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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늘에서 보면 [김태희]

문근영 2013. 4. 6. 09:19
제 263 호
하늘에서 보면

 

 

김 태 희 (다산연구소 연구위원)

  실학자 성호 이익이 세상을 뜬 지 250년이 되었다. 이익을 비롯한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화이론 극복의 논리는 지금도 음미할 만하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보편적 세계문화에 적극적이면서도 고유성과 주체성을 견지해왔다. 그런데 조선 중기, 중국이 명에서 청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항복의 치욕을 겪었다. 이때 현실 인식을 어렵게 한 논리가 중화와 오랑캐로 나누는 화이론(華夷論)이었다. 북방 오랑캐가 중원을 차지하는 현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존재하지도 않은 명에 대한 의리를 주장하고, 청에 대한 문화우월감과 적개심을 고취하면서, 엄연한 현실을 외면하고 스스로를 가두었다.

중화와 오랑캐가 한가지다

  화이론의 극복의 논리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의해서 나타났다. 우선 이익은 화이의 문화적 우열을 인정하지 않았다. 안정복에게 답한 글에서, “중화(中華)를 귀하게 여기고 이적(夷狄)을 천하게 여기는 것을 옳지 않다”면서, 금(金)이나 원(元)의 문화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런 이익의 세계관은 국제관계에 대한 그의 현실적 접근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천문지리에 대한 지식에서 기인한 측면도 있다.

  실학자들의 관점의 근저에는 지구가 둥글다는 인식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이 생각했던 것과 같이 땅이 네모지고 평평하다면 중심과 주변이 있게 된다. 그러나 땅이 둥글다면 지표면에서 중심-주변 개념은 있을 수 없게 된다. 지구설(地球說)은 화이론의 근간인 중국 중심적 천하관을 무너뜨릴 수 있는 계기를 던져주는 인식이었다.

  이익은 ‘화이지변(華夷之辨)’ 등의 글에서 화이의 분별과 배제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계산과 대책을 강조했다. “명(明)이 원(元)을 몰아낸 뒤부터 화ㆍ이(華夷)의 분별이 더욱 엄중해지면서 강약의 형세 따위는 계산에 넣지 않는다. 조정의 계책은 안으로 내실을 꾀할 생각은 하지 않고 밖으로 외적을 물리치는 데만 급급하며, 무인[武弁]의 대우는 극히 천하게 하면서 장차 변고가 나서야 수용하려고 드니, 그 잘못됨이 이와 같다.”

  홍대용은 <의산문답(毉山問答)>에서 실옹(實翁)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입장에서 만물을 보면 사람이 귀하고 만물이 천하지만, 만물의 입장에서 사람을 보면 만물이 귀하고 사람이 천할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서 보면 사람이나 만물이나 다 균등한 것이다.”

  홍대용은 세계에 대한 객관적 관점인 이천시물설(以天視物說)에 입각하여 각 개체를 상대화하고 평등한 주체의식이 가능하게 했다. 그리하여 화(華)와 이(夷)를 상대화하여 화(華)와 이(夷)가 같다는 ‘화이일야론(華夷一也論)’을 주장했다.

  “문을 거듭 만들고 해자를 깊이 파서 강토를 조심하여 지키는 것은 다 같은 국가요, 주나라의 습속이건 오랑캐의 습속이건 다 같은 자기네 습속인 것이다. 하늘에서 본다면 어찌 안과 밖의 구별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각각 제 나라 사람을 친하고 제 임금을 높이며 제 나라를 지키고 제 풍속을 편하게 여기는 것은 중화와 오랑캐가 한가지다.”

다양한 문화 주체가 평화롭게 공존하기를

  자연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전통적인 화이론을 부정하는 논리는 정약용에게서도 나타났다. 청에 사신으로 가는 친구 한치응에게 쓴 편지에서 “이른바 ‘중국’이란 것이 ‘중앙[中]’이 되는 까닭을 나는 모르겠다”며 문제를 제기한 후, 서있는 곳에 따라 내가 선 곳이 바로 중앙이라고 말하고 있다. 중(中)의 개념을 서있는 위치에 따라 상대화시켜버림으로써 지리적 위치에 입각한 화이관을 부정하고 있다. 이어서 중국을 정치와 학문의 문화적 개념으로 정의하면서, 문화적 개념의 중국에 관한 한, 우리나라도 이미 획득했다고 말하고 있다.

  ‘척발위론(拓跋魏論)’에서는, 종족과 지역에 따른 화이의 구분을 부정하고 있다. “성인(聖人)의 법은, 중국(中國)이라도 오랑캐와 같은 행동을 하면 오랑캐로 여기고 오랑캐라도 중국과 같은 행동을 하면 중국으로 여긴다. 중국과 오랑캐의 구분은 도(道)와 정치에 달려 있는 것이지 강역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실학자들이 전통적인 화이구분론을 무너뜨림이 통쾌한데, 여전히 문화적 우열에 따른 구분론을 벗어나지 못한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문화적 우월성을 특정 지역이나 특정 주체(국가나 종족)에 결부시킨 독점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보편적이고 선진적인 문화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문제될 것은 아니다. 문제는 문화 또는 문명의 이름으로 안과 밖을 구분할 때, 안에서는 통제억압의 기제로 발현되고, 밖에서는 침략의 논리로 전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도 특정 문화를 우월하게 보는 화이론적 발상을 볼 수 있다. 이를 벗어나 각 주체를 상대화하고 평등하게 바라볼 때, 다양한 문화 주체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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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태희

· 다산연구소 연구위원(전 기획실장)
· 정치학박사

· 논저 
 <정조의 통합정치에 관한 연구>(2012)
 <다산, 조선의 새 길을 열다>(공저, 2011)
 <왜 광해군은 억울해했을까?>(2011)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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