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비결 중 한 가지는 ‘늦게 입고 늦게 벗어라’이다.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날씨가 좀 춥다고 해서 일찍 속옷을 껴입기 시작하면 한겨울에는 더욱 두껍게 입어야 한다. 추위를 이겨 낼 저항력을 잃는다는 소리다. 그리고 신문방송에서 여기저기 꽃 소식을 전한다고 해서 성급하게 내의를 벗고 가벼운 차림을 했다가는 감기 걸리기 십상이다.
한겨울 얼음골에서 지내다가 따뜻한 봄볕이 그리워 남쪽으로 내려왔다.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매화라도 볼까 해서 길을 떠나왔는데 우수절이 지났는데도 꽃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지난겨울이 너무 추웠기 때문이다.
천지간에 봄은 꽃을 통해 전해지는데 옷깃에 스며드는 바람결이 쌀쌀해서인지 꽃망울들도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예년 같으면 이맘때 강진 다산초당 아랫마을 귤동에는 매화가 피었을 텐데 올해는 아직 꽃을 볼 수 없었다. 백련사의 동백도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영랑 고택의 해묵은 동백나무 가지 끝에 열린 몇 송이 꽃이 이른 봄을 달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어째서 꽃을 찾아 나서는 걸까? 옛 그림에 보면 눈 속에 꽃을 찾아 나귀를 타고 가는 장면들이 눈에 띈다. 곁에는 동자가 깔자리와 다기를 담은 바구니를 들고 뒤를 따른다. 바라보기에도 삶의 향기인 그 운치를 느낄 수 있다.
해마다 이른 봄철이면 뜻을 같이하는 친구와 더불어 갓 피기 시작한 매화나무 아래 자리를 펴고 맑은 찻잔에 매화꽃을 띄워 차를 마시는 일로 그해의 향기로운 봄을 맞이했었다.
그 옛날 매화를 사랑하는 어떤 사람은 꽃철이 되면 이부자리를 가지고 꽃을 찾아가 꽃망울이 잔뜩 부풀어 오를 때부터 마침내 꽃이 만발하고 질 때까지 그 꽃그늘 아래에서 먹고 자며 지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꽃과 함께 눈을 뜨고 꽃과 함께 잠이 들었다. 꽃가지에 달이 떠오르는 밤이면 달이 기울 때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이쯤 되어야 가히 매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처럼 메마르고 삭막한 세태에 이런 옛이야기를 들으면 꽃에 미친 녀석이라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봄을 기다리는 기대감 속에는 이 같은 꽃다운 마음씨도 함께 스며 있을 듯 싶다.
우리 인간의 삶에 살벌하고 비린내 나는 정치와 경제만 있고 ‘꽃에 미친’ 이런 운치가 없다면 인간의 자취가 얼마나 딱딱하고 추하겠는가.
꽃에 미친 이런 사람들 덕에 세상의 종말이 좀 더 늦춰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 점점 사라져가는 거친 세상에서 그래도 철따라 꽃이 피는 그 뜻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만약 우리 곁에 꽃이 없다면 우리 삶은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감옥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휴정선사의 법을 이어받은 편양 언기 스님은 뜰에 핀 꽃을 보고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비 내린 뒤 뜰에는 가득 꽃이 피어
맑은 향기 스며들어 새벽창이 신선하다
꽃은 뜻이 있어 사람을 보고 웃는데
선방의 스님들 헛되이 봄을 보낸다.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게 아니라 꽃이 피어나야 봄이 온다.
그러나 아직은 이른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