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담고 싶은 법정스님의 글

[스크랩] 法頂, 끝까지 그는 이단아 였다 - 조현

문근영 2011. 9. 19. 07:14
[법정스님 떠나던 날]
 
法頂 - 끝까지 그는 이단아 였다 / 조현

송광사 다비장

“중이 무슨 글” 핀잔에도 쉬운 글로 ‘소통’
만장 하나, 연꽃상여 하나없이 ‘불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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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오전 10시 전남 순천 송광사 문수전을 나선 법정 스님의 법구가 대웅전 앞마당에서 멈췄다. 그가 평생 따르던 스승 부처님께 마지막 3배를 고하기 위해서였다. 조계종을 상징하는 ‘조계’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대웅전 앞마당의 지형은 연꽃이 피는 연못인 ‘연화지’다. 따라서 탑을 세우면 아래로 가라앉는다고 해서 석물 하나 세우지 않았다. 그 연화지 안팎엔 법구를 마지막 배웅하려 새벽부터 몰려든 3만여명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수많은 스님들도 그의 법구를 에워싸고 있었다. 하지만 35년 전엔 그의 주위엔 아무도 없는 적막강산이었다.
 
그가 서울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의 생목숨이 하루아침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독재자에 대한 증오심을 풀길이 없어 그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곳에 내려왔을 때, 그의 주위엔 사복경찰 대여섯명이 언제나 그림자처럼 붙어다녔다. 불교계에서 누구 하나 현실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있을 때, 기독교인들이 주도하던 민주화운동판으로 들어가 고군분투하다 내려왔을 때, 산중 노스님들은 “중이 중노릇이나 잘 할 것이지, 무슨 일을 잘못했기에 저렇게 세속 형사들이 산중까지 오느냐”면서 그를 경원했다. 지금은 조계종과 대중들이 소통하는 최대의 창구가 된 템플스테이를 30년 전에 그가 최초로 송광사에서 ‘선수련회’란 이름으로 시작할 당시만 해도 “기도나 시키면 될 세속인들을 산사 수련장에 출입시키며 무슨 되지 않은 참선수련이냐”는 사시 또한 적지 않았다. 세속인들이 ‘도무지 불교는 어려워도 접근할 길이 없다’며 한탄 할 때 가장 쉬운 문체로 산중불교와 대중들을 소통시켰을 때도 주위엔 “중이 무슨 글이냐”는 핀잔만이 팽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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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통’으로 무장한 무관심과 무지와 싸우는 불교계의 이단아였고, 성장이라는 구호 아래 강요된 반인권을 용납할 수 없어 계란으로 바위를 치던 시대의 반항아였다. 세상 사람들이 돈과 성장을 위해 벌떼처럼 도시로 도시로 향해갈 때는 반대로 깊은 암자와 오두막으로 숨어 욕망의 시대를 역류했던 은자였다.
 
정치판이나 종교계에서나 장례가 가장 큰 이벤트가 되는 시대에 장례식을 아예 없게 한 그의 법구 주위엔 큰스님이라면 으레 따르던 만장 하나, 다비식의 화려한 연꽃 상여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역시 이단아였다. 그는 불교를 아파했고, 소유와 욕망의 시대를 아파했다. 그는 말년 폐암으로 고생했다. 석가모니 당시 최고의 법력을 자랑했던 유마거사가 몸져눕자 석가모니가 문수보살을 시켜 병문안을 한다. 문수보살이 “어찌 거사같은 분이 아플 수가 있느냐”고 묻자, 유마거사는 말한다.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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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장에선 1만5천여명이 따라와 서로 사진을 찍겠다고 자리다툼을 하며 소란했다. 스님은 “다 버리라”고 했지만, 세간의 서점에선 스님 책의 사재기마저 성행하고 있다고 했다. 80년대 조계산 천자암에서 불임암을 오가며 법정 스님이 헌남비에 끓여준 국수를 먹곤했던 선승 법웅 스님은 다비장을 오르며 “법정 스님이 장례 때 아무 것도 하지 말고 폐끼치지말고 그대로 태우라고 한것은 허언이 아니라 평소 살던 삶 그대로를 말한 것”이라며 “그 깐깐한 성정에 여기까지 와서 부산을 떠는 사람들을 보면 다비장에서 벌떡 일어서지 않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장작불에 불이 붙자 법정 스님의 상좌인 길상자 주지 덕현 스님이 “화중생련(火中生蓮)”이라고 외쳤다. 유마거사는 “불꽃(욕망) 속에서도 연꽃을 피워내야, 마침내 시들지 않는다”고 했다. 법구에 불꽃이 휩싸이자 “스님, 스님 뜨거워요, 어서 나오세요”라는 보살(여성불자)들의 울부짖음이 메아리쳤지만 시대의 어둠 속으로 기꺼이 걸어간 이단아는 나오지 않았다. 욕망의 불꽃이 다 탈 때까지 그는 끝내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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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조계산/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법정 스님이 17년간 머물던 불일암에서


부엌엔 밥솥 하나 그릇 몇 개가 전부
그가 만지던 흙에선 작은 봄새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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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의 다비식이 있던 지난 13일 아침 조계산 불일암을 찾았다. 송광사에서 가파른 오솔길을 따라 20여분 오르면 법정 스님이 1975년부터 92년까지 17년간 머문 불일암이다. 열반 이틀 전에 그의 사촌 누이인, 현장 스님의 어머니가 병문을 와 “앞으로 스님을 뵈려면 어디로 가야하느냐”고 물었을 때 “불일암으로 오라”고 했던 그곳이다. 지금은 길상사 주지를 지냈던 법정 스님의 맞상좌 덕조 스님이 지키고 있다.

 
Untitled-1 copy 8.jpg대숲 속에 숨은 불일암은 법정 스님의 성정처럼 정갈하다. 조그만 방두칸 앞마루엔 스님의 영정 사진이 놓여있다. 그 앞에서 불자들이 3배를 하면서 무릎을 꿇은 채 하염없이 스님을 바라보고 있다. 암자의 귀퉁이엔 머리카락 하나, 먼지 하나 보이지 않을만큼 너무나 정갈해서 보살들도 들어가기를 겁나했다는 부엌이 있다. 장작개비 몇 개, 밥솥하나, 그릇 몇 개가 전부다. 씨알의소리 편집위원으로 함께 일하다 홀연히 남도의 산 속으로 은거한 그를 못 잊은 함석헌 선생이 언젠가 제자들과 함께 왔을 때 대접할 게 없어서 노인이 먹기 어려웠던 고구마 밖에 삶아드리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 했을만큼 평소 먹을 것도, 그 어느 것도 쌓아두는 법이 없던 단촐한 살림이었다.
 
불일암 앞엔 그가 홀로 살며 가꾸던 50여평의 텃밭이 앞마당을 대신하고 있다. “농경사회에선 씨를 뿌리고 새싹이 돋아나는 과정을 지켜보며 살기 때문에 생명의 소중함이 사람의 마음 안에 싹튼다”면서 “흙을 멀리하고 도시화, 산업화, 정보화 사회에 살면서 인성이 메말라가다 보니 이유 없이 어린이를 폭행하고 살해하는 등 끔찍한 일이 벌어 진다”고
 
늘 흙을 가까이하며 살라고 했던 그였다. 그가 만지던 동토의 흙에서 작은 봄새싹이 움트고 있었다.
 
글·사진 조현 기자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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