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인디언의 피를 먹고 핀 꽃 자본의 왕국, 아메리카

문근영 2011. 10. 10. 07:51

[기획연재]인디언의 피를 먹고 핀 꽃 자본의 왕국, 아메리카

 

 

   <기획연재> 역사로 보는 달러의 정치경제학 1

 

  여상경 편집장 2003jmt@hanmail.net

 

● 기획연재를 시작하면서 ●

 

지금 미국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라는, 우리에게는 아주 생소한 괴물로 인해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요동치고 있습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2위 업체인 뉴센트리파이낸셜(New Century Financial)이 파산을 신청했고, 원리금을 갚지 못해 은행에 빼앗긴 주택이 수십 만 채에 이르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 금융그룹인 씨티그룹(지난해 4분기에만 10조원에 이르는 사상 최대의 손실), 세계 최대 보험사인 AIG(50억 달러에 달하는 모기지 관련 손실) 등 미국 내 금융시장은 말할 것도 없고 독일(IKB은행), 영국(노던록) 등 전 세계 금융시장을 들쑤시고 있습니다. 급기야 1929년 대공황에도 끄덕없었던 미국 5위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가 파산하면서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금융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미국이 세계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큽니다. 그 힘이 많이 약화되었다고 하더라도 현재 미국이 세계 제일의 경제 강국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자본주의가 가장 먼저 발달했고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까지 얻으면서 세계를 지배해 온 영국을 물리치고, 미국이 세계 최강국으로 등장한 것은 불과 백 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미국이 어떻게 대영제국을 제치고 세계 최고에 등극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전 세계를 달러의 발 아래 둘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앞으로 한국경제가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는데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번 기획연재를 통해 달러가 세계 기축통화로 자리 잡아 나가는 과정과 함께 애초부터 패권적 욕심과 불합리함을 안고 출발했던 달러 체제가 힘을 잃어 나가는 과정을 동시에 살펴볼 것입니다. 또한 이를 통해 ‘달러’라는 경제적 힘은 ‘핵’이라는 정치군사적 힘과 맞물리면서 강화되어 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정치군사적 폭력과 경제적 폭력은 그 자체가 한 몸통인 제국주의 패권의 쌍두마차이며 이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한국경제, 나아가 세계경제가 한 치의 진보적 발전도 이룰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면적 951만 8,323㎢로 남한의 100배에 해당하는 땅덩이에 3억 명이 살고 있는 나라. 2007년 기준으로 명목 국내총생산(GDP) 13조8,440억 달러로 한국(9,570억 달러)의 15배 규모를 자랑하며, 캘리포니아 주 하나만 따져도 GDP 2조1,500억 달러로 프랑스와 맞먹는 나라. 캘리포니아 외에도 텍사스, 플로리다, 일리노이, 뉴저지 등 한국보다 경제규모가 크거나 버금가는 주만 해도 몇 개를 꼽을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입니다.

기획연재의 첫 번째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계경제에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고,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의 흐름을 좌우해 왔던 각종 정책과 기구의 설립 등은 미국을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인들의 선조라 할 수 있는 ‘순례자들(필그림스 Pilgrims)’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현재의 미국 땅에 도착한 1620년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현재의 미국경제가 자리잡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 개인의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성장과정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듯이 미국이라는 나라가 작동하는 시스템과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그 역사적 과정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학살의 신세계 교향곡

아메리카 대륙이 (서방)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산살바도르(San Salvador) 해안에 발을 내디딘 이후부터입니다. 우리가 배운 역사책에 의하면 아메리카 대륙은 신대륙 탐험에 나선 모험가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당도했을 때는 이미 수천만에 이르는 원주민(‘인디언’이라는 말은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로 착각했던 콜럼버스가 붙인 이름입니다)들이 광대한 아메리카 대륙에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2만여년 전에 아시아에서 베링해협을 통해 알래스카를 거쳐 아메리카 전역에 정착한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수만 년 전부터 원주민들이 살고 있던 땅을, 서구인으로는 최초로 콜럼버스가 방문1)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한 이들은 당시 유럽인들의 주장처럼 ‘야만인’이 아니라 엄격한 사회규율 속에서도 개인의 가치가 존중되는, 유럽보다도 훨씬 평등하면서도 수준 높은 문명과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우지 못한 콜럼버스의 목적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콜럼버스에게 자금을 대주는 것은 물론 이익의 10%를 떼어 주고 새로 발견한 땅에 대한 통치권한을 주기로 약속한 이사벨라 스페인 여왕의 뜻을 받들어 그 곳에 묻혀 있을 무궁무진한 ‘금’을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콜럼버스의 눈에는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다 ‘황금’으로 보였겠지요. 그들이 찬 금 귀걸이를 보고 눈이 번쩍 뜨인 콜럼버스는 원주민 몇 명을 납치하여 금이 있는 곳을 대라고 족치기도 했다지요. 그에게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그 땅의 주인은커녕 그 땅에 살고 있었던 수많은 짐승들 중 하나이거나 기껏해야 금을 캐는데 사용할 훌륭한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콜럼버스는 나중에 항해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이들은 좋은 하인이 될 듯하다…50명만 있으면 이들 모두를 정복해서 마음껏 부릴 수 있을 것이다.”(미국 민중사, 하워드 진)
콜럼버스와 함께 배를 탔던 한 선교사가 발표한 글에는 당시 콜럼버스를 비롯한 백인들이 원주민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하루는 3천 명에 달하는 원주민을 붙잡아 와 사지를 자르고 목을 베고 여자들은 강간한 후 살해했다. 달아나는 아이는 창을 던져 죽이거나 붙잡아 사지를 잘라 죽였으며, 일부는 끓는 비누에 삶아 죽였다. 또한 개를 풀어 이들을 돼지처럼 몰아 죽였으며,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기를 낚아채 그들이 끌고 온 개에게 먹이로 던져 주었다. 그리고 한 칼에 사람을 두 동강 내거나 목 베는 내기를 했으며, 바위에 짓이겨 죽이기도 했다. 그들은 나지막한 교수대를 만들어 발이 땅에 닿을 듯 말 듯 하게 원주민들을 목매달고 저주받은 예수의 13번째 제자를 본 떠 13명씩 죽였다.(원주민 사회의 파괴에 대한 소고, 라스카사스, 1552년)
 
◀ 스페인 전리품에 그려진 아즈텍인들에 대한 학살
 
 
▲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D.C에 있는 콜럼버스 기념재단. 미국인들은 매년 10월 12일을 ‘콜럼버스데이’로 기념하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아메리카의 비극은 이후 수세기에 걸쳐 침략과 약탈, 야만적인 학살로 점철됩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만행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아메리카의 비극은 영국이 식민지 건설에 착수한 17세기 이후부터 본격화됩니다. 주로 중남미 지역에 침입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금을 약탈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이후 북미에 들어온 영국은 직접 땅을 점령하고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에 원주민들과의 대립과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콜럼버스 이후 ‘신대륙’ 아메리카를 향한 유럽 각국의 진출은 더욱 가속화됩니다. 스페인, 포르트갈은 물론 네덜란드, 프랑스 등이 ‘땅 따먹기’ 경쟁에 참가한 것입니다. 이미 1602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한 네덜란드는 허드슨 강 유역을 항구로 개발하고 자기 나라 도시의 이름을 따 ‘뉴 암스테르담’이라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프랑스는 이보다 오래 전인 1584년 지금의 (캐나다) 퀘벡 지역에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한 후 남쪽 미시시피 강 하구의 뉴올리언스를 중심으로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뒤늦게 각축전에 뛰어든 영국은 1606년 제임스1세의 칙허장(영국 국왕의 허가서)에 따라 ‘런던회사’, ‘프리미어 회사’ 같은 식민지 개척회사들을 세우게 됩니다. 당시 영국은 인클로저 운동으로 토지에서 내몰린 농민들이 부랑자로 전전하거나 도시 주변에 거대한 실업자, 빈민군을 형성하면서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고 있었습니다. 개척회사들은 “신대륙에는 임자가 없고 아무도 가꾸지 않는 땅이 널려 있다”는 등의 감언이설로 이들을 꼬드겨 식민지 개척 사업에 동원하게 됩니다.
 
필그림스의 상륙
 

우리는 1620년 영국에서 박해받던 청교도들이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이주했고, 인디언들의 무자비한 공격과 험난한 자연환경을 극복하면서 마침내 자유의 땅 아메리카를 건설했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영국은 이미 1607년에 런던회사에 고용된 일군의 식민지 개척단을 보내 최초의 영국 식민지인 제임스타운(지금의 버지니아)을 건설하여 운영해 오고 있었습니다. 최초의 영국 정착민들이 온갖 어려움 끝에 버지니아에서 자리를 잡게 되자 회사는 지속적으로 개척 노동자들을 모집하여 이주시켰고, 1620년에 메이플라워 호에 올랐던 이들 역시 버지니아 회사(런던회사는 버지니아 식민지가 정착단계에 들어서자 이름을 ‘버지니아 회사’로 바꾼다)로부터 정착비용을 지원받고 회사에 고용된 사람들이었을 뿐입니다.
당시 102명의 이주민 중에서 ‘박해받던’ 청교도는 35명에 불과했고, 이들 역시 다른 개척민들처럼 버지니아 회사에 고용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이들 청교도들은 미국의 개국신화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과 같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떠난 고난의 순례자’와는 거리가 멉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영국정부의 탄압을 피해 네덜란드로 이주해 있었는데 네덜란드는 종교의 자유가 전면적으로 보장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충분한 자유를 누리고 있던 이들이 네덜란드를 떠나 다시 아메리카로 떠난 것은 먹고 사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자유, 헌신적인 순례자, 극적인 모험 따위와는 거리가 먼, 단지 먹고 살기 위한 생존의 처절함만이 존재했을 뿐입니다.
 
우애를 학살로 되갚은 양키들
1620년, 영국의 플리머스 항을 출발한 이들이 악천후로 길을 잃고 헤매다 도착한 곳은 애초 목적지였던 버지니아에서 수 백 마일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출발지 이름을 따서 플리머스라고 이름붙인 이곳은 지금의 매사추세츠입니다.
당시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인디언들은 하얀 피부색의 이방인들을 반갑게 맞이하며 이들에게 식량과 종자를 제공하고 농사짓는 법, 물고기 잡는 법 등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1621년 첫 수확을 놓고 그들에게 도움을 준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함께 잔치를 벌이고 감사예배를 가진 것이 현재도 이어지고 있는 추수감사절의 유래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디언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자리를 잡고 정착하게 되자 본토(영국)에서는 더 많은 개척 노동자들을 보내기 시작했고, 보다 많은 땅을 갖기를 원했던 백인(개척회사들이 이들을 보낸 이유 중에는 이들 고용된 노동자들이 지속적으로 땅을 개척하고 사용할 수 있는 땅으로 만드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들은 인디언들의 땅을 빼앗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본격적인 비극이 시작됩니다.
 
◀ ‘평화로운’ 추수감사절의 기원을 알리기 위해 교회 등에서 많이 사용되는 그림. 그러나 필그림스들에게 호의를 베푼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후 수백년 동안의 학살극을 거치면서 멸종단계에 이르게 된다.

불과 수백 년 전, 문명국이라고 자부하고 있던 유럽의 백인들이 저지른 만행은 실로 끔찍하고 야비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들 스스로 쓴 몇 가지 역사적 기록들만 들추어 보더라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실들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어릴 적부터 서부영화에서 보아 온 인디언들의 ‘머리가죽 벗기기’는 그들의 야만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으로 우리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가죽 벗기기는 인디언들이 아니라 백인으로 구성된 인간 사냥꾼들의 수법이었습니다. 지금도 남아 있는 1775년 매사추세츠 의회의 포고령을 보면 “남자의 머리가죽을 가져오면 40파운드, 여자나 12세 이하의 머리가죽에 대해서는 20파운드”를 지급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정부가 나서서 공공연하게 인디언 학살을 독려했고, 두 당 얼마씩의 포상금에 맛 들린 인간 사냥꾼들은 사냥한 인디언의 무거운 머리통을 들고 다니는 것보다 그 가죽만을 벗겨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것이 훨씬 수월했을 것입니다. 사냥한 꿩을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멋진 사냥꾼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제노사이드(genocide, 대량학살)’는 일부 광폭한 사냥꾼들이나 무법자들만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정부는 물론 종교지도자, 언론 등이 모두 나서서 전 사회적인 광기를 조성하는 가운데 진행된 것입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인디언들을 ‘짐승의 먹잇감’이라며 ‘박멸’할 것을 주장했고, 7대 대통령을 지낸 앤드류 잭슨은 원주민을 붙잡아 사지를 절단하고 일부는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낸 후 전신을 말려 말안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2) 이것만이 아닙니다. 강경하게 맞서던 인디언들에게 거짓 협상을 제안하고 그들에게 선물이라며 ‘천연두 병원에서 가져온 담요’를 주어 아메리카 전역에 전염병이 창궐하게 하여 수많은 인디언들을 몰살시키는 잔인하고도 비열한 짓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또 1863년 3월 24일자 ‘로키 마운틴 뉴스’는 “모두 죽여라”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어 인디언 학살을 선동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수백 년에 걸친 백인의 야만적이고 체계적인 학살로 인해 당시 3,000만 명으로 추산되던 북미주의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지금은 불과 140만 명(1980년대 기준)만 살아남았다고 하니 역사상 가장 잔혹한 ‘인종 청소’라 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1994년 다수족인 후투족에 의해 100만 명의 투치족이 학살당한 르완다 인종 청소에 대해 미국이 ‘인권’ 운운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스러울 따름입니다.
현재 미국 땅에 남아 있는 인디언들은 미국의 지속적이고 배타적인 차별정책으로 인해 일자리조차 구하지 못하고 마약과 술에 찌들어 비참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정부는 1860년부터 소위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것을 만들어 인디언들의 생활권을 제한해 왔습니다. 말이 좋아 보호구역이지, 그 실상은 끔찍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광활함과 웅장함 때문에 관광 코스로 널리 알려진 그랜드캐년이나 옐로스톤 같은 곳에 인디언들을 몰아넣고 감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랜드캐년 같은 곳은 계곡의 깊이가 최고 1,700미터에 달하며 풀 한포기 제대로 자라기 힘든 척박한 황무지로 농사를 지을래야 지을 수도 없는 곳입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인디언들은 관광객들에게 싸구려 수공예품을 만들어 파는 것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미국 백인정부의 시각에서는 이들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관광 상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신천지 아메리카를 독점하라!
스페인, 프랑스 등에 비해 늦게 정착한 영국 정착민들은 땅에 커다란 집착을 보이면서 정부의 지원 아래 공격적으로 자신의 영토를 확장해 나갑니다. 1664년에는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여 뉴암스테르담을 빼앗고 찰스1세의 동생인 요크공의 이름을 따 뉴욕으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1756년에는 프랑스와 ‘7년 전쟁’을 벌여 캐나다로부터 플로리다에 이르는 미시시피 강 동쪽의 거대한 영토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못한 전쟁광들은 다시 캐나다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합니다. 1812년에는 12,000여명의 육군병력을 투입, 캐나다 토론토를 점령하여 공공건물을 불태우고 수많은 사람들을 살상합니다. 영국군의 반격으로 다시 밀려나고 말았지만, 어쩌면 백악관의 지배자들은 지금도 캐나다를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지칠 줄 모르는 미국인들의 욕심이 이제는 남미로 눈을 돌립니다. 독립영웅 미구엘 이달고의 지휘 아래 전개한 혁명전쟁을 통해 1821년 독립한 멕시코는 미국의 침략을 받습니다. 이미 1836년 텍사스인들을 선동하여 멕시코로부터 분리 독립시킨 미국은 1846년 군대를 멕시코 영토인 리오그란데 강으로 이동시켜 멕시코를 자극하여 전쟁을 일으킵니다. 명백한 군사도발을 통해 전쟁을 만들어낸 미국은 2년여의 전쟁을 통해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 유타, 네바다, 애리조나, 와이오밍, 콜로라도 등 광대한 땅을 손에 넣게 됩니다.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인 1845년부터 미국은 이미 그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워싱턴에서 발행되던 신문인 ‘유니언’지는 “서부를 향해 쇄도할 급류를 어느 누가 막을 수 있는가? 우리에게 캘리포니아로 가는 길이 열릴 것이다. 서부 사람들의 행진을 누가 멈추게 할 것인가?”라면서 멕시코에 대한 도발을 선동하기도 합니다. 물론 미국 정부의 뜻이기도 했지요.
이렇게 미국은 필그림스들이 발을 들인 1620년 이후 수차례의 전쟁과 학살을 통해 끊임없이 영토를 확장시켜 나갔고 아메리카 대륙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등장하게 됩니다.
 
1838년 ‘통곡의 행렬(Trail of Tears)'이라고 불리는 인디언 강제이주가 시작된다. 총칼을 동원하여  3만여 명의 체로키 인디언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7~8천 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했다.
 
 
미국인들의 대표적인 국민성 중 하나라는 ‘프론티어(frontier) 정신’은 이러한 영토 확장을 위한 국가적 차원의 정책과 개인의 탐욕이 맞물린 산물에 불과합니다. 흔히 ‘개척자 정신’으로 불리는 프론티어 정신은 용기, 진취성, 개인주의, 합리주의를 상징합니다. 프론티어(frontier)는 ‘변경’이라는 뜻인데 미국정부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접경지대라는 뜻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미국정부의 공식 정의에 따르면 ‘1평방 마일당 인구 2인 이상의 지역과 그 이하의 지역과의 경계를 잇는 선이라 규정되어 있으며, 아직 충분히 문명화되어 있지 않은 지역을 가리키는 말’(두산백과사전)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의에 당시의 상황을 접목시켜 본다면 그 본질은 아주 간단히 드러납니다. 사람(미국인)이 살지 않는, ‘문명화되지 않는 빈 땅’, 즉 인디언의 땅을 빼앗아 개척하라는 것입니다. 미국 정부는 이를 권장하기 위해 1910년에 ‘홈스테드 법(변경에 일정기간 거주하면 거주자에게 그 땅의 권리를 인정하는 제도)’이라는 것을 제정합니다. 한 마디로 누구든지 말을 달려 드넓은 영토에 말뚝을 박고 인디언의 공격이나 자연재해, 그 외에도 그 땅을 탐내는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쳐 살아남는다면 주인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자신의 땅을 갖고자 하는 강한 욕망(진취성)과 인디언들의 영토를 향해 총을 들고 진격하는 용기가 요구되겠지요. 그 결실이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살아남은 자의 몫(개인주의)이 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갖추는 것(합리주의)도 잊지 않습니다. 물론 그 법과 제도는 분쟁 당사자 간의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승자의 권한만을 보장하는 ‘정글의 합리성’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를 자신의 발아래 두기위해 수많은 침략전쟁을 서슴지 않는 미국의 태도 역시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프론티어 정신의 발로일 뿐입니다. 가장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자본주의인 신자유주의 시대에 어느 때보다 프론티어 정신이 강조되는 것 역시 신자유주의의 기원이 미국인 사실과 무관치 않아 보입니다.
 
영국 물러가라!
한편 아메리카 대륙에서 자신의 지배력을 점차 넓혀가던 영국 정부는 이주민들에 대한 통치 질서를 강화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또한 유럽 나라들과의 잦은 충돌로 인한 막대한 전쟁비용을 감당해야 했고, 점차 영국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식민지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당연히 이러한 영국 정부의 태도는 식민지 정착민들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 1651년 항해조례를 통해 영국정부에서 지정한 품목들은 영국이나 영국식민지에서만 판매할 수 있도록 규정하는 등 식민지 경제에 대한 간섭과 개입이 강화되자 영국본토와 식민지 간의 갈등이 더욱  커지게 됩니다.
이러한 가운데 버지니아에서 베이컨을 중심으로 한 반란군이 수도인 제임스타운을 초토화시키는 ‘베이컨의 반란’이 일어나고, 미국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되는 보스턴 학살사건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베이컨의 반란을 진압한 영국정부는 식민지의회를 해산하고 회사 식민지에서 왕령 식민지로 바꾸는가 하면 식민지에 부과하는 세금을 점차 늘려갑니다. 1764년에 제정한 ‘설탕법3)’이나 그 이듬해 제정된 ‘인지세법’ 등이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입니다. 특히 서적은 물론 모든 서류에 영국 정부가 발행한 인지를 붙이게 한 인지세법은 식민지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식민지인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게 됩니다. 아메리카 전역으로 폭동이 확대되어 각지에서 ‘자유의 아들들’과 같은 저항단체들이 조직되고 급기야 영국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으로 확산되자 놀란 영국 정부가 인지세법을 폐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국 정부를 향한 불만은 수그러들지 않고 13개 주 중에서 9개 주의 대표들이 모여 ‘대표없이 과세없다4)’는 원칙을 결정하는 등 영국정부에 대항한 자치 움직임이 갈수록 고조되기 시작합니다.
 
1773년 발생한 보스턴 차 사건. 사무엘 아담스를 중심으로 한 보스턴의 급진파 청년(자유의 아들들)들이 인디언 분장을 하고 영국상선에 실려있던 차를 모두 바다에 내던진 사건. 사무엘 아담스는 영국정부의 조치로 파산한 상인의 아들이었다.
 
독립선언서

이러한 충돌 과정에서 ‘보스턴 학살사건’ ‘보스턴 차 파티’사건 등이 연이어 발생하고 영국정부의 강경한 대응이 이어지자 급기야 영국의 조치에 대항하는 ‘1차 대륙회의’가 소집되기에 이릅니다. 1774년 조지아 주를 제외한 12개 주의 대표 55명이 참가한 이 회의에서는 식민지 의회가 모든 입법의 권한을 가진다는 것과 전쟁을 준비할 것에 대한 결의문을 채택하게 됩니다. 곳곳에서 영국 군대의 무기고가 습격당하고 관공서가 불타는 등 식민지는 이제 본격적인 반영 투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됩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페트릭 헨리의 연설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대중을 선동하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영국군이 콩고드의 식민지 민병대를 공격하고 다시 민병대가 돌아가는 영국군을 습격하여 적잖은 사상자를 내는 등 양측의 충돌이 격화되는 가운데 소집된 2차 대륙회의는 대륙군의 창설을 결의하고 대농장주였던 조지 워싱턴을 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2차 대륙회의에서는 독립문제가 공식적으로 논의되었고, 토머스 제퍼슨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기초로 마침내 1776년 7월 4일 아메리카의 독립을 선포하게 됩니다. 영국 정부는 하우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3만여 병력을 파병하였고 1783년 파리조약까지 7년여에 걸친 독립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1776년은 아담스미스가 국부론을 발표한 해이기도 합니다.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이 자본주의 경제의 기틀을 잡은 경전이라면, 독립선언서는 가장 강력한 자본주의 국가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기획연재]아메리카 대륙에서 꽃피운 자본의 왕국 (중)

 

 

  <기획연재> 역사로 보는 달러의 정치경제학
  여상경 편집장 2003jmt@hanmail.net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된다는 것, 그들은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일정한 권리를 부여 받는다는 것, 그리고 이에는 삶, 자유 및 행복의 추구 등이 포함된다는 것, 이러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인간들 사이에 정부들이 수립되며, 이들의 정당한 권력은 피치자의 동의에 연유한다는 것, 어떠한 형태의 정부라도 그러한 목적들을 파괴하는 것이 될 때에는 그 정부를 바꾸거나 없애버려 새 정부를 수립하되, 인민들에게 자신들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잘 이룩할 것 같이 보이는 그런 원칙들에 입각하여 그 토대를 마련하고 또 그런 형태 하에 권력을 조직하는 것이 인민의 권리라는 것 등이다.”
(미국 독립선언서 중에서)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할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와 같은 기본권과 국민 주권의 원리가 잘 나타나 있다고 칭송되는 미국 독립선언서의 한 구절입니다. 문자의 뜻으로만 보자면 더없이 훌륭한, 심지어는 ‘인민에 의한 정권의 교체’라는 혁명적 권리까지 부여하고 있는 이 선언서는, 사실 재산을 가진 백인남성의 독점적 권리에 기초한 불평등을 감추고 있습니다.
이 선언서에 의해 촉발된 미국의 독립전쟁 역시 온갖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신대륙 아메리카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백인 남성 부르주아지의 ‘권리장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미국 역사의 전 과정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백인의, 백인에 의한, 백인을 위한 정부,
남성의,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정부,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정부!

 

“일부 아메리카인-인디언, 흑인노예, 여성-은 독립선언서에 표현된 이런 단합된 이해집단에서 분명히 제외됐다… 로크의 통치론과 마찬가지로 독립선언서는 정부와 정치적 권리에 관해서는 언급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재산상의 불평등에는 눈을 감았다… (독립선언서는) 그런 합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이해의 충돌을 가리기 위해, 또 많은 사람들이 배제되고 있음을 숨기기 위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용되고 있다.”(미국민중사, 하워드 진)
 
미국인들이 지금까지도 가장 존경하는 정치가 토머스 제퍼슨이 흑인 노예들 사이에서 다섯 명 이상의 사생아를 낳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탈출 노예 출신인 흑인 작가 윌리엄 웰스 브라운은 바로 이 숨겨진 제퍼슨의 실화를 기반으로 하여 야만적인 미국 노예제의 실상을 고발했습니다.
 
* 미국 2달러 지폐에 그려져 있는 토머스 제퍼슨.
 
독립선언서의 작성자인 토머스 제퍼슨. 미국 독립혁명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고 3대 대통령 자리까지 올랐던 그는 입으로는 노예제를 혐오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죽는 날까지 수백 명의 노예를 소유했던 버지니아의 대농장주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성을 업신여기는 남성우월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여성들은 소설과 시를 탐닉해서는 안 되고, 여성교육이 “꾸미고 장식하는 일과 인생의 즐거움”에 집중되어야 하며 사교춤과 그림, 음악 등이 그것이라고 주장했다지요. 심지어 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흑인노예와의 사이에 낳은 핏줄마저 부정하는 파렴치함1)까지 갖추고 있던 정치가이기도 했습니다. 제퍼슨의 독립선언서가 지금까지도 훌륭한 문장으로 칭송받고 있지만, 그에게 있어 흑인노예나 여성은 신으로부터 권리를 부여받은 평등한 창조물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제퍼슨만이 아닙니다.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개최되었던 대륙회의에 참가했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들의 절대다수가 당시 식민지의 지배계급이었고 영국치하의 식민지 관리를 지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에서도 미국독립혁명의 계급적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반 영국 저항운동을 이끌었던 ‘자유의 아들들’ 역시 “간부와 위원회 위원들은 거의 모두가 식민지 사회의 상류계급”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이 주도한 독립전쟁은 어떤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식민지 지배세력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영국 본토의 지배세력과 벌인 전쟁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신대륙의 민중들은 독립전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요?
당시 대영국 저항운동의 주도세력이 식민지의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하고 있던 상인, 지주, 농장주, 자본가들이었던 반면, 이주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사람들은 영국정부의 이주(사실은 추방)정책과 개척회사의 감언이설에 속아 배에 올랐던,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노동자, 농민, 빈민들이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항해에 드는 비용을 5~7년 동안 주인을 위해 일해서 치르겠다는 노역계약서를 작성한 실질적인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계약하인’이라고  불리던 이들은 실제로 노예처럼 사고 팔렸다고 합니다.
“리즈타운에 약 100명의 건장한 남자, 여자, 어린아이로 구성된 하인들을 실은 저스티셔 호가 막 도착했음…. 판매는 4월 2일 화요일에 시작될 예정.”(버지니아 가제트, 1771년 3월 28일자)
 
배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들어오는 이주민들
당시 신대륙의 계급관계는 대단히 복잡했습니다. 먼저 내부적으로는 식민지 지배계급과 하층계급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존재했고, 이것이 외적으로는 타 종족(인디언과 흑인노예)에 대한 배타적인 지배와 약탈로 표출됩니다. 그리고 식민지 전체는 영국에 착취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속에서 민중들은 독립전쟁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기득권을 둘러싼 지배계급 간의 대결이라는 독립전쟁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었으며, 식민지가 승리하든 영국이 승리하든 자신들은 여전히 가진 자들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퍼슨과 함께 독립혁명의 중요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존 애덤스는 이 전쟁의 지지자는 전체의 1/3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무관심하거나 반대자라고 추산하기도 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다급해진 부르주아지들은 강제징집을 통해 군인을 확보(물론 돈 있는 사람들은 돈으로 사람을 사서 징집을 기피하였다)하거나 얼마간의 급료를 미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유혹하는 방법을 쓰기도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군대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고 계급이 올라가 사회적 지위를 바꿀 수 있는 기회로 비춰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독립’이라는 명분과 상관없이 ‘전쟁을 통해 한 몫 잡아보겠다’는 소박한 꿈마저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군대 역시 가진 자들의 자식인 장교와 일반 사병간의 차별이 극심했고 약속한 급료마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추위와 굶주림,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던 사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군대의 반란 소식을 접한 조지 워싱턴이 한편으로는 유화책을 쓰면서 한편으로는 반란군을 진압할 병사를 준비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는 당시 ‘혁명 군대’의 사기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사례입니다.
심지어 반란군들이 필라델피아의 대륙회의 본부로 쳐들어가 고매한 대륙회의 대표자들이 강을 건너 허겁지겁 도망한 일도 있었다고 하니 우리가 역사에서만 듣던 위대한 미국 독립전쟁의 실상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런 우여곡절 속에서도 미국이 승리했고, 마침내 1783년 9월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평화조약이 프랑스 파리에서 조인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7년여에 걸친 독립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공화국 아메리카가 탄생하게 되었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1등 계급에게 권력을 달라!
독립전쟁의 승리로 새롭게 탄생한 아메리카에 있어 ‘영국의 지배, 간섭’이라는 외부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여전히 해결해야 할 내부 문제는 산적해 있었습니다. 골치 아픈 하층계급의 문제, 흑인노예나 인디언의 문제뿐만 아니라 영국이라는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봉합되어 왔던 지배계급 내부의 대립과 갈등도 표출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아메리카는 13개 주의 느슨한 연합체 수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역별로 강력한 지배세력이 존재하고 독자적인 지배체제를 갖춘 독립된 주들을 하나의 민족국가 체제 안에 통합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공동의 적 앞에서 형성되었던 응집력이 이제는 자신의 기득권을 중심으로 대립하고 있는 조건에서 모든 주들이 인정하고 승복할 수 있는 강력한 지도체제, 즉 단일 정부를 수립하고 헌법을 제정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먼저 이들은 통일된 헌법을 만들기 위해 각 주의 대표 55명으로 구성된 제헌의회를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 헌법이 민주주의와 평등을 지향하는 최고의 법이라고 찬양하지만 당시 제헌의회에 참가한 대표들의 면면을 볼 때 그 법에 어떤 세력의 이해관계가 반영되었을지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20세기 초의 역사가인) 비어드는 헌법을 작성하기 위해 1787년에 필라델피아에 모였던 55명의 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사고를 연구함으로써… 그들 대다수의 직업이 법률가였다는 점, 대부분이 토지, 노예, 제조업, 해운업 등에 종사하는 부자였다는 점, 절반이 이자놀이를 하는 전주였다는 점, 55명 중 40명이 정부 채권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 등을 재무부 기록을 통해 밝혀냈다.… 제조업자는 보호관세를, 금융업자는 채무상환에서 지폐 사용의 중단을, 토지 투기업자는 인디언 토지를 침범할 경우에 보호를, 노예소유주는 노예반란이나 탈주를 방지할 수 있는 연방의 보장을, 채권소유자는 채권 상환을 위해 전국적 과세를 통해 돈을 조달할 수 있는 정부를 요구하거나 원했던 것이다. 비어드는 네 개의 집단, 즉 노예, 계약하인, 여성, 무산자들은 제헌회의에 대표를 보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제헌회의는 이들 집단의 이해를 반영하지 않았다.”(미국민중사, 하워드 진)
 
“인민은 난폭하고 변덕스러우며 올바른 판단이나 결정을 하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1등 계급에게 뚜렷하고 영속적인 몫을 부여하라2)”는 지배계급의 요구대로 헌법이 작성되었습니다. 재산을 가진 자만이 투표를 할 수 있었고, 여성과 인디언, 흑인노예들은 제외되었습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13개 주 중에서 9개 주 이상이 승인하면 채택하기로 한 헌법안은 격렬한 논쟁 속에 휘말리게 됩니다. 각양각색의 이해관계가 충돌했지만 크게는 대농장을 소유하며 노예를 거느리고 있던 남부의 지배세력과 상업과 제조업, 금융업 등을 통해 돈을 벌어들인 북부의 지배세력간의 이해관계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오랜 대립과 논쟁, 그리고 각각의 이해관계를 절충한 수정헌법이 추가되어서야 연방헌법이 통과되었고 새 헌법에 따라 총선거가 치러지게 됩니다. 1789년 4월 30일, 초대 대통령으로 뽑힌 조지 워싱턴이 취임선서를 함으로써 신대륙 최초의 연방정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연방정부의 탄생은 가장 강력한 백인 남성 중심의 자본주의 국가가 출현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검둥이들이 유권자나 배심원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상인과 지주들을 주주로 둔 (영국) 특허회사들이 신대륙에서 막대한 이익을 기대하고 개척민을 파견한 것이 미국의 시초라고 할 때, 미국이라는 국가는 애초부터 이윤을 목적으로 한 자본의 요구가 낳은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들 개척회사들은 영국 왕으로부터 경제적 권리만이 아니라 정치적·사법적 권리까지 부여받았고 국가의 권한을 이양 받은 자본의 대리인들이 신대륙을 지배하면서 미국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각지에 근거지를 마련한 이들 ‘건국의 아버지’들은 점차 그 지역에 가장 적합한 산업을 발전시켜 왔고 신대륙에는 여러 개의 ‘독립적인’ 지역 국가들이 형성되어 왔습니다. 독립 이후 연방정부를 구성하는데 핵심은 광대한 영토와 주별로 다양한 법체계, 관습과 제도 등을 하나로 통일시켜 ‘단일한 시장’을 형성하는 문제였는데, 이것이야말로 미국의 경제발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봉건영주들이 난립하여 통일된 시장의 형성과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자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형성했던 다른 자본주의 나라들의 경로와도 일치하는 요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배 세력들의 이해관계를 절충하고 봉합한 연방 헌법은 처음부터 분쟁의 불씨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산업적 토대의 차이로부터 비롯되는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됩니다. 남부 지역은 면화, 사탕수수, 담배 등을 중심으로 산업이 발전하였는데 특히 1793년 휘트니가 목화씨를 빼내는 기계인 조면기를 발명한 이래 면화재배가 커다란 붐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로 인해 남부 지역에서는 대규모 농장(플랜테이션)이 발전했고 농장주들은 아프리카에서 사냥(!)해 온 흑인노예를 대대적으로 부리고 있었습니다. 노예노동을 통해 남부의 지배세력은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그 결과 1860년대에 이르면 남부지역만 따져도 세계에서 네 번째로 부유한 나라가 되어 영국을 제외한 모든 유럽 국가를 1인당 소득에서 앞지르게 됩니다.
반면 직물, 목재, 의류, 피혁 및 모직물 등의 제조업과 상업, 금융업이 발달해 있었던 북부 지역은 특히 유럽의 산업혁명이 빠른 속도로 미국으로 유입되면서 기계 산업이 급속하게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으며 그 대부분을 이민 노동자에 의지해 왔습니다.
특히 1800년대 초·중반에 몰아닥친 아일랜드의 대기근 등으로 수백만 명의 이민자들이 몰려 들어왔고 이들은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하고 있던 북부 지역의 자본가들에게 커다란 이윤을 안겨줍니다. 그런데도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남부의 노예 노동력은 북부의 자본가들에게는 커다란 유혹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부 농장지대에 묶여 있는 수백만의 노예들이 풀려난다면 엄청난 신규 노동력이 공급될 것이고 그렇게만 된다면 더욱 싼 값에 노동자를 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흑인노예를 둘러싼 남과 북의 이해관계는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그 불씨는 연방정부의 구성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물론 연방정부의 정치가들의 입장에서는 연방정부를 존속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에 노예문제를 둘러싼 대립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을 막는데 많은 애를 쓰게 됩니다. 대표적인 정치가가 바로 ‘에이브러햄 링컨’입니다.
흑인노예를 해방시킨 박애주의자로 널리 알려진 링컨. 그러나 그의 발언과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명성에 전혀 어울리지 면모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종 차별을) 버리고 이 땅 전역에서 한 국민으로 단결해 다시 한 번 일어서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선언합시다.”(1858년 7월 상원의원 선거운동 당시 일리노이 주 북부에서의 발언)
“저는 어떤 식으로든 백인과 흑인 사이에 정치, 사회적인 평등을 이루는 일에 찬성하지 않으며 찬성한 적도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검둥이들이 유권자나 배심원이 되게 하거나 공직 자격을 부여하거나 백인과 결혼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등에 대해 저는 찬성하지 않으며 한 번도 찬성해 본 적이 없습니다.”(1858년 9월 일리노이 주 남부에서의 발언)
 
그는 흑인노예의 고통을 새기고 그들의 인권을 위해 노력했던 것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연방국가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단지 그것을 활용했을 뿐입니다.
“이 싸움에서 제가 견지하는 최대의 목표는 연방을 지키는 것이며 노예제를 지키거나 파괴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한 명의 노예도 해방시키지 않고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고, 모든 노예를 해방시킴으로써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며 일부는 내버려둠으로써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역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1862년 뉴욕 트리뷴 주필인 그릴리에게 보낸 편지)
 
이처럼 남부 대지주들과 북부 자본가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평화로운 지배체제를 유지하려고 애쓰던 링컨이었지만 남부의 주들이 연방에서 탈퇴를 선언하자 1861년 남부에 대해 선전포고를 합니다. 남북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도 여전히 노예주들을 회유하기 위해 ‘노예제도에 대해 간섭할 의사가 없음’을 공공연하게 밝히던 링컨은 전쟁이 격화되고 자신의 지지기반이 흔들리자 비로소 노예제를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과 화력으로 북군을 몰아붙이는 남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남부 지역에 존재하는 흑인들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마침내 1863년 1월 1일 노예해방령이 발표되었고 이 발표는 흑인병사를 모집하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수십만의 노예들이 탈주하여 북군에 입대했으며 남부 지역에서는 수많은 노예들이 반란에 나섰습니다. 남북전쟁 기간 동안 20만 명의 흑인이 북군에 입대하여 4만여 명이 전사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링컨의 노예해방은 물론, 그러한 대의명분을 앞세워 시작된 남북전쟁의 본질은 흑인노예의 인권과 노예제도의 폐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과 북의 지배세력 간 이해관계가 폭력적으로 충돌한 지점에서 북부 자본가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정치책략에 불과한 것입니다.내막이 이렇다보니 노예해방을 앞세웠던 북군이 승리한 이후에도 흑인들의 조건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남북전쟁의 승리 이후에도 흑인들에 대한 차별정책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고, 정부가 나서서 흑인들의 거주지와 영토를 도로 빼앗아 남부의 백인 소유자들에게 돌려주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심지어 인종주의에 찌든 일부 백인들이 KKK단(Ku Klux Klan)이라는 테러집단을 조직하여 흑인들에 대한 공공연한 린치, 살인을 일삼지만 정부는 수수방관합니다. 흑인들의 차별을 금지하는 각종 법률들이 대법원에 의해서 공공연히 번복되고 심지어는 1900년까지 남부 주들에서 흑인의 공민권을 박탈하고 분리를 인정하는 법령들이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 1863년 7월1일부터 사흘간 벌어진 게티스버그 전투. 양쪽 각각 2만 명 이상의 전사자를 낸 이 참혹한 전투에서 남군은 참패하고 북군이 전쟁 승리의 기세를 잡게 된다. 이 전투가 끝나고 4개월 후 전몰자 추도기념식을 하면서 링컨 대통령이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을 한다.
 
지배계급의 분할통치, 인종주의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미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반인륜적 인종주의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처음부터 백인과 흑인 사이에 (원초적) 갈등이 존재했던 것은 아닙니다. 흑인에 대한 차별정책, 백인의 우월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인종주의는 식민지 내부의 계급갈등을 희석하고 왜곡하기 위한 백인 지배계급의 분열정책이 시간이 흐르면서 백인 전체에게 먹혀든 결과입니다. 이러한 인종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각종 사이비 이론들이 동원되었고, 분열주의를 뒷받침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인류사회가 계급사회로 들어서면서 소수의 지배계급이 절대 다수의 피지배계급을 지배하고 통치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가 바로 ‘분할통치전략’입니다. 인종의 차이는 물론 피지배계급의 성적, 종교적, 지역적 차이를 차별화하여 서로 단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노동자들 내부에서도 본토노동자와 이주노동자, 숙련노동자와 미숙련 노동자,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대기업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를 갈라놓아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식민지 초기에 흑인은 물론 상당수 백인들도 노예상태에 있었으며 참을 수 없는 가혹한 조건에서 노동하고 있었습니다. 흑백을 가릴 것 없이 구타와 매질이 흔히 있었고 여성들의 경우에는 주인에게 강간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초기에 백인(노예)들은 흑인노예들과도 잘 어울렸으며 인종을 뛰어넘는 사랑을 나누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백인 지배계급은 이러한 사랑을 ‘검둥이를 비롯한 하녀와의 범죄적인 성관계’로 규정, 인종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령을 선포하고 이들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사생아로 공표하는 등 흑백교류를 막기 위해 부단히 애를 씁니다.
각지에서 계약하인들의 폭동, 도주가 끊이지 않았고 흑인노예와 백인하인들이 합세하여 주인에게 저항한 사례도 적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다 목수, 조선소 노동자, 제빵업자 등 하인 신분이 아닌 자유로운 백인 노동자들의 투쟁도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신대륙 아메리카는 계급투쟁의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심각한 노동력 부족으로 아프리카에서 대거 사냥해 온 흑인노예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자 백인 지배계급은 커다란 위기의식을 갖습니다. “우리의 검둥이들을 감독하거나 검둥이들의 폭동을 진압할 백인이 없다”는 그들의 불안감은 결국 새로운 지배, 통치도구를 개발해내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바로 백인들과 흑인노예들을 이간질시켜 서로 단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식민지 관리인들이 1721년 영국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최근 흑인노예들이 폭동을 일으켜 거의 새로운 혁명을 이룰 뻔했는데… 향후에는 더 많은 백인 하인들을 잘 대우해 주도록 하는 몇 가지 새로운 법률을 제안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후 백인 지배자들이 백인 하층계급들에게 흑인보다 조금 더 많은 푼돈을 얹어주고 흑인을 감시, 관리하는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흑백간의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게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지배계급의 분할통치전략은 훌륭하게 먹혀들어 노동조합에서조차 흑인들의 가입을 허락하지 않아 결국 노동조합의 힘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이 나라에는 전쟁이 필요하다네
남북전쟁을 통해 아메리카 전역을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하고 강력한 중앙집중적 권력을 형성한 미국 부르주아지들은 본능적으로 전쟁이 갖는 유효성을 깨닫게 됩니다.
대량살상력을 가진 성능 좋은 포탄과 불을 뿜어대는 기관총 등이 동원되어 최초의 현대전이라 불리는 남북전쟁은 3,000만 미국 인구 중에서 100만 이상의 사상자를 낸 엄청난 인명피해를 남기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참한 외형 뒤에는 ‘전혀 다른 성공’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청년들이 전장에서 비참하게 죽어갈 때 24살의 건장한 청년 J.P. 모건은 전쟁을 통해 엄청난 이득을 얻습니다.
300달러로 자신 또래의 목숨을 사서 대신 군대에 내보낸4) 모건은 총을 들고 전장에서 애국하는 방법보다 돈을 벌어 ‘애국(?)’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탁월한 경제적 감각으로 통화상황을 예견한 그는 미리 많은 양의 금을 사 두었고 북군의 거듭된 패배로 인해 북부의 통화사정이 어려워지자 금값이 폭등해 많은 돈을 벌어들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낡고 고장 난 정부 소유의 소총들을 헐값에 사들였다가 다시 정부에게 비싼 값으로 되팔아 엄청난 폭리를 취합니다. 록펠러, 카네기 등 미국 자본주의를 개척해 나간 쟁쟁한 부자들은 모두 이 시기에 군대 징집을 피하고 대신 전쟁을 이용하여 떼돈을 벌어들인 사람들입니다.
전쟁은 엄청난 군수물자를 필요로 했고, 군대의 수송과 보급을 위한 철도 건설, 교신을 위한 통신망의 가설 등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신흥 부르주아지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전쟁은 한편에서는 수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괴물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 대가로 엄청난 부를 안겨주는 요술단지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괴물에 짓밟힐 것인가 요술단지를 차지할 것인가 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사항이라기 보다는 얼마만큼의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에 좌우되지만 이제 미국의 경제발전에 있어서 전쟁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인디언들과의 숱한 (영토)협정과 번복5), 그리고 강제 이주 등을 통해  체계적으로 인디언들을 추방·멸족시킨 미국 정부는 1890년 ‘운디드니 학살6)’을 끝으로 내륙국경 설정이 완료되었다고 공식 선언합니다.
이 말은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어 오던 인디언 사냥과 영토 확장 사업이 완료되었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더 이상 확보할 땅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새로운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아메리카 대륙을 넘어서 세계적 차원의 개척 사업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당시 대통령이던 루즈벨트는 자신의 친구에게 “우리끼리만 은밀하게 하는 얘기인데… 이 나라에는 전쟁이 필요하다네”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미국은 처음에는 자국 기업가나 상인을 보호한다는 아주 원시적인 명분을 내세워 침략했지만, 이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주권·민주주의·인권이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걸고 전쟁7)을 벌이는 방법을 개발하게 됩니다. 1899년에 입안된 이른바 ‘문호개방(Open Door)’ 정책이 바로 그것입니다.
 
제국주의 팽창정책 노골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우리 민족의 사명, 세계를 문명화한다는 사명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는 앨버트 베버리지 상원의원의 발언은 미국 지배계급의 혈관에 흐르고 있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제국주의 확장정책의 심장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부로 계속 팽창해 대륙 전체를 손에 넣는 것은 신이 미국인들에게 베풀어 주신 ‘명백한 운명’이라는 주장은 “(야만인들을) 교육시키고 정신을 앙양하고, 개화시키고, 기독교로 개종”시키자는 문호개방 정책을 거쳐 부시의 ‘악의 축’과의 ‘성전’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미국의 기독교는 선교사를 파견하여 미국 정부와 기업의 정보원으로 활동하게 하는 등 제국주의 팽창정책에 노골적으로 복무하게 됩니다.
이미 이 시기에 이르러 미국은 세계 최고의 강대국으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1912년 당시 미국은 국부에서 영국의 2배, 프랑스의 3배를 넘어섰으며,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22년에 이르면 영국의 3.5배, 프랑스의 5배에 달하게 됩니다. 이처럼 엄청난 경제 팽창은 한편으로 그것을 소화해 낼 시장을 필요로 했고, 시장개척을 위한 전쟁은 다시 미국경제의 활력소로 작용하게 됩니다.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 쿠바를 손에 넣었고, 스페인령 푸에르토리코, 하와이 제도를 병합하게 됩니다. 또한 괌, 필리핀 등을 집어 삼켜 태평양 방면을 온전하게 자신의 정원으로 접수합니다. 태평양 방면으로의 진출은 일본, 한국을 비롯한 중국 대륙까지 넘보는 계기가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는 결정적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입니다. 특히 2차 세계대전은 ‘반 파시즘8)’이라는 대의명분과 맞물리면서 미국에게 엄청난 경제적, 정치적 이익을 안겨준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할 때도 눈 깜짝하지 않았고 무솔리니가 이디오피아를 침공할 때도 미국 기업이 이탈리아로 석유를 수송하는 것을 막지 않았던 미국이 전쟁에 뛰어든 것은 1941년 12월의 하와이 공습 때문입니다. 가만히 있는 미국을 일본이 건드렸기 때문이 아니라 일본이 미국의 잠재적 시장인 중국을 침공하고 미국 경제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동남아시아를 위협하였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하와이 공습은 기다리고 있던 미국에게 빌미를 준 것일 뿐입니다. 이러다보니 루즈벨트가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고 실제로 진주만 공격 2주 전에 백악관 회의에서 전쟁을 예견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웠다는 기록도 존재합니다.
감히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건드린 일본은 철저하고도 참혹한 응징을 받게 됩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리틀 보이’라는 애칭의 폭탄이 투하된 지 사흘 만에 다시 나가사키에도 ‘패트 맨’이라는 폭탄이 투하됩니다. 인간이 발명한 전쟁무기 중 가장 처참하고 잔혹한 무기인 핵무기의 등장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단 두 발로 15만 이상을 몰살시키고 수십만 명을 후유증으로 고통 받으며 죽어가게 한 무시무시한 핵무기의 위력은 미국의 군사적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세계 평화의 수호자로서 미국의 존재를 뚜렷하게 부각시킨 동력이 됩니다.
1945년 8월경에 이르면 일본은 항복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일본의 교신을 도청하여 일본 측이 모스크바 주재 대사에게 연합국과 강화협상에 착수하라고 지시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미국이 굳이 핵무기를 사용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히로시마에 우라늄 폭탄을, 나가사키에 플루토늄 폭탄을 떨어뜨린 것은 두 종류 핵폭탄의 위력을 실험하기 위한 것이라느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선택된 것은 경제활동과 인구가 집중된 도시이기 때문이라거나 당시 히로시마 시 교도소에는 미군 포로 12명이 갇혀 있었다는 사실 등 ‘미국의 반인륜’을 비판하는 근거들이 제기되고 있지만 미국이 거둔 정치·경제적 성과에 비하면 하찮은 오류일 뿐입니다.
 
“2차 세계대전은 미국을 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위치로 끌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의 효과적인 통제를 위한 조건도 창출했다.…전쟁은 농민에게는 가격인상을, (노동자에게는) 임금인상을, 그리고 1930년대를 그토록 위협했던 반란을 방지하기에 충분한 번영을 많은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었다.…가장 큰 소득은 기업의 이윤으로 1940년의 64억 달러에서 1944년의 108억 달러로 상승했다. 그러나 노동자와 농민들 역시 체제가 자신들에게도 만족스럽게 굴러가고 있다고 느낄 수 있도록 충분한 몫이 그들에게 돌아갔다.”(미국민중사, 하워드 진)
 
 
토론주제
 
1. 민중을 분열시켜 서로 대립하게 만드는 것은 지배계급이 민중을 지배·통제하는 가장 유력한 방법 중 하나입니다. 자본이 노동을 지배·통제하기 위해 사용하는 분열지배전략의 구체적인 사례를 찾아봅시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에 대하여 토론하여 봅시다.
 
2. 미국이 다른 나라를 침략할 때는 여러 가지 명분을 앞세우는데, 때로는 이러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사건을 조작하기도 합니다. 미국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면서 내세웠던 명분과 사건들을 찾아 봅시다.

<각주>
1)  제퍼슨의 노예였던 샐리 해밍스는 당시 14세의 어린 소녀로 제퍼슨과의 사이에서 6명의 자식을 낳았다. 물론 제퍼슨 가문은 이를 부정해 왔으나, 1998년 과학저널 <네이처>가 DNA 검사결과를 토대로 제퍼슨이 그들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99%라고 밝혀냈다.
2) 이 말은 당시 워싱턴을 보좌했던 알렉산더 해밀턴이 했던 것인데 그는 심지어 대통령과 상원의원의 종신제를 제안하기도 했다.
3) 재산에 따른 투표제한이 없어져 백인 남성이 투표할 수 있게 된 것은 1850년대에 이루어졌고, 흑인의 참정권은 1870년에, 여성의 투표권은 1919년에 와서야 인정되었다. 그러나 흑인의 참정권은 문자해독시험을 치르게 하거나 선거세를 지불하게 하는 등의 방법으로 지속적으로 제한하여 오다가 1960년대 중반에 와서야 완전하게 보장된다.
4) 당시 징집법은 ‘돈으로 다른 사람을 사서 군대에 보내는 것’이 가능했다. 심지어 뉴욕의 신문에는 “신사 여러분! 소개소나 은행 혹은 일반 지원병 협회의 사무실에 주문을 해 주시면 대신 군에 갈 사람을 신속히 마련해 드리겠습니다.”라는 광고가 실리기도 했다.(알려지지 않은 미국 노동운동 이야기 참조)
5) “1832년까지 인디언과 백인 간의 지루한 외교 관계의 역사가 있어 왔지만 백인 측에 의해 곧 파기되지 않은 조약은 단 한 건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그럼에도 ‘영구적인’ ‘영원한’ ‘항상’ ‘태양이 떠오르는 한’이라는 표현으로 장엄하게 미화됐다…미합중국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이 약속은 며칠 만에 깨져 버렸다.”(미국민중사, 하워드 진)
6) 1890년 인디언 수족의 제사의식을 빌미로 투입된 미 연방군이 어린아이를 포함한 200여명을 학살한 사건
7)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김동춘
8) 역사는 2차 세계대전을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파시즘과 맞선 전쟁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중에 행한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들을 놓고 볼 때, ‘파시즘 대 민주주의’라는 구도는 이 전쟁을 미화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하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전쟁 중 미국이 재미 일본인들에 행한 소개조치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2년 대통령령 9066호를 통해 태평양 연안지역에 살고 있던 일본계 미국인 11만 명을 체포해 수용소에 3년 이상 구금했다. 대다수가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일본인 2세였던 이들을 체포, 구금하는데 영장이나 기소절차는 필요가 없었다. 히틀러의 유태인 소개, 학살정책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등록일: 08-07-10

 

 

 

 

 

 

 

[기획연재]아메리카 대륙에서 꽃 피운 자본의 왕국(하)

 

 

  <기획연재> 역사로보는달러의정치경제학
  여상경 편집장 2003jmt@hanmail.net

 
“우리 미합중국 인민은 더욱 완벽한 연방을 형성하고 정의를 확립하며 국내의 안녕을 보장하고 공동의 방위를 도모하며 국민의 복지를 증진하고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자유와 축복을 확보할 목적으로 이 미합중국 헌법을 제정한다.”
 
1787년 9월17일, 필라델피아에서 아메리카 연방회의가 열린지 16주 만에 42명의 주 대표 중 39명의 서명으로 제정된 미합중국 헌법의 전문입니다. ‘완벽한 연방정부’ 구성에 대한 염원이 담긴 이 헌법은, 그러나 서로 격렬히 대립하는 이해관계의 각축 속에서 오랜 논쟁과 우여곡절을 거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헌법의 제정은 미합중국의 출발을 알리는 축포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폭력을 통해서야 마무리된, 격렬한 갈등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아메리카에 뿌려진 자본의 씨앗
콜럼버스의 발견 이후 아메리카 대륙은 새로운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한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남미는 이미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분점하고 있었고, 북미의 몇 몇 지역도 17세기 초부터 네덜란드, 프랑스 등이 영토선을 긋고 정착하고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늦게 제임스타운 식민지를 건설한 영국의 이민 사업은 다른 나라와 달리 정부가 주도하지 않고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설립된 주식회사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정치적 탄압1)이나 종교적 이유, 또는 모험과 황금을 찾아 나선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이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아메리카 행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종획운동으로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과 부랑자들, 도시의 빈민들인 이들은 식민지 개척을 위해 만들어진 주식회사와 계약을 맺고 신대륙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들 주식회사는 영국 국왕의 특허장을 가 지고 있었습니다. 이 특허장에 따라 주식회사와 이주민 대표(대부분 회사의 대리인)에게는 영국 국왕의 전권이 넘겨졌는데, 이것은 이들 회사와 주주들, 회사의 대리인들이 식민지의 실질적 지배자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영국 국왕은 이들 주식회사가 영국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한 식민지를 자신의 발 아래 둘 수 있다는 계산을 했겠지요.
이렇게 아메리카 식민지는 처음부터 이윤획득을 위한 자본의 요구에 따라 기획되었고, 자본의 이해관계에 맞게 설계되어 왔습니다. 이후 아메리카의 역사는 가장 강력한 신흥 자본주의 국가의 탄생과 성장의 발자취를 보여주게 됩니다.
그런데 식민지에 정착한 초기 이주민들의 관계가 원활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매사추세츠 식민지에서 발생한 사건인데, 이곳은 1620년에 이주한 ‘필그림스(청교도)’들이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이들의 애초 목적지는 버지니아(영국 최초의 식민지였던 제임스타운이 발전하여 버지니아 주가 된다)였지만 폭풍을 만나 그보다 훨씬 북쪽인 매사추세츠에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102명 중 35명이던 청교도들을 제외한 나머지 개척민들은 원래 계약 장소인 버지니아로 떠나고 청교도들은 그 곳에 눌러앉게 됩니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청교도들은 계약을 위반한 것이지요. 어찌 되었건 이들이 혹독한 자연환경을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극복하고 정착하게 되자 많은 청교도들과 개척민들이 매사추세츠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배타적인 종교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이주민들을 엄격하게 통치합니다. 그런데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종교적 통치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로저 윌리엄스라고 하는 젊은 목사가 대표적입니다. 그는 ‘국왕의 특허장을 받았다고 해서 인디언의 땅을 탈취하는 것까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고 주장하면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을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선언2)을 하게 되지만 결국 추방되고 맙니다. 이후 인디언으로부터 땅을 사들인 그는 정교분리, 신앙의 자유를 표방하는 식민지를 개척하게 되는데 이곳이 지금의 로드아일랜드 주입니다.
이 외에도 보다 좋은 땅과 환경을 찾아 많은 개척민들이 여러 곳으로 떠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아메리카 대륙의 각지에 다양한 식민지들이 건설됩니다. 물론 이들이 한 곳에 농사를 일구고 정착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자신의 땅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로저 윌리엄스도 식민지를 개척한 후 영국 정부의 인가를 받아 로드아일랜드의 총독이 되었듯이 반드시 정부(또는 주식회사)의 인가를 받고 일정한 계약을 맺어야만 그 권리가 인정되었습니다.
이제 아메리카라는 더 없이 훌륭한 토양에는 막 싹을 틔울 준비를 갖춘 자본주의의 종자들이 뿌려졌고, 발아를 위한 조건이 성숙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낳아준 체제와 맞서다
신대륙을 향한 이민자들의 행렬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1680년대 이후로는 전쟁을 피해 온 수많은 유럽 난민들과 정치적 박해를 피해 온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식민지 인구가 증가하게 됩니다. 1690년대에 25만이던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나 1775년경에는 250만을 넘어서게 됩니다. 영국 본토의 지원과 생필품이 필요했던 초기에 이주민들은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모여 살았지만, 이주민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서점운동(westward movement)’이라 불리는 미국 정부의 확장정책과 맞물리면서 그 범위가 점차 내륙으로 확대되어 갑니다.
 
◀ 미국 독립당시의 13개 주는 주로 해안을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성조기에 있는 13개의 붉은 줄은 독립 당시의 주를 의미한다. 출처_ 오마이뉴스
 
대체적으로 따뜻한 기후와 풍부한 강우량, 기름진 토양을 가진 남부 지역에서는 농업 중심의 사회가 발전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면화 재배지였던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중심으로 버지니아, 메릴랜드, 조지아 등이 그러한 지역입니다. 이들 지역에서는 면화, 사탕수수, 담배, 쌀 등이 생산되었는데 무엇보다 지속적이고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습니다. 많은 수의 이주민들과 아프리카에서 불법적으로 납치된 흑인노예들이 플랜테이션이라 불리는 대규모 농장에 팔려가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특히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아프리카 흑인노예의 노동력은 남부의 대농장주들에게 엄청난 이윤을 안겨주는 노다지였습니다.
반면 뉴욕, 펜실베이니아, 뉴저지 등이 위치한 아메리카 동북부 지역은 돌이 많고 토질이 척박한데다가 겨울이 길어 농사를 짓기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삼림이 우거져 이를 이용한 목재가공업, 조선업 등이 발달했고 특히 무역과 상업, 금융업 등이 발달했습니다.
이처럼 식민지 개척자들은 자신들이 정착한 지역의 기후, 토양, 지형 등에 따라 독특한 경제를 발전시켰고 그것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해 나갑니다. 물론 엄연히 영국의 식민지였기에 ‘국가’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영국의 지배로부터 상당히 독립적인 자기 완결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8세기 중반을 넘어서면 이미 대부분의 주들이 독자적인 군대(육군은 물론 해군까지)와 다양한 재화들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는 외국과 독자적인 교섭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하나의 대륙에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던 각각의 공동체들은 서로간의 교역을 통해 교류를 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지 어떤 공동체적 동질성에 근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오랜 세월동안 하나의 영토에서 공통의 언어, 문화, 관습 등을 공유하며 형성되어진 역사적이고 혈연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다양한 인종, 다양한 민족, 다양한 국가 출신의 이민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형성된 인위적인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유일한 끈은 ‘영국과의 관계’였습니다. 영국 본토에서는 이들 식민지에 자신들이 임명한 관리들을 파견하여 세금을 거두고 저항할 시에는 본토에서 군대를 투입하여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1754년에 시작된 프랑스와의 7년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정부는 그동안 소홀히 하고 있었던 식민지 관리 정책을 강화하게 됩니다. 승리의 대가로 프랑스가 차지하고 있던 캐나다 일부와 미시시피 강 유역까지 차지함으로써 2배로 넓어진 영토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훨씬 많은 돈과 행정력, 새로운 식민지 관리체계가 필요했을 테니 말입니다.
그 일차적인 조치가 조세관리인데, 식민지에 설탕세, 인지세 등 각종 세금을 부과하게 되자 이에 불만을 느낀 식민지 지배계급의 저항에 직면하게 됩니다.(‘아메리카 대륙에서 꽃 피운 자본의 왕국’ (상) 참조)
강력한 대영제국에 맞서기 위해서는 식민지의 단결이 필요했습니다. 식민지 지배세력들은 각 주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벌어지고 있던 대영 저항운동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단합된 힘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찾고자 했습니다. 보스턴 차 사건을 계기로 영국과 긴장이 높아지는 가운데 식민지 대표들이 필라델피아에서 개최한 2차례의 대륙회의와 그 결의로 시작된 독립전쟁은 식민지의 단결을 향한 첫 번째 계기가 됩니다.
 
▶조지아 주를 제외한 12개 주에서 55명의 대표가 참여한 1, 2차 대륙회의는 대영투쟁과 독립전쟁의 구심점이 된다.

아메리카는 16세기경부터 세계를 제패해 온 대영제국이 낳은 체제입니다. 식민지를 수탈해서 벌어들인 막대한 이윤을 불리기 위해 찾아낸 새로운 투자처가 바로 아메리카였던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재테크 전략’은 영국이 지난 세기동안 이룩한 성과를 자양분 삼아 급속하게 성장하기 시작했지만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영국의 낡은 체제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영국이 수백 년에 걸쳐 집적한 자본주의라는 유전자는 신대륙에 급속하게 이식되었고, 아직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곧 신대륙이 가진 풍부한 에너지와 결합하여 빠른 속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고비를 거쳐야만 했습니다.
 
통일로 가는 험난한 여정
프랑스와의 동맹,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합세 등 유리한 조건 속에서 치러진 아메리카 독립전쟁은 7년여 만에 미국의 승리로 끝을 맺게 됩니다. 이제 그 여세를 몰아 독립선언서에 밝힌 대로 ‘연합한 식민지들의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를 완성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외부의 적이 사라지자 내부의 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동안 식민지 각 주들을 하나로 단결시키는데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었던 지배계급간의 이해관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 미합중국 헌법
 
그 첫 번째 충돌은 새로이 탄생하게 될 통일국가의 ‘헌법’을 둘러싸고 전개됩니다. 국가운영의 기본원리, 국가조직 및 국민기본권을 보장하는 가장 근본적인 규칙들이 헌법에 담겨있다고 할 때, 헌법에 어느 계급의 이해관계가 담겨지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국가운영에서 주인으로 나설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아메리카의 상황을 놓고 보자면, 거의 0에 가까운 비용으로 흑인노예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부를 누리던 남부지역의 대농장주들과 제조업, 무역과 상업을 통하여 신흥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북부의 자본가들이 격돌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집하였고 헌법제정과 국가건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때로는 격렬한 논쟁으로, 때로는 연방 탈퇴로 배수진을 치면서 각축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13개 주가 독립적으로 행사하고 있던 지방의 관할권과 중앙정부(이하 연방정부)의 권한을 조정하는 것도 커다란 문제였습니다. 이미 각 주에서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던 지배세력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권한을 연방정부로 넘겨주는 것이 탐탁지 않았을 테니까 말입니다. 오죽하면 조지 워싱턴조차 파리조약(독립전쟁을 종결하고 미국 독립을 승인한 영국과의 강화조약)부터 미국 헌법이 기초될 때까지의 과정을 “주들이 겨우 ‘모래로 만든 줄’로 연결되어 있다”3)고 썼을까요.
 
◀ 1862년 오두막에 앉아있는 남부의 흑인노예들. 흑인노예의 노동력은 남북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이러한 이해관계의 충돌과 논란 끝에 ‘마침내 짧은 문서 속에, 그 때까지 인간이 고안해 낸 가장 복잡한 정부의 조직을-명확히 정의된 한정된 범위 내에서 최고의 정부조직을 구체화하는 초안을 완성’4)하게 됩니다. 이 초안에 따르면 입법, 사법, 행정의 3부가 설치되고, 영국 의회와 같은 양원제(상원은 각 주에서 동일한 수의 대표를 선출하고 하원은 인구비례대표제로 선출)로 운영하게 됩니다. 또한 연방정부에게 군사, 외교 등은 물론 과세, 관세, 도량형, 특허권, 주 사이의 교역을 규제하는 권한 등이 주어지게 됩니다. 더불어 주법과 연방법 사이의 불일치가 발생할 경우, 또는 연방정부의 결정을 주 정부가 존중하지 않을 경우 연방 헌법과 연방 의회의 해석에 따르게 하여 주 정부와 연방 정부의 관계를 조정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헌법 초안은 각 주 의회의 동의를 거쳐야 했습니다. 역시 오랜 논란과 수정, 첨삭(권리장전으로 알려진 10개의 수정조항을 추가)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채택되었고, 마침내 초안이 나온 지 1년 반이 지난 1789년 3월4일 조지워싱턴을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미국 연방정부가 탄생하게 됩니다. 각 주의 느슨한 연대를 지지했던 남부(반연방당, 이후 민주공화당을 거쳐 민주당으로)와 강력한 연방정부를 지지했던 북부(연방당, 이후 휘그당을 거쳐 공화당으로)의 대결에서 연방주의자들, 즉 신흥 부르주아지들이 정치적으로 승리-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이해관계를 절충·봉합5)한 상태에서 승리의 교두보를 확보-한 것입니다. 물론 완전한 승리를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은 여전히 산적해 있었으며, 그 두 번째 충돌은 ‘흑인노예’를 둘러싼 논란으로 불거집니다.
 
▶뉴욕 월스트리트에 있는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동상. 미국 건국 영웅의 동상이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월스트리트에 서 있다는 것이 상징적이다.
 
 
주식회사 아메리카의 탄생

이렇게 탄생한 아메리카 합중국이 발전된 자본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시장과 화폐의 통합은 물론 구체적인 법과 제도를 정비해야만 했습니다.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해밀턴은 강력한 연방정부를 통해 상업과 공업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주의 경계선을 넘지 못했던 은행의 한계를 극복하고 각 주에 지점을 둔 미국 중앙은행6)과 독립적인 조폐국을 설립했으며, 소위 ‘유치산업 보호론’을 내세워 강력한 관세제도를 두게 됩니다. 이와 함께 국채시장을 설립했고, 은행제도의 발전을 장려하는 등 미국의 금융시장을 현대화하는 데도 커다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본의 생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 미국 10달러 지폐에 그려진 알렉산더 해밀턴의 얼굴.
그는 미국 경제시스템의 기본 골격을 만든 사람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해밀턴은 <제조업에 관한 보고>라는 의회 보고서를 통해 ‘미국과 같은 후진적인 나라는 외국의 경쟁으로부터 유치산업을 보호하고 그 산업들이 자기 발로 설 수 있을 때까지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보호관세와 수입금지령, 보조금, 핵심 원자재의 수출 금지령, 산업 원자재에 대한 수입 자유화와 관세 리베이트, 발명품에 대한 포상과 특허 부여, 상품의 표준에 대한 법령 제정, 금융과 운송의 하부 구조 개발 등’7)을 추진합니다. 남부의 반대로 모든 내용이 시행되지는 못했지만 이후 외국 공산품에 대한 평균 관세가 5%에서 12.5%로, 그리고 1820년경에는 평균 40%까지 오르는데 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보호무역주의 조치들은 미국의 산업과 자본주의를 급속하게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됩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완전한 무역자유화와 시장 개방만이 최선인 것처럼 이야기되지만 미국의 예만 보더라도 국민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국가가 정책적으로 개입하여 주요 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은 지금도 보조금 지급, 고관세 등을 통해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슈퍼301조라는 보호무역법을 통해 강력한 무역보복조치를 취하기도 합니다.

 

▲ 미국 민주당의 상징인 당나귀와 공화당의 상징인 코끼리

보호무역을 주장했던 공화당에 비해 남부의 입장을 대변하던 민주당은 자유무역과 낮은 공산품 관세를 주장했는데 이후 수십 년 간 관세문제는 미국 정치의 가장 중요한 분쟁 요인이 됩니다. 지금의 민주당이 한미FTA의 의회비준을 거부하는 등 보호무역으로 기울고 있다고 하지만, 지난 역사적 과정을 놓고 볼 때 자국의 보다 큰 이익을 노리는 민주당의 정치적 공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의 양대 정당은 자기들끼리는 자유무역이니 보호무역이니 논쟁할 수 있지만 대외 정책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을 중심에 놓고 있다는 점에서 큰 차별성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롭게 발전하는 국내 산업과 외부적으로 조성된 경제적 환경은 관세율을 높여 국내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여론이 조성됩니다.
이때는 관세율을 높이는 데에 적기였다. 버몬트 주와 오하이오 주의 목양업자들은 영국에서 들여오는 양모로부터 보호받기를 원했다. 켄터키 주에서는 이 지방의 대마로 면화포장용 마대를 제조하는 새로운 산업이 스코틀랜드의 포장 제조업자들 때문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미 번창하는 제철공업의 중심지가 된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는 영국과 스웨덴의 철 공급업자에게 도전하고자 갈망하고 있었다.(미국 역사 개관, 편집 Howard Cincotta, 미국 공보원, 1994년)
한편 남부에서는 다른 형태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품종의 면화가 개발되고 특히 조면기가 발명되면서 남부의 면화재배가 큰 활력을 띠게 됩니다. 또한 산업혁명으로 말미암아 방직업이 크게 활기를 띠면서 면화에 대한 수요가 커졌고, 더불어 서부 개척과 함께 면화를 재배할 땅도 늘어나게 됩니다. 1850년에 이르러 남부는 세계 목화의 80% 이상을 재배하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1808년 노예무역의 폐지 이후 사라질 것으로 예상되었던 노예제도가 오히려 크게 활성화되어 더욱 확대되게 됩니다.
남부와 북부에서 전개되고 있던 다른 방향의 경제적 발전은 상충되는 이해관계를 내포하고 있었고, 결국 노예의 존재를 둘러싼 충돌로 발전하게 됩니다. 즉 북부에서의 공업의 발전은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는데, 북부의 자본가들은 흑인노예의 존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노예라는 사슬에서 풀려나 자유로운 임금노동자가 된다면 북부의 노동력 부족을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노예들이 풀려나면 광범위한 산업예비군이 형성될 것이고 그렇게만 된다면 더욱 싼 값에 노동자를 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농민들을 토지로부터 분리시켜 새롭게 대두되던 도시의 산업노동자로 몰아넣은 영국의 종획운동에 비견되는 조치라 할 수 있습니다.
노예제라는 경제외적 강제(이는 본질적으로 중세시대 봉건 영주들이 행사했던 신분적·경제외적 강제와 차이가 없다)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남기던 남부의 대토지소유자와 제조업, 무역과 금융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있던 북부의 부르주아지가 동일한 시대 공간에서 각자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던 탈-역사적인 현장이 바로 19세기의 아메리카였던 것입니다.
영토가 점차 넓어지면서 새롭게 형성되는 주를 노예주(노예제도를 주법으로 허용하는 주)로 할 것인가 자유주로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남부와 북부의 대립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됩니다. 남부와 북부는 새롭게 생기는 주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치열한 공작을 벌였으며 이것은 연방의회에서 자기 세력을 확대하려는 정치세력 간의 대립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일관되게 노예제의 존속을 지지해 온 남부의 민주당에 비해 노예 문제에 대해 기회주의적 태도를 취하곤 하던 휘그당이 몰락하고 새롭고 강력한 북부 정당인 공화당이 결성되기도 합니다. 공화당의 정책은 새롭게 생긴 모든 주에서 노예제도를 배제하는 것이었습니다.
몇 차례에 걸친 타협안으로 대립이 무마되곤 했지만,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점차 불가능해졌습니다. 마침내 노예제를 둘러싼 대립이 극적인 충돌로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1861년 발발한 남북전쟁입니다.
1860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당선된 A.링컨은 노예해방선언을 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북부 자본가계급의 이해를 확고히 대변하게 됩니다. 물론 그의 궁극적 목표는 흑인 노예의 인권과 해방이 아니라 미국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아메리카 대륙에서 꽃 피운 자본의 왕국’ (중) 참조)
남북전쟁에서 북군의 승리는 북부 공업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신흥부르주아지의 정치, 군사적 승리이자 아메리카에서 꽃피우기 시작한 자본주의의 승리이기도 했습니다.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완전히 통합적인 국가와 시장체제를 갖추게 된 미국의 자본주의는 본격적인 발전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 시민전쟁(Civil war)이라 불리는 남북전쟁은 유럽의
    시민혁명에 비견되는 부르주아 혁명이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 북군의 모습.
 
 
자본주의 폭주기관차, 아메리카
남북전쟁의 진정한 승리자는 ‘자본’이었습니다. 아래 기사는 그러한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전쟁터에서 패하지는 않았다. 우리 군대를 거꾸러뜨린 것은 다름 아닌 제이 쿡이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난 뒤 한 남군 장군이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필라델피아 출신의 채권 브로커였던 쿡이 어떻게 남북전쟁에서 북부 연방정부가 승리를 거두는 데 일등공신이 될 수 있었을까.
1857년에 시작된 불황으로 재정적자가 쌓인 결과 전쟁이 터졌을 때 연방정부는 거의 파산상태였다. 재정면에선 남부가 훨씬 더 여유 있었다. 그런데 1861년 4월 전쟁 발발 당시 하루 17만 2000달러의 지출도 감당하기 어려웠던 연방정부가 전쟁 말기에는 전쟁부 한 부처에서만 하루 200만 달러를 써댈 정도로 씀씀이가 커졌다.
연방정부가 인쇄기로 돈을 찍어내지 않고도 이런 엄청난 전비를 마련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 바로 쿡이다. 그는 연방정부에 돈을 빌려줄 의사가 없었던 뉴욕 월가의 은행들을 제치고 국민들에게 직접 국채를 판매한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국채를 50달러, 100달러의 소액으로 쪼개 일반 시민들도 국가가 발행한 유가증권을 살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애국심에 호소하는 광고 전략과 함께 쿡은 10억 달러가 넘는 국채를 팔았다. 연방정부가 지출한 전쟁 비용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국채 판매 방식에 대한 쿡의 혁신은 남북전쟁의 승패를 갈랐을 뿐만 아니라 미국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경제사학자인 존 스틸 고든은 <'부의 제국'>이란 책에서 '연방 국민의 5%를 일종의 소(小) 자본가로 변모시키고, 침대 매트리스 밑에서 죽어있던 자본을 해방시켜 생산적으로 소비될 수 있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8) (남북전쟁 승리 일등공신은 채권 브로커, 조선일보, 2008년 5월 3일자)
남북전쟁은 미국 경제를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새로운 발명과 기술혁신이 이어지면서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이와 함께 1780년대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물결이 미국으로도 밀려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수천 마일의 철도가 군대 수송과 보급을 위해 필요했다. 군대의 교신을 위해 수천 마일의 전신이 가설되었다. 새로 건설된 대공장들은 신기술을 활용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벨트와 직기를 덜커덕거리며 대량 생산을 계속하고 있었다. 특히 군복, 군화, 통조림 그리고 농기구 등이 그러했다. 최근까지 동력원이었던 서서히 육중하게 돌아가는 물레방아는 이제 완전히 과거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 석탄과 증기 그리고 철 등 혁명적 3대 동력은 1890년 중반까지 미국을 세계 공산품의 3분의 1을 생산하는 제1의 공업국으로 바꾸어 놓았다.(알려지지 않은 미국 노동운동이야기, 리차드 O 보이어, 하버트 M 모레이스 지음)

‘제2의 산업혁명’이라 불릴 만큼 격렬한 발전을 이룬 이 시기는 미국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시기 중 하나였습니다. 축음기를 비롯하여 전구, 전화, 타자기 등이 발명되었고 마차를 대신한 운송수단으로 자동차가 등장하였습니다. 철도 노선이 무서운 속도로 서부를 비롯한 미국 대륙 전체를 연결하고 있었고, 펜실베이니아에서는 세계 최초의 상업유전이 개발되었습니다. 애팔래치아 산맥에서는 엄청난 양의 석탄이 발견되었고, 피츠버그에서는 양질의 철광이 개발되었습니다. 특히 1850년대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금광과 유전을 찾아 나선 이들이 서부를 향해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을 고생만 하다가 헛물을 켰고 성공을 이룬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1925년에 제작된 찰리 채플린의 ‘황금광시대(The Gold Rush)’는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로 금광을 찾아 나선 찰리 일행이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가죽구두를 삶아먹는 장면은 당시 ‘캘리포니아 드림’을 꿈꾸며 길을 나선 이들의 비참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 황금광시대(The Gold Rush, 1925), 미국, 찰리 채플린 감독

그러나 ‘펜실베이니아에서 쏟아져 나온 석유는 록펠러를 갑부로 만들었고, 피츠버그의 철은 앤드류 카네기를 황홀하게 하였습니다.’(알려지지 않은 미국 노동운동 이야기) 서부개척의 시대는 철로의 개통으로 활짝 열리게 됩니다. 북부의 은행가들, 특히 1875년에는 J.P.모건이 앨라배마와 조지아 주에 있던 여러 철도노선을 사들이게 됩니다. 철도연장의 급격한 증가는 철과 석탄의 생산을 부추겼고, 이것은 다시 제철, 제강산업을 추동하게 됩니다. 대륙을 하나로 잇기 위한 건설 사업에는 수만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동원되었고, 이 과정에서 남북 전쟁에서 희생된 전사자 수와 맞먹는 수의 노동자들이 사막과 얼음산에서 죽어나갔습니다.
 
이러한 발전과 맞물려 도시도 번창했습니다. 1700년대 후반에 100만이 안 되던 도시인구가 1840년에는 1,100만으로 늘어났으며, 1860년에는 뉴욕인구만 100만으로 증가합니다. 대륙 각지에 공업도시가 건설되었고 이제 미국은 증기기관차만큼이나 거센 힘으로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나가게 됩니다. (계속)
 

▶ 미국 대륙횡단 철도 건설의 주역은 이주노동자들이다. 1만 명의 ‘노란 노동자(중국 노동자)’들과 3천 명의 아일랜드 노동자들이 캘리포니아에서 동쪽으로 시에라네바다 산맥과 록키 산맥을 넘어 철로를 부설했다. 유니언 퍼시픽 철도회사의 건설현장.

 
각주>
1)  1630년대에는 찰스1세의 폭정으로, 그 후 1640년대에는 이에 대한 올리버 크롬웰의 반란으로 왕당파 기사당원들이 버지니아로 도망치기도 했다.
2)  미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케네스 C 데이비스, 이순호 역
3)  미국 역사 개관, 편집 Howard Cincotta, 미국 공보원, 1994년
4) 위의 책. 초안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격렬한 이해관계의 충돌과 봉합과정이었다. 예컨대 각 주가 내야할 세금을 산정함에 있어 노예가 적은 북부 주들은 노예들도 세금 산정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남부 주들은 이에 반대했다. 거꾸로 인구비례로 선출하는 하원 의석수를 결정할 때는 흑인을 인구에 포함시키는 문제에 있어 남과 북의 주장이 세금문제 때와는 정반대였다. 결국 이 논란은 하원 의석수 계산에 있어 흑인 노예 수의 3/5을 포함시켜 배당하는 것으로 봉합되었다.
5) 예컨대 초대 내각을 구성하는데 국방부 장관에는 당시 남부를 대표하는 토머스 제퍼슨이, 재무부 장관에는 상업과 공업의 이익을 추구하는 북부의 알렉산더 해밀턴이 임명된다. 그런 점에서 연방헌법의 제정과 연방정부의 구성은 ‘남부 노예소유주의 이해와 북부 화폐소득자의 이해를 조정한 타협의 결과물’이었다. 이 두 집단은 ‘미국식 체제에서 양당제도라는 장기적으로 근본적인 합의를 예고하고 있었다.’(미국 민중사 참조, 하워드 진)
6) 북부와 남부의 정치세력이 가장 첨예하게 맞붙었던 논쟁 중 하나가 ‘중앙은행’의 설립 문제였다. 남부의 민주당은 중앙은행의 설립을, “금융을 장악해 소수 특권층에 이익을 주고 권력을 독점하려는 자본가들의 음모”라며 반대하였다. 결국 미국 최초의 중앙은행은 20년 동안만 영업허가를 받고 한시적으로 운영되었으며 안정적이고 상설적인 중앙은행의 설립까지는 더 많은 시간과 논쟁이 필요했다.
7) 나쁜 사마리아인들, 장하준, 2007년.
8) 전쟁비용의 중개 수수료로 2천만 달러를 벌어들인 제이 쿡은 은행사업으로 번창하다가 대륙횡단철도인 ‘노던퍼시픽 철도’에 과다한 투자를 하여 1873년 파산하고 만다. 제이 쿡 은행의 파산은 유럽의 은행 부도와 맞물려 심각한 경제위기를 불러 왔다. 1873년 경제위기로 개장 이래 처음으로 뉴욕증권거래소가 열흘간 휴장하고 5,000여개의 사업체가 문을 닫아야 했다.


등록일: 08-08-13

 

 

 

 

 

 

[기획연재]아메리카 대륙에서 꽃 피운 자본의 왕국(최종)

 

 

  독점은 공황을 낳고 공황은 다시 독점을 낳고
  여상경 편집장 2003jmt@hanmail.net
 
 
독점은 공황을 낳고 공황은 다시 독점을 낳고
1800년대 후반 미국경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독점이 강화되고 강력한 금융자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남북전쟁을 통해 부를 모으고 전쟁 직후 이어진 눈부신 발전의 시기에 철강, 석탄, 석유 및 철도 등을 재빠르게 장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이들의 성공은 정부와 정치인들의 막강한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최초의 대륙횡단철도인 유니언퍼시픽 철도는 1,200만 에이커에 이르는 토지를 무상으로 불하받고 2,700만 달러의 정부채권을 받았는데 이러한 특혜는 다른 철도회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철도회사로 넘어간 공유지와 보조금을 합치면 10억 달러가 넘는데 이는 모두 미국 국민의 세금에서 지출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성공 이면에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피땀과 고통이 새겨져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억압하는 데는 정부와 법원이 앞장섰으며 노동자들의 투쟁을 깨기 위해 핑커튼 탐정사1) 같은 곳에서 고용한 파업파괴꾼들이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노동자들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는 군대였는데, 대포와 총칼로 무장한 주 및 연방정부의 군대에 의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학살되었습니다.
 
“법원은 노동자가 1년간 계약을 하고 1년이 지나기 전에 일을 그만둔다면 지금까지 일한 것까지 포함한 일체의 임금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결했다.”
“매사추세츠의 한 판사는 작업 과정에서 다친 노동자는 계약에 서명을 함으로써 일정한 위험을 감수한다는 데 동의한 것이므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결했다.”(미국민중사, 하워드 진)
 
또한 이들은 막대한 자본금을 동원하기 위하여 은행과 주식회사2) 제도를 누구보다 잘 활용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J.P.모건입니다.
 
모건은 철도회사들을 연결시켰고, 이 모두를 은행으로 연결시켰으며, 은행은 다시 보험회사에 연결시켰다. 1900년에 이르면 모건은 전국 철도의 절반인 16만 킬로미터의 철도를 장악했다.(위의 책)
 
록펠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가 창립한 스탠더드 석유회사는 초기의 주식회사들 중 하나였 는데 그는 이후 철도회사들과의 운임 리베이트 협정을 맺어 경쟁자를 몰아내고 강력한 독점왕국을 구축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은 상대방을 굴복시키기 위해 경쟁사 정유공장에 폭발사고를 일으키는 등 불법적이고 추악한 음모와 공작이 얼룩져 있습니다. 현재도 세계 철강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US스틸을 비롯하여 타이슨, 카길과 함께 미국의 메이저 육류업체이며 한국에 쇠고기 수입압력을 넣고 있는 스위프트, 전화기 발명가인 그레이엄 벨이 설립하여 지금은 세계적인 통신기업으로 발전한 AT&T 등이 이 시기에 탄생한 대표 적 독점기업들입니다. 이들은 정부와 정치인에 대한 강력한 로비와 뇌물수수 등을 통해 엄청난 특혜를 받았으며, 해당 시장을 거의 완전히 장악할 정도의 독점력3)을 기반으로 막대한 독점이익을 남기게 됩니다.
 
막대한 독점이윤에 맛들인 독점기업들의 지칠 줄 모르는 생산력과 굶주림에 지친 노동대중의 소비력 사이에 모순이 심각해지면서 과잉생산공황에 빠져들기도 했지만 이러한 과정이 독점기업들에게 항상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주기적인 경제위기는 노동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파산과 실업의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독점적 지배력을 강화하는 기회로 작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부를 차지하게 된 이들은 극에 달한 사치를 뽐내기도 하고 정치권력 따위를 무서워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힘을 갖게 됩니다.

 
“그들은 말 잔등 위에서 저녁식사를 하며 사랑하는 말에게 꽃과 샴페인을 먹였다. 조그마한 흑갈색의 강아지에게 다이아몬드가 박힌 1만 5천 달러짜리 목걸이를 달아주고 호화로운 음식을 대접했다. 어떤 연회장에서는 100달러짜리 지폐로 담배를 말아 피웠고, 또 어떤 연회에서는 손님들에게 고급 흑진주를 넣은 조개를 대접했다.”(알려지지 않은 미국 노동운동 이야기, 리처드 O보이어·하버트 M 모레이스)
“어느 정당이 집권하건 누가 대통령이 되건 그까짓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정치가도 사상가도 아니다. 우리는 단지 부자일 뿐이다. 그리고 미국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다. 우리가 어떻게 돈을 벌었건 미국은 여하튼 우리 것이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엄청나게 무거운 각종 성금, 후원비, 정치적 결탁에 드는 비용, 국회의원 매수, 입법 반대를 위해 민중선동가를 동원하는 따위의 번거로움도 필요없게 만들고, 국론을 분열시키는 대통령선거 따위는 깡그리 없애 버렸으면 하고 생각 중이다.”(위의 책)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부의 어떤 규제도 먹히지 않게 됩니다. 독점화된 철도기업들이 서로 담합하여 폭리를 취하는 등 횡포가 극에 달하자 이를 규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셔먼 반트러스트법’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독점 기업들의 ‘담합이나 음모’를 불법으로 규정한 이 반독점법은 자본가들의 반발과 로비공작에 의해 규제는커녕 오히려 노동자들의 투쟁을 탄압하는데 악용되곤 했기 때문입니다. 1894년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대법원은 셔먼 반트러스트법을 적용하여 ‘주간 파업(미국의 경계를 뛰어넘는 파업)은 통상을 제약하기 때문에’ 불법이라며 노동자들을 탄압합니다. 1892년부터 1896년까지 이 법에 의해 법원에 제소된 것은 모두 10건이었는데, 그 중 노동자 파업에 대해 기소한 5건 중 4건이 노동자의 패배로 끝났고, 기업 독점에 대한 5건 중 4건이 기업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바다를 우리의 상선으로 뒤덮을 것이다
20세기로 접어들면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공업국가로 변모하게 됩니다. 1860년 131만 명이던 공업부문 노동자 수가 1900년에는 471만 명으로 늘어났고, 총생산액도 1년에 110억 달러를 넘어서게 됩니다. 생산량에 있어서도 당시 가장 강력한 나라였던 영국을 거의 2배나 앞지르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몇 안 되는 금융 독점자본, 이른바 금융과두체제의 지배하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모든 은행과 산업을 지배하고 있던 이들에게 새로운 골칫거리가 생겼으니 바로 ‘과잉상품(과잉자본)’의 존재입니다. 급격하게 높아진 생산성에 비해 노동자들의 구매력은 갈수록 떨어져 팔리지 않는 과잉상품(과잉자본)의 양도 그만큼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물건이 팔리지 않고 재고가 늘어나게 되면 생산 활동이 정체되거나 중단되고 노동자들은 임금저하, 해고, 실업 등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것은 다시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더욱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게 되고 상품 판매는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러한 악순환 과정에서 자본력이 약한 기업부터 연쇄적으로 도산하게 되고, 이것은 다시 이들 기업에 대출을 해 준 은행의 부실과 도산으로 이어지면서 전 사회적으로 경제가 공황상태에 빠져들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살아남은 대기업들은 부도가 난 기업체를 흡수하거나 시장을 확대하면서 더욱 강력한 독점기업으로 거듭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독점기업이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경제공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더욱이 공황으로 일자리를 잃게 된 노동자들의 불만과 저항이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것으로 발전하면서 독점 자본가들에게 공포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미국 국민의 소비능력을 뛰어넘는 엄청난 양의 상품들과 누적된 자본을 소화시킬 새로운 땅, 더 넓고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거대한 금융과두제국의 지배자들은 정치가들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1898년 4월, 꾸바 아바나에 입항해 있던 미국 군함 메인호가 까닭모를 폭발사고4)로 침몰해 버리자 미국은 어떤 근거도 없이 그것이 스페인 짓이라면서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이틀 뒤에 나온 베버리지 상원의원의 발언을 통해 그 전쟁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공장들은 미국 민중이 사용할 수 있는 양보다 훨씬 더 많이 생산하고 있다. 미국 땅은 미국 국민이 소비할 수 있는 양보다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고 있다.… 운명의 신이 우리를 위해서 나아가야 할 바를 알려 주었다. 세계의 무역을 우리가 지배해야 하며 또 그렇게 되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모국(영국)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대로 그것을 차지할 것이다.… 우리는 바다를 우리의 상선으로 뒤덮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위대한 세력이 되는 것에 발맞추어 해군을 만들 것이다.”(위의 책)
 
꾸바를 삼키고 하와이, 괌을 거쳐 필리핀으로 이어지는 영토의 확장은 시장의 확장으로 이어졌습니다. 전쟁은 산업을 활성화시켰고 이것은 다시 고용의 증대로 이어져 불만에 가득찬 노동자들을 달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됩니다. 노동자들은 독점기업의 팽창과 그 횡포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쟁과 애국주의 열풍은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마비시켰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노동자들이 마냥 고분고분했던 것은 아닙니다. 전쟁에 동원되는 것은 가진 것 없는 노동자들과 그 자식들이었고 전쟁의 과실은 항상 독점 자본가들에게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특히 20세기 초반에 이루어진 테일러라는 천재와 포드라는 자본가의 절묘한 만남은 노동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의 판도를 확 바꾸어 버렸습니다. 시간연구와 동작연구를 기초로 한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이 자동차 회사인 포드사의 생산체제와 결합하여 ‘포드주의5)’라는 대량생산 시스템이 발명되었고, 이제 자본주의 미국을 먹여 살리는 힘은 컨베이어 시스템과 결합된 미숙련 노동자들에게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미국 노동운동을 지배해 온 폐쇄적이고 우경화된 직업별 숙련노동조합은 그 힘을 잃었고, 대신 광범위한 미숙련, 여성, 흑인 및 이민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산업별 노동운동이 현장을 휩쓸기 시작합니다. 노동귀족들이 완전하게 지배하고 있던 미국노동연맹(AFL)을 대신해 1905년 시카고에서 설립된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이 투쟁의 중심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노동계급을 해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은 “경제영역만이 아니라 정치영역에서도 단결하고 어떤 정당과도 제휴하지 않는 노동계급의 경제조직을 통해 자신들의 노동으로 만든 생산물을 차지할 때까지, 두 계급의 투쟁(IWW 규약 전문)”을 전개하며 그 영향력을 전국적으로 미치게 됩니다.
1890년대 한 해에 1,000여건이던 노동자들의 파업이 1904년에 이르면 4,000여건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당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운동도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전국이 불순한(?) 투쟁으로 넘쳐나게 됩니다. 시각, 청각, 언어 등 삼중의 장애를 겪으면서도 작가이자 장애인의 권익을 지키는 활동가로 왕성한 활동을 벌였던 헬렌 켈러가 사회주의자로 이름을 날렸던 것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무언가 다른 돌파구가 필요했고 그것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는 민중들의 봉기를 진정시키고 미국이 오랜 세월에 걸쳐 정착시켜 온 양당제라는 정치적 테두리 안으로 복귀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더욱 강력한 시장 확대 정책을 펼치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두 명의 루즈벨트-한 명은 암살당한 매킨리의 부통령이었다가 1904년에 당선된 공화당의 시어도어 루즈벨트이고, 다른 한 명은 대공황의 여파 속에서 공화당 정부에 대한 국민의 반대에 힘입어 1932년 압도적으로 당선된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즈벨트-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공공기관의 8시간 노동을 법제화하고 작업 중 상해에 대해 고용주가 책임을 지도록 하는 보상법을 제정하였으며, 재산이나 소득에 따라 과세하는 세입법을 제정하기도 합니다. 특히 ‘혁신주의 시대’라 불린 이 시기에 분노의 표적이 된 독점기업을 규제하는 각종 법안, 예컨대 과감한 철도회사 규제법인 ‘햅번 법’, 주간 통상을 통해 육류를 판매하는 회사들이 연방 정부의 검사를 받도록 규정한 ‘만-엘킨스 법’ 등이 통과됩니다.
 
“의심할 나위없이, 보통 사람들은 이런 변화에서 어느 정도 혜택을 받았다. 체제는 풍요롭고 생산적이고 복잡했으며, 사회 밑바닥과 최상층 사이에 보호막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할 만큼의 몫에 해당하는 부를 노동계급에게 줄 수 있었다.”(미국민중사, 하워드 진)
 
또한 체제에 지지를 보낼 수 있고 계급갈등을 완화시키는 전문직이나 화이트칼라 노동자층이 완충지대를 형성함으로써 상황이 훨씬 안정되었습니다. 조치들은 많은 지지를 받았으며 사업가들도 새로운 개혁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본가들은 체제의 불확실성과 골칫거리가 커지던 시점에서 체제 안정화를 위한 개혁을 지지하고 협조하게 됩니다. 사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인 1895년에 미국철도노조의 지도자였고, 유명한 사회주의자이자 사회당 대통령 후보이기도 했던 유진 뎁스를 총살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개혁정책은 점점 커져 가는 노동자들과 국민들의 분노와 투쟁에 대한 굴복이자 ‘혁명의 가능성’을 없애버리고 싶었던 자본가들의 지지와 후원 속에서 탄생한 것으로 처음부터 커다란 한계를 안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영혼 속에는 분노의 포도가 익어간다
조금씩 형성되기 시작하던 중산층, 특히 직업별 노동조합의 테두리 내에서 일정한 기득권을 누리고 있던 백인·남성·숙련노동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노동자들과 빈민들은 여전히 개혁의 혜택으로부터 배제되고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새롭게 태동한 산업별 노동운동이 활기를 띠는 가운데 사회주의의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더 이상 지켜볼 수만 없었던 독점자본가들의 반격이 시작됩니다. 콜로라도 석탄파업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어린아이 11명을 포함한 26명이 살해된 ‘러들로 학살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항의하는 전국적 시위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연방군까지 동원하여 최종적으로 66명의 남성과 여성, 어린이가 살해된 채 콜로라도 파업은 막을 내리지만 이 사건이 불러일으킨 반향은 전 미국을 강타하게 됩니다. 여기에 더하여 1914년부터 심각한 경제불황이 시작되었습니다.
1914년 7월 20일, 계급갈등이 격렬하게 드러나는 가운데 유럽은 새로운 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4년 동안 약 1천만 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고 2천만 명이 중상을 입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입니다. 불황으로 위축되어 가던 미국 경제는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활기를 되찾게 됩니다. 참전하기도 전부터 유럽의 동맹국에서 쇄도하는 군수품 주문에 미국 경제는 활기를 되찾았고, 이제 미국이 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모건가의 압력에 굴복한 윌슨 정부가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든 지 1년 반 만에 미국은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바뀌었습니다. 수백억 달러의 개인자금 및 공공자금이 차관 형식으로 동맹국에 대부되었습니다. 모건을 비롯한 월가의 독점자본은 자신의 활동무대를 세계로 넓히기 시작했고 미국은 세계 최고의 강대국으로 올라서게 됩니다.6) 전쟁기간 내내 끊이지 않았던 반전투쟁과 파업은 무력으로 분쇄되었고 그 중심에 서 있던 세계산업노동자연맹과 사회당은 분열되고 무력화되었습니다.
여전히 매년 25,000여명의 노동자들이 산재로 죽어 나갔고 상위 0.1%의 가구가 하위 42%의 총합과 맞먹는 소득을 올리는 등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발생한 혁명이 월가의 주인들을 긴장시키기도 했지만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노동자들의 전반적 상황이 그전보다 악화되었지만 전쟁의 과실은 일부가 떼어져 대중들에게도 돌아왔습니다. 1915년 250만 대였던 승용차 등록 수가 1929년에는 2,650만 대로 늘어났고, 2/3의 가구가 전기혜택을 받았으며, 25%가 세탁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급진적인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탄압을 가하면서 한편으로는 ‘회사노조’를 설립하고 복지혜택을 주어 노사협조를 정착시키게 됩니다. 소위 ‘번영과 흥겨움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대감을 가지게 만들었던 1920년대의 번영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시작된 주가 폭락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농업공황으로 확산되었으며 곧 전국적 대공황으로 번져갑니다. 1929년에 155만 명이던 실업자 수가 1933년에는 최고 1,700만 명(실업률 25%, 반실업자까지 합하면 50% 상회)으로 늘어났고 빈곤과 굶주림의 공포가 전 대륙을 뒤덮었습니다. 미국의 역사학자인 슐레징거는 당시 상황을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1933년에 이르면 미국에서는 절망적인 분위기가 전국에 퍼져 있었다. 많은 가족이… 개처럼 마을 쓰레기통에서 음식찌꺼기를 뒤지고 있었다. 10월에는 뉴욕시 보건국이 공립학교 어린이의 1/5이상이 영양실조에 걸려 있다고 발표했다. 몇 천명이나 되는 부랑아, 거렁뱅이들이 전국을 떠돌고 있었다. 추위에 떨며 비참한 얼굴을 한 기아 시위대가 뉴욕과 시카고 거리를 행진하였다. 농촌에서는 불안이 치솟아 농민들은 이미 폭도로 변했다.”
 
월가의 구원투수, 케인즈
사상 최악의 대공황은 월가의 독점 자본가들에도 커다란 타격을 안겨주었고 주기적인 경제위기를 타개할 다른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나아가 1917년 러시아의 악몽이 아메리카에서 되살아나는 것 역시 월가의 주인들은 원치 않았습니다. 구원투수가 필요했습니다. 월가의 구원투수를 자처하고 나선 사람은 두 번째 루즈벨트, 즉 민주당의 프랭클린 D. 루즈벨트였습니다. 1932년 11월 선거에서 공화당의 후버를 압도적으로 물리친 루즈벨트는 대통령직에 오르자마자 ‘새로운 카드(New Deal, 포커에서 새 게임을 위해 카드를 다시 친다는 뜻)’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는 영국 경제학자인 케인즈의 조언(케인즈의 조언은 정작 모국 영국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을 받아들여 ‘국가의 개입을 통한 유효수요의 창출’이라는 방향으로 경제정책을 추진하게 됩니다.
 
“대규모 대부계획을 정부는 후원해야 합니다. 어떤 일에 대부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그러나 단기간에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사업들, 이를테면… 철도 사업 같은 분야에 우선권을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목적은 일단 경제를 굴러가도록 만드는데 있으니까요.”(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J.M.케인즈)
 
먼저 그는 연방예금보험공사(FDID)를 신설하여 문을 닫아버린 5,000여개의 은행을 살려냅니다. 또한 그는 실업구제 및 일자리 창출을 위한 일련의 프로그램-18세부터 25세까지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민간식림치수단(CCC)을 운영하였고, 연방긴급구제국(FERA)을 설치하여 대대적인 실업구제사업을 벌였으며 테네시강유역개발공사(TVA) 등을 추진하게 됩니다. 특히 홍수 조절과 전력 생산을 위한 정부 소유의 댐과 수력발전소망을 구축한 TVA는 그때까지는 아주 이례적으로 정부가 직접 산업에 손을 댄 사례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은 경제를 안정시키고 민중의 분노가 혁명으로 번지지 않도록 하기에 충분한 성과를 내었습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주요한 법령으로 농업조정법(AAA)과 전국산업부흥법(NIRA)이 있습니다. 농업조정법은 한마디로 잉여농산물을 줄이고 농산물 가격을 올리기 위한 것인데 농민들에게 농작물을 갈아엎도록 하고 정부가 그에 대한 보상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수백만 명이 식량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데 그 식량을 갈아엎으면 돈으로 보상해주는 ‘이상한 법’이지만 이로 인해 농산물 가격은 올라가게 됩니다. 대체로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되는 이 법은 토지소유자들에게만 보상함으로써 소작인은 오히려 소작을 뺏기고 더욱 궁핍해지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전국산업부흥법 역시 농업조정법과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과잉생산을 없애고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주어 구매력을 높이는 것과 함께 기업의 경쟁을 규제하여 적절한 이윤을 보장해 주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먼저 노동자의 권한이 강화됩니다. 노동조합을 조직할 권리와 단체교섭의 권리를 인정하였고, 최저연령, 최고노동시간, 최저임금 등의 기준을 정하였습니다. 또한 2단계 이상의 지주회사를 금지하고 증권발행과 재산획득에 대해 증권거래위원회의 통제를 받게 하는 등 독점기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회보장법을 통해 실업보험제와 노후연금제를 전국적으로 실시하게 됩니다.
얼마 전 미국 금융시장을 뒤흔든 패니메이(FNMA·Federal National Mortgage Association)가 출범한 것도 이 시기입니다. 정식 명칭이 ‘연방전미모기지협회’인 패니메이는 무주택 서민들의 내 집 마련을 위해 설립된 것 입니다.
뉴딜의 영향으로 노동조합의 조직력이 크게 늘어나 1936년~37년 사이 1년 동안 무려 300만 명이 늘어나게 됩니다. 특히 1935년 말에 미국노동연맹(AFL)의 백인 숙련공 중심의 배타적·실리적 조합주의를 극복하고자 설립된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는 대공장 미숙련 노동자들의 조직화에 힘을 기울여 커다란 성과를 내게 됩니다.
그러나 뉴딜 하에서도 GM 플린트 공장 노동자들의 연좌농성 등 노동자들의 투쟁은 끊이지 않습 니다. 특히 미국노동연맹의 지침을 거부하는 ‘살쾡이 파업(wildcat strike)7)’이나 공장점거투쟁이 늘어나면서 자본가들은 새로운 대응 방식-더욱 정교한 방식을 모색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조합과 기업주 간의 일정한 양보와 타협이 필요했습니다. 기업주는 노동조합에 법적 지위와 고충사항의 일부를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노동자들의 반란의 에너지를 노조투표로 돌리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노동조합(특히 CIO 같은 전투적 노조마저도)은 노동자들의 에너지를 제도화되고 합법화된 테이블-노사협상과 그를 통한 단체협약-로 흡수하여 안정화되고 영향력 있는 조직으로, 다시 말해 기업의 인정을 받음과 동시에 현장에 대한 통제력을 가진 거대조직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러나 안정적인 사회체제는 뉴딜을 통해서가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비로소 구축됩니다.
 
“뉴딜은 실업자 수를 1,300만에서 900만으로 줄이는 데만 성공을 거뒀다.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준 것은 다름 아닌 전쟁이었으며, 전쟁은 그 밖에도 모종의 성과를 낳았다. 해외의 적에 맞서 모든 계급의 단결을 조장함으로써 대기업에 대한 분노를 조직화하기가 더욱 어려워진 것이다. 전쟁 기간 동안 산업별조직회의(CIO)와 미국노동연맹은 파업을 벌이지 않겠다고 서약했다.”(미국민중사, 하워드 진)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을 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위치로 끌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의 효과적인 통제를 위한 조건도 창출했다. 1930년대를 특징지었던, 뉴딜 정책에 의해 단지 부분적으로만 완화됐던 실업과 경제적 고난, 그리고 그 당연한 결과인 소요는 전쟁이라는 더 큰 소요에 의해 진정되고 극복됐다.… 가장 큰 소득은 기업의 이윤으로 1940년의 64억 달러에서 1944년 108억 달러로 상승했다. 그러나 노동자와 농민들 역시 체제가 자신들에게도 만족스럽게 굴러가고 있다고 느낄 수 있도록 충분한 몫이 그들에게 돌아갔다.”(위의 책)
 
이렇게 해서 인류 역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짧은 시간에, 전 세계를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완벽한 제국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제국의 외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배타적이면서 제국 내부의 대립과 갈등을 외부에 대한 적대감으로 환원하고, 그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자원과 부를 에너지로 끊임없는 부와 생명력을 창출하는 가장 완벽한 자본주의 아메리카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끝)
 
※이번 호로 4회에 걸쳐 연재된 ‘아메리카 대륙에서 꽃 피운 자본의 왕국’이 마무리되었습니다. 다음 편부터는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가장 강력한 자본주의 왕국으로 등극한 미국이 세계경제를 제패하기 위해 만들어 낸 각종 국제기구, 조약, 사건들을 중심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의 흐름을 시기별로 살펴볼 것입니다.
 
 
 
<주>
1) 1850년 시카고에서 앨런 J. 핑커튼이 설립한 회사.
링컨 대통령을 경호했던 핑커튼은 남북전쟁 당시 북군 정보국장으로 활동하면서 남부군 스파이를 색출하는 작업을 하면서 명성을 얻게 된다. 초기에는 대륙횡단 철도의 강도사건을 해결하는 등의 일을 했으나 점차 독점자본의 이익을 지키는 기업의 파수꾼 역할을 맡으면서 악명을 떨친다. 1892년 홈스테드 파업에 핑커튼 소속 구사대가 노동자들을 공격하여 11명을 학살하기도 했다. 현재는 스웨덴 보안서비스 업체인 세큐리다스에 매각되어 30개국에 11만 4천명의 직원을 둔 다국적 PI(Private Investigator, 민간조사원. 탐정을 이르는 말)업체로 활동하고 있다
 
2) 영국처럼 ‘본원적 축적’ 단계를 거치지 못했던 미국에서는 거대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주식회사 제도가 발전하게 된다. 특히 철도처럼 많은 자본이 필요로 했던 산업에서 주식을 발행해서 다수의 투자자들로부터 많은 자본을 모을 수 있었다. 20세기 들어서면서 기업자금조달 수단으로 주식이 중요해지기 시작했는데, 주식소유의 확산에는 새롭게 등장한 투자신탁회사가 크게 기여했다. 투자신탁회사들이 개인투자자를 대신해 기업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투자의 안정성을 높여주었기 때문이다.
 
3) 당시 독점기업들의 시장지배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1902년 발행된 정부 공식문서에 따르면, “철강 제품에 있어서는 한 회사가 전체 산출량의 75내지 80%를 점했고… 설탕 생산 분야에서는 90%, 석유 생산 분야에서는 82% 등”을 차지했다.
 
4) 후일 밝혀진 바에 의하면 메인 호는 단순한 기계고장으로 폭발하였고 미국은 이 사건을 꾸바 개입의 계기로 삼은 것이다. 물론 현재까지 밝혀진 수준에서 그렇다. 그러나 베트남 통킹만에서 작전 중이던 미 군함에 대해 북베트남 어뢰정이 공격하였다는 것을 근거로 월남전의 도화선이 된 소위 ‘통킹만 사건’이 미국의 자작극이었음을 감안할 때, 메인호 사건에 대해 미국이 개입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5) 포드의 한 공장에서 자재를 운반하는데 컨베이어가 도입되었고, 1914년부터는 조립공정에 도입하여 생산을 세 배 이상 올리게 되었다. 이 방식은 곧 다른 자동차 공장으로, 그리고 다른 산업으로 확대되어 1900년~1920년 사이 제조업 전체의 노동생산성이 약 30% 상승하게 된다.
 
6) 1913년의 생산지수를 100으로 할 때 1920년 미국은 122.2로 상승한 반면 유럽은 77.2로 떨어졌다. 1920년까지 미국의 국민소득은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캐나다와 17개의 작은 나라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아메리카합중국 빈곤사, 후지모토 부, 신일본출판사)
 
7) 노동조합의 승인 없이 기층 조합원들이 자발적으로 벌이는 현장 파업. 미국에서는 살쾡이파업에 대해 대단히 무거운 처벌 조항을 두고 있는데, 이것은 통제되지 않는 파업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노동조합의 범위를 벗어나려는 것을 막기 위한 기업주와 노동귀족 간 타협의 산물이다.


등록일: 08-09-03

 

 

 

 

[기획연재]주검 위에 세워진 황금의 제국

 

 

  경제 <기획연재> 역사로보는달러의정치경제학5
  여상경 편집장 2003jmt@hanmail.net

 
죽은 자를 부러워하는 세상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8월 6일 새벽 2시. 서태평양 북 마리아나 제도의 티니언(Tinian)섬 미 공군기지에서 기장인 폴 티베츠는 미 육군항공대 소속 B-29 폭격기의 조종간을 잡았습니다. 굉음과 함께 어둠을 가르며 날아오른 폭격기는 6시간 뒤인 8시 15분,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 도착했습니다. 무겁고 긴장된 침묵을 뚫고 떨어진 투하 명령. 단 한 발의 폭탄이 아침 햇살에 반짝이며 허공을 갈랐습니다.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월 요일 오전이었습니다.
 
“폭심지로부터 반지름 1㎞ 내에서는 단 한 순간 타오른 화염의 열에너지가 너무나 강렬했다. 1초의 몇 분의 1도 안 되는 시간에 사람들은 사라졌다. 전신주, 나무, 옷, 초가지붕, 목조 건물, 애완동물, 그리고 거리의 전차들은 제풀에 몽땅 타 버렸으며, 철골 구조 건물은 양초처럼 녹아 내렸다.” (카운트다운 히로시마, 스티븐 워커)
 
폭발과 동시에 직경 180m에 이르는 30만℃의 거대한 불덩이가 순식간에 주위 사람과 건물을 증발시켜 버렸습니다. 다행히(?) 폭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은 6,000℃의 지열에 끔찍한 화상을 입고 죽어 갔으며, 몇 초 뒤 시속 수백Km의 후폭풍이 무너진 건물의 잔해와 유리조각 등을 몰고 와 서 있는 사람들의 몸을 관통하며 살상했습니다. ‘에놀라 게이’라 이름 붙여진 미군 폭격기로부터 투하된 것은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리틀 보이’였습니다. 이 한 발로 7만8천명이 즉사했고, 8만4천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방사능 낙진은 수백만의 생명을 엄습했고, 수십 년간 25만 명의 사람들이 죽어 갔습니다. ‘죽은 자를 부러워하는 세상’이라 불릴 정도로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말입니다.
사흘 뒤, 나가사키에도 ‘팻맨’이라는 이름의 플루토튬 탄이 떨어졌고 히로시마의 지옥도가 그대로 재연되었습니다. 우라늄-235탄인 리틀보이는 루즈벨트 전 미국대통령의 별명이었다고 합니다.
전 세계가 경악과 두려움에 찬 눈으로 추이를 지켜보는 가운데, 8월 15일 정오에 일본 NHK 라디오를 통해 히로히토 일왕의 ‘종전 조서,’ 즉 무조건 항복 선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세계를 제패한 미국
미국은 일약 세계 최고의 강자로 등극했습니다. 이미 20세기 초에 생산량에 있어서 영국을 앞지르기 시작한 미국은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경제적으로 가장 강력한 나라로 올라섰으며, 무시무시한 대량살상무기의 위력까지 보여준 마당에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어졌습니다. 어느 나라도 미국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이제 세계는 미국의 발아래 완벽하게 놓이게 되었습니다.
사실 미국은 이 전쟁의 승리를 일찌감치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승리로 미국이 전쟁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고, 43년 9월 이탈리아 항복, 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 45년 소련 참전 등으로 추축국(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에 대항한 파시스트 국가, 특히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이르는 말)의 패배가 확실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미국은 전쟁 자체보다도 전쟁 이후의 상황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자신의 확실한 주도 아래 전쟁을 승리한 이후 패전국 처리과정은 물론 세계 전반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합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넘어서서 이 행성 전체에 대해 ‘문호 개방정책’을 시행하는 것, 건국의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역사적 염원을 전 지구적 범위에서 실현하는 것이 당시 지배세력의 목적이었습니다. 패전의 기색이 농후해진 45년 8월로 들어서면서 일본은 항복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미국 역시 이러한 정보를 탐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라는 최악의 선택을 한 것도 이러한 연장선에서 정치적 타산을 한 것이지요. 세계에 자신의 군사력을 과시하여 엄포를 놓는 것과 함께 2차 세계대전의 결정적 승리를 만들어낸 국가로 기록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모든 나라들이 고분고분하게 지도력을 인정하면서 따라올 테니 말입니다. 이른바 ‘헤게모니’를 쥘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헤게모니란 강력한 힘에 기반을 둔 정치·도덕적 권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대영제국의 해가 지고 새로운 해가 뜨다
원래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국제통화제도는 영국의 파운드화를 중심으로 한 ‘금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금본위제란 한 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금의 양만큼 화폐를 발행하는 것입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2006년에 반드시 읽어야 할 책 10권’ 중 한 권으로 선정한『세계사를 바꿀 달러의 위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저자는 “달러를 버리고 금을 사라”고 말합니다. 화폐의 가치는 시간이 지나면서 갈수록 떨어지지만 금만은 유일하게 자신의 가치를 유지하는 자산1)이기 때문입니다. 스위스는 금을 거의 화폐처럼 사용해서 ‘빵 가게에서 빵 사듯이’ 금을 산다고 하며, 프랑스 사람들은 돈이 생기면 일단 금을 사고 본다고 합니다.
금본위제는 각국의 물가와 국제수지가 금의 유출입을 통해 조절된다는 메커니즘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한 나라의 국제수지가 적자가 되면 그만큼의 금이 해외로 유출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럴 경우 (금의 양만큼 화폐를 발행해야 하기 때문에) 통화량은 줄어들게 됩니다. 통화량이 줄어들면 물가가 떨어지게 되고 그만큼 싼 값에 수출할 수 있게 되어 수출이 늘어나고 결국은 국제수지의 균형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국제 금본위체제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경제가 성장하고 국제 교역의 규모가 커지면서 필요로 하는 화폐의 양도 커지게 되는데 금의 생산이 증가하는 화폐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통화량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 수출입가격의 변화가 수출입의 증감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한 시간이 걸리면서 실제 경제 현실에서는 커다란 괴리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금본위제는 국가가 경제정책을 세울 때 국제수지의 균형에만 집중하게 되어 실업문제에 소홀하도록 만들 뿐만 아니라 중앙은행이 보유한 금이 줄어들게 되면 찍어낼 수 있는 화폐의 양도 줄어들게 됩니다. 돈을 풀리지 않으면 심각한 경기침체에 빠지게 되고 그 피해는 주로 부자들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게 됩니다2).
마지막으로 그간 국제 금본위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가장 강대국이었던 ‘대영제국’이 금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고 영국과 통상을 해야 했던 다른 나라들도 영국의 파운드화를 중심으로 한 금본위제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20세기 초 금본위제의 균열은 영국의 지위가 이전보다 약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1차 세계대전 후 잠시 금본위제가 부활했지만, 1929년 뉴욕 증권시장에서 시작된 대공황이 전 세계로 파급되면서 급속하게 붕괴했습니다. 먼저 영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하게 됩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의 파운드화는 상당히 고평가3)되어 있었는데, 파운드화가 떨어질 것을 예상한 투자자들이 파운드화를 팔고 금을 사들이는 바람에 영국의 금 보유량이 급격하게 줄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들도 경쟁적으로 평가절하(자국 통화가치를 떨어뜨리면 수출이 늘어나기 때문이지요)를 단행했고, 관세장벽을 높이는 등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었습니다. 그 결과 19세기 강력한 영국의 경제력에 기반을 둔 자유무역주의와 국제 금본위체제는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새로운 강자로 등극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경제체제 말입니다.
 
세계경제의 새로운 그림을 그려라, 브레튼우즈.
켄터키주에 있는 미 연방준비은행의 금 보관소 포트녹스 . 2차대전이 끝나자 이곳에는 전세계 금 보유량의 3분의 2가 쌓였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으로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게 됩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이면 세계 금보유고의 2/3 이상이 미국의 포트 녹스(Fort Knox)4)에 있었다고 합니다. 미국이 이처럼 엄청난 금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전쟁 덕입니다. 두 차례의 세계전쟁 기간 동안 한 번도 본토를 공격당하지 않았던 미국은 안정된 조건에서 군수산업을 가동시킬 수 있었고, 그렇게 생산된 엄청난 무기와 군수물자를 연합국에 팔 수 있었습니다. 전쟁에 돌입하자 모든 나라들이 전쟁비용 마련을 위해 화폐를 대량으로 찍어내기 시작했고, 화폐가치가 크게 떨어지게 됩니다. 이러다 보니 미국 입장에서는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는 화폐를 받는 대신 금을 받았고 그 금들이 포트 녹스에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영국에 대해서는 한층 가혹했습니다. 미국은 영국에 대부라기보다는 원조형태인 렌드-리스(Lend-Lease:무기대여) 프로그램에 따라 총 127억 달러 상당의 무기와 군수물자를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컸습니다. 미국에 있는 영국 소유의 비스코스 회사를 헐값에 매각해야만 했고, 캐나다에 투자한 19억 파운드 상당의 투자금을 미국에 넘겨야 했습니다. 이 외에도 수천만 파운드의 금화를 지급하고 첨단과학기술과 자메이카, 버뮤다 등 영국 식민지에 대한 장기조차(특별한 합의에 따라 한 나라가 다른 나라 영토의 일부를 빌려 일정한 기간 동안 통치하는 일)를 인정해야 했습니다.

 

보잉사의 시애틀 공장에서 생산되고 있는 B-29폭격기. B-29는  1943~46년에 걸쳐 무려 3,970대가 생산되었다.

 

일본에 대한 원폭투하로 전쟁 승리의 주역이자 최강의 군사력을 과시한 미국이 세계의 금을 대부분 끌어 모았으니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우리는 세계의 선두에 서야 한다. 또한 세계라는 회사의 대주주로서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스탠더드 오일의 레오 웰치 회장(1946)의 말처럼 세계를 미국의 ‘자회사’처럼 자신의 발아래 두고 ‘책임을 다해’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그 첫 출발점이 바로 브레튼우즈 회의입니다.
 
세계를 삼킨 달러
1944년 6월 말,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즈는 미국 땅을 밟았습니다. 미국 뉴햄프셔 주의 브레튼우즈라는 작은 도시에서 열리게 될 ‘UN 통화금융회의(브레튼우즈 회의라고도 합니다)’에 참석하기 위해서입니다. 44개국이 참여한 이 회의에 케인즈는 영국의 대표로, 자신의 힘으로 자본주의의 위기, 특히 미국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게 한 자부심을 가지고 회의에 참석합니다. 연합국을 중심으로 브레튼우즈 회의가 소집된 까닭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대공황으로 이어지면서 국제무역 및 통화체계가 극도의 혼란에 빠졌던 끔찍한 악몽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브레튼우즈 회의는 모국인 영국의 파운드화를 기본으로 세계경제질서를 재구축하여 대영제국의 부활을 꿈꾸었던 케인즈에게 좌절을 안겨주게 됩니다.
브레튼우즈 회의에서는 저무는 태양인 영국의 케인즈 안과 떠오르는 태양인 미국의 화이트 안이 격돌하게 됩니다. 미국이 케인즈에게 빚이 있고, 그의 명성이 아무리 높았다 하더라도 새롭게 부상하는 제국에 맞선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했습니다. 케인즈가 낸 안은 대부분 폐기되고 대신 미국 대표인 화이트의 안을 기본으로 브레튼우즈 체제가 짜이게 됩니다. 아무도 세계 최고의 강대국으로 등장한 미국을 거역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반드시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모든 정열을 쏟아 부은 케인즈는 회의가 막을 내린지 4개월 후 사망하고 맙니다.
브레튼우즈 회의는 향후 30년 가까이 세계경제체제를 재구성할 몇 가지 중요한 결정을 합니다.
그 첫 번째가 달러를 기축통화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기축통화란 나라간의 무역 결제나 금융거래의 기본이 되는 화폐를 의미합니다. 즉 앞으로는 모든 나라의 무역이나 금융거래에서 달러만 사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영국의 케인즈는 파운드화를 기축통화로 주장하지 않고 '뱅콜(Bancor)'이라는 제3의 가상통화를 만들자고 주장5)했지만 미국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전 세계 보유량의 2/3 이상을 확보하고 있는 미국의 금이 뒷받침된다면 미국 정부가 발행하는 화폐인 달러는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금 1온스6)에 35달러로 정하고 언제든지 그 비율로 달러와 금을 교환해 주기로 약속합니다. 이것을 ‘금태환’이라고 하는데 금 보유량이 충분한 미국이니 이런 약속이 가능했겠지요. 어쨌건 달러가 기축통화로서 자리매김됐다는 것은 막강한 미국의 경제력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발권국으로서 엄청난 특혜7)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금과 달러의 교환비율이 정해졌으니 이제는 달러와 다른 나라 화폐의 교환비율을 정할 차례입니다. 각 나라들은 경제력을 반영하여 그 나라 화폐의 기준환율에 달러를 고정시키고 상하 1% 이내에서 환율조정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이것을 고정환율제라고 하는데 이를 통해 각 나라들이 수출을 늘리기 위해 경쟁적으로 평가 절하하는 것을 막고 국제무역을 안정화시키자는 것입니다. 다만 1% 이내에서, 예컨대 1달러=1,000원이라면 990원에서 1,010원까지의 변동폭을 허용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한 나라가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나라는 달러가 유입되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달러 과잉현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달러의 수급 상황에 따라 환율이 바뀌는 변동환율제라면 환율이 내려가겠지만 고정환율제를 지키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이것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1% 이내에서, 다시 말해 앞서의 예에서 본 것처럼 1달러를 1,000원에서 990원으로 조정하는 것만 허용될 뿐입니다.
만약 무역수지 흑자폭이 커서 990원 이상으로 환율이 내려가야 할 경우, 예컨대 900원으로 환율을 조정해야 할 경우가 되면 어떻게 될까요? 이럴 경우에는 그 나라 정부가 책임지고 달러를 처리해야 합니다. 결국 다른 나라에서 수입을 늘려 무역수지 균형을 맞추든지 중앙은행에서 달러를 매입하여 통화량을 조절해야 합니다.
반대로 무역수지 적자국인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역수지가 적자라는 것은 수출보다 수입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고 결과적으로 달러가 유출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달러가 유출되었으니 달러 부족현상이 나타나 환율을 올려야 합니다. 1,010원까지는 조정이 가능하지만 적자폭이 그보다 더 클 경우에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즉 그 나라 정부가 책임지고 달러를 끌어와야 합니다. 어디서 끌어올 수 있을까요?
 
2기구+1협정, 브레튼우즈 체제의 삼두마차
여기에서 달러를 중심으로 한 고정환율제 체제, 즉 브레튼우즈 체제는 무역수지 적자국에게 달러를 공급해 줄 기구의 존재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적자국에게 있어서는 구세주(?)와도 같은 그 기구가 바로 IMF(국제통화기금)입니다.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 때 확인했듯이 외환(달러)이 부족한 나라들에게 외환을 공급(대출)해 주는 국제기구로 출범한 IMF는 본부를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에 두고 있습니다.
IMF 기금은 회원국들의 할당액으로 조성되는데, 그 할당액만큼 대출 한도를 정하게 될 뿐 아니라 의결권도 가지게 됩니다. 당연히 제일 돈을 많이 낸 미국이 가장 많은 의결권을 가지고 있겠지요. 미국은 17%의 의결권을 가지고 있는데, 주요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85%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IMF는 미국이 거부하면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는, 미국 독재의 세계경제기구인 것입니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IMF는 그 성격이 점점 변질되어 지금은 경제위기에 처한 나라의 어려운 상황을 악용하여 미국식 경제 체제를 이식하는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로 악명을 떨치고 있습니다.
브레튼우즈 회의는 IMF 외에도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세계은행이라고도 함)의 설립도 결정합니다. 애초에는 2차 세계대전 직후 각국의 전쟁피해 복구와 개발을 돕기 위해 만들어 졌지만, 지금은 주로 저개발 국가에 대한 원조 융자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한국 역시 60~70년대 경제개발 과정에서 IBRD의 원조 자금을 받아 사용했습니다.
IMF와 IBRD의 총재는 항상 미국 사람이 맡아오다가 유럽의 반발이 심해지자 IMF 총재 자리는 유럽 사람이, 부총재는 미국인이 맡는 것으로 관례를 삼고 있습니다. IBRD 총재는 여전히 미국 사람으로 미국 대통령이 지명합니다. 현 IBRD 총재는 부시대통령이 지명한 로버트 졸릭으로 그는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 국무부 부장관을 거쳐 골드만삭스 국제담당 부회장으로 일해 왔던 사람입니다. 국제기구인 세계은행 총재를 한 나라의 대통령이 지명한다는 것도 석연치 않지만 저개발 국가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책임지는 역할을 저개발 국가의 경제를 교란시키고 독점 이윤을 뽑아내는데 혈안이 되어온 초국적 자본의 임원에게 맡긴다는 것 역시 현재 세계적 경제기구들의 계급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반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 총재는 미국의 FTA 정책이 “민영화의 지지, 공공서비스 독점에 대한 공격, 규제완화를 통한 시장개혁의 추진”이라며 스스로 신자유주의자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브레튼우즈 회의가 만들어 낸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이 있습니다. 1947년 제네바에서 조인하여 제네바관세협정이라고도 하는 GATT는 관세율 인하, 최혜국대우, 보조금 지급금지 등 한미FTA의 기초가 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최초의 ‘세계화 협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관세율 인하로 인한 자유무역의 확대는 전후 전 세계 GDP의 50% 이상을 생산하는 미국에게 가장 커다란 혜택을 준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한미FTA가 쌍무협정이고 GATT는 다자간협정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전 세계를 하나의 단일시장으로 만들어 자본의 무한경쟁과 이윤획득의 공간을 창출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이처럼 IMF와 IBRD라는 두 개의 기구와 GATT라는 하나의 협정을 통틀어 ‘브레튼우즈 기구’라고 합니다. 이들 삼두마차는 점차 그 역할을 강화하거나 행동반경을 넓히기도 하고, 때론 새로운 질로 변신을 거듭하면서 미국의 세계 패권 실현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오고 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주>
1) 위 책의 저자들(빌 보너 / 애디슨 위긴)은 100년 전 1달러의 가치는 현재의 몇 센트에 지나지 않지만 100년 전 금 1온스의 구매력과 지금의 금 1온스의 구매력은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2) 실제로 미국은 1800년대 중순 중앙은행이 보유한 금이 바닥나면서 더 이상 화폐를 찍을 수 없어 심각한 경기침체에 빠져들었고 수많은 노동자, 농민들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지독한 디플레이션은 알래스카 등지에서 금광이 잇따라 발견되고 중앙은행의 금 보유량이 늘어 화폐를 풍족하게 찍어낼 수 있었던 1800년대 말에야 끝나게 됩니다.
 
3) 1992년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투기자본의 대명사인 조지 소로스는 1992년 영국 파운드화의 고평가를 확신하고 대규모로 파운드화를 팔았습니다. 다른 투자자들이 이러한 파운드 투매에 동참하여 파운드화는 엄청난 가치하락을 입었고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은 두 손을 들게 됩니다. 조지 소로스는 2주 동안의 파운드 공격으로 10억 달러의 수익을 거두었습니다. 조지 소로스가 돈을 벌어들인 원리를 원화에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1달러=1,000원이라고 가정할 때, 원화의 고평가를 확신한 소로스가 1,000억원의 원화를 차입합니다. 그는 차입한 원화를 내다팔고 그만큼의 달러(1억 달러)를 사들입니다. 소로스 정도의 큰손이 환율시장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면 수많은 투자자들이 함께 원화의 투매에 동참하게 되고 원화 가치는 급격하게 하락하기 시작합니다. 예컨대 1달러=2,000원으로 원화가치가 하락(환율 상승)했다고 한다면 소로스는 앞서 사들인 1억 달러로 원화 2,000억 원을 다시 사들입니다. 그리곤 빌렸던 1,000억 원을 갚고 1,000억 원의 이익을 남긴 채 사라집니다. 소로스가 영국 파운드화를 공격할 당시 영국 여왕은 소로소의 퀀텀펀드에 투자한 상태였다고 하니 영국 사람들 속 꽤나 터졌겠군요.
 
4) 켄터키 주에 있는 군 주둔지로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에 만든 미 연방준비은행 금 보관소가 있습니다.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상당히 약해진 지금도 전 세계 30,733톤의 금 보유고 중 8,135톤이 이곳에 있다고 합니다.
 
5) 케인즈의 안은 단일한 세계정부가 존재하고 IMF가 세계 중앙은행으로 기능할 때 가능한 것으로 현실 가능성이 없는 이상이었을 뿐입니다.
6) 원래 1온스는 28.35g 이지만 금 1온스는 31.1035g 인데 이것은 일반저울과 금저울의 차이 때문입니다.
7) 이 지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금으로 태환되지 않는 불환화폐라면 그 화폐를 찍어내는 나라는 엄청난 발권이익을 가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 원가가 1달러인 100달러 지폐를 찍어냈다면 미국은 99달러의 발권이익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브레튼우즈 체제는 금태환제로 운영함으로써 미국의 일방적인 발권이익을 제한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뒤에서 나오겠지만) 금태환 중단을 선언한 1971년 이후 브레튼우즈 체제가 와해되었다고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발권국가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고 태환의 의무는 벗어버렸기 때문에 브레튼우즈 체제보다 더 큰 발권이익을 가지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등록일: 08-10-09

 

 

 

 

 

[기획연재]자본주의를 구출하는 홍 반장, 팍스 아메리카나
  <기획연재> 역사로보는달러의정치경제학6
  여상경 편집장 2003jmt@hanmail.net
브레튼우즈 회의를 통하여 세계 경제 재편의 주도권을 장악한 미국은 본격적인 체제 정비와 토대 구축에 나서게 됩니다. 브레튼우즈 회의가 세계무역질서를 규정할 원칙을 세우고 그것을 관장할 기구를 설치하여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라면 이제 그 시스템이 작동할 경제적 토대를 정상화하여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 자본주의 상황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전쟁으로 이득을 보는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전쟁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메리카의 형성과정에서 살펴보았듯이 미국경제에 있어 전쟁이 가지는 제일의 의미는 ‘전시호황’과 ‘시장의 확대’ 그 자체입니다. 전쟁은 그 나라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벌이는, 총체적이고 집중화된 정치적 폭력입니다. 범국가적 차원의 전시동원 체제는 막대한 전쟁 물자를 필요로 합니다. 이로 인해 직접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산업은 물론 이와 연계된 대부분의 산업이 때 아닌 호황을 누리게 됩니다. ‘파괴’를 기본속성으로 하는 전쟁에서 누가 많은 물량을 쏟아 넣고 퍼붓는가에 승패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라는 파괴와 광란의 축제에서 스폰서는 항상 자본이 담당해 왔습니다.
미국의 수많은 정치가, 기업가들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미국이 다른 나라를 상대로 벌인 200회 이상의 전쟁은 대부분 거대기업의 이익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맥아더가 “미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인”이라고 칭송했던 스메들리 버틀러 미 해병대 장군이 1933년에 한 연설에서 발언한 내용은 그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나는 33년 4개월 동안 우리나라의 가장 기민한 군대의 일원으로 복무했다. 소위에서 제독까지 모든 자리를 다 거쳤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대기업과 월스트리트, 은행가들을 위해 일하는 고급 폭력단원으로 보냈다. 간단히 말해서 자본주의를 위한 협박꾼이자 폭력배였던 것이다…1914년에는 미국 석유 회사의 이익을 위해 멕시코, 특히 탐피코에서 위험물을 제거해 주었다. 또한 내셔널시티 은행이 이익을 올릴 수 있도록 아이티와 쿠바에 튼튼한 발판을 만드는 것을 도왔다…나는 1909년에서 1912년까지 국제 금융가문인 브라운 브라더스를 위해 니카라과를 공격했고, 1916년 미국 설탕회사의 이익을 위해 도미니카공화국 사태를 해결했으며, 1903년에는 미국의 청과회사를 위해 온두라스를 ‘바로잡는’ 일에 가담했다…1927년 중국에서는 스탠더드 석유회사가 방해를 받지 않도록 돌보았다. 그 기간 동안 나는 거물급 깡패였다. 나는 명예와 훈장, 칭찬을 받았다. 알 카포네는 기껏해야 3개 도시에서 활개 쳤지만 우리 해군은 3개 대륙에 걸쳐서 활동했다.”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이자 세계 최대의 금융자본인 JP모건의 역사는 전쟁을 통한 부흥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진한 돈 냄새를 맡은 존 피어폰트 모건은 미국 최대의 화학기업인 ‘뒤퐁’과 손잡고 무기중개업자로 나서 떼돈을 벌어들입니다. 모건의 행운은 그 아들인 잭 모건에게로 이어졌습니다. 잭 모건이 아버지에게서 회사를 물려받은 다음 해에 1차 세계대전이 터졌기 때문입니다. 잭 모건은 아버지 모건의 동업자였던 뒤퐁과 손잡고 미국 전역에 TNT 공장을 세워 대량생산된 화약을 유럽의 전장에 공급했습니다. 뒤퐁의 화약 생산량은 전쟁 전에 비해 무려 26배로 늘어났습니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 정부의 요청으로 자금조달 및 무기매입 대리인으로 지정된 모건 사는 전시공채를 발행하고, 군수물자를 독점가격으로 매입해  다시 비싸게 되파는 수법으로 엄청난 이익을 남기게 됩니다. 한편 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섰지만 금융시장만은 여전히 영국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미국이 모건 사로 인해 세계금융시장마저 주도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모건 사가 유럽에 전시공채를 판매한 것을 계기로 금융시장의 중심축이 서서히 런던에서 미국으로 기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월가의 구세주이자 대부 역할을 하고 있는 JP 모건사는 이번 금융위기 한파에도 끄덕 하지 않았다. 오히려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신청 이후 뉴욕연방은행의 요청에 따라 리먼 브로커-딜러 부문에 1,300억 달러가 넘는 막대한 금액을 지원해 브로커-딜러 부문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진은 미국 휴스턴의 JP 모건체이스 타워.
 
이처럼 전쟁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남기는 것은 자본주의가 독점단계로 들어서면서부터 일반적인 수법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러한 전쟁의 고마움을 잘 알고 있었던 GE사의 찰스 E. 윌슨 회장은 “영구 전시경제를 위한 기업과 군부의 지속적인 동맹1)을 제안하기까지 했다”(미국민중사, 하워드 진)고 합니다. 특히 자본주의의 고질병 중 하나가 과잉자본과 그것이 만들어 낸 과잉상품의 존재인데 전쟁은 이 두통거리를 한순간에 해결해 주는 고마운 해결사이기도 합니다. 전쟁은 물자의 집중적인 투하를 요구하기 때문에 일상 시기에는 판매되지 않고 남아돌던 상품을 처분하고, 가동되지 않던 기계를 가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전쟁은 과잉자본의 직접적인 파괴를 동반하기도 합니다. 최첨단의 대량살상무기는 인간만이 아니라 생산설비를 파괴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새로운 탈출구를 찾지 못한 자본주의 체제는 스스로 파괴의 사신으로 나서게 됩니다.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이 과잉생산으로 드러나고 결국 그 과잉자본을 파괴하기 위해 스스로 무기를 들어야 하는 악순환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숙명인지도 모릅니다.
 
전쟁은 자본이 생산한 무기로 과잉자본을 파괴하는 사신이 되기도 한다. 폭격당한 독일 라이히 지역의 산업도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위기
1, 2차 세계대전은 일국을 기반으로 발전하고 있었던 자본주의 나라들이 새로운 시장개척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충돌한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 2차 세계대전은 본질적으로 제국주의 전쟁이었고 국가의 가면을 쓴 자본의 전쟁이었습니다. 새로운 시장의 개척을 둘러싼 이와 같은 쟁투는 자본주의의 숙명이기도 하면서 자본주의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1, 2차 세계대전이 개별 독점자본들에게는 커다란 이익을 안겨 주었는지 모르지만, 자본주의 체제 전반을 놓고 볼 때는 오히려 커다란 위기로 다가왔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자본주의 무역질서는 심각한 교란상태에 빠졌고 급기야 1929년 세계 대공황을 불러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위기의 틈바구니를 뚫고 러시아에서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혁명이 성공하게 됩니다. 유령으로 떠돌던 사회주의가 최초로 인간세계에 발을 내딛게 되자 전 세계가 혁명의 불길에 휩싸입니다. 유럽, 특히 독일에서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조직 ‘스팔타쿠스 단’의 영향력이 커져갔고 스페인에서는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봉기와 공장점거운동의 물결이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은 절반에 가까운 노동자들을 실업 상태에 빠뜨렸고  분노한 노동자, 농민들의 폭동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뉴딜정책을 통해 난국을 타개하려 했으나 ‘언 발에 오줌누기’에 불과했습니다. 거대한 수요를 창출할 무언가가 필요했고, 그 요구는 바로 2차 세계대전으로 분출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은 자본을 위기에서 건져낸 공신이었지만 이는 위기의 폭발을 유보시킨 미봉책에 불과했습니다. 오히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자본주의가 직면한 위기는 1차 세계대전 이후의 그것보다 훨씬 심각했습니다.
수많은 식민지 나라에서 민족해방운동이 고양되었고, 특히 민족해방운동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사이에 통일전선이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속속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으며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좌파진영의 목소리가 커지고 이에 대한 국민의 지지 역시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를 구출할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고 그 역사적 책무(?)는 헤게모니 국가를 자처한 미국이 떠맡았습니다.
 
사회주의의 구렁텅이에서 유럽을 구출하라!
1947년 6월 5일, 미국의 국무장관 조지 마셜은 하버드 대학의 졸업식에서 한 연설을 통해 “시장 경제 체제를 채택하는 나라들이 그들의 국내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집행하는 계획에 대하여 미국은 대규모 재정적 지원을 하겠다”고 밝힙니다. 흔히 ‘마셜 플랜’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유럽부흥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ERP)’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셜 플랜을 전후 유럽의 경제를 살리기 위한 미국의 대규모 원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측면을 완전히 부인하기는 어렵지만 당시의 유럽 주요국의 경제 상황을 놓고 볼 때 무언가 석연찮은 구석이 발견됩니다.
<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필립 암스트롱 외)>라는 책에 따르면 전쟁으로 인해 노동력, 산업시설 등의 피해가 적지 않았지만 복구작업은 대부분의 유럽 나라들에서 신속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연령이 찬 신규 노동력이 충원되었고, 전시동원으로 수많은 남성노동자들이 군대로 차출된 자리를 고용되지 않았던 남성들과 여성노동력이 유입되어 메웠습니다. 산업시설의 피해는 나라마다 차이가 크지만 대부분 2~3년 내에 전쟁전 수준을 회복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굳이 미국이 대규모의 재정적 지원을 하지 않아도 될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미국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오히려 해오던 원조마저 중단하게 됩니다. ‘연합국구제부흥기관(UNRRA)’을 통해 진행해 오던 유럽에 대한 원조를 1946년 가을, 경제 회복상태가 양호하다는 이유로 중단시켰습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미국이 다시 마셜 플랜을  발표하여 유럽을 지원하겠다고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미국의 고위 외교관이었던 존스(J.M.Jones)의 발언을 통해 그 단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럽이 경제적인 무정부 상태에 빠지도록 방치한다면, 최선의 경우 그들은 미국의 궤도에서 벗어나 자립적인 민족주의적 정책을 시도할 것이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그들은 소련의 궤도로 편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미국은 세계에서 고립될 것이다.”(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 필립 암스트롱 외)
미국은 유럽이 자신들의 궤도에서 벗어나는 것과 소련의 궤도, 즉 사회주의의 길로 빠져드는 것을 우려했던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이던 트루먼의 염려는 훨씬 구체적입니다. “(원조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 필자) 프랑스와 이탈리아 정부는 붕괴할 것이고, 오스트리아도 역시 붕괴할 것이며, 실제로 유럽은 모두 공산국이 될 것이다.”(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 필립 암스트롱 외)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냉전의 개시를 선포한 소위 ‘트루먼 독트린’입니다. 마셜 플랜이 발표되기 3개월 전인 1947년 3월 미 의회연설에서 발표한 트루먼 독트린은 미국의 반공 외교원칙을 밝힌 것입니다. “소수 무장세력이나 외부 압력의 예속 기도에 저항하는 자유민을 지원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 되어야 한다”는 트루먼의 주장은 유럽에 뿌리내리고 있었던 사회주의자들과 소련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세계 자본주의 진영은 커다란 위기에 빠져 들게 됩니다. 특히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유럽의 상황은 더욱 나빴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역학관계가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전시 호황기를 거치면서 노동자들의 힘이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불황기에는 공장 가동률이 줄고 실업률이 높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업자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언제 잘릴지 모르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어렵겠지요. 거꾸로 생산이 늘고 고용이 늘면 노동자들의 힘이 강해지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남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가사 일에 묶여 있던 여성까지 고용해야만 했던 전시의 호황기를 거치면서 고용된 노동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노동조합의 힘도 커졌습니다. 미국만 하더라도 400만 명 이상이 노동조합에 합류하여 전후 노조원의 수가 1,400만 명을 넘어섰고 영국도 노조원이 1/3 이상 증가하였습니다. 이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면에 자본가들의 힘은 전쟁을 거치면서 급격히 약화되었습니다. 독일, 일본, 이탈리아 같은 파시스트 국가의 자본가들은 전쟁을 일으킨 주범들로 패전과 함께 그 힘을 급격히 잃게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또한 독일이 침공하자 독일에 항복하고 협력한 프랑스 비시정부처럼 파시즘에 부역한 자본가들이 전후에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 역시 당연한 일입니다. 일제에 부역하며 떵떵거리다가 일제가 패망하자 하루아침에 몰락한 조선의 친일 지주, 자본가들처럼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파시스트 치하에서 끝까지 저항하며 투쟁했던 세력들 중에 노동자와 사회주의자들의 비중이 높았다는 사실도 전후 노동자들의 힘을 강력하게 만든 근거입니다. 특히 2천만 명이 넘는 병력을 희생하면서도 독일 주력부대를 깨뜨려 연합국의 승전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소련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사회주의 세력의 힘도 그만큼 커지게 됩니다.
그 결과 소련이 진주했던 폴란드, 체코, 유고 등 동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고 그리스에서는 내전이 발생했으며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는 좌파 정당들이 권력을 잡기도 합니다. 베트남을 비롯해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제국주의의 영토였던 식민지에서도 식민지 지배세력과 민중 간의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인구 10억의 광활한 중국대륙에서는 일본 제국주의 대신 미국의 지원을 받는 장개석 군대와 홍군이 격렬한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필립 암스트롱이 말한 것처럼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진정한 문제는 ‘물질적 파손’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가 하나의 사회 체제로서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것을 위협하는 요소들’이었습니다. 마셜 플랜은 유럽을 사회주의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기 위한 미국의 자구책이자 핵을 앞세운 정치·군사적 냉전체제와 함께 달러를 앞세운 경제적 냉전체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2)이었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우린 함께해야 한다.” 마셜 플랜 당시 미국이 선전을 위해 제작했던 포스터.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모습대로 세계를 창조한다!
자본주의의 파수꾼을 자처하는 미국의 이와 같은 개입은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에서 혁명의 기운이 높아지자 유럽의 자본가들에게 경제원조를 제공한 것이 미국이었고 패전국 독일의 지배계급이 혁명세력을 탄압하도록 후원한 것도 역시 미국이었습니다. 유럽 혁명의 중심지라 할 독일에서는 식량 원조를 빌미로 한 미국의 부축임 속에 독일 부르주아지들이 혁명세력을 탄압하여 결국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 등 노동계급의 지도자들이 학살되고 맙니다. 나아가 패전국 독일이 감당해야 할 전후배상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하여 배상금을 삭감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8억 마르크의 융자까지 제공3) 한 것도 미국이었습니다. 독일에게 전쟁의 책임을 묻는 것보다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칼 리프크네히트를 기리며, 1920, 케테 콜비츠
 
3년간 130억 달러가 지원된 마셜 플랜은 서구의 달러부족과 무역적자를 해소하는 것을 직접적인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전후 유럽은 심각한 달러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전 세계 금의 70%가 미국으로 집중되었는데 이것은 거꾸로 유럽 나라들의 화폐를 보증할 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이 브레튼우즈 체제는 금본위에 기초한 고정환율제를 근간으로 하는데 금으로 보증되지 않는 화폐는 종잇조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교환성이 떨어진’ 유럽 화폐들은 전후 경제 재건을 위한 물자들을 사들이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었습니다. 교환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금이나 기축통화인 달러를 확보하는 것인데 무역수지 적자폭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달러를 확보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1946년 58억 달러이던 유럽의 무역수지 적자가 이듬해에는 75억 달러로 증가하여 금과 달러 보유고는 마셜 플랜이 시행되기까지 1/3가량이 감소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유럽 화폐의 교환성을 회복시키고 경제를 살리고자 했을까요?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유럽을 사회주의로부터 방어하고자 하는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문제였지만 유럽경제의 회복은 단기적으로도 미국에게 커다란 이익을 안겨주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수혜자인 미국도 사실은 전후 상황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길거리에서도 증권거래가 이루어질 정도로 엄청난 호황기를 맞았던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경제가 급격하게 대공황의 나락에 떨어진 것에 비춰볼 때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호황과 유동성의 증가가 파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전시 호황의 이득이 고스란히 자본의 금고에 축적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미국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전례 없는 규모의 투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마셜 플랜에 의한 원조는 유럽에 유동성을 공급함으로써 미국의 수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946년 GDP의 3.6%를 차지했던 미국의 순수출(수출액에서 수입액을 뺀 액수)이 1947년 2/4분기에만 120억 달러(GDP의 5.4%)를 차지할 정도로 증가한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수출증가가 없었더라면 미국의 생산 및 물가, 고용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심각했을 것이라는 당시 미국정부의 보고서를 보더라도 마셜 플랜이 미국의 단기적인 이익에도 크게 기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미국은 마셜 원조를 주는 대신 유럽 나라들에게 여러 가지 조건을 부여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갑니다4).
“원조에 의해 조달되는 재화의 50%는 반드시 미국의 선박을 이용해야 하고 미국의 보험업자에게 보험을 가입해야 했다. 그리고 원조에 의해 식량을 수입할 경우, 다른 곳에서 보다 싸게 살 수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미국에서 수입해야 했다. 또한 미국의 석유업자들은 특혜대우를 받았다.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관리에 따르면, 이러한 협정은 미국 석유의 유럽 출구를 유지시켜 주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유럽 시장을 상실했을 것이다].”(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 필립 암스트롱 외)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미국이 원조를 줄 때 수혜국들에게 4개년 경제재건 계획을 제출하도록 요구했고 미 의회가 이를 근거로 원조를 승인했다는 점입니다. IMF 외환위기 당시 구제금융의 대가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수용할 것을 요구했던 점을 상기해 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미국은 유럽에 대한 원조를 빌미로 유럽에 미국식 경제시스템을 이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셜 플랜은 “산업현대화 프로젝트를 보장하고, 집합적인 경제관리라는 케인즈주의 전략을 장려하며 낡은 공공행정 체계를 바로잡고 누진세 정책과 저가 주택 공급프로그램 및 경제·사회개혁 조치를 장려”(The Left, 제프 일리)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유럽에 미국식 경영기법이 본격적으로 이식된 것도 이 때부터입니다. 미국은 1900년대부터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과 이에 기반을 둔 포드주의 대량생산 시스템을 발전시켜 왔는데 마셜 플랜을 통해 미국식 경영, 생산시스템을 유럽으로 이식한 것입니다. 이른바 하버드의 ‘비즈니스 스쿨’이 유럽으로 수출되었고, 59년도에는 미국 재단의 지원으로 유럽경영학교가 문을 열어 본격적으로 미국식 경영이론이 뿌리내리게 됩니다. 자신의 돈과 힘으로 유럽을 사회주의로부터 지키고 살려낸 미국이 자신의 사상으로 유럽을 재조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마셜 플랜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 맑스가 공산당선언에서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모습대로 세계를 창조한다”고 했던 것처럼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의 부르주아지들이 자신의 시스템으로 세계를 재창조하는 역사5)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 미국은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이끌어가는 완벽한 헤게모니 국가로 지위를 확고히 하게 됩니다.
 
빨갱이를 사냥하라!
트루먼 독트린, 마셜 플랜으로 대표되는 냉전 시스템은 미국 국내는 물론 유럽, 일본 등 전 세계에 걸친 공세로 이어집니다. 마셜 플랜이 유럽의 구 지배세력에게 달러와 안정을 안겨 주었다면, 노동자, 민중들에게 안겨진 것은 탄압과 분열이었습니다.
먼저 미국은 자국 노동자들의 소요를 진압하고 조직된 노동자들을 공격할 무기를 마련합니다. 거세게 터져 나온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는 전시 호황을 감안할 때 너무나 당연한 요구였지만 트루먼 행정부는 노동자들의 파업이 “전쟁의 공식적인 종언을 선언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며 선전포고로 응하게 됩니다. 파업에 대한 비상조치권, 살인적인 폭력과 벌금, 구속 등의 한시적인 조치를 넘어 훨씬 더 강력하고 보다 근본적인 공세가 취해졌는데 1947년 6월에 통과된 ‘태프트-하틀리 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1935년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미국의 노동헌장이라 불리는 ‘와그너법’이 제정된 이래 미국의 노동운동은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 왔습니다. 그러나 1947년 이후의 반공 공세는 이러한 노동운동의 진출을 용납하지 않았고 그것이 태프트-하틀리 법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노동조합의 부당노동행위 금지, 클로즈드 샵(closed shop)의 불법화, 60일간의 냉각기간, 공무원의 파업 금지, 노동조합 간부가 공산당원이 아니라는 선서의 제출 의무화 등 노동조합 활동을 억압하는 내용의 태프트-하틀리 법은 노동조합 내부에서조차 반공산주의 운동, 공산주의자 색출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등 본격적인 마녀사냥의 출발점이 됩니다.
 
전쟁 직후부터 시작된 빨갱이 사냥은 1950년대 초반 미 전역을 휩쓴 매카시 선풍에서 절정을 이룬다. 공화당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
 
이러한 미국 내 분위기는 마셜 원조를 받는 유럽 나라들로 확산되었습니다. “1947년 이후 3~4년 간 가장 중요한 특징은, 노동자들(특히 노조 투사들)을 해고하고 노조를 공격함으로써 경영자통제를 다시 확립”하려는 시도인데 “노동운동에 대한 이러한 공격은 디플레이션적인 금융정책에 의해 뒷받침”(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 필립 암스트롱 외)되었습니다. 디플레이션 정책은 전시 경제하에서 발생한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잡고, 금 보유량이 바닥난 가운데 통화량을 줄여 물가를 억제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지만, 돈이 풀리지 않고 경기가 침체되면 당장 실업자가 늘어나는 등 노동자들의 피해가 커지게 됩니다.
유럽 각국에서 실업률이 올라가고 노동조합의 힘이 약화되는 가운데 노동운동에 대한 분열공작과 공세가 더욱 강화됩니다. 프랑스에서는 노동총동맹(CGT)의 1947년 가을 총파업이 분쇄된 가운데 CGT에서 탈퇴한 일부가 ‘노동자의 힘(FO)’을 결성하게 됩니다. 1948년 여름의 총파업이 실패한 뒤 이탈리아 노총(CGIL) 역시 CISL(이탈리아 노동조합연합)이 떨어져 나가는 분열을 겪습니다. 이러한 노동조합의 분열은 대부분의 유럽 나라들에서 나타났고 좌파 정치조직의 분열로 이어지게 됩니다. 노동운동의 분열은 자본가계급에게 분할지배전략을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게 됩니다.
이러한 유럽 노동운동의 분열 뒤에는 백악관과 거대 관료기구로 변질하여 반공의 기수로 등장한 미국노동연맹(AFL)의 막후공작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프랑스 노총이 분열되고 몇 년 뒤 미국노동연맹(AFL)의 조지 미니가 “우리가 FO를 결성시킴으로써 프랑스 CGT를 양분시켰다”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닌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탈리아 노총의 분열과 CISL의 결성 역시 AFL과 CIA의 자금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944년, 미국 노동운동의 주도 아래 전 세계적인 자유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자유노조위원회(FTUC)’를 결성한 AFL은 미 국무부 및 CIA, 그리고 세계시장의 제패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던 독점자본의 자금 지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합니다. 마셜플랜에는 아예 서유럽 노조재건을 위해 자금의 5%를 사용할 수 있는 규정을 두었는데 그 자금의 사용자는 당연히 AFL에서 파견된 노조파괴자들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AFL은 세계노련(WFTU)에 맞서 국제자유노련(ICFTU)를 결성하고 중남미 지역에 반공노조를 확산시키기 위해 미주지역노동기구(ORIT)를 설립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통해 미국식 노사관계를 세계에 전파하는 선봉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됩니다.
이러한 결과, 유럽 전역에서는 고용의 증가 없이도 생산이 크게 늘어났고, 유럽의 산업 생산성은 1947년 이후 4년 동안 42%나 상승했습니다. 이러한 생산성의 증가는 대부분 노동강도의 강화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60~70년대 자본주의 최대의 황금기를 맞이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토대가 완벽하게 갖춰지게 됩니다. (계속)
 
각주
1) 미국경제를 움직이는 가장 커다란 힘 중 하나가 바로 군산복합체이다. ‘죽음의 상인’이라고 부를 정도로 이들이 세계를 상대로 벌이는 무기장사는 천문학적인 수익을 보장해 주고 있다. 모든 자본은 자신이 생산한 상품이 빨리 소비되기를 바라듯이 이들 군산복합체 역시 자신들의 상품인 살상무기가 빠르게 소비되고 그 시장을 빠르게 확대되기를 바란다. 그 결과는 ‘전쟁’이며 군산복합체의 초과이윤은 세계의 전장화로 이어진다. 미국이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고 나선 것은 군산복합체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함일 뿐이다.
 
2) 마셜 플랜은 소련과 소련 점령하의 동구권에도 제안되었으나 미국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소련이 이 제안을 거부한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나라들은 별도의 사회주의 경제협력기구라 할 수 있는 코메콘(Comecon, The 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을 구성하게 된다. 또한 1949년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라는 군사동맹기구를 만들자 소련은 1955년 바르샤바조약기구를 구성하여 이에 대항한다.
 
3) 독일의 배상문제에 대한 재건계획안으로, 이 안을 낸 미국 C.G.도즈의 이름을 따서 ‘도즈 안(Dawes Plan)’이라고도 한다. 미국에게서 대부를 받은 독일은 이 돈으로 영국과 프랑스에 배상금을 지불했고, 다시 영국과 프랑스는 이 돈으로 미국에서 빌린 전쟁채무를 갚았다. 결국 미국이 낸 돈으로 독일도 살리고, 영국과 프랑스도 살린 셈이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은 결과적으로 독일을 회생, 강화시켜 나치 출현의 조건을 마련해 준 셈이다.
 
4) 당시 마셜원조를 받기 위해 유럽 16개국이 공동으로 조직한 ‘유럽 경제협력위원회'(Organization of European Economic Cooperation / OEEC)’가 유럽경제공동체를 거쳐 현재의 유럽연합(EU)으로 발전해 왔다고 할 때, 현대 세계경제체제에서 미국의 가장 강력한 맞수 중 하나를 미국 스스로의 손으로 키운 셈이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아니 할 수 없다.
 
5) 마셜 플랜에 의한 미국식 사회, 경제시스템의 성과에 확신을 가지게 된 미국은 본격적으로 이 계획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한다. 1949년 트루먼에 의해 작성되고 시작된 ‘포인트 포 프로그램(Point Four Program)’이 바로 그것이다. 트루먼은 “미국의 과학적 진보와 공업발전의 혜택이 저개발지역의 진보와 성장에 이용되는 대담한 새 계획에 착수해야 한다”며 미국의 자본과 기술원조로 저개발지역의 경제를 개발, 생활수준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 ① 권고와 지도를 위한 미국 기술전문가의 파견 ② 실제 교육프로젝트용 자재의 제공 ③ 피원조국의 국민교육을 위한 미국이나 다른 나라의 수용 ④ 피원조국 고등교육제도 확립을 위한 미국 대학과의 계약체결 등을 실시하였다. 이 계획은 1950년 6월 5일 국제개발법(AID)으로 의회 승인을 얻어 9월 6일 그 실시 예산으로 3450만 달러의 예산지출법이 가결되었다. 이 계획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상호안전보장법(MSA)에 흡수되었으며, 그 계획 수행의 중심기관으로 처음에는 국무부 기술협력국이 설치되었으나 뒤에 대외활동본부로 다시 국제협력본부, 이어 국제개발국으로 바뀌었다.(Yahoo 통합사전 참조)


등록일: 08-11-05

 

 

 

 

[기획연재] 자본주의의 황금시대(Golden Age)-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시대

 

 

  <기획연재> 역사로 보는 달러의 정치경제학 7
  여상경 편집장 2003jmt@hanmail.net
 
필립 암스트롱은 그의 저서 ‘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호황의 가장 놀라운 특징은 생산의 숨막히는 성장이었다. 1973년 선진 자본주의국들의 생산은 1950년보다 180% 컸다. 이는 거의 두 배에 이르는 성장이었다. 이 25년 동안에 생산된 것은 그 이전 75년 동안 생산된 것보다 많았으며, 인간 역사상 어떤 25년보다도 몇 배나 많았다.”
 
말 그대로 자본주의 최고의 ‘황금시대(Golden Age)’였던 것입니다. 1947년 이후 유럽의 총생산은 연간 7%로 꾸준히 성장했고, 공업생산은 연간 약 10%가 성장하면서 40년대 말에 이르면 전전 생산수준을 초과하게 됩니다. 1973년 생산수단의 양은 1952년에 비해 2.5배나 증가했고, 비슷한 기간 동안 공산품의 세계 무역량 역시 349%가 증대했습니다. 또한 1955년을 100으로 할 때 1970년 선진국 산업 전체의 생산성은 160 이상으로, 노동자들의 임금 역시 150 이상으로 상승했습니다.
전후 극심한 혼란과 침체기를 겪었던 유럽 경제는 빠르게 복구됐고, 특히 일본의 약진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1955년~1970년 유럽 주요국의 자본스톡은 115%가 증가했고, 일본은 무려 500%가 증가했습니다. 세계대공황과 두 차례의 전쟁을 거치면서 심각한 위기 상황에 빠져들었던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강력한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에 의해 다시금 부활하는 듯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놀라운 성장과 호황을 만들어 낸 비결은 무엇일까요? 가장 극적인 성장세를 보인 일본의 예를 통해 황금시대의 비밀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의 항복을 알리는 트루먼. 냉전선언인 트루먼 독트린은 일본경제를 살리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일본은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놀라운 발전을 이뤄냅니다. 그리고 일본의 성장에는 50~60년대 자본주의 호황기의 모든 특징들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황금시대의 비밀과 한계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냉전의 경제학 : 노동을 통제하라!
 

*두고 보자! 일본에 대한 당시 미국민의 감정을 부추기기 위해 제작된 포스터. 이 포스터에 드러난 감정처럼 초기 미국의 정책은 일본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것이었다. 출처 : http://blog.naver.com/mig17/140018042618
 
일본을 점령한 직후 미국의 정책은 일본을 철저하게 거세하는 것, 즉 경제적 토대를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초기 미군정의 일본 정책은 ‘일본의 공격에 피해를 입은 인근 아시아 나라들보다 일본이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것을 돕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군정은 일본 군국주의의 가장 유력한 물적 토대였던 재벌 체제를 해체하고 노동조합을 장려하였습니다. 장차 미국기업의 강력한 경쟁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거대 독점체를 해체하는 것과 함께 노동조합 활동을 장려한 것은 노동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저임금 구조를 없애 미국기업의 경쟁력을 확보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1947년 이후 미국의 대일본 정책은 크게 변화하게 됩니다. 노동에 대한 통제와 탄압을 강화하고 재벌해체 작업을 중단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의 결정적 계기는 말할 나위도 없이 47년 3월에 발표된 ‘트루먼 독트린’입니다. 미래의 경쟁상대에 대한 견제보다 당장 위협적인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었던 사회주의 세력을 봉쇄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트루먼 독트린이 공표되고 3개월 후에 발표된 유럽부흥계획 역시 이러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은 지난 글을 통해 확인한 바 있습니다.

미국은 일본의 허약한 자본가들을 보호하고 강력한 노동운동 세력을 와해시키는데 총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일본을 지원하기 위해 4억 달러의 증여를 제공하고 경제회복을 촉진하는 것과 함께 일명 ‘도지 라인(Dodge Line)’을 통해 노동에 대한 반동적 공세를 강화합니다. 백악관은 서독의 통화개혁을 입안하기도 했던 은행가인 도지(Joseph Morrell Dodge)를 도쿄로 파견하여 강력한 초긴축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도지는 정부의 재정지출을 삭감하고 통화량을 급격하게 위축시켰는데 이러한 과정은 수많은 기업의 도산과 대규모 정리해고 및 실업사태를 야기하게 됩니다. 미군정이 빨갱이 사냥을 부추기는 가운데 수많은 노동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해고되었고 공산당이 지배하던 ‘산베추(산별)’는 붕괴되었습니다.

미군정의 도지라인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일본 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하는데 기여하게 됩니다.  강력했던 노동운동 세력을 분열, 와해시켜 작업장 통제를 강화한 것과 함께 당시 일본의 악성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고 과잉자본을 파괴하여 경기의 선순환을 위한 토대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1949년부터 이윤이 상승하기 시작했고, 여기에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일본 경제에 기적과도 같은 호황국면1)을 만들어줍니다.
 
노동자들을 통제하기 위한 미군정과 일본 총자본의 담합은 점점 강화됩니다. 예를 들면, 1953년 닛산 자동차의 파업 당시 이들이 보여준 협력관계는 혀를 내두를 지경입니다.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자 닛산 자본가들은 먼저 공장폐쇄를 단행하게 됩니다. 이러한 닛산 자본에게 일본 산업은행은 금융지원으로, 다른 자본가들은 닛산 하청업체들의 주문을 대신 받아주는 것으로, 그리고 닛산의 경쟁자들은 노동자들과의 전쟁 기간 동안에는 닛산의 시장에 침범하지 않는 것으로 협력합니다. 동시에 어용노조인 ‘젠로(전노련)’의 지원 아래 제2노조를 결성하여 노조 분열을 꾀합니다. 그야말로 총자본의 총체적인 공세가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원활한 재생을 위해 가장 먼저 노동운동을 분열시키고 무력화시켜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인 노동자 집단을 만들어내는 것은 일본만이 아니라 유럽에서도 일반적으로 행해졌던 방법입니다(역사로 보는 달러의 정치경제학 6 참조).
 
 
국가, 경제에 개입하다!

이와 더불어 전후 호황을 이끌어 낸 중요한 동인은 강력한 국가의 개입입니다. 대공황과 뉴딜 이후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는데 유럽과 일본의 부흥에 있어서도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게 제기되었습니다. 이 때 국가의 주요한 역할은 노동자들에게 일정한 권리와 물질적 혜택을 부여하는 것과 함께 경제계획, 산업정책 등을 통해 경제활동에 직접 개입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흔히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슬로건으로 표현되는 ‘복지국가 모델’이 바로 그것입니다. (노사협조적인) 노동조합 활동의 보장, 안정적인 고용, 정기적인 임금인상, 국가의 사회·복지서비스 증대 등을 특징으로 하는 이 모델은 주로 유럽에서 정착되었는데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체제 변혁의 꿈을 포기한 대가로 주어진 혜택(?)이기도 합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국가가 강력한 정책적 수단을 동원하여 핵심 산업을 육성하고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세금감면과 금융적 지원은 물론 관세장벽을 통한 산업 보호, 외국인 투자제한, 기술개발 지원 등을 통해 핵심 산업을 ‘계획적으로’ 육성하고 심지어는 합병 유도 등을 통해 대형화를 촉진하게 됩니다. 이렇게 육성된 산업들이 조선, 철강, 자동차, 컴퓨터 산업 등인데 현재도 일본의 대표적인 핵심 산업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비난하던 자본주의 체제가 ‘계획’의 요소를 도입하게 된 것인데 한국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도 그 한 예입니다.
이 외에도 국가가 도로나 항만 등 경제의 하부구조를 구축하거나 특정 산업을 국유화하여 직접
경영하기도 하는 등 국가의 경제개입이 본격화됩니다.
 
 
신기술의 도입과 생산성의 증가
마지막으로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를 꽃피운 힘은 아이러니하게도 격렬한 ‘경쟁’이었습니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기업 간 경쟁을 격화시킵니다. 이 때 생산성을 높여 경쟁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자본의 노력은 낡은 설비와 기술을 폐기하고 새로운 설비와 신기술을 도입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호황과 함께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고,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자본의 경쟁은 필연적으로 임금의 상승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임금상승으로 인한 수익성의 저하를 상쇄하기 위해 더욱 경쟁적으로 생산성이 높은 신기술과 새로운 설비를 도입하게 됩니다. 이러한 결과 노동생산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임금 상승은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높여주어 시장을 확장시키는 효과도 만들어 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엄청난 기술혁신이 이루어졌고 산업구조 또한 석탄 중심에서 석유 중심으로 전환하여 고효율의 생산시스템이 자리 잡게 되면서 기업의 이윤율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반드시 언급하고 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 헤게모니를 이야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테일러-포드시스템이라는 미국식 생산 시스템의 확산입니다. 미국이 마셜플랜을 통해 테일러-포드시스템을 유럽으로 이식하고 확산시켜 왔다는 것은 지난 글에서 살펴보았습니다. 미국이 헤게모니2) 국가로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은 물론 다른 나라들이 스스로 ‘동의’하면서 따라 올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미국은 ‘경제 성장과 부’를 그 동의의 대가로 제시합니다. 한마디로 “우리를 따라오면 엄청난 성장과 막대한 부를 얻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답이 바로 ‘강력한 노동통제에 기초한 대량생산 시스템’ 즉 테일러-포드 시스템의 보급입니다.
 
*1925년형 포드 모델 T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시대
‘과학적 관리법’이라고도 불리는 테일러시스템은 작업능률을 극대화하기 위해 시간연구와 동작연구를 기초로 노동의 표준량을 정하고 그에 근거하여 차별적으로 임금을 지급하는 노동통제방법입니다. 노동의 표준량은 최고 숙련공을 대상으로, 세분화되고 단순화된 동작의 분할과 초 단위 시간측정을 통해 정해지게 됩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것이지요.
 
“직원의 코끝에서 75Cm 이상 떨어져 있는 물건들은 모두 귀중한 시간을 빼앗는 것들이었다. 책상에서 하는 작업 역시 움직인 시간에 따라 연구한 다음 작업시간을 표준화했다. 즉 서류가 들어 있는 서랍을 열고 닫는데 걸리는 시간은 0.04분, 의자에 앉는데 걸리는 시간은 0.033분, 회전의자를 돌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0.009분이었다.”(템포바이러스, 페터 보르샤이트)
 
이를 통해 표준 노동량(테일러는 이것을 ‘정당한 하루의 과업’이라고 불렀습니다)을 결정하고 소수의 기술자들이 다수의 노동자들을 지시·감독·통제하는 현장 시스템을 구축3)하였습니다. 결국 테일러는 인간노동을 단순한 기계적 동작으로 치환하여 표준화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이는 대신 인간노동을 파편화시키고 철저히 기계에 종속시키는 생산관리 시스템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러한 테일러의 연구에서 엄청난 이윤의 원천을 발견한 사람은 바로 자동차 왕 헨리 포드입니다. 그는 테일러의 연구를 자신의 자동차 생산 공정에 접목함으로써 ‘모델 T’를 대량생산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모델 T는 컨베이어 벨트로 대량생산한 자동차로서 생산시간과 생산비를 획기적으로 절감시켜, 자동차를 부의 상징이 아니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대중적인 이동수단으로 만드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게 됩니다.

테일러-포드 시스템은 표준화와 이동조립을 특징으로 합니다. 모델 T로 대표되는 포드자동차는 동일한 모양과 색상의 차를 대량으로 생산(제품의 표준화)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부품의 표준화, 직무의 표준화가 요구됩니다. 이동조립법은 일에 사람이 가는 대신 ‘사람에게로 일을 가져오는’ 방식으로 흔히 컨베이어 시스템이라고도 합니다. 이동조립법은 생산의 흐름이 직선적이고 막힘이 없어 생산시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필요에 따라 공정간 거리를 단축시킬 수 있고 제품을 항상 라인에 흘려보내 조립하는 방식이다 보니 재고를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나아가 생산의 흐름이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에 맞춰지기 때문에 노동자들을 라인에 종속시켜 작업의 몰입도를 높일 수 있으며 감시, 감독이 용이합니다. 또한 노동을 극단적으로 파편화시키고 노동강도를 강화하는 등 노동의 비인간화를 가져왔고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역관계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키게 됩니다.4)
 

*포드 공장이 있던 디트로이트는 미국 자동차 산업의 요람이 된다.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디트로이트 산업(1932-1933). 포드사에 남아있는 벽화이다.
 
테일러-포드 시스템은 현대화된 공장에서도 그대로 차용되어 노동의 소외와 비인간화를 양산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도요다 자동차입니다. 도요다의 노동자들은 68초마다 자동차 한 대를 조립해야 하는데 “이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 표준작업이라는 도요타 매뉴얼에는 작업 중 발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까지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을 정도로 테일러와 길브레이스의 시간 및 동작연구에 기초하여 작업과정이 통제5)”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테일러-포드 시스템은 50~60년대 자본주의 황금시대의 물질적 기초, 즉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결합을 이루어 호황의 기초를 이루고 체제의 안정화를 가져 왔습니다. 대량생산 체제는 엄청난 상품을 싼 가격에 쏟아내어 노동자들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고 혁명의 꿈을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1970년대가 되면 미국 국민들은 가구당 2대 이상의 자동차를 보유하게 되었고, 냉장고, 세탁기가 구비된 안락한 주택에서 컬러TV를 즐기며 체제에 순응하는 고분고분한 노동자가 되어 갔던 것입니다. 또한 수만 명을 고용하는 대량생산 공장은 자본에게 충분한 이윤을 보장해 주었으며, 그들이 지급하는 임금으로 구매력을 얻게 된 노동자들은 보다 넓은 판매 시장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자본이 만든 모던 타임즈(Morden Times)

컨베이어 시스템을 도입하여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인 포드의 디트로이트 공장은 전 세계 자본가들에게 꿈의 공장으로 떠올랐고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너도나도 포드공장의 ‘꿈의 시스템’을 받아 들였고, 테일러-포드시스템은 급속하게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테일러-포드 시스템은 생산방식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산방식의 변화는 그러한 생산방식 하에서 노동하는 노동자들의 생활양식을 변화시켰고 사회 제도와 문화, 소비방법 등 사회양식의 변화까지 만들어냅니다.
 
“포드와 같은 미국 기업가들이 취한 조치 역시 흥미롭습니다. 그는 자기 종업원들의 사생활을 감독하고 규제하는 일단의 감독관들을 두고 있습니다. 그들은 음식, 침대, 방의 용적, 휴식 시간, 그리고 더 은밀한 문제들까지도 감독합니다. 따르지 않는 이는 누구든지 해고당하고 하루 6달러라는 자기의 최저 급여6)를 잃게 됩니다.”(옥중수고, 안토니오 그람시)
 
*미국의 페미니스트 사진작가 바바라 크루거의 <I Shop, Therefore I Am(1987)>. 소비주의에 매몰된 인간존재를 비판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는 상품은 그 자체로 자본에게 이익을 주지 못합니다. 그 상품이 판매되어 화폐로 돌아올 때 자본은 최종적으로 이익을 남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테일러-포드 시스템은 상품의 판매를 촉진하기 위한 각종 마케팅 기법과 판매망을 요구하게 되고, 소비를 권장하는 각종 이데올로기와 제도 역시 생산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대량생산이 대량소비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대량판매 시스템이 필요한 것입니다. 체인스토어(연쇄점), 슈퍼마켓이 등장했고, 대도시의 소비자를 위한 대형 백화점이 발전했으며 농촌의 소비를 촉진시키기 위해 통신판매 등이 개발되었습니다. 특히 1930년대부터 시작된 텔레비전 방송은 광고 혁명7)을 불러옵니다. 상품을 소개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자본이 새로운 소비욕구를 불러일으키고 불필요한 소비를 조장하여 ‘소비사회8)’를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1949년에 1,230억 달러였던 TV 광고시장이 불과 2년 만에 10배가 넘는 12,800억 달러의 시장으로 확장될 정도였습니다. 또한 판매 방식도 대량생산 시스템에 맞게 개선되어 소액의 계약금을 내고 나머지 잔액은 매월 조금씩 지불하는 할부신용을 비롯한 각종 소비자금융이 발달하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사람들의 의식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멋진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카멜 담배를 문 멋쟁이 배우가 터프하게 생긴 지프를 몰아 광야에서 야영을 합니다. 사냥개를 옆에 둔 이 멋쟁이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황혼을 바라보고 고독을 즐깁니다. 부와 풍요, 여가와 소비를 지향하는 중산층 미국인들은 이런 류의 광고나 드라마를 보면서 그 영상이 자극하는 각종 상품 - 카우보이 모자, 담배, 지프, 커피 등을 구매하여 자신을 표준적인 ‘아메리칸 스타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소비 행위는 단순한 욕구 충족을 넘어서는 상징적, 문화적 행위가 되며 그 사회에서 자신의 위상을 확인하는 징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테일러-포드 시스템의 소품종 대량생산방식은 획일화된 - 비슷한 종류의 상품을 소비하며 비슷한 생활패턴과 사고방식을 가진 - 인간형을 대량생산하는 시스템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와 풍요의 상징으로서 ‘아메리칸 스타일리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먼저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테일러-포드 시스템이 작동하는 대공장에 취직하여 잘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컨베이어 시스템이 요구하는 속도에 맞춰 노동할 수 있는 육체적 능력과 기계화된 동작을 익혀야만 합니다. ‘소비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노동의 권리’를 포기할 줄 알아야 하며 기계가 요구하는 동작과 속도를 맞추기 위해서는 ‘인간의 권리’도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성으로 노동해서는 안 되며 오로지 기계적으로 분할되어 매뉴얼화된 동작으로만 노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테일러-포드 시스템은 컨베이어 라인의 속도에 맞춰 노동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기계에 대한 노동의 종속을 심화시킨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획일화된 생산현장은 획일화된 상품을 만들어내고, 획일화된 상품을 소비하는 사회는 마찬가지로 획일화된 생활양식을 만들어 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노동자들의 노동과 삶을 떠올려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대건설이 만들어낸 대형 아파트를 나와 서울 메트로가 운행하는 지하철을 타고 출근합니다. 업무가 끝나면 다시 출근의 역순으로 집으로 되돌아가 삼성전자가 판매하는 TV를 통해 방송사와 제목만 다를 뿐 내용은 비슷한 드라마와 쇼 프로그램을 보다가 ‘침대 과학’이 만든 침대에서 잠이 듭니다. 어쩌다 동료들과 회식이라도 할라치면 19.5도로 똑같이 알콜 도수를 낮춘 소주에 돼지고기보다 싼 미국산 쇠고기를 먹습니다.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면 비슷한 조명에 비슷한 영상이 나오는 노래방에서 한바탕 즐긴 후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지요.
이렇게 대량생산체제가 만들어내는 사회는 그 자체로 하나의 대량소비체제로 기능하면서 작동하게 됩니다. 물론 이렇게 작동하는 시스템의 이면에는 자본의 의지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본이 생산한 상품과, 자본이 만들어낸 소비심리 그 자체가 자본의 의지의 발현인 것입니다. 자본에 의해 생산되고 자본에 의해 통제되는 사회가 바로 대량생산-대량소비사회의 본질입니다. 대량생산-대량소비사회야말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는 ‘상품의 방대한 집적’으로서 나타난다”는 K.맑스의 표현을 가장 극명하게 확인시켜 주는 사회인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원형감옥, 21세기 파놉티콘(Panopticon)

그런데 이러한 사회 시스템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원활한 생산이 보장되어야 하며 그를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라인 시스템에서 일탈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감시와 통제장치가 필요한 것이지요. 그러나 테일러-포드 시스템은 소수의 특권화된 관리층만을 필요로 합니다. 감시, 감독과 통제는 생산 시스템 그 자체의 역할로 넘어갑니다. 컨베이어 라인의 속도가 노동자들을 통제하는 일차적 기제라면 대량소비에의 유혹 또한 훌륭한 통제장치로 기능합니다.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대량소비사회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면 컨베이어 시스템에서 방출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노동자 스스로 컨베이어 시스템의 일부가 될 때 대량소비의 혜택을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쯤 되면 더 이상 ‘살아있는’ 감독자가 필요 없게 됩니다. 벤담이 구상했던 ‘파놉티콘’이 완벽하게 복원되는 것이지요. 파놉티콘은 18세기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담이 설계한 원형감옥(경찰서 유치장을 떠올리면 됩니다)을 말합니다. 벤담이 설계할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했던 파놉티콘은 프랑스 철학자 푸코가 파놉티콘의 감시체계 원리가 사회 전반으로 파고들어 규범사회의 기본원리로 되고 있다고 제기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벤담이 설계한 감옥 파놉티콘은 중앙이 비어있는 동심원 모양을 하고 있었다. 파놉티콘의 바깥쪽 원주를 따라서는 죄수를 가두는 방이 있었고 중앙에는 죄수를 감시하기 위한 원형 탑이 있었다. 죄수의 방에는 햇빛을 들이기 위해 외부로 난 창 이외에도 건물 내부의 탑을 향한 또 다른 창이 있어서, 죄수의 일거수 일투족이 탑에 있는 간수에게 시시각각 포착될 수 있었다. 반면 중앙의 감시 탑의 내부는 항상 어둡게 유지되어 죄수는 간수를 볼 수 있기는커녕 간수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죄수를 감시한다는 ("seeing without being seen") 시선의 '비대칭성'이 파놉티콘의 핵심 구조였다. 파놉티콘에 수용된 죄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항상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 간수의 시선 때문에 규율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못하다가 점차 이 시선을 '내면화'해서 스스로 자신을 감시하게 된다는 것이 벤담의 생각이었다. "감시는 보편적이었고, 영구했으며, 포괄적이었고," 이러한 의미에서 파놉티콘은 감시의 원리를 체화한 "자동 기계9)"였다.(벤담의 파놉티콘(Panopticon)에서 전자 시놉티콘(Synopticon)까지: 감시와 역감시, 그 열림과 닫힘의 변증법, 홍성욱)
 
*벤담의 파놉티콘을 그대로 재현한 현대 감옥.

ERP(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란 이름의 프로그램과 고성능 컴퓨터 시스템이 노동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실시간으로 감시, 통제하는 사회. 기업 곳곳에 설치된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전자 센서가 작동하면서 가슴에 찍힌 바코드를 통해 그들의 동선과 활동내역을 실시간으로 체크당하는 병원 노동자들, PDA를 통해 작업 지령을 받고 작업이 끝나면 다시 PDA를 통해 보고한 뒤에도 안심할 수 없어 퇴근 후에 개인적으로 고장신고를 받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통신노동자들의 존재는 사회전체가 원형감옥에 둘러싸인 자본주의의 현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일까요. (계속)
 
*각주
1) 한국전쟁은 일본 경제의 부활에 있어 결정적인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다. 1949년~51년 사이 일본의 수출은 3배가 늘었고, 이윤몫은 2배가 늘었다. 미국은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1950년 7월부터 ‘특별구매조달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되는데 일본은 이를 통해 기계·금속부문, 화학부문의 활성화를 이루게 된다. 이 기간 동안 특별구매와 미군 주둔 지출액이 일본 총 외화 획득액의 37%에 이르렀다.
 
2) 안토니오 그람시는 ‘옥중수고 Prison Notebooks’에서 헤게모니는 한 계급이 힘의 위력으로써만이 아니라 제도, 사회관계, 관념의 조직망 속에 ‘동의’를 이끌어냄으로써 자신의 지배를 유지하는 수단이라고 정의하였다.
 
3) 과학과 기술이 빠른 속도로 발달하면서 과학자, 기술자, 경제학자 등 전문 기술자들이 사회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그들의 정치적 중요성이 커지게 된다. 그들의 통제 범위가 개별 현장 수준을 뛰어넘어 전체 조직 또는 사회적 의사결정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단계에 이른 것을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기술관료)’라 하여 이들의 독재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크다.
 
4) 테일러-포드 시스템은 자본-노동 사이의 역관계를 근본적으로 뒤집는 계기가 된다. 인간의 노동이 중심적이던 초기 자본주의 단계에서 생산도구의 소유 및 배치, 생산계획 수립, 노동과정의 배치에 이르기까지 생산 전반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사람은 노동자였다. 당시 생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였던 ‘숙련’이 노동자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계의 도입과 함께 상황은 반전된다. 노동자의 특정 노동과정을 오차 없이 무한 반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기계는 노동자의 숙련을 쓸모없게 만들어 버린다. 노동자는 숙련기계의 ‘노동’을 보조하는, 예컨대 기계에 맞춰 연료나 원료를 공급하거나 부품을 조립하는 단순작업을 하게 된다. 이로써 자본가는 예전처럼 노동자를 닦달하거나 회유하는 방법을 통하지 않고도 기계의 속도를 조절함으로써 노동과정을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지배하고 통제하게 된 이러한 변화를 맑스는 ‘노동에 대한 형식적 포섭’에서 ‘노동에 대한 자본의 실질적 포섭’으로의 변화라고 불렀다. 즉 기계의 도입을 통한 가치증식 과정의 변화(절대적 잉여가치의 창출에서 상대적 잉여가치 창출로의 변화)와 함께 노동에 대한 자본의 규율과 통제가 동시에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기계가 점점 인간의 숙련을 해체하고 인간노동력을 대체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면서, 이제는 그나마 인간이 필요한 노동과정을 보다 철저히 기계의 리듬에 복속되도록 하는 것이 남았다. 초단위로 인간 동작을 세분화하고 쓸모없는 동작을 제거, 표준화하여 생산기계의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는 포드-테일러 시스템이 고안된 것은 그러한 필요에 의해서였다. 체계적으로 수집되고 표준화된 노동과정에 대한 정보는 다시 전체 생산(량과 과정을)을 장악하고 있는 전문 관리자(기술자)들에 의해 노동자들에게 ‘작업지시서’로 내려짐으로써 더 이상 ‘생각할 필요’조차 없게 된 노동자는,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흘러오는-그것도 주요 핵심작업을 기계로 마친- 생산품에 마지막 손질만 가하면 되는 것이다. 컨베이어 속도를 방해하지 않도록 재빠른 동작으로 말이다.
 
5) 도요타 파워, 정철화
 
6) 그람시는 자본의 입장에서 ‘최저 급여’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사실 포드 노동자들이 받았던 임금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7) 초기의 TV 광고는 기업이 직접 후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1948년 시작된 NBC의 ‘카멜 뉴스 카라반(Camel News Caravan)’이란 뉴스 프로그램이다. 담배회사인 카멜이 스폰서를 담당하여 프로그램 제목에 기업이름이 들어가고 중간 중간 카멜 담배를 광고했던 이 프로그램은 담배 판매량을 급증시켜 막대한 이익을 내는데 크게 공헌했다.
 
8)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기 위해 생명을 유지하게 만드는 사회, 이것은 다시 인간이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이 인간을 소비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장 보드리야르는 광고가 담고 있는 상품의 질서, 즉 기호가 사람의 욕구를 자극한다는 측면에서 해당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광고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으로 보았다. 욕망, 기호(광고), 상품의 연쇄반응이 소비의 욕구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초과이윤을 향한 자본의 욕망이 인간의 욕망과 과소비를 부추기는 것이다.
 
9) 이러한 의미에서 컨베이어 시스템도 감시의 원리를 체화한 ‘자동기계’일지도 모른다.
 
 


등록일: 09-02-06

 

 

 

[기획연재]위기의 ‘팍스 달러리움(Pax Dollarium)’
  
  여상경 편집장 2003jmt@hanmail.net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새로운 역사를 써가는 듯 했습니다. 두 차례의 전쟁으로 피폐화된 세계 경제를 단숨에 복구했고, 사상 최고의 호황기를 맞아 높은 생산성을 구가했으며 자본주의 본국의 체제는 안정적이었습니다. 대량생산 시스템이 쏟아내는 값싼 상품들은 노동자들에게 나누어졌고 노동자들은 상품 구매를 위해 더욱 더 컨베이어 벨트에 매달렸습니다. 노동자들이 만들어낸 구매력은 상품 판매시장을 더욱 넓혀 주었고 이윤율은 크게 상승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한편에서는 사회주의 진영이 영토를 넓혀가고 있었고 제국주의의 품을 떠난 신생독립국들이 그 발걸음을 왼쪽으로 돌리는가 하면, 인구 10억의 중국 대륙에도 붉은 별이 떠오르는 등 전체적으로 불안정성은 더욱 심화되었지만 미국은 그에 대한 방비책을 마련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브레튼우즈 체제가 안정적으로 정착하기까지 미국의 군사적 역할입니다. 사회주의에 대한 집단적 안전보장이란 명분 아래 결합된 미군 주도의 군사동맹은 체제 내적으로는 유럽 및 일본의 급진적 노동운동세력을 누르고 외적으로는 불온한 적색 위협을 막아내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됩니다. 동유럽 사회주의의 소위 ‘철의 장막’에 대해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구축하여 대응하고, 아시아 지역의 방어를 위해서는 미국의 ‘불침항모(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 일본과의 군사동맹을 주축으로 한국과 대만을 잇는 저지선1)을 구축합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당장의 위협을 저지하고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배양하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게 됩니다.
 
과잉축적, 피할 수 없는 운명

전후 20여 년 동안 세계 경제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1970년대 초 세계 공업생산고는 50년대의 4배로 증가했고, 교역량은 무려 10배나 증가했습니다. 황금기의 처음에는 세계 경제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 또한 대단히 컸습니다. 1952년에는 미국 한 나라가 선진국 전체 생산량의 60%를 생산해 냈고, 인구 1인당 총생산 수준도 2위인 영국의 2배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미국은 물론 유럽과 일본 역시 놀라운 속도로 축적을 늘렸고 테일러-포드 시스템에 기반을 둔 대량생산 시스템은 노동자 계급을 실질적으로 포섭함으로써 엄청난 생산성의 증가를 이뤄냅니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입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자본주의의 황금시대가 막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증기기관처럼 폭주하던 브레튼우즈 체제가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그 동력을 잃어버렸고, 급격하게 증가하던 생산성이 둔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미 1960년대 중반부터 선진국의 전 산업 부문에서 이윤율이 하락하기 시작하여 1973년에는 이전 최고 수준의 1/3 정도가 하락했습니다.
이러한 이윤율의 하락은 세계 무역이 증가하면서 국가 간 경쟁이 격화된 것을 포함해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문제는 ‘과잉 축적’이었습니다.
“고도의 축적률은 자본주의로 하여금 역사상 가장 길고 급속한 경제 호황을 누리게 했지만 대가를 요구했다. 호황이 끝날 때쯤, 성장의 엔진은 과열되었고 점차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과잉 축적’이 시작된 것이다.”(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 필립 암스트롱 외)
 
K.맑스는 일찍이 자본론에서 자본 간의 경쟁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고도화시켜 이윤율을 저하시키는 경향으로 발전하며 이로 인해 공황이 도래한다고 예견한 바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시장 장악을 둘러싼 자본 간 경쟁은 더욱 치열해집니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본가들은 노동 강도를 높이고 임금을 낮추는 등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지만, 이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보다 생산성이 높은 기계설비와 신기술을 도입하는 방법으로 초과이윤을 얻고자 합니다. 그런데 경쟁적으로 새로운 생산설비를 확충하게 되면서 전체 자본 구성에서 불변자본(생산수단에 투하되는 자본)의 비중이 가변자본(노동자의 고용에 소요되는 자본)보다 상대적으로 커지게 되는데 이것을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맑스에 따르면 인간 노동력 부분인 가변자본만이 새로운 가치(잉여가치)를 생산합니다. 즉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된다는 것은 전체 생산액 중에서 잉여가치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이윤율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다시 말해, 자본가들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거대한 생산설비와 신기술을 도입하면 할수록 이윤율은 갈수록 줄어드는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자본가들은 ‘박리다매’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즉 줄어드는 이윤율의 문제를 이윤량을 늘려 보상받고자 하는 것이지요. 예컨대 총투하자본 100에 이윤율이 10%라면 자본가가 10만큼의 이윤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윤율이 8%로 저하되면 8만큼만 가져갈 수 있게 되는데 이 때 투하자본을 200으로 늘린다면 16만큼의 이윤을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자본 간의 과도한 축적경쟁을 야기해 필연적으로 과잉축적과 과잉생산을 불러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모순이 폭발하게 되면 ‘공황’이라는 괴물을 불러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끝에서는 부가 쌓이는 반면 다른 한 끝에서는 수탈과 비참함이 쌓이는 것을 특징으로2)” 하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적 경향입니다.
60년대 중반 호황기가 끝날 즈음 세계 자본주의는 100여 년 전 맑스가 예견한 바로 그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대량생산 시스템이 만들어 낸
거대한 노동자군대

과도하게 높은 축적률이 이윤율 하락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지만, 이로부터 파생된 다른 문제 역시 자본의 이윤을 잠식하는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그것은 바로 급속한 자본 축적과 함께 창출된 대량의 노동자들의 존재입니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독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특히 테일러-포드 시스템이 만들어 낸 대량생산체제는 거대한 노동자들을 공장으로 결집시켰습니다. 여기에다 사상 유래가 없는 대호황으로 말미암아 일할 노동력이 항상 부족했기 때문에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자본의 경쟁도 치열해 졌습니다. 농업생산력이 증대하면서 농촌에서 수많은 노동력이 배출되었고, 여성 노동력뿐만 아니라 이민 노동자들도 크게 늘어났지만 60년대에 들어서면서 노동자에 대한 수요에 비해 공급이 모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자들을 구하기 힘들어진 자본가들은 낡은 생산수단을 폐기하고 생산성이 높은 새로운 생산설비를 도입하였고 이것은 과잉 축적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60년대 중반에 이르면 이른바 ‘완전고용’ 상태가 되는데 완전고용은 노동자들의 힘을 강화하고 자본의 통제를 약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흔히 경제위기 상황이 되면 노동자들의 불만이 커져 노동자들의 저항과 투쟁이 강화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그와 반대입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한 노동자 내부의 경쟁은 강화되는 반면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노동력을 구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이미 취업상태인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지키는 수준에서 임금 및 근로조건을 양보하거나 급격하게 보수화될 가능성이 커지고, 실업상태인 노동자들은 치열한 일자리 경쟁을 벌이다 좌절하거나 일회성 폭동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자본의 경찰에 진압되기 일쑤입니다.
거꾸로 경기가 활성화되어 노동력이 더 많이 필요하게 되면 노동자를 고용하기 위한 자본 간의 경쟁이 강화되고 노동자들은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자신의 근로조건을 계약하거나 단결된 힘을 바탕으로 따낼 수 있습니다.
폴란드 출신의 경제학자 미샬 칼레스키가 ‘완전고용의 정치적 면모’라는 글에서 밝힌 것처럼 “영구적인 완전고용 체제 하에서는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기 때문에 : 필자) ‘해고의 위협’이 징계수단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지속적인 완전고용은 불건전하고, 실업은 정상적인 자본주의 체제의 일부라는 것”을 계급적 본능으로 알고 있는 자본가들은 ‘공장의 규율’과 ‘정치적 안정’을 당면한 이윤보다 더 선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본주의 최고의 호황기는 자본가들의 계급적 본능과는 무관하게 엄청난 노동자들을 공장으로 불러들였고 완전고용 상황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노동조합에 가입한 노동자 수도 크게 늘어 1952년 4,900만 명이었던 선진국의 노조원 수가 1970년에 이르면 6,200만 명으로 증가하게 됩니다.3) 노동자들은 강화된 힘을 기반으로 높은 임금인상을 달성했고 노동시간을 크게 단축하는 등 근로조건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상황들은 자본의 이윤을 잠식하는 또 다른 요인이 됩니다.
 
테일러-포드 시스템과 함께 무너진
케인즈주의의 환상

완전고용은 자본의 수익성은 물론 작업현장에서 자본가의 통제 또한 위협했습니다. 생산성은 기본적으로 새로운 생산설비와 신기술에 의해서 높아지지만, 작업현장의 규율이나 작업방식, 작업의 속도와 강도 등에 의해서도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아담 스미스는 분업의 효율성을 강조하기 위해 핀의 생산을 예로 들었는데, 그에 따르면 핀 공장에서 10명의 노동자들이 독립적으로 핀을 만들면 하루 20여 개도 만들기 힘든데, 그 공정을 18가지로 나누어 만들게 되면 하루에 무려 48,000여 개를 생산한다는 것입니다. 아담 스미스가 예로 든 공장의 경우 사용한 작업도구나 노동자는 그대로이며 단지 생산 공정과 작업 방식만을 바꾸었을 뿐입니다.
 
전후 호황을 만들어 낸 테일러-포드 시스템은 표준화와 이동조립 방식이라는 생산방식의 획기적인 변화 외에도 위계적 관리체계를 통해 노동의 규율을 강화했으며 컨베이어의 속도 조절만으로도 작업 속도와 노동 강도를 크게 높일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테일러-포드 시스템은 노동자들의 숙련과 노동과정에 대한 지식을 빼앗아 자본의 수중에 집중시킴으로써 노동자들을 단순·반복 노동으로 몰아넣습니다. 테일러는 “두뇌작업은 가능한 한 공장으로부터 분리하여 계획부나 설계부에 집중”시킬 것을 요구했는데 이를 통해 소수의 관리자가 작업 전반에 대해 기획, 관리하고 대다수 노동자들은 그 지시와 명령, 통제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 권위적 통제체제를 구축합니다. 이를 조금 어려운 말로 ‘구상과 실행의 분리’라고 합니다. 테일러가 말한 ‘두뇌작업(구상)’은 관리·기획 담당자가 하고 노동자들은 (두뇌로 생각하지 말고) 그저 기계처럼 일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호황의 초기에 테일러-포드 시스템은 생활 물자의 부족에 시달렸던 노동자들에게 물질적 풍요와 복지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자신의 메커니즘 안으로 노동자들을 포섭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작업장 통제 메커니즘이 주는 불합리함과 병폐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테일러-포드 시스템은 노동의 파편화, 단조로움, 노동 강도의 강화 및 작업장에서 위계적 차별화를 불러와 노동의 비인간화를 양산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노동자들의 작업 의욕은 갈수록 떨어지고 그와 함께 생산성도 저하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호황이 진전되어 노동자들의 힘이 강력해지자 현장에 대한 자본의 통제력이 힘을 잃어가면서 그 저하속도는 점점 가속화되었습니다.
 
저명한 맑스주의자 H. 브레이버만은 자신의 저서 <노동과 독점자본>에서 70년대 미국에서는 ‘직무불만족’이 ‘유행하는 연구주제’라면서 미국 정부가 발행한 <미국의 노동>이라는 보고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고의적인 결근, 이직률, 비합법 스트라이크, 사보타지, 불량품, 업무에 대한 노동자의 혐오감 등으로 측정하였을 때 결국 노동생산성은 낮다. 더욱이 노동문제의 증가와 더불어 육체적, 정신적 건강, 가족적 안정성, 공동체에 대한 참여와 그 응집도, 균형 잡힌 사회정치적 태도 등이 결과적으로 쇠퇴하는 반면에 약물이나 알코올 중독, 싸움, 범죄가 증가함을 지적하고 있는 조사연구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테일러-포드 시스템의 한계는 그 사회·경제적 기반으로서 케인즈주의의 한계와 함께 드러나게 됩니다.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한 치의 오차 없이 작동해야 하는 테일러-포드 시스템에 결박시키기 위해, 정부가 재정지출을 늘려 노동자들에게 의료, 복지, 교육 등의 사회서비스를 제공해야 했는데 문제는 이러한 사회서비스는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갈수록 사회복지비용이 증가하게 되면서 자본에게 부과되는 조세도 커져 결국 이러한 것들이 이윤율 저하에 영향을 끼치게 된 것입니다.
 
1936년 케인즈가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을 발표한 이래, 그의 이론은 대공황의 수렁에서 허덕이던 자본주의에 구세주처럼 받아들여졌고 미국에서도 그의 이론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케인즈의 이론이 빛을 발한 것은 2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정부가 돈을 대 전쟁에 쏟아 부으면서 실업률이 낮아졌고 대공황이 사라진 것입니다. 당시 열렬한 케인즈주의자였던 케네스 겔브레이스가 “이것(2차 세계대전)보다 더 케인즈주의의 효과를 보여준 것은 없었다”고 이야기할 정도입니다. 케인즈는 “군비지출로 실업을 해결했다면 우리는 이미 위대한 실험을 한 것”이라면서 전시에 적용된 자신의 이론이 평화 시에도 작동할 것이라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전시와 평화 시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은 엄청난 화약과 대량살상무기를 동원하는 대량살상전의 양상을 띠었는데 이는 그만큼의 전쟁 물자를 소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시에 생산된 상품, 즉 무기와 군수물자들은 전쟁터에서 바로 소비되어 버립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자본의 입장에서는 이처럼 무궁무진한 시장이 없는 셈입니다.
예컨대 1939년 영국은 미국의 록히드 사에 폭격기 200대를 주문했는데 이를 통해 록히드는 300만 달러 상당의 이윤을 냈다고 합니다. 영국의 주문은 폭증하여 1941년 말에는 1,700대로 증가했고 일손이 딸린 록히드는 9만 명의 노동자를 추가 고용했습니다. 또한 미국은 1939년~1945년 사이에 각종 총기류 600만 정과 97,810대의 중폭격기를 포함한 324,750대의 각종 항공기, 약 10만 대의 탱크와 장갑차량, 항공모함 114척과 구축함 349척을 비롯한 약 71,000척의 각종 함정들, 그리고 약 410억 발에 달하는 각종 탄약류와 33,993,230톤의 각종 화물선을 생산했다고 합니다.4) 이 엄청난 ‘상품’들이 ‘전장’이라는 이름의 시장에서 포연과 함께 소비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시의 케인즈주의는 전시와 같은 무궁무진한 성장을 담보하지 못했습니다. 테일러-포드 시스템이 전시처럼 대량의 상품을 쏟아냈지만, 그 소비시장의 확대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결국 소비되지 못하는 과잉상품의 존재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케인즈는 국가의 개입과 ‘계획’을 이야기했지만,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작동 시스템이 건재한 조건에서 생산의 무정부성을 제어하지 못하는 한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서 그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외에도 처음에는 자신의 자동차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감격해 하던 소비자들이 점차 다양한 색상과 디자인, 기능을 가진 자동차를 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테일러-포드 시스템은 그와 같은 대중의 소비패턴에 즉각적으로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부품 및 제품의 표준화에 근거한 대량생산체제가 갖는 경직성은 동일한 기능과 차체의 검은색 모델T만 생산해 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품종대량생산 시스템으로서 포드주의 방식은 대중의 요구와 기호에 부응하지 못하면서 점점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딜레마

갈수록 이윤율이 저하하고 결국 과잉생산공황으로 치닫게 되는 것은 자본주의가 숙명적으로 안고 있는 체제 모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5~60년대 황금기가 파국을 맞게 된 데는 브레튼우즈 체제가 안고 있었던 모순이 폭력적으로 드러나게 된 것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애초부터 브레튼우즈 체제는 미국에 의해 떠받쳐진 경제체제였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부를 축적한 미국의 경제력과, 핵우산을 기반으로 형성된 강력한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브레튼우즈 체제는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브레튼우즈 체제는 아메리카 헤게모니에 기반을 둔 정치-군사-경제 체제인 것입니다. 이 때, 헤게모니 국가이자 브레튼우즈 체제의 매니저로서 미국은 그 유지비용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미국은 전후 유럽 및 일본의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서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습니다. 3년간 130억 달러를 지출한 마셜플랜이나 일본의 배상의무를 면제해 준 것이 대표적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미국은 사회주의로부터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해 많은 나라들에 군사원조를 지출했으며 엄청난 전비를 들여가면서 직접 군사행동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1949년 나토 회원국들에게 14억 5천만 달러의 군사원조를 행했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거액의 방위 원조를 통해 일본의 오키나와 공군기지, 요코스카 해군기지 등의 군사시설을 확장·정비하고 1949년 한 해에만 20만 톤 가량의 군수품을 일본에 조달했습니다.5)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는 그 해 1월에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에 의거해 수백 명의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고 2억 달러에 달하는 군사원조를 단행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베트남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이 베트남과 직접 대결하기 전인 1946년,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의 전쟁에 미국은 막대한 양의 군사원조를 프랑스에 제공합니다. “1954년까지 미국은 인도차이나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 군대 전체를 무장시키기에 충분한 소형화기와 기관총 30만 정과 10억 달러를 제공6)”합니다. 전쟁 당사자도 아닌 미국은 프랑스가 이 전쟁에 투입해야 할 비용의 80%를 부담했다고 합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미국은 자신이 만든 세계 체제에 대한 책임감(?) 하나로 전 세계를 누비면서 엄청난 규모의 달러를 살포하고 다닌 것입니다. 이름 붙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에 의한 평화)’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것이 평화인지 지옥인지는 오직 그 전쟁의 한복판에서, 쏟아지는 네이팜탄을 경험한 당사자만이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하튼 미국은 이와 같은 금융적, 군사적 우위를 통해 자신의 헤게모니를 유지해 왔고 그 결과 엄청난 규모의 달러가 해외로 유출되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미국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안녕을 위해 유럽과 일본을 부흥시켰는데 이들이 훨씬 빠른 속도로 자본축적을 이루면서 미국의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했습니다. 미국이 자본주의 경찰로서 불침번을 서고 있는 사이 유럽과 일본은 낮은 임금비용을 무기로 미국을 따라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1955~70년 사이 미국 제조업의 자본 스톡이 75% 상승한 데 반해 유럽은 115%, 일본은 무려 500%가 상승했습니다. 또 같은 기간 평균생산성은 미국이 1/3 상승한 반면 유럽은 2배, 일본은 5배나 상승했습니다. 1950~60년대 커다란 수출이익을 남겼던 미국은 경쟁자들의 추격에 밀리기 시작7)했고 1971년을 기점으로 무역수지 적자국으로 전락했습니다. 미국이 경상수지 적자국이 됐다는 것은 그만큼의 달러가 해외로 유출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다가 60년대 중반 이후 미국 기업의 해외투자가 급증하여 달러의 해외 유출은 더욱 가속화됩니다. 1950년에 120억 달러였던 해외투자가 1970년에 이르면 780억 달러로 늘어났고 1972년 미국 기업의 해외 생산은 총생산의 22.5%에 달했습니다.
미국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유지하기 위해 본인의 의지로, 또는 의도하지 않았던 요인에 의해 엄청난 규모의 달러를 해외에 유출시켜 온 것입니다.
 
달러를 방위하라!

미국 달러화는 1944년 브레튼우즈 협정을 통해 유일한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습니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핵심은 ‘달러’이며 그런 점에서 기축통화로서 달러는 미국의 지배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 체제는 그 자체로 미국에게 커다란 이익을 안겨주었습니다. 미국은 달러를 찍어내기만 하면 외국의 훌륭한 사업체를 살 수 있었고(1950~67년 사이 450억 달러) 외국 정부에게 차관이나 증여를 제공(500억 달러)할 수 있었으며 외국에서의 군비 지출을 조달(440억 달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8) 기축통화라는 사실 그 자체로부터 막대한 규모의 이익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달러가 기축통화로 된다는 것은 미국에게 심각한 딜레마를 안겨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교역이 증가하면서 보다 많은 통화량이 요구되었는데 지하자원인 금은 매장량이 제한적이고 캐내기도 쉽지 않아 늘어나는 유동성 요구에 부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결국 금 아닌 또 다른 기축통화로서 달러가 이러한 통화 증가 요구를 충족시켜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달러화가 국제 시장으로 공급되기 위해서는 미국의 수입이 수출보다 많거나 미국으로부터 자본유출이 발생해야만 합니다. 여기에서 미국의 딜레마가 발생합니다. 즉 이 럴 경우 미국은 항상 경상수지 적자 상태여야 하는데 미국이 적자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국제유동성 공급이 어려워집니다. 반면 이러한 적자 상태가 지속되어 미 달러가 과잉 공급되면 달러 가치가 하락해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신뢰도가 떨어지고 결국 고정환율제 자체가 붕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9) 한 마디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이러한 달러의 딜레마는 곧 드러나게 됩니다.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미국의 패권적인 대외 정책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규모의 해외 지출이 이루어진데다 무역수지 적자폭이 커지고 자본의 유출도 심각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달러의 발행량을 늘리는 결과를 빚었고 결국 달러의 금태환성을 불안정하게 만들었습니다. 무역 흑자 등을 통해 달러를 가진 나라들은 달러의 과잉발행으로 인한 달러가치의 하락과 금으로의 태환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브레튼우즈에서의 약속에 따라 달러 보유국이 요구하면 미국은 언제든지 금 1온스와 35달러를 바꿔주어야 합니다. 다만 달러가 이렇게 과잉 발행될 경우 미국의 금 보유고를 뛰어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이 불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 각국은 미국의 금태환 자제 요청에 따라 “금을 달러로 바꾸지 않겠다”는 성명을 내는 등 미국에 대한 신의(?)를 지키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안감에 기름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베트남전쟁입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엄청난 전비를 쏟아 부었는데 이것은 달러 보유국들의 불안감을 키웠을 뿐 아니라 이들 정부보다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투기세력들의 움직임이 그 불안감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달러가치의 하락을 예감한 투기세력들이 달러 투매를 본격화한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금 1온스를 35달러에 살 수 있는데 달러 가치의 하락으로 인해 이미 미국 외 금시장에서는 금이 35달러 이상으로 매매(70년대 말에 이르면 금 1온스가 850달러에 거래되고 있었다)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달러를 금으로 태환한 후 국제 금시장에 내다팔면 그 만큼의 차익을 챙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었던 각국 정부가 미국 정부에 금태환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71년 8월에는 프랑스와 영국이 달러를 금으로 교환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퍼지면서 달러 투매가 더욱 격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이들 나라의 태환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71년 초 미국 정부가 보유한 금은 외국의 달러보유액의 32%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이 수치는 그 해 12월 18%로 떨어집니다.
마침내 1971년 8월 15일,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닉슨은 “달러화 방위를 위해 달러화의 금태환을 잠정 중단한다”고 발표했고 세계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이른바 ‘닉슨 쇼크’라고도 하는 이 발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 질서를 규율해 왔고 아메리카 헤게모니의 상징이기도 했던 브레튼우즈 체제의 종언을 의미합니다. 닉슨의 금태환 중지 선언이 나오자 당시 미국 신문들은 “Let's dollar float”라는 기사를 실었다고 합니다. 더 이상 달러와 금을 바꿔주지 않게 됨으로써 이제 달러가 금에 대해 그 가치를 잃고 표류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미국의 지배력이 결정적으로 쇠퇴하게 되었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무덤 속으로 들어간 브레튼우즈 체제

닉슨 쇼크 이후에도 브레튼우즈 체제를 재건하기 위한 미국의 몸부림이 이어졌습니다. 미국으로서는 지난 수십 년간 쌓아온 자신의 헤게모니를 놓기 싫었을 것이고 다른 나라들도 자유무역의 활성화를 위해 브레튼우즈 체제를 대신할 대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해 12월에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모인 선진 10개국 재무장관들은 미국의 무역적자를 감안하여 달러화를 금 1온스당 35달러에서 38달러로 평가절하하고 고정환율제의 변동폭을 1%에서 2.25%로 확대하는 협정에 서명하게 됩니다. 스미소니언 협정이라는 것인데 미국은 이를 통해 금태환의 의무를 벗어버리고 무역적자를 개선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고정환율제에 기초한 브레튼우즈 체제를 더 이상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국가 간 자본이동이 유래 없이 활발한 조건에서 고정환율제는 국내 통화정책과 양립할 수 없었기 때문10)입니다. 특히 투기자본이 어느 때보다 기승을 부리고 있는 조건에서 고정환율제를 유지하기란 더 이상 불가능했습니다. 영국이 먼저 변동환율제로 이행했고 이탈리아, 스위스 등이 이를 따랐습니다. 달러는 다시 한 번 평가 절하되었지만 추가적인 조치도 달러의 신뢰성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국이 변동환율제를 채택했고 1976년 1월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에서 열린 IMF 잠정회의를 통해 공식적으로 승인하게 됩니다. 이로써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주도 아래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유지해 왔던 브레튼우즈 체제가 막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브레튼우즈 시대의 개막이 세계 최강의 자본주의로서 미국의 지배를 뜻한다면 브레튼우즈 체제의 종말은 이러한 미국의 헤게모니가 결정적으로 쇠퇴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미국이 세계의 제왕으로서의 지위를 순순히 내어주거나 한 번의 위기로 그대로 주저앉지는 않았습니다. 누누이 강조해 왔듯이 미국의 패권주의는 경제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정치·군사적 개입력이 기반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러가치의 하락으로 미국의 경제적 지배력이 극도로 약화되고 결국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마저 내주는 상황이 되자 미국은 다른 방도를 찾기 시작합니다. 당시 미국이 주목한 것은 ‘검은황금’석유였습니다. 석유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에너지 수요가 급증하고 공업용뿐만 아니라 가정용으로도 널리 쓰이게 되면서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으로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1945년부터 사우디아라비아와 합작관계를 맺고, 엑손, 텍사코 등 메이저 석유회사를 통해 사우디의 석유 생산을 통제하고 있던 미국은 사우디 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키신저는 미국으로 흘러가는 중동지역의 정보를 장악했다. 그 속에는 미국 정보부가 입수한 아랍 관리의 전쟁 준비에 관한 정보의 확인도 포함되어 있다. 워싱턴 당국과 전쟁기간과 전쟁 후에 키신저의 ‘왕복 외교’를 통해 빌더버그 5월 회의에서 정해진 노선을 정확히 실행했다. 아랍 석유 생산국들이 전 세계인의 눈총을 받는 ‘속죄양’으로 전락하는 사이에 앵글로색슨족과 미국이 챙긴 막대한 이익은 슬그머니 가려져 버렸다.”11)
 
키신저의 회유와 협박에 못 이긴 사우디아라비아는 1975년 OPEC 회원국 중 최초로 그들의 석유 결제대금으로 달러만 사용할 것을 받아들였고, 곧 다른 OPEC 국가들도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로써 금에 의해 보증되던 달러가 이제는 석유에 의해서 보증되는, 그래서 브레튼우즈 시대의 종말로 그 지위가 하락하던 달러가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굳건하게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특히 74년부터 시작된 석유 파동은 달러에 대한 수요를 크게 증가시켰습니다. 석유 사용량이 많았던 주요 선진국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석유의 결제 화폐인 달러를 구하는 것이 사활적인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브레튼우즈 체제는 사라졌지만, 달러는 여전히 미국의 패권주의를 실현하는 강력한 무기로 기능하면서 세계 경제를 교란시켜 온 것입니다.
그러나 달러의 부활과 무관하게, 세계 경제는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빠져들었고 73년부터 시작된 유가 폭등은 2차 세계대전 이후 20년 이상 지속되어 온 자본주의 황금시대에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1973~74년 사이 4배나 뛰어오른 석유 값은 자본의 수익성을 결정적으로 떨어뜨렸고 전 세계적 차원에서 수요가 급격하게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본주의적 과잉축적이 결국 공황을 불러올 것이라는 맑스의 예견이 1974년 여름에 시작된 세계 공황을 통해 다시 한 번 입증되고 있었습니다.(계속)
1973년부터 시작된 석유 위기는 60년대 중반부터 누적되어 온 자본주의 축적위기가 파국으로 치닫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1950~60년대 자본주의 황금기가 끝나고 세계는 장기불황으로 진입하게 된다.
 
주석>
 
1) 이때부터 한국과 대만은 신생독립국의 이탈을 막고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자본주의 상품전시장으로 기능하면서 발전하게 된다. 물론 이 전시장에는 화려한 상품과 불야성처럼 밝은 조명이 필요했기 때문에 미국은 이들 나라에 많은 조언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원조(군사원조 포함), 차관 형태의 지원은 물론 경제발전을 위한 자문도 한다. 한국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도 미국인 고문 찰스 울프의 자문을 받아 완성한 후 미국 워싱턴에 있는 국제원조처(USAID)의 재가를 받아 그 자금으로 진행된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한국과 대만의 자본주의를 발전시켜야만 다른 신생독립국들에게 “한국과 대만처럼 우리를 따른다면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다”라는 유혹적인 메시지를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자본주의를 ‘쇼윈도 자본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한강의 기적’이라는 슬로건은 이 쇼윈도의 요란스런 광고 카피 역할을 한 것이다. 
2) 폴 스위지, <노동과 독점자본> 서문 
3) 노동조합 조합원 수가 크게 늘어난 데 반해 조직률은 37% 대에서 30% 대로 떨어졌는데 이것은 상대적으로 조직률이 취약한 사무직, 서비스 직종의 노동자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4)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민족경제연구모임, 제국주의 미국 
5) 허버트 빅스, 지역통합전략
6) 하워드 진, 미국 민중사
7) 단적으로 1957년 미국의 빅3가 생산한 자동차는 다른 선진국의 11.6배에 달했는데 1972년에는 4.2배로 줄었고 철강 역시 4.7배에서 0.9배로 줄어들었다. 
8) 필립 암스트롱 외, 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
9) 이를 트리핀의 딜레마라고 한다. 1950년대 미국의 적자가 계속되자 당시 미국 예일대 교수였던 로버트 트리핀이 이와 같은 요지의 의회연설을 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10) 예를 들어 한국이 경기진작을 위해 팽창정책을 쓴다고 가정하자. 통화 공급이 늘어나면 물가가 오르고 이자율이 떨어진다. 국내 물가가 오르면 수출가격이 올라 무역수지가 악화되는데 이는 달러가 유출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다가 이자율이 떨어지면 이자율이 높은 나라로 달러가 빠져나가게 된다. 달러의 유출이 증가하면 환율이 올라가게 되는데(고환율) 정부는 적정 환율을 유지하기 위해 외환시장에 개입하게 된다. 즉 정부는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풀고 원화와 바꾸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애초의 통화 팽창 정책의 효과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11) 윌리엄 엥달, 석유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


등록일: 09-03-08

 

 

 

 

[기획연재] 세계를 휘젓는 투기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역사로보는달러의정치경제학 9
  여상경 편집장 2003jmt@hanmail.net
 
1992년 9월, 영국의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마이더스의 손’으로 영국 투자자들로부터 칭송받던 조지 소로스의 공격 때문에 영국 파운드화가 폭락하고 국가 파산위기에 몰린 것입니다.

먼저 사태의 시작은 독일에서 비롯됩니다. 1990년 통일한 독일은 빠르게 동독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막대한 통일비용을 지출합니다. 돈이 많이 풀리면 인플레가 발생하게 되는데 독일 중앙은행이 인플레를 막기 위해 초고금리 정책을 취하자 유럽 전역의 화폐 가치가 크게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금리가 높은 곳으로 몰리는 돈의 속성상 유럽의 자본이 금리를 올린 독일로 쏠렸기 때문입니다. 영국 파운드화 역시 대폭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당시 독일과 통합유럽의 헤게모니를 다투던 영국은 파운드화를 방어하겠다며 평가절하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자 조지 소로스가 각종 언론을 통해 ‘파운드화 대폭락’을 예언1)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퀀텀펀드를 앞세우고 100억 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자금을 동원해 파운드화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조지 소로스의 뒤를 이어 수많은 헤지펀드들이 가세했고 그 규모는 1천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레버리지 효과(지렛대 효과)’인데 사태가 마무리된 후 추산한 바에 따르면 당시 영란은행은 헤지펀드들이 실제 동원한 자금의 10배에 이르는 1조 달러의 압박을 받았다고 합니다. 조지 소로스는 자신의 자금을 담보로, 그것보다 훨씬 많은 액수의 파운드화를 차입합니다. 그리고는 그 돈으로 외환시장에 ‘파운드화 팔자’ 주문을 내면서 달러를 사들입니다. 엄청난 규모의 파운드화가 풀리고 달러가 없어지니까 파운드화가 하락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영란은행은 외환보유고를 총동원해 파운드화를 지키려 했지만 투기자본의 맹공을 당할 수 없었고 결국 두 손을 들고 맙니다.
 
그렇다면 소로스가 돈을 벌어들인 비결은 무엇일까요? 예컨대 소로스가 1달러=1파운드인 시점에 1억 달러를 담보로(외환시장에서 바꾸는 것이 아니라) 1억 파운드를 차입(실제로는 레버리지 효과에 의해 훨씬 많은 파운드를 차입)했다고 합시다. 빌린 돈 1억 파운드로 달러를 사들이기 시작해 1달러=2파운드가 되었을 때 다시 달러를 파운드로 바꿉니다. 그는 2억 파운드를 손에 넣게 되었고 그 중 빌린 1억 파운드를 되갚고도 1억 파운드의 이익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약 한 달간의 공세를 통해 소로스는 간단하게 10억 달러를 벌어들였고 영국은 엄청난 국부를 탕진하고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통합유럽을 향한 단일통화제도도 상당한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당시 한 신문이 ‘유럽, 산산조각 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을 정도로 유럽 각국에 엄청난 피해를 입힌 이 공격은 한 나라의 중앙은행마저 투기자본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황금의 손’으로 극찬을 받던 조지 소로스는 최근 들어 글로벌 금융위기의 주범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실제로 그는 퀀텀펀드라는 헤지펀드를 운영하면서 여러 나라에서 환투기를 일으켜 실물경제를 교란시켜 왔다.

‘돈’이 ‘돈’을 사다!

원래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투자’라는 명목의 ‘투기’를 부추기는 체제입니다. 사회적 필요와 무관하게 이윤이 보장되는 곳이라면 돈이 몰리는 경제 체제가 자본주의이며 특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요와 공급 간의 균형을 맞추어준다는 시장은 때때로(거의 대부분) 위험 경보를 늦게 발령하는 경우가 있어 흔히 과잉투자와 파산을 불러옵니다. 투자를 통해-다시 말해, 고급정보통을 가지고 있거나 대단히! 운이 좋아 사고파는 시점을 잘 맞춰 떼돈을 벌어들인 사람에게는 ‘성공한 투자자’라는 명예가 따르고 파산을 한 사람들에게는 종종 ‘투기열풍에 휩쓸린’이라는 딱지가 붙습니다.

애초부터 투기와 투자는 그 구분이 모호합니다. 17세기 네덜란드를 뒤흔들었던 튤립투기 역시 투자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튤립이 거래되면서 발생한 것입니다. 외환위기 당시 단기 차익을 노리고 국내 증권을 사들였던 수많은 헤지펀드들을 ‘외국인투자자’라고 환영했던 것을 떠올려 본다면, 제일은행을 인수한 후 다시 매각해 1조원이 넘는 시세차익을 남기면서 세금 한 푼 내지 않았던 KFB브릿지홀딩스가 버젓이 투자전문회사라는 간판을 내걸었던 것을 상기한다면 투자와 투기를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그 투기적 경향을 극명하게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부터입니다.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엄청난 규모의 유휴자본의 존재이고 두 번째는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입니다. 자본주의의 황금기가 끝나고 점차 이윤율이 저하하자 호황 과정에서 몸집을 불린 막대한 유휴자본이 실물경제 영역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수익원을 찾아 떠돌던 유휴자본은 새로운 투자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돈’입니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되고 변동환율제가 도입되면서 환율의 변동을 이용하기만 하면 엄청난 시세차익을 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통화 가치는 시장에서 ‘변동’하게 됐고, 마치 상품처럼 서로 경쟁해야 했다. 통화 시장은 거대한 도박장으로 변해 힘센 헤지펀드, 다국적 은행, 그리고 기타 투기꾼들이 조작하게 됐다.”(엘런 브라운, 달러)
 
암스트롱에 따르면 ‘이윤율 하락에 따라 생산적 투자에 자금을 투하하지 않고 단기적 투기를 통해 큰 돈벌이를 꾀하는 흐름이 생겨난 것’은 이미 1970년대 초반부터입니다. 특히 80년대를 경과하면서 전 세계를 휩쓴 초국적 투기자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의 태내에서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주식 버블로 야기된 1929년 세계대공황의 배후에는 은행이 있다. 대공황 당시 증권시장의 붕괴가 시작되는 가운데 사람들이 은행으로 몰려들고 있다.
 
 
노동자-경영자-주주의 타협체제

미국은 오래 전부터 주식회사 제도를 발전시켜 왔는데 이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은행입니다. 그러나 기업 합병 등을 통해 독점이 강화되고 금융자본의 지배력이 커지자 이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게 됩니다. 물론 독점화된 금융자본의 권력집중에 대한 반대 여론이 커진 것도 규제를 강화하게 한 원동력이지만, 결정적으로 규제의 계기를 제공한 것은 1929년 세계대공황입니다. 무분별한 투기로 치달았던 1920년대 버블 당시 은행이 고객예금으로 위험한 주식, 채권에 투자했다가 망하면서 문제를 키웠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미국 정부는 상업은행의 방만한 경영을 규제하고 투자은행 업무를 완전히 분리함으로써 금융자본의 산업자본에 대한 지배를 약화시키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1933년 제정된 ‘글래스-스티걸 법(Glass-Steagal Act)’입니다. 이로써 기업이 발행하는 주식의 인수는 투자은행에만 국한되고 상업은행2)에 대해서는 완전히 금지됩니다. 미국판 금산분리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를 더 이상 구제할 수 없는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듯했던 사상 최악의 대공황은 구원투수 케인즈에 의해 기사회생합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케인즈는 국가의 개입과 유효수요의 창출을 통해 자본주의 경제를 되살린 사람입니다. 열렬한 케인지언이었던 루즈벨트 대통령은 실업자들을 위해 각종 구호 정책을 내놓았고 일자리를 주었습니다. 동시에 자본에 대한 강력한 규제책도 함께 내놓았습니다. 이른바 ‘거시경제정책’을 통해 ‘고삐 풀린 시장’을 통제하고 자본주의 생산의 무정부적 경향을 제어하고자 한 것입니다. 주식시장을 감독하는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설치되고 은행예금을 보증하는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등이 설립된 것도 이 시기입니다.

이러한 케인즈주의 경제정책의 핵심은 포드-테일러 시스템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세계 최고의 강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토대에는 포드-테일러 시스템으로 표현되는 고유한 축적체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포드-테일러 시스템은 ‘강력한 노동통제와 포섭정책에 기초한 대량생산-대량소비 시스템’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포드-테일러 시스템은 전문 경영자와 기술자 집단을 주축으로 하는 혁신적 생산체제3)이기도 했습니다. 이 때 전문 경영자와 기술자 집단은 기업의 성장과 확대가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때문에 기업 활동을 통해 획득한 이윤을 다시 재투자해 생산을 늘리고 기업을 확대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대량생산 시스템을 통해 완전 고용과 대량소비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노동자계급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점에서 포드-테일러 시스템은 절충적인 노사타협에 기초한 생산체제입니다.
 
한편 포드-테일러 축적체제는 또 다른 관계, 즉 전문 경영자와 그 기업의 주식을 보유한 주주와의 관계에 있어 긴장과 타협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전문 경영자는 이윤을 재투자해 생산을 확장하고자 하는 반면 주주는 보다 많은 배당을 받아 수익성을 극대화하고자 합니다. 포드-테일러 축적체제는 금융자본에게 높은 주식가치를 보장해 주면서도 ‘현금흐름 분배와 통제를 둘러싼 산업자본(경영자)과 금융자본(주주)의 갈등4)’에 있어 산업자본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미국 자본주의의 형태를 ‘경영자 자본주의’, 80년대 이후 시기를 ‘주주자본주의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앞에서 본 바대로 금융자본의 산업자본에 대한 지배를 금지한 것은 물론 자본시장에 대한 관리를 일원화하고 증권거래소에 대한 감독 및 공공성이 강한 전기·가스 등의 사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 나갔습니다. 또한 저금리를 유지함으로써 기업들이 자금 조달을 쉽게 하고 장기적 안목에서 투자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포드-테일러 시스템은 높은 투자율과 노동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것이 1950~60년대 자본주의 황금기를 만들어낸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그런데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테일러-포드 시스템은 노사타협은 물론 경영자와 주주 간 타협 속에서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에 우위를 점하는 체제입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테일러-포드 시스템이 높은 생산성에 기초하여 세계시장에서 경쟁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러한 경쟁에서 우위를 상실할 경우, 즉 더 이상 주주들에게 높은 수준의 주가 상승 이익을 주지 못할 경우 체제를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타협체제에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 들어서입니다. 이미 1950년대부터 낮은 임금비용과 높은 투자에 기초하여 생산성을 향상시켜 오던 일본과 독일이 60년대 후반 들어서면서 미국이 차지하고 있던 세계시장은 물론 미 국내시장까지 잠식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자본 수익률이 크게 감소한 기업들이 한편으로는 노동자에 대한 임금억제를 통해, 또 한편으로는 국외로의 진출을 통해 이것을 상쇄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포드-테일러 시스템을 떠받치고 있던 전제, 즉 노동과 자본 및 경영자와 주주 사이의 균형과 타협이 깨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동자들의 임금이 억제되고 부당노동행위가 증가하게 되면서, ‘살쾡이 파업5)(Wild cat Strike)’이나 결근율이 크게 늘어나 생산성 하락과 불량률 증가를 야기하게 됩니다.
이와 함께 그동안 미국기업의 경쟁력 우위에 기초해 높은 주가를 보장받음으로서 이 협력 체제를 수용해 왔던 주주(금융자본)들의 반격이 시작됩니다. 이들은 금융유동성과 자본이탈을 통해 케인즈주의 국가정책을 압박해 들어옵니다.
 

레이건, 대주주들의 보안관이 되다
 

로널드 레이건 주연의 1953년 작품인 '법과 질서(law and order)'. 악당들을 향해 총을 빼들고 서 있는 보안관 레이건의 모습은 마치 신자유주의 법과 질서를 지키는 수호자로 자신의 미래를 예견한 듯한 표정이다.
 
주주들의 반격에 돌격대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사람은 1980년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입니다. 이류 영화배우로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레이건이지만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전 세계의 대주주들에게 가장 주목받는 정치인이 됩니다. 그는 정의를 지키는 영화 속 보안관처럼 멋진 포즈로 자본주의의 악당들을 물리칩니다. 그가 제일 먼저 총을 빼든 대상은 바로 자본주의 최고의 악당인 ‘노동자’들입니다.

레이건이 취임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은 1981년 8월, 연방정부 소속의 항공관제사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에 돌입합니다. 지난 50년 동안 민주당을 지지해 왔던 항공관제사노조(PATCO)는 노동조건을 개선해 주겠다는 약속을 굳게 믿고 레이건을 지지했는데 그가 신뢰를 저버리자 파업에 돌입한 것입니다. ‘48시간 내 복귀명령’을 내린 레이건은 이에 응하지 않은 노동자 12,000명을 해고해 버렸고 ‘평생 재취업 금지명령’이라는 강경책으로 이들의 미래마저 막아 버렸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노동운동을 근본적으로 무력화시키기 위한 각종 조치들이 이어집니다. 노동자들을 적대시하는 보수적인 판사들이 연방 사법부를 채웠고, 자본의 편을 드는 인사들이 전국노동관계위원회(NLRB)6)를 장악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노동운동의 급격한 약화로 나타났습니다. 1981년 이전 연간 7,100회에 달하던 노동조합의 파업승인투표 횟수는 1981년 이후에는 연간 3,500회로 절반으로 감소했으며, 81만여 명에 이르던 조합원 수도 83년 이후에는 36만 명 수준으로 축소됩니다.

“레이건은 산업안전보건청의 수장 자리에 이 기구의 목적에 상반되는 기업가를 임명했다. 그가 한 첫 번째 조치 가운데 하나는 섬유 노동자들에게 면섬유 분진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지적하는 정부 소책자 10만 부를 파기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하워드 진, 미국민중사)

“레이건의 팽창정책 3년째 되는 해에 이 부문들은 이미 깊은 경기후퇴 속에 빠져들었고, 애플, 휴럿-패커드 및 텍사스 기계의 ‘종신’ 고용인들은 뒷주머니에 해고통지서를 찔러 넣은 채 밤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다른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현 시기가, 내준 건 많고 얻은 건 적은 그런 시기임을 깨닫고 있었다.”(마이크 데이비스,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
 
레이건이 추진한 각종 정책들 중 주주들의 가장 큰 환호와 갈채를 받은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일련의 금융관련 정책과 조세정책이었습니다.

“케인즈주의 정책에서 벗어나 고달러, 고금리를 사용해 물가안정을 거시경제정책의 최대 목표로 삼는 통화주의 긴축정책으로 전환하고, 미시경제정책으로는 금융자유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금융자본에 대한 뉴딜 개혁의 규제를 하나씩 제거해 나갔다. 한편, 노동시간 유연화, 한계기업 퇴출 등 기업구조조정을 강요함으로써 신자유주의와 친화성을 갖는 주주자본주의가 경영자자본주의를 공격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조영철, 금융세계화와 한국경제의 진로)
 
 
새로운 자본주의의 ‘법과 질서’, 레이거노믹스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 즉 ‘레이건’과 ‘이코노믹스’의 합성어인 이 말은 레이건이 추진한 일련의 경제정책을 이르는 말로 영국의 마가렛 대처(대처리즘)7)와 함께 신자유주의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중요한 징표가 됩니다.

물가안정을 최대 목표로 삼는 통화주의 긴축정책, 대대적인 감세로 ‘공급측면’을 자극해-MB시대의 표현을 빌자면 ‘부자감세’로 경제의 활성화를 이룬다는 소위 ‘공급측면 경제’, 그리고 금융규제 완화와 금융자유화, 노동시장 유연화 등을 특징으로 하는 레이건의 ‘법과 질서’는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규범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사람은 케인즈 때문에 빛을 보지 못했던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입니다. 전 세계가 케인즈에 열광하며 너도나도 그의 해법을 받아들이던 시절부터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비판했던 하이에크는 철저한 ‘시장주의자’였습니다.
케인즈가 ‘시장은 불확실하고 위험하기 때문에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과 통제가 필요’하다고 본 반면 하이에크는 ‘자연적 질서인 시장에 국가가 계획이나 통제를 가하기 시작하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전제주의로 나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케인즈의 해법과 하이에크의 해법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지만, 두 사람 모두 사회주의를 반대하고 자본주의를 지키는 구원투수를 자처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물론 그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동지적 관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에크가 보기에 자본주의가 대단한 위기에 빠져 있던 1947년, 스위스의 몽 페를랑 산에 위치한 한 호텔에서 경제학자, 역사학자 등 36명의 지식인들이 모여 학술회의를 개최합니다. 하이에크가 제안한 이 회의에 참석했던 밀턴 프리드먼에 따르면, 그들은 “전 세계가 계획경제로 가고 있으며 그런 움직임에 대항할 지적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케인즈주의마저 사회주의와 동일시할 정도로 극단적인 보수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였던 이들은 ‘사회주의자들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추진력’을 따라 배워 세상을 바꾸자는 결의를 모으고 ‘시장 근본주의’의 깃발을 높이 들게 됩니다.8) 이를 우리는 ‘신자유주의’라고 부릅니다.
 
사실 케인즈주의를 대신해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실현될 조짐은 이미 레이건 집권 이전부터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미국경제가 경쟁우위를 상실하고 포드-테일러 시스템이 한계에 봉착하자 케인즈의 거시경제정책은 인플레이션과 막대한 재정적자, 경상수지적자를 심화시켰습니다. 70년대 들어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이 함께 찾아온 스태그플레이션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자 케인즈주의는 서서히 그 효용성을 의심받기 시작했고, 닉슨은 집권과 함께 시카고 대학에 둥지를 틀고 소위 ‘시카고 학파’9)의 수장으로 활약하고 있던 프리드먼을 특별보좌관으로 기용하게 됩니다. 물론 닉슨의 정치적이고 기회주의적 판단으로 프리드먼의 정책이 현실화되지는 못했지만,10) 그의 사상적 동지 하이에크가 1974년 스웨덴 스톡홀름의 노벨상 수상식에 등장했을 때 이미 그들의 ‘신념’이 빛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예감했을지도 모릅니다.
 
 
신자유주의 전도사로 변신한 IMF

1979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의장으로 취임한 폴 볼커11)는 대대적인 금리인상을 단행하게 됩니다. ‘토요일 밤의 대학살’이라고도 불리는 볼커의 금리인상 조치는 할인율12)을 무려 12%나 인상하는 것으로 몇 주안에 미국 금리를 세 배로 올려 20% 이상 뛰어오르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금리인상 조치는 금융자본에게는 더 높은 수익성을 안겨주었지만,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급격한 경기후퇴와 대량 실업을 불러왔습니다. 실업률은 10% 이상으로 늘어났고 기업은 유동성 위기에 빠져들게 됩니다.

또한 금리인상 조치는 제3세계 외채파동의 직접적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이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압박하여 OPEC 국가들이 석유의 결제대금으로 달러를 사용할 것을 강요하였고 결국 관철시켰습니다. 석유파동으로 유가가 폭등하자 OPEC 국가들에는 오일달러가 넘쳐났습니다. 산유국들은 뉴욕 월가와 런던 시티에 이 돈을 맡겼는데 당시 월가와 시티의 은행들은 횡재를 한 것이지요. 은행들이 다시 이 돈을 남미를 비롯한 저개발 국가들에 장기 대출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오일달러 외에도 70년대 후반부터 금융규제에 반발한 자본이탈이 본격화되는데 이 달러 자금들도 수많은 저개발 국가에 투자됩니다. 이렇게 해서 1973~82년 사이 총 1조 달러가 넘는 해외 대출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 절반가량이 남미로 흘러들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금리가 폭등하게 되니까 달러 대출을 받았던 수많은 제3세계, 특히 남미의 국가들은 파산 상태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중동 산유국에서 월가에 맡겨진 막대한 오일달러는 남미를 비롯한 제3세계 외채의 상당부분을 차지하였다. 80년대 미국의 초고금리는 제3세계의 외채상환능력을 악화시켰고 남미의 외환위기로 이어졌다.
 
결국 1980년대 남미의 외환위기는 미국의 금융자유화 조치, 직접적으로 금리인상으로 인해 불어 닥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미 외환위기의 전개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IMF의 개입입니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가장 핵심적인 기구였던 IMF는 브레튼우즈 체제가 와해되자 별다른 할 일이 없어 폐점휴업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남미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기사회생의 계기를 찾게 되었는데 외환위기의 해결사로서의 역할이 바로 그것입니다. 본래 IMF는 고정환율체제 아래서 무역수지 적자국에게 부족한 달러를 대출해주는 역할을 했는데 이러한 본래의 기능을 더욱 업그레이드한 것이지요. 그런데 IMF가 외환위기에 직면한 나라들에 ‘구제금융’이라는 이름의 달러를 제공할 때, 아무런 대가없이 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IMF 구제금융을 받기 위해서 해당 정부는 IMF가 제시하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수용할 것을 담보로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IMF 차관을 ‘정책담보차관’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IMF가 요구하는 정책(구조조정 프로그램)은 무엇일까요?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경험했던 우리도 익히 잘 알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 핵심적인 내용은 긴축정책, 규제완화, 공기업 민영화, 외환 및 자본시장 개방, 노동시장 유연화 등으로 바로 ‘레이거노믹스’의 핵심정책,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 정책인 것입니다. 결국 IMF는 미국이 채택한 경제정책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전 세계에 확산시키는 ‘신자유주의의 전도사’ 역할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게 된 것입니다. IMF의 지분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미국은 IMF의 각종 회의기구를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키면서 의사결정을 좌지우지해 왔습니다. 1985년 서울에서 열린 IMF-세계은행 연차총회에서 발표된 베이커 플랜이나 89년 브래디 플랜 등은 모두 미국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것들입니다. 특히 재무장관 브래디에 의해 제안된 브래디 플랜은 ‘채무국은 채무를 IMF에 맡기고, 채무국의 경제개혁을 IMF가 지도한다’는 것으로 IMF의 위상과 권한을 한층 강화하는 계기가 됩니다. 미국은 거의 사망 직전이던 IMF를 되살려 놓음으로써 세계 금융 권력을 장악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백악관과 월가를 중심으로 한 초국적 금융동맹을 형성하고 IMF와 세계은행 같은 국제적 금융기구를 앞세워 전 세계를 초토화하기 시작합니다. 수명이 다한 시체가 되살아나 ‘좀비’라는 추한 괴물이 되듯이, 수명이 다한 IMF는 되살아나면서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는 ‘경제좀비’가 된 것입니다.
 
고삐 풀린 투기자본

레이건은 뉴딜 시기에 자본주의의 ‘고삐 풀린’ 투기욕을 제어,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각종 규제책들을 완화, 폐지하여 금융자본의 운동에 걸림돌이 되는 장벽들을 제거하기 시작합니다. 미 의회는 1980년에 ‘예금기관 규제완화 및 통화관리법(DIDMCA)’을, 1982년에 ‘예금금융기관법(DIA)’ 등을 연이어 제정하여 예금금리 상한선을 단계적으로 폐지하고 은행이 다양한 대출상품을 개발,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합니다. 뿐만 아니라 은행들이 부동산 개발업체에 아무런 규제 없이 대출을 해줄 수 있도록 했으며, 심지어는 직접 개발회사를 설립하여 투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은행 간에 불꽃 튀는 금리전쟁이 벌어지고 너도나도 신금융상품의 개발과 판매경쟁에 나서게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이러한 금융기관의 규제 완화 조치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옵니다. 금융기관의 터무니없는 투기 행위와 도덕적 해이가 부쩍 늘어나 1980년대 후반에는 은행의 파산, 사기와 부정 사건 등이 무더기로 발생한 것입니다. 80년대 내내 여러 지역의 저축은행들이 부동산 벤처와 정크본드 등에 투자하거나 경영진의 부정행위 등으로 부실해져 파산을 거듭하다가 1988년에는 3,178개 저축은행 중 503개가 지불불능상태에 빠졌습니다. 자신들이 맡긴 예금이 떼일 것을 우려한 고객들이 일제히 은행 창구로 몰려들었고, 급기야 저축은행의 도미노 붕괴를 우려한 정부가 개입하게 됩니다. 정부의 개입이란 다름 아니라 은행의 파렴치한 행위로 인한 부실을 국민의 세금으로 메워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주곡에 불과했습니다. 정부의 개입과 공적자금의 투입에도 진정되지 않던 은행 위기는 그 이듬해에는 더욱 확대되어 이들에게 자금을 공급해 주던 정부기관인 연방저축대부보험공사(FSLIC)마저 파산하는 상황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것이 유명한 주택대부조합(S&L) 부실사태입니다. 이로 인해 1988~90년 사이에 도산한 은행 수만 총 1,386개에 달했고 미국 정부가 2천억 달러의 자금을 투입했지만 물가가 급등하고 경기가 후퇴하는 등 심각한 후유증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1987년 10월에 있었던, ‘블랙먼데이’라고 불리는 뉴욕증시의 대폭락도 그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 날 뉴욕증시는 개장 초부터 대량의 팔자 주문이 쏟아지면서 그날 하루의 낙폭이 508포인트, 전일 대비 22.6%에 이르러 1929년의 대폭락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이처럼 금융규제의 완화가 안겨준 상처가 결코 가볍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번 고삐에서 풀려난 금융자본은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합니다.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는 금융자본의 요구는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응집되어 있으며, 이것은 미국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의 자유, 즉 투자를 원하는 곳이라면 어느 나라 국경이라도 제한 없이 넘나들 수 있는 무제한적인 자유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특정 국가의 경제정책은 말할 것도 없이 어떤 것도 제약이 될 수 없고 심지어는 그 나라 국민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는 부문마저도 무차별적인 투자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자유라기보다 금융자본의 ‘전횡과 독재’에 가깝습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모든 국경과 여러 가지 장벽을 허무는데 있어 IMF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IMF를 앞세운 세계적 차원에서의 금융자유화는 국내 차원에서의 금융지배를 세계적으로 확산시키는 것임과 동시에 초국적 금융동맹의 제3세계 나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금융자유화, 금융세계화가 완성된 사회는 모든 가치가 금융자본의 수익성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경제의 금융화 = 대박 신화의 사회

또 하나 주의해서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 시기에 금융유동성을 크게 증대시킨 규제완화와 금융혁신은 주로 자본시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민영화’란 이름으로 덩치 큰 국영기업들이 무더기로 주식시장에 매물로 나오게 되면서 주식시장의 규모가 결정적으로 확대됩니다. 또한 이처럼 규모가 커진 주식시장에서 거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다시 말해 마음껏 기업을 사고팔 수 있도록 증권시장의 갖가지 진입장벽을 허물고, 수수료율을 자유화 하는 등의 조치가 이어집니다. 이러한 조치들에 따라서 자본시장은 크게 확대, 발전하였으며 특히 유통시장은 놀라울 정도로 발달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본시장 규모가 확대되고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연기금이나 뮤추얼펀드 같은 기관투자자들도 크게 발전했는데, 개인들에 비해 자금 동원력이 월등히 큰 기관투자자들의 발전은 금융자본의 산업자본에 대한 영향력과 지배력을 극대화하게 됩니다. 높은 유동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단기투자를 통한 시세차익을 목표로 투자하는 기관투자자들은 그 기업의 장기적인 성장에 관심을 두지 않고 수익성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는 항상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해 주지 못해 다른 곳으로 투자하게 되면, 순식간에 큰 자금이 빠져나가 기업 활동에 어려움을 주거나 주가가 하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기관투자자들은 이러한 자본 동원력과 휘발성을 무기로 경영자에게 압력을 가해 자신의 이해, 예컨대 더 높은 배당률 등을 요구하게 됩니다. 또한 이러한 행태는 기업을 생산 활동을 위한 곳이 아니라 일반 상품처럼 사고파는 상품으로, 거래와 투기의 대상으로 만들게 되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생산의 토대 자체를 대단히 취약하게 만듭니다.

이처럼 금융자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국가의 경제정책은 물론 사회적 관념마저 ‘수익성 원리’를 중심으로 형성되도록 강제합니다. 요즘 주식시장을 보면 기업의 성장성이나 전망과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정부는 물론 대다수 국민들이 주식시장의 흥망이 마치 경제 성장의 척도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도 이런 탓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금융자산계층의 수익성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을 ‘경제의 금융화’라고 합니다. 경제의 금융화는 사회적 의식도 보수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외국인투자자, 소액주주, 국민연금 고갈과 재정적자 심화를 걱정하는 연금 가입자, 여유 자금을 적립식 펀드에 넣고 매일 주가지수를 점검하는 중산층 등 이질적 사회계층이 금융자산계층의 이익이라는 동질적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연결되고 한국사회 보수화의 저변을 형성하고 있다.”(조영철, 금융세계화와 한국경제의 진로)
 
주가의 등락이나 펀드 수익률에 웃고 우는 사회, ‘대박신화’에 목매고 환호하는 사회, 주가를 떨어뜨릴지 모른다는 우려에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 투쟁도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사회, 장기적인 미래가치에 투자하는 기업보다 더 많은 배당금을 지급하는 기업을 선호하는 사회, 국민의 생활과 복지에 꼭 필요한 물자와 서비스를 공급하는 기업보다 ‘뜨는’ 아이템을 홍보하는 기업에 자본을 몰아주는 사회, 사회적 자금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수요자에게 공급하기보다는 높은 수익성을 위해 불필요한 곳에 투자하는 은행의 행태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 이런 것들이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내는 주주자본주의의 사회상입니다.
 
 
파국행 폭주 기관차, 글로벌 투기자본주의

하이에크의 신념과 다르게 자본주의 시장은 변덕스럽기 짝이 없고, 경제를 파국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는 신자유주의 정책은 오히려 실물경제를 위축시키고 경제성장을 지체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기업의 장기 전망보다는 단기적 시세차익을 앞세우고 이윤의 더 많은 부분을 배당으로 지급하기를 요구하는 금융 자본의 이해관계가 이 투자를 위축시키고 성장을 저해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국내는 물론 국제적 소득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으며 특히 금리소득자의 몫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금리소득자의 몫이 1960년대 14%에서 1970년대 22%, 그리고 1980년대에는 38% 등으로 급속하게 증가했습니다. 상위 1%의 소득은 1970년대 이전에는 전체 소득의 8%였는데 1990년대 후반에는 14%로 거의 두 배 가까이 증가했습니다. 이것은 세계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960년에는 가장 가난한 국가의 20% 부자가 가장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 20%의 소득보다 30배가 많았는데 1997년에는 이것이 74배가 되었다.”(UNDP 보고서)
 
계속되는 버블과 금융위기는 사람들의 의식을 마비시켜 패닉, 위기라는 말에 둔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연일 폭등하는 주가에 환호하며 주가의 폭등이 사회적 부를 키울 것이라는 환상13)에 빠져들었습니다. 레이건에 의해 물꼬가 터진 규제 완화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클린턴 정부 말기에 절정을 이룹니다. 1999년 11월 ‘그램 리치 브릴리 법(GLBA)’이 통과되면서 1929년 대공황의 교훈으로부터 제정된 글래스-스티걸 법이 폐지된 것입니다. 그램 리치 브릴리 법이 통과되면서 60년 넘게 존재했던 상업은행과 투자은행 사이의 장벽이 사라졌습니다. 유럽금융회사들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서 대형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이후 통제가 없는 자유로운 투자가 허용되고 수천 개의 새로운 금융상품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씨티그룹, JP모간체이스,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초대형 금융사들을 탄생시킴으로써 월가는 세계 금융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이후 결과는 파국적입니다. 2008년 85년 역사의 미국 5위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가 일순간에 무너졌고 메릴린치가 매각되었습니다. 미국 최대의 모기지업체인 페니매와 프레디맥이 사실상 국유화되었고, 이어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했습니다.

이러한 파국적 위기 속에서도 금융자본의 부정과 부패는 끊이질 않습니다. 압권은 AIG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체 부실규모조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매머드 부실을 가지고 있는 AIG에 미국 정부는 20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빚잔치 와중에도 AIG 임원들은 자신의 잇속 차리기에 바빴습니다. 최근 임직원들이 정부의 구제금융으로 거액의 보너스를 나눠가진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AIG는 부패한 금융자본의 대명사가 되어 세간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본사 간판을 내리고 상호를 바꾸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자본주의가 짧았던 황금기를 거쳐 1970년대 이후 만성적인 불황과 침체에 직면하자 금융시장의 거품을 통해 이윤을 획득하려 발버둥쳐 온 것이 지난 수십 년간의 과정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극소수 금융자본가로의 부와 권력의 집중을 낳았고 절대 다수 사람들은 빈곤과 절망을 키워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2008년부터 본격화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더 이상 투기적 자본주의가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세계적 금융체제의 막다른 골목 앞에서 좌절할 것인가 아니면 그 벽을 부수고 새로운 길을 열어갈 것인가 하는 것은 그 체제 안에서 고통받아 왔던 절대 다수의 사람들만이 선택할 문제입니다.
 
 
1) 평소 언론을 극도로 기피하는 조지 소로스지만 투기공세를 펴기 전에는 항상 언론 플레이를 펼치면서 투자자들과 시장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몰아간다고 한다.
 
2) 상업은행은 예금과 인출, 수표나 어음의 발행을 통한 결제수단의 제공 등의 업무를 하는 일반적인 ‘은행’을 지칭하며 투자은행은 주식, 채권의 인수나 판매를 주로 하는 은행으로 우리나라에는 엄밀한 의미의 투자은행은 없고 투신사나 증권사가 이러한 역할을 하고 있다.
 
3) 케인지언들에게 시장은 ‘저절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전문가들이 작동시켜야 하는 정교한 기계와 같은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전문 경영인과 기술자 집단이 주축이 된, 관료적이고 위계적인 생산체제로서 포드-테일러 시스템과 케인즈주의는 인텔리주의라는 공통의 기반을 가지고 있다.
 
4) 조영철, 금융세계화와 한국경제의 진로
 
5) 노동조합에 의해 주도되지 않는 파업이나 노동조합의 파업지령 없이 규약에 정해진 절차에 의하지 않고 돌입하는 파업을 의미. 오랜 타협체제 속에서 길들여진 거대산별노조의 관료화된 지도부는 이미 상당부분 자본에 포섭된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한 파업을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다보니 현장에서 노동조합의 승인을 받지 않은 자연발생적인 파업이 수시로 벌어진 것이다.
 
6) 1933년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노사관계를 개혁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통령직속자문기구로 노사 각 3인의 대표와 1인의 공익의장으로 구성된다.
 
7) 마가렛 대처는 대학시절 하이에크의 저서 ‘노예의 길’을 읽고 시장경제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보수당 당수가 되어 하이에크에게 별도의 경제수업을 받기도 했던 그녀는 집권하자마자 ‘사회주의와 과도한 세금, 그리고 공공지출’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레이건이 그랬던 것처럼 가장 먼저 광산노동자들의 파업을 진압하고 과거 노동당 정부가 만든 국영기업들을 민영화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집권한 날이 마침 하이에크의 생일이었는데, 하이에크는 그녀에게 “최고의 생일선물에 감사한다”는 축전을 보낼 정도로 기뻐했다고 한다.
 
8) KBS 신년경제기획 <세계경제전쟁 100년 - 커맨딩 하이츠> 참조
 
9) 미국의 시카고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일단의 경제학자들로 F.하이에크, M.프리드먼, G.스티글러 등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케인즈주의에 반대하여 시장에 의한 자원배분과 자유로운 가격기능을 통해 물가를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자유주의의 산실이라 할 수 있다.
 
10) 닉슨은 프리드먼의 정책을 지지했지만, 여전히 케인즈적 해법을 선호하고 있던 미국 국민들에 영합하기 위해 끝내 프리드먼의 조언과 정책을 실행하지 못했다.
11) 폴 볼커는 카터 정부 때 FRB 의장으로 지명되어 레이건 정부 때인 1987년까지 임기를 유지하게 된다. 카터는 볼커의 정책에 개입하지 않았지만, 레이건은 적극적으로 볼커의 초고금리 정책을 지지하였고 그런 점에서 볼커는 레이거노믹스의 금리정책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12) 연방중앙은행이 민간은행에 대부해 줄 때의 이자율. 민간은행은 연방은행에서 돈을 빌려오면 여기에 추가로 금리를 더 붙여 기업이나 가계에 대출하게 된다.
 
13) 최근의 금융위기는 이러한 환상은 깨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 국민의 53%가 정부가 “(문제 해결을 위해)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응답해 그렇지 않다는 응답 42%보다 더 많았다. 12년 전에는 정부의 행동에 반대하는 의견이 2대 1로 많았다.


등록일: 09-04-07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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