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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전 언론에 전쟁 관련 기사가 실렸다. 한국전쟁에서 죽은 미국병사 유해가 발굴되었고, 그 유해가 고향에 묻힐 때 주 전체에서 조기를 달아 예우했다는 기사다. 60년 전에 죽은 무명 사병에 불과하고 특별한 전공을 세운 것도 아닌데 주 의회에서 성대한 예우를 의결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미국의 힘이라고 느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에게는 그 희생이 아무리 작더라도 예우하고 보상하는 것이 작은 영웅을 만들어 더 큰 영웅을 기다리는 힘인 것이다.
자칫 역사에 묻혀버릴 뻔한 박동초를 말한다
아쉽게도 우리는 조국을 위해 영웅적 희생을 한 사람을 예우는커녕 오히려 묵살하는 일을 흔히 보아 왔다. 현대에도 흔히 보지만 과거에도 적지 않았다. 조수삼이 쓴《추재기이(秋齋紀異)》를 번역해 출간하면서 200여 년 동안 우리가 망각한 영웅 한 사람을 추적해 밝힌 적이 있다. 정조 초기의 인물로 표범이라 불린 박동초(朴東初)다. 그는 함경도 강계의 무인으로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의 수비를 책임진 방수장(防守將)으로 근무했다. 당시 청나라 사람들은 담비 가죽과 산삼을 몰래 캐려고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 조선 땅으로 숨어들었다. 박동초는 월경하는 적을 무섭게 막았기에 적들은 박동초가 지키는 한 압록강을 넘을 꿈도 못 꿨다. 얼굴에 마마자국이 심하게 나서 적들로부터 표범이라 불렸다. 이것은 그를 두려워했음을 보여주는 별명이다. 조수삼은 이 정도로 기록하고 말았지만, 그 정도 기록도 의미는 크다. 국경지역에서 충실하게 제 맡은 임무를 수행하는 장교를 누가 추켜세우랴? 조수삼은 강계에 잠시 근무한 경험이 있어서 그의 명성을 듣고 기록으로 남겼다. 자칫 역사에 묻혀버렸을지도 모를 한 영웅의 사적이 드러난 것이다.
1776년 춥기로 유명한 중강진 강변의 ‘항암(項岩)’이란 곳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300여 명의 불법 월경자가 배 열두 척에 나눠 타고 압록강을 숨어 들어왔다. 박동초는 좌수 강정제(姜正齊)와 함께 조총수 100여 명을 항암 바위 아래 매복시켰다가 배가 접근하자 일제히 총을 쏴서 거의 섬멸했다. 일부는 물에 빠져 죽고 너댓 명만 겨우 목숨을 건져 돌아갔다. 300명을 섬멸했으므로 작은 전과가 아니다. 이 전투 이후 이 지역으로는 월경꾼이 완전히 사라졌다.
문제는 실록이나 다른 공식 기록에 이 사건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고가 되지 않았을까? 그럴 수는 없다. 현재 같으면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양국 간에 군사적 외교적 소용돌이가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 시절이라고 해서 무사하게 넘어갈 전투가 아니다. 그럼에도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왜일까? 불법적 월경이기에 중국인들은 죽어도 자기 정부에 말할 수 없다. 문제는 우리 쪽이다. 정조가 등극한 격변기에 혁혁한 전과가 조정에 올라갔으나 조정에서는 쉬쉬하며 숨기고 말았다고 나는 판단한다. 사건이 불거지면 청나라와 벌어질 군사적 외교적 변수를 고려하여 아예 보고자체를 묵살하고 말았을 것이다. 묵살의 결과 박동초를 비롯한 영웅들에게 포상은 커녕 후속조치도 변변치 않았으리라. 국왕 정조는 이 사건을 몰랐을까? 몰랐을 리가 없으나, 그냥 넘기고 말았을 것이다. 그 물증이 다른 기록에도 나오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0년이 경과한 1794년 고산리첨사(高山里僉使) 원영주(元永胄)가 강계지역을 정찰하고《정찰일기》를 남겨 정조에게 보고했다. 왕명에 따라 문관 무관이 합동으로 면밀하게 정찰한 뒤 보고문을 올렸다. 여기에 그 전투와 박동초의 전공이 상세히 기록되었다. 그러나 정조는 다른 제안에는 시행을 허가하면서 박동초 건에는 묵묵부답이었다.
영웅을 대접하는 것을 보면 그 나라의 미래를 알 수 있다
그 무렵 병영(兵營)에서 이 지역의 수비와 국경 개척 상황을 조정에 보고한 보고서 가운데 《강주변정휘편(江州邊情彙編)》이란 문서가 있는데 여기에도 그 전과가 상세하게 실려 있다. 한 마디로 전방의 실상이 여러 차례 여러 경로를 통해 조정에 보고되었다. 조정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그 전투 자체와 영웅적 전과를 완전히 무시하고 말았다고 나는 판단한다. 전투가 벌어진 40년 뒤인 1814년 8월 5일 강계부사(江界府使) 김계하(金啓河)가 조정에 올린 상소문이 그 증거이다. 김계하는 다시 한 번 박동초의 전과를 상기시키며 표창을 건의했다. 그 건의문에는 이 전과를 보는 조정과 민심의 현격한 차이가 가감없이 드러난다. 공식기록인《일성록(日省錄)》에 실려 있는 내용을 일부 보자.
“병신년(1776년) 죽은 만호 박동초는 비분강개하게 국경을 방어하여 압록강을 가로질러 힘써 싸웠습니다. 앞뒤로 소탕한 적의 수가 몇 명인지 모릅니다. 저들도 그를 범인 양 무서워하여 그를 박 장군이라고 부릅니다. 박동초가 살아 있을 때에는 저들이 감히 강가에 머리를 내밀지 못했습니다. (……) 이 두 사람이 세운 공훈이 정말 어떠합니까? 그렇지만 몸도 이름도 묻혀 뒷일이 처량하므로 고을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며 행인들조차 눈물을 훔칠 지경입니다. 비록 일이 두 나라에 관련되어 틈이 벌어질까 염려되나 이러쿵저러쿵 핑계를 대어 일절 덮어둔다면 군사를 무슨 수로 격려하고 엄중히 방어하겠습니까? 방어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엄중히 방어하려 한다면 격려하고 권하는 것이 가장 낫습니다.”
민간에서는 박동초를 영웅으로 떠받들고, 적들도 그를 두려워했다. 국경을 방어하는 큰 공적을 세워 나라의 영웅으로 예우할 만하다. 그러나 조정은 그를 예우하고 보살피기는 커녕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사후에 가족도 보살피지 않았다. 뒷일이 처량하다는 것은 국가 유공자 가족으로 예우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강계부사가 그 점을 조정에 건의한 것은 박동초와 그 가족을 예우하지 않을 경우 누구도 자신을 희생하며 나라를 위해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국경을 지키는 그로서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강계부사는 두 나라 사이의 외교적 분쟁 때문에 박동초를 의도적으로 무시한다고 보았다. 그의 보고를 듣고 있노라면 한심한 생각이 든다. 국제관계가 걱정된다 해도 영웅을 은밀하게라도 예우할 방법이 그렇게도 없단 말인가? 망한 명나라 황제는 궁궐 깊숙한 곳에서 융숭하게 제사를 드리면서 살아있는 자국의 영웅은 비참하게 팽개쳐 두었다. 남들은 작은 영웅도 저렇게 대접하여 큰 영웅을 기다리는데 우리는 큰 영웅도 홀대하여 작은 영웅도 나오지 못하도록 막는다. 혹시 지금도 그렇지 않은지 둘러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