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은 광화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좌측이나 우측에서 들어가야 하는데 지하철 경복궁역에서 내리면 통상 좌측으로 들어간야 한다.
좌측으로 들어가면 국립 중앙박물관이 나오고 그뒤쪽으로도 몇가지 보물이있다.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 (고려 부도) [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
국보 제101호. 높이 610㎝. 원래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법천사지에 있었으나 1912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15년 반환되어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계속된 팔각형 평면에서 벗어나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는 이형부도이다.
기단부와 탑신의 평면은 사각형이며, 기단부는 넓은 지대석 위에 3단의 괴임을 두고 그 위에 상하기단의 면석(面石)과 갑석(甲石)을 올리고
높이와 넓이에 변화를 주어 안정감 있게 탑을 받치고 있다. 지대석의 네 모서리에는 동물발톱 모양이 조각되어 지면에 닿아 있다. 제1괴임의
네 옆면에는 각각 기둥을 7개씩 조각해 8등분하고 그 사이에 꽃무늬가 있는 작은 안상(眼象)을 조각했다. 제2괴임의 옆면에는 장식적인 복판
(伏瓣) 연꽃무늬를 조각했으며, 제3괴임의 옆면에는 2개의 우주(隅柱)와 2개의 탱주(撑柱)를 각 면에 모각하여 3등분하고 그 사이에 각각
장방형의 화문대를 2개씩 조각했다. 그 위에 얹힌 하층기단의 면석에도 각각 우주와 1개의 탱주를 모각하고 그 사이에는 보주·불꽃무늬·구름
무늬를 장식했다. 하층기단의 갑석은 밑면에 낮은 부연(附椽)을 두고 옆면에는 2단의 평행 세로선무늬와 연주무늬[連珠紋]를 장식했으며,
갑석의 윗면에는 복련(伏蓮)을 조각했는데 네 귀퉁이에는 사자상을 안치했던 큰 구멍이 2개씩 뚫려 있다. 상층기단의 면석은 기단부 가운데
가장 높으며 4면에 장방형의 도드라진 틀[額]을 2개씩 조각하고 그 안에 북면에는 산경무늬, 동면에는 운룡무늬, 서면에는 신선무늬, 남면에는
사리함을 공양하는 장면이 각각 조각되어 있다. 상층기단의 갑석은 늘어진 장막과 앙련의 연화대로 장식되어 있다. 그 위에 탑신이 얹혀 있는데
탑신석과 옥개석은 한 돌로 되어 있으며 안상과 연꽃무늬가 조각된 괴임대 위에 놓여 있다. 탑신 4면에는 대나무 줄기 모양의 우주를 모각하고
2면에는 문비를, 2면에는 창을 모각했다. 옥개석은 밑에 휘장이 늘어지고 영락이 달린 네모난 천개형의 옥개인데 낙수면의 네 모서리에 목조건축의
잔재인 우동마루가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상륜부는 보상화형의 상륜받침·앙화·복발·보륜·보개·보주가 층층이 쌓여 완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보개만이 팔각형이다. 이 승탑은 평면이 방형인 점, 규모가 크면서도 각 부의 구성이 다양한 점, 표면이 조각장식으로 가득차 있는 점 등이 특징이다.
특히 장식내용이 매우 다채롭고 외래적 요소를 지닌 문양이 많아 주목되는 특이한 예이다. 현재 법천사지에 남아 있는 이 탑의 탑비(국보 제59호)에
의하면 고려 초기 법상종의 고승인 지광국사 해린(海麟:984~1070)이 입적한 후 15년이 지난 1085년(선종 2)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탑의 건립도 1085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이탑의 이미테이션이 용인의 에버랜드 호암미술관 희원에 자리잡고 있다.






사진에서도 비교가 되지만 1000년의 세월을 지닌 원래의 탑과 10여년이 지난 이미테이션은 확실히 차이가 난다.
탑 옆면에 새겨진 다양한 문양과 조각들이 천년의 세월을 버텨왔다고 누가 믿겠는가?
돌을 저정도 자유자재로 다룰수 있었던 우리 조상님들, 참으로 대단하다.

경복궁의 역사
경복궁은 1392년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이성계에 의해 세워진(만들어진) 첫 궁궐이다.
조선왕조의 법궁(法宮)으로서 개국공신 정도전으로 하여금 <시경(詩經)> 주아편의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 만년에 큰 복(景福)을
누리리라’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궁궐의 이름을 경복(景福)이라 정하게 했다고 한다.
한때, 이방원 (태조의 5번째 아들 - 후에 태종)주도의 왕자의 난으로 조선 2대왕 정종(태조 2째 아들) 등극 및 정종의 개경환도로 잠시 경복궁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으나, 3대 태종의 한양 재환도와 4대 세종의 즉위를 기점으로 법궁으로 써 제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그런데, 3대 임금인 태종의 한양환도 때에 또 다른 궁궐인 창덕궁이 제2의 궁궐로 창건되어 궁궐이 2개로 늘어났으며, 그 후 9대 성종 조에 이르러
창경궁이 중건되니 궁궐의 수가 3개로 늘어나게 된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궁궐의 수가 늘어났으나 그 중에서도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명실상부한
「제1의 궁궐」로 통치자의 권위의 상징이자 국권의 중심부로 역사의 표면에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창덕궁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고, 그 후 창덕궁, 창경궁은 복구되나 경복궁만은 273년간 재건되지
못한 채 빈 터로만 남아있다가 1865년(고종2)에 흥선대원군 주도로 중건에 착수, 1868년(고종5)에 다시 복원됨으로써 왕조의 법궁으로 써 면모를 되찾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비극의 시작을 알리는 1895년 8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왕비살해)이 일어나고 이듬해인 1896년(고종33)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이동, 1897년 경운궁(덕수궁) 에 기거하시니 주인 없는집은 그 의미를 잃듯이 경복궁 역시 빛을 잃게 된다.
그 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궁궐은 크게 훼손되어 고종 중건 당시의 10%정도의 전각만이 남게 되는 비운을 겪으며 공원화 되는 위기를 극복하고 현재
장기복원 계획에 의해 본래 모습을 되찾는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경복궁은 사적117호로 종로구 세종로 1-56 번지에 위치, 규모는 연 면적 약 127,000평 (416,990㎡)에 이르며, 궁궐 내에 근정전, 경회루의 국보와
자경전, 아미산 굴뚝 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광화문은 지금 복원공사중이다.
경복궁의 정문(正門)이자, 국권(國權)이 드나드는 왕권의 상징성을 갖는 문이기도 하다. 창건초기에는 오문(午門) 이라 칭하다가 세종 조에 이르러
동서남북 4방위의 문들이 각각 이름이 붙여져 오문(남문을 뜻함)은 광화문으로 명명되는데 의미는『빛이 나라밖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
(光被四表化及萬方)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역사의 부침 속에서 이 광화문도 수난을 많이 당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경복궁 내 「조선총독부」신축으로 원래의 위치에서 철거당하여 건춘문
(동쪽문) 북쪽으로 이전 되었다가 1968년에 현위치로 자리잡게 되는데 본 위치에서 약15m 가량 뒤로 물러나게 되고 문루(문의 상부)는 6.25동란에
소실되는 아픔도 간직하고 있으며, 3개의 홍예(아치)가 아름다움과 권위를 겸비한 조선궁궐의 정문이다.

흥례문
이 문은 본디 홍례문이라 했는데 고종 중건때 흥례문으로 바뀌었고 궁궐 내로 들어가는 두 번째 문이다.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의 좌우공간은 궁궐을 지키는 군사들을 위한 관청 및 부속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기타 궁궐 내 작은 행사나 큰 행사의
준비가 이루어졌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과거 일제에 의한 조선역사 말살과 왜곡의 희생지는 1차로 이지역에서 단행되어 이곳에 「조선 총독부」
건물이 지어졌다.
그런 연후 궁궐의 중심부를 시야에서 차단하여 역사의 관념을 지워버리려 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오늘날 그 옛 모습으로 근간에 복원되어 중심축을
이루니 궁궐의 본래 모습이 조금씩 되살아 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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