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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의 자와 압을 정한 이후 영조는 네 가지 글을 지어 고위 관리들에게 내보였다. 관례를 치르는 날 교서를 대신하여 세자에게 훈계하고자 하는 글을 지은 것이다.
첫 번째 글은 ‘넓고 굳세게 뜻을 세우고, 너그러운 마음과 간편한 정책으로 백성을 다스려라. 공정한 마음으로 사물을 똑같이 보며, 어진 이를 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부려라.’는 의미의 16글자(弘毅立志 寬簡御衆 公心一視 任賢使能)였다. 너그러운 마음과 간편한 정책으로 백성을 다스리라는 구절에 ‘윤관’의 뜻이 담겨있었다.
두 번째 글은 자신의 글을 돌에 새겨 인쇄하여 세 부의 책자를 만들라는 지시였다. 영조는 세 부 가운데 하나는 성인식 다음날 세자에게 주고, 다른 하나는 의정부 대신에게 주어 힘쓰게 하며, 나머지 하나는 춘추관에 보내어 보관하라고 명령했다.
세 번째 글은 옛 제왕들의 두터운 사랑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영조는 삼대의 정치나 한 고조, 송 태조의 정치는 모두 너그럽고 두터웠으며, 조선의 국왕들도 정사가 관대하고 백성들을 너그럽게 대했다고 했다. 영조는 후대의 풍속이 법조문을 강하게 적용하여 백성들을 가혹하게 다루지만, 세자는 ‘윤관’의 의미를 잘 생각하여 너그러운 정치를 펴라고 당부했다.
네 번째 글은 ‘달’자에 대한 해설이었다. 영조는 무왕이나 주공이 선대의 뜻과 사업을 잘 계승하여 모든 사람이 인정할 정도의 지극한 효도인 달효(達孝)를 이루었음을 강조하고, 사도세자가 자신의 마음을 본받고 자신의 사업을 계승하여 지극한 효도를 실천하라고 당부했다.
영조가 지시한 내용은 그대로 이뤄졌다. 영조가 친필로 써 준 글은 석판에 새겨져 인쇄되었다. 성인식을 거행한 사도세자가 문안인사를 올리기 위해 방문했고, 영조는 세자에게 훈유가 인쇄된 책자와 훈유함을 내주었다. 글을 잘 읽어보고 그대로 실천하라는 의미였다.
영조가 성인식을 치른 후계자에게 강조한 것은 관용의 정치였다. 영조는 당시 현실이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는 것처럼, 법이 갈수록 가혹하고 까다로워져서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했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윤관’이란 자와 ‘달’이란 압을 정해준 것은 자신의 뜻을 잘 계승하여 관용의 정치를 펼치라는 당부가 담겨있었다.
영조의 친필 훈유를 새긴 석판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석판의 매수는 총 12매이고, 글자가 새겨진 면수는 22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