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후기, 문인과 학자도 많았지만, 나라의 운세가 기울면서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탐관오리들은 날뛰어, 어떻게 해야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까 고민하는 선비들도 많았지만, 방법을 못 찾아 암담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겸하여 극심해진 세도정치는 해가 갈수록 발호하여, 안동김씨, 풍양조씨, 여흥민씨의 위세가 등등하여 일반 서민들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던 때여서 탁월한 인재(人才)라도 등용되어 획기적인 국가개혁으로 변화라도 추구해야 했는데, 천하의 경세가(輕世家) 다산 정약용이 귀양지에서 풀려서 돌아왔건만, 사감(私感)에 흔들리던 고관대작의 방해로 등용될 길까지 막히자, 나라에는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뜻있는 선비나 문인들은 서울에서 가깝지 않은 다산이 살던 마재 마을을 찾아다니며 도(道)를 구하려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정조대왕의 외동 사위이던 홍현주(洪顯周:1793〜1865)나 당대의 시인 동번(東樊) 이만용(李晚用:1792〜1863) 같은 분들이 그들이었습니다. 70이 넘은 신선 모습의 다산을 자주 찾아뵈오며 시를 짓고 마재 일대의 아름다운 풍광을 구경하면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1836년 음력 2월22일(양력·4월7일), 75세의 다산은 끝내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만정다산선생(挽丁茶山先生)」
남녘 땅끝 귀양살이 20년 세월 卄載南荒泣玦餘 떠날 때 검은 귀밑머리 올 때는 백발이라 去時靑鬢白紛如 참으로 천명(天命)을 알아 궁해도 학문만 좋아해 窮猶好學眞知命 옛날 학자들 못 이룬 학문 책으로 다 엮었네 撰盡先儒未了書
『동번집(東樊集)』「애도다산선생」 아버지처럼 노스승처럼 자주 찾아뵙던 다산선생이 서거하자 동번 이만용은 시재(詩才)를 한껏 발휘하여 다산의 서거를 슬퍼하는 만시(輓詩) 12수를 지었습니다. 첫 수부터 마지막 열두 수까지 다산의 일생을 서술했는데, 다섯 번째 시에서는 바로 다산의 학문을 이야기 했습니다. 마흔 살 한창의 장년에 귀양살이를 떠났지만, 18년의 세월이 흐른 57세의 중늙은이로 귀향한 다산, 백발이 성성한 신세였습니다. 그렇게 간절한 애국심이 있었건만, 모든 것을 접고 오로지 학문에만 생을 바쳤던 다산, 그래서 시인은 ‘진지명’(眞知命) 즉 정말로 옳게 천명을 알았기에, 어떤 원망이나 불평도 모두 이기고, 학문 연구에만 심신을 바쳐, 옛날의 큰 학자, 어느 누구도 이룩하지 못했던 학문의 대업(大業)을 이룩했노라고 찬양하였습니다. 공자(孔子)는 일찍이 ‘궁사남’(窮斯濫)이라고 말하여, 사람이 궁하게 되면 분수를 잃고 엉뚱한 짓을 하여,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에서 벗어나 버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산은 아무리 궁한 처지에서도 본분을 잃거나 벗어나지 않고, 해야 할 학문 연구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다산 생시에 함께 어울렸던 사람으로 다산의 죽음에 애도의 만시를 지었던 사람이 없었는데, 이만용의 만시 12수는 그래서 더욱 귀중합니다. 38세에 벼슬이 끝났던 점으로 보면, 귀양이 풀릴 때 까지는 20년이었으니, 20년 귀양살이가 그래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도 아무리 궁하더라도 본분에서 벗어나지 말고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합시다. 박석무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