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말씀을 책으로 엮으며
내가 처음 법정 스님을 뵙기 위해 송광사 뒷산 불일암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고요한 한낮, 우거진 나무들 사이를 지나 그곳에 도착하니 스님은 출타 중이고 안 계셨다. 나는 서너 시간을 주인 없는 불일암 뜰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차츰 어떤 평온함 같은 것이 내 안에 찾아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도 없는 빈터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무료한 일이다. 나는 그냥 떠나갈까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무료함 대신 이상하게도 평화로움과 고요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 장소가 가진 어떤 분위기 때문이었다.
사실 어떤 집이나 방은 그 주인의 내면 세계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집과 방은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방식의 삶을 사는가의 적나라한 드러남이다.
잎사귀가 넓은 후박나무, 집 안팎을 둘러봐도 명성에 걸맞지 않는 빈한한 살림살이, 그러나 그곳에 고여 있는 침묵과 그 침묵이 가져다 주던 충만함을 나는 잊지 못한다.
흙벽 앞에 놓인 나무 의자며, 포개진 몇 안 되는 그릇이며, 발등에 올라 앉는 풀여치들이며, 낫과 괭이 같은 것이 단순한 하나의 사물로 내던져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세움 없이도 온전한 어떤 침묵의 얘기를 전하고 있었다. 나는 무의식 중에 그 침묵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이다.
잠시 후 나는 물을 마시기 위해 근처의 옹달샘으로 갔다. 이제 생각하니 그때 나는 마치 어느 비밀의 정원에 들어선 어린아이와 같았던 듯하다. 그런데 샘으로 가서 물을 떠마시려는 순간 나는 수면에 비친 내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게 되었다. 한 순간, 깊은 고요함이 내 안으로 찾아들었다.
아마도 주위가 소란스러웠거나 그 집이 내적인 향기로움을 지니지 못했다면 단순히 물을 떠마시고 끝났을 것이다. 수면은 흐트러지고 내 자신을 들여다볼 기회조차 갖지 못했으리라. 작은 오두막 안팎에 고여서 출렁이는 단순하면서도 명상적인 분위기가 무심결에 나를 내 존재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물건과 장소의 배치가, 돌멩이 하나까지도 절제된 아름다움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그곳에서 홀로 두세 시간 동안 텅 빈 충만감을 누리다가 산을 내려왔다. 스님을 뵙지 못하였으나 나는 이미 그분의 존재를 충분히 느낀 것이다.
훗날 스님을 뵈었을 때 나는 주인 없는 불일암 뜰에서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분위기를 스님에게서 느낄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것은 일종의 안도감이었고, 사람에 대한 희망이 한 순간에 되살아남이었다. 거죽의 얼굴과 속의 얼굴이 같음은 인간의 진정성을 가늠하는 척도이기 때문에 그렇다.
단순하면서도 가난하되, 절제된 아름다움을 지닌 삶, 그것이 내가 스님의 처소에서 받은 첫 느낌이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물건 더미와 장식물을 자랑하는 '풍요로운 감옥'들에 대한 서늘한 깨우침이 아닐 수 없다.
그분은 가난한 삶을 역설한다. 가난한 삶이라니! 모두가 경제 회복과 물질의 풍요를 되찾고자 외치는 이 시대에! 그러나 나는 아무리 해도 그 말씀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소음과 어지러운 말들에 지칠 때면 나는 십 년 전 처음 찾아갔던 그 불일암의 뜰과, 그곳에서 느낀 단순함과 침묵의 풍요가 더없이 그립다. 다시 그곳에 가서 홀로 가만히 있고 싶어진다. 그래서 그 안에서 고구마를 캐듯이 침묵을 캐내고 싶어진다.
여기에 모은 이 글들은 지난 여러 해 동안 스님이 법문하시고 말씀 하신 내용 중에서 가려 뽑은 것이다. 명동 성당 축성 백주년 기념으로 강연하신 것도 있고, '맑고 향기롭게' 회원들과 길상회 모임을 대상으로 법문하신 것도 포함되었다. 가장 최근의 것으로는 도올 서원에서 말씀하신 내용이 여기에 수록되었다. 또한 서너 사람이 모인 사석에서 하신 말씀도 엮은이의 기억을 살려 여기에 실었다.
말씀과 말씀 사이에 하나의 문양을 넣고 한 줄씩 여백을 띄운 것은 그 말씀들 배경에 놓인 침묵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말씀 도중에 하나의 맑은 풍경소리를 듣는 것처럼, 이른 아침의 순수한 새소리를 듣는 것처럼 그 여백이 읽는 이의 마음 속에 자리하기를 바라는 의도에서다. 저 불일의 뜨락에서 내 발등에 올라앉던 풀여치의 감촉, 그 침묵의 느낌을 전하고 싶어서다.
일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녹음되어 있는 내용을 한 자도 빠짐없이 몇몇 사람이 베껴 적고, 구어체와 경어체의 문장을 엮은이가 문어체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단어나 표현법을 문학적으로 바꿔 꾸미지는 않았다. 그 대부분이 스님의 육성 그대로임을 여기에 밝혀둔다.
책의 표지는 판화가 이철수 형이 새로이 글자와 꽃 한 송이를 판화로 새겨 주었다. 그것을 갖고, 스님이 늘 말씀하시는 단순과 간소함의 철학에 따라 책의 장정은 최대한 단순하게 하되 미적인 배치 또한 잊지 않았다.
언제나 변함없이 독자들에게 꾸준히 읽히고 있는 <무소유>와 <서있는 사람들>을 비롯해 스님이 쓰신 여러 권의 수상록들은 자연 속에서의 충만된 삶과 거기서 체험되는 마음의 풍경을 탁월하게 그려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 왔다.
한편으로 여기에 묶은 말씀들은 삶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일과 매순간 자기를 점검하는 구도자적 자세에 그 주제가 집중되고 있다. 또한 어떻게 하면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단순하되 충만된 삶을 살 것인가의 화두가 곳곳에서 우리를 일깨운다.
그렇다. 안으로 충만해지는 일은 밖으로 부자가 되는 일 못지 않게 인생의 중요한 몫임을 우리가 깨닫지 못할 이유가 없다. 때로는 개울에서 흘러내리는 비온 뒤의 힘찬 물줄기처럼, 때로는 대숲에 겸허하게 내리는 싸락눈처럼, 그분의 말씀이 우리를 문득 고요한 깨달음의 자리로 인도한다.
스님의 말씀을 여러 장으로 엮으면서 각 장 서두에 엮은이의 개인적인 소감을 실은 것은 자칫 이 책의 의미와 주제를 흐려놓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다만 내가 그 글들을 쓴 것은, 자주 스님을 뵙는 행복을 누리는 자로서 그 만남을 통해 내 자신이 느끼는 것과 배운 것들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함이다.
여기 내가 받아적은 이 글들 속에 혹시라도 한쪽에 치우치고 부처와 조사들의 가르침에 어긋난 표현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엮은이인 내 자신의 무지의 결과이다. 믿는 것은, 내 부족한 식견에 현혹됨이 없이 스님의 말씀에 담긴 그 고요한 침묵의 세계를 바라볼 줄 아는 독자들의 드높은 혜안이다.
1998년 6월
류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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