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담고 싶은 법정스님의 글

[스크랩] 아름다운 마무리 (12) 병상에서 배우다 - 자신에게 알맞은 땅을

문근영 2012. 3. 30. 07:23

 

 

 

 

 

며칠 전 불임암에 다녀왔다. 무덥고 지루하고 짜증스런 이 여름을 혼자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길을 떠났다. 떠나기 며칠 전부터 남쪽은 연일 폭우가 쏟아지는 날씨였다. 내려가던 그날도 폭우가 쏟아져 무시로 비상등을 깜박거리며 주행해야 했다. 그 장대비 속을 달리면서 '무슨 길 바삐 바삐 가는 나그네인가'를 두런두런 외웠다.

 

다음 날은 오랜만에 맑게 갠 화창한 날씨. 이 여름철 달빚과 별을 본 지가 언제였던가 싶다. 후박나무 아래 의자를 내다 놓고 앉아 설렁거리는 바람결을 타고 모처럼 좋은 좌정의 시간을 가졌었다. 이런 맑고 투명한 시간을 누리기 위해 천릿길을 달려 왔는가 싶었다.

 

30년 전 이 암자를 지을 때 손수 심어 놓은 나무들의 정정한 모습을 볼 때마다 뿌듯한 생각이 차오른다. 후박나무, 태산목, 은행나무, 굴거리와 벽오동 등이 마음껏 허공으로 뻗어 가는  그 기상이 믿음직스럽다. 사람은 늙어 가는 데 나무들은 정정하게 자란다. 사람이 가고 난 뒤에도 이 나무들은 대지 위에 끗끗하게 서 있을 것이다. 내 마음을 전하기 위해 한 아름이 된 후박나무를 안아 주었다.

 

내가 강원도로 거처를 옮겨 간 후 한동안은 이곳에서 중이 된 사람들이 한 두 철씩 번갈아 가면서 살았었다.

 

시절인연으로 몇 해 전부터 스님들 몇이서 이 도량에 살면서부터 수행도량으로써 그 면목이 새로워졌다. 이번 여름철 암주는 어찌나 부지런한지 혼자 지내면서도 도량 안팎을 쓸고 닦아 훈훈한 청정도량을 이루고 있다. 푸르름을 먹고 산다는 스님은 환희심으로 충만해 있다.

 

세상살이에 마음이 심란해 절을 찾은 사람들이 맑게 정리된 도량을 보고 마음이 안정돼 내려가면서, 이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쪽지를 남기는 경우도 있다.

 

우리들 생활환경은 본래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사는 사람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겉을 보면 속을 안다는 말은 이를 가리키고 있다.

 

안거가 시작되는 결제날, 홀로 지내는 암주에게 이런 사연을 보냈다.

 

   <장로게>에서 한 수행자는 이와 같이 읊었습니다.

 

     홀로 있는 수행자는 범천梵天과 같고,       

     둘이서 함께라면 두 사람의 신神과 같으며,

     셋이면 마을 집과 같고,                         

     그 이상이면 장바닥이다.                          

                      

    올 여름 범천이 기뻐할 안거 이루기를.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기를. 부디 청청靑靑하시오.

 

수행자는 무엇보다도 안팎으로 밝게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 밝음이 이웃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만약 수행자가 어둡고 음울하다면 그 어둡고 음울한을 털어 버리는 일을 제1과제로 삼아야 한다. 수행자는 앞뒤가 훤칠하게 툭툭 터져야한다. 그래야 그 안에 티끌이 쌓이지 않는다. 그 맑고 투명함이 이웃에게 비췬다.

 

사람은 이 세상에 올 때 하나의 씨았을 지니고 온다. 그 씨앗을 제대로 움트게 하려면 자신에게 알맞은 땅(도량)을 만나야 한다. 당신은 지금 어떤 땅에서 어떤 삶을 이루고 있는지 순간순간 물어야 한다.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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