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기 학자이자 관료였던 김육(金堉, 1580~1658)은 서울 마포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났다. 김육은 김식(金湜)의 후손이었는데, 김식은 중종 때 조광조와 함께 개혁정치를 추진하다 죽어서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일컬어졌다.
김육은 열두 살 때 책을 읽다 이런 구절을 보았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다른 사람을 구제할 수 있다.” 그는 생각했다. ‘맞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안 된다. 다른 사람을 구제하려면, 관직에 있어야 할 수 있다.’ 그는 실질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관직에 나아가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관직을 꿈꿨던 김육, 농사꾼이 되다
김육의 성장기는 순탄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중에 부모를 모두 잃고, 어렵게 지내야 했다. 그런 가운데에도 열심히 공부하여 26세의 좀 늦은 나이로 성균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성균관 시절도 순탄하지 않았다. 김육은 요즘으로 치면 학생데모를 주동한 일로 곤경에 처하게 된다. 오현종사(五賢從祀) 문제로 당시 광해군 정권의 실력자였던 정인홍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때 김육은 성균관재임(成均館齋任), 즉 유생 임원이었다. 대신인 이항복과 이덕형이 광해군을 달래 간신히 엄한 처벌을 면하고 사태가 진정되었다.
이에 34세인 김육은 꿈꾸던 벼슬을 포기하고 시골로 내려갔다. 가평의 잠곡(潛谷) 마을에서 초가삼간을 짓고 살았다.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책을 읽었다. 그는 부지런한 농사꾼이었다. 숯을 구워 서울에 가서 팔았는데, 아침에 동대문을 열면 가장 먼저 들어오는 숯장수가 김육이었다고 한다. 또 이런 얘기도 전한다. 어느 날 김육에게 손님이 찾아왔는데, 농사일로 바쁜 그는 일손을 멈추질 않았다. “농사일이란 게 제때에 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양해를 구했다. 손님은 그가 일하는 곳을 따라다니며 얘기를 나누다 돌아갔다.
김육이 농사꾼으로 생활한 지 10년 무렵, 서울에서 변란이 일어났다. 바로 인조반정이었다. 광해군과 집권세력을 몰아낸 반정세력은 널리 인재를 구했고, 김육은 그제야 벼슬에 나아갔다. 그의 나이 벌써 40대 중반이었다. 늦게 관직에 나간 김육은 점차 능력을 발휘했다.
당시 큰 전쟁을 몇 차례 겪고 나서 나라살림은 형편없었고, 백성들의 삶도 매우 어려웠다. 김육은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한 일로 여기고, 이를 위해 온 힘을 쏟았다. “나라를 위하는 길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조세제도를 바로잡는 것이 매우 긴급한 일이다.”
김육이 주목한 것은 조세제도였다. 특히 공물제도의 폐해였다. 그 고장에서 나지도 않는 물품을 바치라 하니 곡물농사만 하는 농민에게는 큰 고통이었고, 마을 규모와 관계없이 부과하니 불공평했다. 충청도 관찰사가 된 김육은 대동법(大同法) 실시를 주장했다. “지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은 대동법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이미 시행하였으니 충청도에서 무슨 행하기 어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간편하고 공평해 백성도 나라도 이로운 조세개혁
대동법은 광해군 때 이원익이 주장하여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된 공물제도 개혁방안이었다. 물품을 받던 것을 쌀로 거두고, 집안마다 매기던 것을 경작하는 토지마다 매기게 했다. 관에서는 거둔 쌀로 필요한 물품을 구입했다. 공물을 보유 토지에 따라 일정량의 쌀을 내게 하니, 전체 조세제도가 간단해졌다. 물품 조달과정에서의 농간도 사라졌다. 무엇보다 토지를 가진 만큼 쌀을 내기 때문에 부담이 공평해졌다.
그러나 대동법을 둘러싸고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조세부담이 커진 땅부자들이 싫어했다. 반대론을 펴는 관료 가운데는 스스로 이런 부자이거나 이런 부자들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 많았다.
김육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임금과 신하들을 설득했다. 그 결과 대동법은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에서 차례대로 시행될 수 있었다. 그가 죽은 후에는 전국적으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대동법이 시행된 결과 농민들의 부담은 줄어들고 세수는 늘어났다. 또한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은 직접 시장에서 구하게 되니 시장이 발달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보고들은 것이 많았던 김육은 이밖에도 백성의 삶을 안정시킬 수 있는 여러 방책들을 내놓았다. 역법으로 시헌력을 보급할 것, 편리한 수레를 사용할 것, 농사에 수차를 사용할 것, 화폐를 널리 사용할 것 등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하나하나 실현되었다.
김육은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실제적인 일을 많이 한 관료였다. 그의 노력은 이른바 ‘북벌론’이라는 현실성 없는 이념을 내세워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고 내부 단속에만 급급했던 다른 정치적 흐름과 크게 대비되는 것이었다. 현 정부는 출범할 때 경제와 실용을 내세웠지만 곧 무색하게 되었다. 진실로 민생에 의지와 능력을 갖춘 인재를 발탁해 공직에 기용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