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마무리가 진행되고 있는 시점이다. 문 밖을 나서면 저절로 등이 움츠러들게 만드는 추위는 여유 없는 이들에게 마음의 위축감마저 더 얹어준다. 연말이니, 어느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든 간에 정리하고, 평가하고, 성과를 내느라 분주할 것이다. 게다가 올해는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큰 결정을 앞두고, 심사숙고해야하는 의무까지 주어졌다. 국민들, 즉 우리는 참 할 일이 많다.
필자 역시 한 학기의 강의를 마치면서 기말고사도 준비해야 하고, 학생들의 보고서도 꼼꼼하게 읽고 있다. 마치 게임처럼 빠르게 돌아가는 디지털 사회에서는 풋풋한 대학생들과 함께 한시(漢詩)를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행운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다양한 전공을 지향하는 학생들이 모인 교양수업은 그만큼 다양한 시선들이 감지된다. 한시 작가와 작품에 관해 자유로운 형식으로 보고서를 써보라는 거친 제안에도, 이들은 섬세하게 응한다. 시를 고르고, 읽어나가는 느린 동작 속에서 스스로와 소통하나보다. 이에, 60명의 멋진 시평가(詩評家)들이 탄생한다.
젊은이들에게 투영된 시대의 아픔을 읽어야
그런데, 이 친구들의 글을 읽어가면서 마음 한켠이 허하다. 그저 ‘젊음’만으로도 아름답기에 나 자신도 모르게 발랄한 이야기를 기대했었나보다. 예상과는 달랐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의 포부와 현실에서의 괴리’ 혹은, ‘전망이 불투명한 미래’, ‘경쟁의 피로’ 등에 대한 고민을 토로했다. 맹호연(孟浩然)의 과거 낙방, 두보(杜甫)의 시대적 고민과 실의에 자신을 투영한다. 온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비슷한 고민과 박탈감이 존재했다.
돌아보면, 유치원 추첨에서부터 대학 입시까지 끊임없는 경쟁구도에서 자라난 이들이다. 경제적 형편이 좋지 않다는 한 학생은 ‘해야 할 것만’ 있었고 ‘해보고 싶은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대학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청년실업 등의 사회문제가 학문적 기호나 열정을 억누른다. 대찬 모습, 활발함 뒤에 숨겨진 섬약한 상처. 이것은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불합리한 틀에 긁히고 베인 것이 아닐까. 사회로 진출하기 전부터, ‘비정규직’, ‘88만원세대’, ‘보이지 않는 계급’은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마음에 스미는 한파와도 같다. 누가 녹여줄 수 있을까.
성호 이익, 그 ‘공감의 능력’을 배워야 할 때
실학이 시대적 요구와 함께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애정을 기반으로 성립되었다는 것은 성호 이익의 글을 읽을 때 마다 절실히 느껴진다. 하층민, 사회적 약자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그 아픔을 공감하려 했다. 노비제도의 불합리함, 폐지론을 설파한 것은 그 적절한 예라 할 수 있겠다.
“어린아이가 위태로운 때를 당하면, 그의 부모로서는 그를 구하기에 급급하여 어떠한 수단 방법도 가리지 않는다. 아무리 물과 불에 빠지는 위험이 뒤따른다 할지라도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강구할 뿐이요, 반드시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하여, 가만히 앉아 죽는 것을 지켜보지는 않을 것이다…지금 시기가, 백성이 한창 고난에 빠져서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보다 더 위태로운 형편인데,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방법이 없다고 핑계하고 모르는 체하니 어찌 옳겠는가? 그들의 처사는 역시 지엽적인 것만 다루고 있을 뿐이므로 뿌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또한 쇠붙이를 주조하는 일과도 같다. 시원찮은 불꽃으로 겉만 스치니, 그 구리를 어떻게 둥그렇게 또는 편평하게 두드려 만들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이는 큰 불 속에 집어넣어 빨갛게 달구어야만 쇠가 녹아내리게 될 것이다…” 아이를 보살피는 마음으로 백성들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효과적인 공감이 또 어디에 있을까.
성호가 말하는 ‘아이’와 ‘백성’은 마음을 다해 보호해주어야 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을 이끌어 가려면, 우선 이들이 어떠한 고통에 처해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런데 이것은 소위 ‘사람 좋다’, ‘성격 좋다’ 라고 하는 개인적 성정을 말하는 것이 아닐 터이다. 시대가 요구하는 지성인이라면, 리더라면, 이러한 마음을 공적인 결과로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철저하게 그들의 입장이 되어서 아픔을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는 일회성의 이벤트로 채워질 수 없다. 일본의 저명한 학자 요시카와 고지로는 두보가 백성들의 아픔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를 그의 사회적 약자와 불합리한 현실 구석구석을 향한 ‘섬세한 시선처리’라 언급한 바 있다.
중요한 선거가 바짝 다가왔다. 리더가 되겠다는 이들 모두 서민의 마음을 대변해 줄 수 있다고 한다. 성호 이익은 민생의 고충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대저 백성들의 괴로움은, 부유하고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이 깨달을 수 있는 바가 아니다.[夫下民疾苦, 非富貴所覺]”라 했다. 이는 부귀한 이들에 대한 무작정의 비판이 아니다. “백성들과의 거리를 좁혀야만 그들의 아픔을 진정으로 인식하고 느낄 수 있다”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사회적 동량이 될 젊은 사람들의 고민을 이해하고, 소외된 이들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마음과, 냉철한 안목으로 이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공감의 능력’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러한 리더가 우리는 절실히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