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담고 싶은 법정스님의 글

[스크랩] (35 ; 끝) 불교의 평화관

문근영 2012. 7. 2. 07:55

법정스님의 모습

불교의 평화관


1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사실상 전쟁 상태에 놓여 있는 우리 현실을 돌아볼 때에 불안의 그림자는 이 구석 저 구석에 도사리고 있다. 정치를 업으로 삼고 있는 세계의 헤비급 챔피언들이 지구가 좁다는 듯이 사방으로 분주하게 뛰고 내닫는 것도 오로지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안간힘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지구상에서는 단 하루도 싸움이 종식된 날이 없다. 인간은 왜 싸워야 하는가? 싸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도록 돼먹은 존재인가?

인간이 잘 살기 위해 마련한 기술 문명이 사상 유례 없이 달에까지 치솟게 된 오늘날, 인간의 대지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살육의 피비린내가 날로 물씬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 사회 구조는 어딘가 잘못되어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곧잘 다툰다. 뿐만 아니라 전쟁놀이도 겸하고 있다. 장난감 가게에서는 예쁜 인형과 함께 총과 칼도 팔고 있다. 귀여운 고사리 손이 살육하는 연장에 익숙해지도록 성인들이 몸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운동 경기 종목 가운데는 권투와 레슬링이라는 게 있다. 이 두 가지 경기는 그 어떤 경기보다도 관중들을 미치게 하고 환장하게 만든다. 그것이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경기일 경우 링 위에서 치고 받는 선수 뿐 아니라 관중들도 한께 싸우고 있다. "밟아라! 죽여라!" 하는 함성과 함께 때로는 돌멩이가 날고 술병이 던져진다. 이런 걸 가리켜 그래도 친선 경기라고 한다.

인간끼리 마주 붙어 피를 찾으며 치고받는 이런 행위가 경기 종목으로 각광받고 있는 한, 인간 촌락에 싸움이 그칠 날은 멀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바로 이런 경기의 확대판이 아니겠는가?

오늘날의 전쟁은 기계문명의 발달과 함께 그 양상이 점점 처절해지고 있다. 비전투원들까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지 않을 수 없다. 2차 대전이래 부녀자들까지도 대량학살의 제물이 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 아래서 종교인이 과거처럼 부동자세로써 청산 백운이나 보며 초연하려 한다면 그런 종교는 없는 것만도 못할 것이다. 일체 중생이 부딪치고 있는 문제는 곧 종교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평화에 대한 염원과 노력은 오늘의 종교가 문제삼아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2

불타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평화가 무엇인가를 보여 준 그 한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인류 역사에 불멸의 자취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불교가 사회적인 실천 윤리의 바탕을 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비다. 중생을 사랑하여 기쁨을 주는 것을 자慈라 하고, 중생을 가엾이 여겨 괴로움을 없애주는 일을 비悲라 한다. 그러므로 자비는 인간 심성의 승화라 할 수 있다.

초기 불교에서는,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듯 그런 마음가짐으로 모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강조했다.

"어머니가 자기 외아들을 목숨 걸고 지키듯이,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일으켜야 한다."(<숫타니파타>149)

지극한 자비에는 멀고 가까움이나 원수와 동지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만인의 벗, 일체 중생의 동정자. 자비한 마음을 길러 항상 아힘사無傷害를 즐기노라." (<장로게長老偈>648)

"그러므로 적에게도 자비를 베풀어라. 자비로 가득 채우라.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밀린다 왕문경王問經>)

인간 존재에 있어서 기본적인 구조는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있다는 것은 함께 있음을 뜻한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는 없다. 서로서로 의지하여 관계를 이루며 살아간다. 그러기 때문에 저쪽의 불행이 내게 무연하지 않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는 말은 인과 관계의 원리이지만, 그것은 또한 모든 존재의 실상이기도 하다.

초기 교단에서는 국가 권력을 향해 전쟁을 포기하도록 여러 가지로 노력했었다.

"원한은 원한에 의해 해결될 수 없다. 원한을 버림으로써 그것은 풀린다."고 했다.

마가다의 아사세 왕이 이웃 나라 밧지족을 공격하려고 부처님에게 의견을 물었을 때, 부처님은 여러 가지 저쪽 상황을 물은 뒤 무익한 전쟁을 만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란 죽이지 않고 해치지 않으며, 이기지 않고 적에게 이기도록 하지도 않으며, 슬프게 하지 않고 법답게 다스려야 합니다." (<상응부相應部 경전> 제1권)

그리고 불가피한 경우라 할지라도 맞서 싸우기보다는 권지權智로써 화평하라고 했다.

3

얼마 전 조조에 영화 <솔저 블루>를 보고 전쟁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마음에서 싹튼 증오가 불붙기 시작할 때 그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고 만다. 어떠한 전쟁이라 할지라도 본질적인 승리란 있을 수 없다. 모두 패자일 뿐이다. 어리석은 증오심과 부질없는 탐욕에 스스로 타서 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세상의 움직임이란 외형적인 현상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과 관계로 이어지는 연기緣起의 논리를 빌리지 않더라도, 세상의 흐름은 근원적으로 각 개인의 동정과 직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세계 안에 살고 있는 개인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은 곧 그 세계를 형성하게 마련이다.

더구나 영향력을 가진 세계적인 정치가의 동작은 그만큼 큰 반응을 초래한다. 그들이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은 영화 <솔저 블루>를 당사국인 미국에서 만들어 낸 일인만큼이나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노력은 그들의 마음에서부터 탐욕과 분노와 무지를 씻어 버리는 일이다.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함께 살고 있는 이웃에게 자비와 지혜를 베푸는 일이어야 한다.

국제간에 경제적인 균등한 분배 없이는 그 어떠한 평화도 없다. 과거 평화를 깨뜨린 원인들을 상기해볼 때 절대 다수의 뜻에서가 아니라 소수 지배 계층의 행동 양식이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더구나 핵무기가 등장한 현대전의 결과는 어느 쪽에도 승리란 있을 수 없게 됐다. 인간에게 지혜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평화의 적은 어리석고 옹졸해지기 쉬운 인간의 그 마음에 있다. 또한 평화를 이루는 것도 지혜롭고 너그러운 인간의 그 마음에 달린 것이다. 그래서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이기보다는 인간의 심성에서 유출되는 자비의 구현이다.

우리는 물고 뜯고 싸우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서로 의지해 사랑하기 위해 만난 것이다.

1971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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