲水) 들도 몰려들어 참례했으며, 혹 돌함을 들어보기도 하고 그렇지않기도 했다. 진신의 사리 네 알 외에 변신(變身) 사리가 모래알처럼 부서져서 돌함 밖으로 나와 있었다. 여기서는 이상한 향기가 강하게 풍기어 여러 날 동안 없어지지 않는 일이 가끔 있었으니, 이것은 말세에 있는 한 지방의 기이한 일이었다.

황룡사 9층목탑 찰주본기가 새겨진 사리함은 9층 목탑이 벼락으로 1차 첫 번재 훼손 될을시 보수 증축하는 과정에서 이를 거내어 현 황룡사지 용궁 내불당 목탑지에 모셔둔것이 확실 합니다.


9.현 황룡사지 발굴조사에서는 작은 석탑 쪼각 한점도 발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에 기록된 자료에 의하면 황룡사 9층 목탑 안에는 작은 석탑 99기가 있었다고 하였으나 현 황룡사지 발굴조사에서는 작은 석탑 쪼각 한점도 발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10. 현 황룡사지 발굴 목탑지 중심부에는 철기둥을 세웠던  밭침대 유구가 없습니다.

1) 삼국유사 황룡사 9층탑조 : 찰주기엔 이렇게 적혔다. ‘철반(鐵般) 이상의 높이가 42척, 철반 이하는 1백 83척이다.


11. 황룡사 남쪽에는 미탄사지가 있었습니다.

1) 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왕조 : 최치원이 바로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의 황룡사 남쪽 미탄사의 남쪽 미탄사의 남쪽에 옛 집터가 있는데 여기가 최후(崔侯:치원)의 옛집이 분명하다.(현 경주국립박물관 과 박물관 앞 주차장 남쪽 일대 주변 논.밭이다.)


이상의 옛 문헌에 의한 고증으로 현재 발굴 조사된 현 황룡사지는 문헌에 기록된 용궁지 신라 궁궐에 속한 유지 이며. 목탑지와 후면 금당지는 용궁 내불당지 임이 확실 합니다.

문헌에 의한 황룡사지는 월성 동쪽에 위치한 9황동 마을 일대가 분명 합니다.

이곳 지역 일대에 아직도 남아있는 주춧돌 및 많은 건축 유지가 잘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문화재관리청과 황룡사지 발굴 관계자 모두가 발굴전에 황룡사지에 대한 문헌 검토를 철저히 하였다고 발굴 보고서에서 밝히고 있으나, 황룡사지제조사운동 대표 청청 고운맘 스님 본인이 확인한 결과 발구 조사전 가장 기초적인 상식인 방향 실측조사 한번 없이 무작적 거창한 용궁지 유구에 현옥되어 착시현상에 도취되어 옛 황룡사지가 아닌 용궁지를 황룡사지로 잘못 발굴 조사하게 된것이 확실 합니다.

발굴보고서 참고자료에는 동도역세제자기. 동경잡기. 금오승람 문헌에 기록된 9층 목탑 좌우 금당과 황룡사 대종이 황룡사 밭 이랑에 뭍혀있다는 기록이  빠져 있습니다.

발굴조사전 황룡사에 관한 문헌자료 수집 확인 검토에 소흘한것이 확실 합니다.

이 렇게 모든 면에서 잘못 발굴조사를 하다보니 이에 잘못 착각하여 국립박물관. 경주박물관 부여박물관. 독립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는 황룡사지 모형도 또한 잘못 조작되어 옛 황룡사지 모양도 인것처럼 많은 관람객을 현옥시키며, 외곡 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즉5시 철수 시켜야 되며, 하루 빨리 문헌에 의한 월성 동쪽 옛 황룡사지 지표조사를 실시해야 된다고 봅니다.

2006년 9월 14일

황룡사지제조사운동본부 대표 청청 고운맘 스님 합장

 

[스크랩] 문무왕과 만파식적 설화

 

문무왕

문무왕(文武王, 626~ 681)은 신라 제30대 왕.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의 누이 문명왕후의 맏아들로서 휘는 법민(法敏)이다.

아버지 김춘추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 파진찬과 병부령직을 겸임, 곧 태자로 봉해졌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아버지를 도와 국사의 중대한 책무를 다하였다. 무열왕 7(660) 당 연합군이 백제를 칠 때, 김유신과 함께 5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어 무열왕 8(661) 부왕이 승하하자 곧 왕위에 올랐으며 즉위 당시의 나이는 36세였다.

 

대왕암의 전설

68171일에 56세로 서거하였다. 유조에 따라 시신은 화장하였고, 경주 감은사 동쪽 바다 대왕암 위에 장사하였다. [삼국유사]왕이 유언하신 말씀에 따라 동해 가운데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다.”라는 말이 나오지만, 이것이 화장을 하여 동해에 뿌렸다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전설에는 자신의 사후 동해바다에 화장하여 뿌리면 자신이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고 유언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 근처에 감은사를 세워 법당아래 동해를 향한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만파식적

신라 제31대 신문대왕의 이름은 정명이고 성은 김씨. 681년에 즉위했다.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동해안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었는데, 다음해 작은 산 하나가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오고 있다는 전갈이 있었다. 점을 친 일관은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이 왕에게 성을 지키는 보배를 주려는 것이니 해변에 가서 받으라고 했다. 왕이 기뻐하며 이견대(利見臺)에서 바다에 떠 있는 산을 바라보다가 사람을 보내 살펴보니, 산의 모양이 거북의 머리와 같은데 그 위에 대나무 한 줄기가 있어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되었다.

 

다음날 대나무가 하나가 되자 7일 동안이나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왕이 그 산에 들어갔더니, 용이 검은 옥대(玉帶)를 가져와 바쳤다. 왕이 산과 대나무가 갈라지기도 하고 합해지기도 하는 이유를 물었다.

 

용은 그것이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상서로운 징조라고 하며 대나무가 합해졌을 때 베어다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평화로울 것이라고 했다. 왕이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베어가지고 나오자 산과 용이 갑자기 사라졌다. 왕이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사에 두었는데, 이것을 불면 적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비가 올 때는 개이며, 바람과 물결도 잠잠해졌다. 그래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하고 국보로 삼았는데, 효소왕 때 기이한 일이 일어나자 만만파파식적이라고 했다.

 

이 설화는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게 되는 신비체험을 기록한 것이다. 만파식적은 환웅의 천부인(天符印),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 이성계의 금척(金尺) 등과 같은 성격의 신성징표이다.

신문왕은 정치적 힘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 왕권의 정통성과 신성성을 확립하고 지배계층의 동질성을 재확인해야 했다.

따라서 삼국통일의 업적을 이룩한 아버지 문무왕과 김유신을 등장시켜 왕권을 강화시킬 수 있는 신물(神物)설화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설화는 〈삼국유사〉의 만파식적조, 백률사조(栢栗寺條), 원성대왕조(元聖大王條)에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신증동국여지승람〉·〈동사강목〉 등에도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가져온 곳 : 
카페 >박선영의 문화유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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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선영| 원글보기

우리나라 특히 신라(新羅)의 수도 경주는 물에 관련된 신화나 전설,야화가 많은데,선지식인이 물에서 깨달으라는 메세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라(新羅)는 용궁(龍宮)과 용왕(龍王)으로  "물의나라"  인것입니다.

 

불상은 타임 캡슐이었다!

 

 

 

석굴암 불상입니다.

 

석굴암 불상의 모습을 보고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부처가 악마를 항복시키는 인상, 왼손은 펴서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무릎에 올려놓고 오른손은 펴서 땅을 가리키는 모습이다. 라고 우리는 이해하고 있읍니다.

 

사람들은 불상(佛像)앞에서 복(福)을 빌고,절하고,염불하고,목탁을 두들기고,기도하고, 참선을 하는등 여러가지 의식을 행하고 하나, 이 사람은 불상을 보면 왜 이런 모습일까?

 

불상 이마에는 왜 보석 같은게 박혀있을까?

오른손은 검지를 왜 아래로 향하고 있을까?

불상은 왜 연꽃위에 앉아 있는 모습일까?

 

불상(佛像)은 선지식인(善知識人)이 우리에게 메세지를 주고 있는 타임캡슐이었던 것입니다.

 

오른손 검지를 아래로 향하고 있는 것은 부처가 앉아 있는 연꽃을 가리키는 것이며, 연꽃이란 물에서 수생하는 식물로서, 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부처는, 우리에게 물을 깔고 앉으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이마에 빛나는 보석은 그렇게 실행하면 깨달음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우리에게 메세지를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계사에 있는 불상입니다.

 

불상은 우리에게 메세지를 주고있는 타임캡슐인 것입니다.

 

이사람이 보는 불상에 대하여 말씀 드립니다.

 

연꽃이란 물에서 수생하는 식물로서, 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부처는, 우리에게 물을 깔고 앉으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오른손 손가락 세개를 펼쳐 보인것은,삼십년에 세월을 실행하라는 것이고,이마에 빛나는 보석은 그렇게 실행하면 깨달음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우리에게 메세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사람의 몸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설명하시면서 맹귀우목 (盲龜遇木)이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눈먼 거북이가 백 년을 물 속에서 살다가 숨 한번 쉬기 위해 물 위로 떠오르는 순간 나무토막 하나를 만나는 것처럼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몸은 이렇게 어렵게 받아(人身難得) 태어난 소중한 것입니다.

 

 

 

 

요한 2,23-3,21

예수께서는 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머무르시는 동안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 그것은 사람들을 너무나 잘 아실뿐만 아니라 누구에 대해서도 사람의 말은 들어 보실 필요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마음 속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이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밤에 예수를 찾아 와서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니고데모는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 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새로 나야 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자 니고데모는 다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모르느냐?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우리의 눈으로 본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 너희는 내가 이 세상 일을 말 하는데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하늘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을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 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 간 일이 없다.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그를 믿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벌써 죄인으로 판결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과연 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누구나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 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지팡이는 불의(不義)를 치고 앞길을 인도하며 강한 의지하는 뜻의 표징물(表徵物)로서, 장차 오실 메시아를 상징하였던 것이다(본장 제2절 Ⅱ. 2. ㄴ). 따라서 야곱이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짚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으로 들어갔다는 것은(창세기 32장 10절), 장차 타락인간이 메시아를 받들어 불의를 치고 또 그의 인도를 받으며 그를 의지함으로써, 죄악세계(罪惡世界)를 넘어 창조이상세계(創造理想世界)로 들어간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예수님도 자신을 표징하는 철장(鐵杖)을 가지고, 이 고해(苦海)의 세계를 건너 하나님의 창조이상세계에로 전 인류를 인도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것이다(요한계시록 12장 5절, 요한계시록 2장 27절).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약4:6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마15:28에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하셨습니다.

 

요일4:7-8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요한 2,23-3,21

 

사람은 태어나 누구나 생노병사 그물에서 벗어날수 없고,생노병사 그물에서 벗어 나려면, 젊을때부터 건강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 것이며,20세이상 나이 들어가면 건강에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하여 여기저기 아픈곳이 나타나게 됩니다. 세수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앉아만 계십시요.(좌욕)~~물에 앉는것을 실행하시면, 인체에 쌓인 노폐물 제거는 물론 혈액순환에 도움을 주며, 당신의 건강을 지킬수 있읍니다.하루에 오전, 오후 30분이상 실행하며, 매일 습관을 들이 는 것이 중요합니다.(오래 앉아 있을수록 좋으며, 1분1초라도 더 물에 앉으면 자신에게 좋은 것이나, 힘이들때는 쉬어가면서 하세요)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수 있는 방법)

 

묵묵히 실행하다 보면 모든것을 알수 있게 됩니다.

 

 

,노력과 극복없이 기쁨은 얻을수 없습니다. 

 

e-mail: mbbbk@daum.net
홈피: http://hompy.sayclub.com/mbb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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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물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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