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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정은 1784년 문과에 급제하여 1790년 홍문관 부교리가 되었다. 이후에는 병조참판과 황해관찰사를 역임했다. 1791년 초에 정조는 단종의 묘소인 장릉에 배식단이란 제단을 만들고 단종에게 충절을 바쳤던 268명을 한꺼번에 제사지냈다. 한식날이 되자 정조는 부교리 박기정을 대축(大祝)으로 임명하여 장릉과 배식단 제사에 참석하게 했다. 사육신의 후손으로는 유일한 참석자였다. 제사를 지내던 날 박기정은 단종과 박팽년이 같은 공간에서 제사를 받는 것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정조는 궁궐로 돌아온 박기정을 만나 배식단에서 제사를 지낼 때의 느낌을 물었다. 이날 정조는 박기정을 영월부사로 임명하면서 단종과 관련된 유적을 정비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영월의 단종 유적은 숙종이 단종과 사육신을 복권시킨 이후 정비되기 시작했다. 숙종은 단종의 묘소에 석물을 추가하여 왕릉으로 단장하고, 사육신과 엄흥도를 모신 사당에 ‘창절사(彰節祠)’란 현판을 내렸다. 엄흥도는 영월의 호장으로 단종이 사망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한 사람이었다. 영조는 숙종을 계승하여 장릉에 비석을 세우고 창절사 건물을 수리하며, 민충사와 청령포를 정비했다. 민충사는 단종이 사망할 때 그 시녀와 시종들이 떨어져 죽은 자리에 세운 사당이다. 영조는 이 건물을 중수하게 하고 ‘민충사(愍忠祠)’란 현판을 하사했다. 영조는 영월에 도착한 단종이 처음에 머물렀던 청령포에 이를 알리는 비석을 세우게 했다. 이곳은 깎아지른 산봉우리와 물이 둘러싸고 있어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청령포에 홍수가 나면 침몰할 우려가 있어 단종은 거처를 객사로 옮겼다.
군신의 인연…아름답고도 끈질겨
박기정은 영월부사로 부임하면서 유적을 본격적으로 정비했다. 먼저 자규루를 완공했다. 이는 객사 앞에 있던 매죽루란 건물로 단종이 이곳에서 자규(소쩍새)를 노래한 이후 ‘자규루’라 불렸다. 그러나 오래 전 홍수로 건물이 무너져 집터조차 모르다가 민가에 불이 나면서 주춧돌이 드러나 중건한 건물이었다. 다음에는 객사인 관풍헌을 정비했다. 이곳은 단종의 침실이자 사망한 장소이기도 했다. 박기정이 노후한 목재를 교체하고 마당을 고르자, 관풍헌에서 자규루에 이르는 벽돌길이 드러났다. 단종이 매일 걸었던 길이었다. 박기정은 청령포의 집터에 네모난 단을 쌓고 영조가 세운 비각을 중수했으며, 장릉의 우물에는 영천(靈泉)이란 글씨를 새겼다. 이 우물은 평소에는 물이 잘 나오지 않다가 한식 제사 때만 되면 물이 넘쳤기 때문에 ‘신령한 샘’이란 이름을 얻었다. 박기정은 단종 유적을 정비하는 일에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했다.
유적을 정비한 후에는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단종 유적을 채색화로 그린 <자규루도>와 <월중도>가 작성되었고, 단종의 생애와 복권, 단종 유적이 정비되는 과정을 정리한『장릉사보』가 편찬되었다. 박기정은 영월부사로서 유적을 그리는 일을 주관했고,『장릉사보』를 편찬할 때에는 교정자로 참여했다.
박기정의 활동은 증조부인 박경여의 행적을 계승한 것이기도 했다. 박경여는 숙종 대에 장릉이 조성된 후 최초의 장릉참봉이 되었고, 단종과 사육신이 복권된 사실을 정리한『장릉지』를 편찬했다. 단종과 박팽년에서 시작된 군신(君臣)의 인연은 숙종과 박경여를 거쳐 정조와 박기정까지 이어졌다. 아름답고도 끈질긴 인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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