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3일, 이날은 세계적으로 책을 기념하는 '책의 날'이다. 이 '책의 날'을 기리기 위해 어제는 강남에 있는 교보문고 강당에서 강연을 했다. 일찍이 안 하던 짓을 선뜩 허락하게 된 것은 나 자신 책의 은혜를 많이 입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사람의 생각과 행위를 문자로 기록해 놓은 이 책이 인류사회에 공헌한 바는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다. 만약 우리 곁에 책이 없었다면 결코 현재의 우리들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책은 공기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요소이다. 책을 즐겨 읽거나 멀리하거나 상관없이 이 책은 인간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어느 날 아침 내 둘레를 돌아보고 새삼스레 느낀 일인데, 내 둘레에 무엇이 있는가 하고 자문해 보았다. 차와 책과 음악이 떠올랐다. 마실 차가 있고, 읽을 책이 있고, 듣고 즐기는 음악이 있음에 저절로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오두막 살림살이 이만하면 넉넉하구나 싶었다. 차와 책과 음악이 곁에 있어 내 삶에 생기를 복돋아 주고 나를 녹슬지 않게 거들어 주고 있음에 그저 고마울 뿐이다.
오두막 살림살이 중에서 가장 행복한 때를 들라면 읽고 싶은 책을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쾌적한 상태에서 읽고 있을 때, 즉 독서삼매에 몰입하고 있을 때 내 영혼은 투명할대로 투명해진다. 이때 문득 서권書券의 기상이 나를 받쳐 준다. 어떤 그림이나 글씨에서 그 작가의 기량을 엿보려면 이 '서권기와 문자의 향기'가 있느냐 없느냐로 가늠할 수 있다.
나는 몸소 서점에 들러 읽고 싶은 책을 사 오기도 하지만 저자나 출판사로부터 보내오는 책이 한 달이면 20여 권 가까이 된다. 하루 일과 중에서 책만 읽으면서 지낼 수 없으니까 엄격하게 가려서 읽는다. 이 나이에도 재미있는 책은 밤을 새워 가며 읽을 때가 가끔 있다.
책은 가려서 읽어야 한다. 읽고 나서 남에게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는 책은 좋은 책이다. 읽을 책도 많은데 시시한 책에 시간과 기운을 빼앗기는 것은 인생의 낭비다. 사실 두번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은 한 번 읽을 가치도 없다.
그럼 어떤 책이 좋은 책良書인가? 베스트셀러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한때 상업주의의 바람일 수도 있다. 좋은 책은 세월이 결정한다. 읽을 때마다 새롭게 배울 수 있는 책, 잠든 내 영혼을 불러일으켜 삶의 의미와 기쁨을 안겨 주는 그런 책은 그 수명이 길다. 수많은 세월을 거쳐 지금도 책으로서 살아 숨쉬는 동서양의 고전들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이 기회에 한 가지 권하고 싶은 말은 어떤 종교의 경전이든지 경전은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 그저 눈으로 스치지만 말고 소리 내어 읽을 때 그 울림에 신비한 기운이 스며 있어 그 경전을 말한 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책을 가까이 하면서도 그 책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아무리 좋은 책일지라도 거기에 얽매이면 자신의 눈을 잃는다. 책을 많이 읽었으면서 콕 막힌 사람들이 더러 있다. 책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읽을 수 있을 때 열린 세상도 함께 읽을 수 있다. 책에 읽히지 말고 책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책에는 분명히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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