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담고 싶은 법정스님의 글

[스크랩] 법정스님 법문 / 헛눈 팔지 말고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문근영 2011. 5. 26. 07:48
그 동안 잘 들 지냈습니까?
파리에 있는 길상사 창건 10주년이 된다고 해서 거길 좀 다녀왔습니다.
주지 스님 편지를 보니깐, 저를 거기에 오도록 기도를 했답니다.
기도의 영험이 있었는지, 제 마음이 움직여서 다녀왔습니다.
한 열을 돌아다니면서 해놓은 밥 얻어 먹다보니 새삼스럽게
끓여먹기가 멀어져요. 습관이란 그렇습니다.
어디에 의존하다보면, 타성에 젖다 보면 자기가 지니고 있는
능력이 개발되지 않습니다. 능력이 쇠퇴하게 됩니다.
될 수 있으면 어디든지 의존하지 않은 체 사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10여 년 전에 '현학 스님'과 같이 유럽 여행을 하는 중에 파리에 들렀어요.
그곳에서 불자들이 하는 집회에 참여했었는데,
그때 절이 없어, 신도가 경영하는 식당 한쪽을 빌려 집회를 하곤 했습니다.
그때 불자들의 말씀이 절을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절을 만드는데 돈이 얼마나 들겠느냐고 했더니, 10여 년 전에,
한국 돈으로 7,8천만 원이면 될 것 같다고 해서 그러면 절을 하나 해볼까
생각하고, 저에게 돈이 있은 것은 아니지만,
아는 신도들과 의논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고 마음을 냈습니다.

모든 일이 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화엄경}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모든 일이 한 마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천당도 지옥도 미음으로 이루어진다는 법문이 있는데 절을 한번 해볼까
하는 한 생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좋은 일에는 마음을 같이 하는 이웃이 생깁니다.
절을 한다고 하니 파리에 있는 한국 화가들이 작품들을 내놓고
국내에 있는 화가들이 작품을 내놓고 하여,
기금 마련을 위해서 전시회를 하고, 다는 모이지 않았지만 시작이 됐습니다.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한 생각 내는 데서 시작됩니다.

저가 1975년에 서울에서 지내다가 서울이 싫어졌어요.
중노릇을 다시 해야되겠다고 생각해서 여기저기 터를 찾다가
'조계산'에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암자가 있어 거기에 집을 지어,
그때까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여태껏 절에 들어와서 그 절에 스님들이 지어놓은 집에서
내가 공부를 하고 있는데 내가 무엇인가 하나 지어서 나뿐만 아니라
이 다음에 오는 스님들도 수도할 수 있는 그런 도량을
하나 이루어야 되겠구나, 하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불일암'을 짓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절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새 집으로 이사가건 새 직장을 마련하건
혹은 짝을 만나 결혼하건 한 생각 일으키는 데서 시작됩니다.
한 생각 일으키지 않으면 일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한 생각을 어떻게 내느냐 따라서 그 상황은 달라져요.
밝게 내면 밝은 쪽으로 가고 어둡게 내면 어두운 쪽으로 갑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순간순간 보고 듣고 무엇을 말하며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우리들 각자 구체적인 삶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산다는 것이 막연한 것 같지만
구체적으로 보면 순간순간 무엇인가를 보고 무엇인가를 듣고
또 어떻게 말하고 생각을 어떻게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우리들의 각자 구체적인 삶의 내용입니다.
또한 이러한 일들이 업을 만들어요. 업,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업을 맑히는 일입니다.
청정한 본 마음을 지니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과거, 현재, 모든 부처님들이 공통적으로 말씀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칠불통게라고 하는데 잘 아시다시피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한 일 두루 행해서 그 마음을 맑히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한문으로 하면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제의 시제불교"라고 하지요.
불교란 무엇인가? 나쁜 일 하지 말고 착한 일 두루 해서 그 마음을 맑히라.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누구나 들으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재로 행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 살든 한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되요.
순간순간 마음을 맑히는 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한 숨 내쉬고 들이쉴 때마다 마음을 맑히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 한순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한순간이 바로 생과 사의 갈림길입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산다는 것은 계속 들 쉼 낼 쉼
호흡하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호흡이 멎는 상태지요.
순간순간 들이쉬고 내 쉬는 숨을 의식해야 합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어떻게 말하고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가에
스스로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불교 수행법에 관법이 있는데 자기 행위 자기 생각,
이것을 낱낱이 관찰하는 것입니다.
'달마 스님' {관심론}이란 법문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마음을 살피는 이 한 가지 일이 모든 행위를 조절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업을 조절한다는 것입니다.
법구경에 보면 "물대는 사람은 물을 끌어들이고
활 만드는 사람은 화살을 곧게 한다.
목수는 재목을 다듬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을 다룬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을 항상 살피는 사람입니다.
종파가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종교든 간에 자기 자신을 살피고 되돌아봐요.

옛 절에 가면 신발 벗는 선돌에 "조고각하(照考脚下)"라고 쓰여져 있어요.
무슨 소리인가 하면 신발 벋는 선돌에 자기 발뿌리를 내려다보라는 것입니다.

신발을 바르게 벗으라는 뜻도 되지만 더 깊은 법문은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항상 살피라는 뜻입니다.
자기 현존재를 살피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절에 다니건 어떤 교회에 나가건 어떤 종교 종파에 속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데에 구애받지 마세요. 전체가 아니고 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교가 되었건 기독교가 되었건 회교가 되었건 전체가 아니고
한 부분에는 항시 대립과 갈등이 생깁니다.
네 절 내 절 따지고 네 종교 내 종교 따지면 부분이며 갈등이 생깁니다.
진정한 믿음의 세계는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고 본래의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하느님에 의지했건 부처님을 의지했건 예언자를 의지했건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인도에서는 예전부터 50살의 나이를 "바나프라스"라고 한답니다.
이 말은 산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라는 뜻입니다.
나이 50이 되면 자식들 치닥거리도 대충 마쳤으니 이제는 서서히
산으로 떠날 준비를 할 때라는 거예요.
이것은 힌두교사회에서 인생의 4 주기를 전제해서 하는 말입니다.
세속적인 의무를 다 했으니 이제 자기 몫의 삶을 위해서 닦는 나이랍니다.
명상을 하지 않는 종교 즉 자기 자신을 안으로 살피지 않는 종교는
맹신에 빠지게 쉽습니다.
광신(狂信)이라든가, 이런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안으로 살피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종교가 되었건 당초부터 종교는 명상으로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가 어떤 선각자에 의한 명상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상을 하지 않고 종교를 접하려는 것은
마치 뿌리를 잊어버리고 가지를 붙잡으려는 격입니다.
절에 다니면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기 자신에게 귀기울이고
자기를 낱낱이 살피고 분석하고 되돌아보려면은 여기에는 상당한 주의력과
인내력과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입으로 천수경과 반야심경을 염불하면서 마음으로는
딴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도 주의력과 인내력과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항시 "인욕정진(忍辱精進)", 정진에는 반드시 인욕이 따르게 됩니다.
인욕이 없는 정진은 없습니다.
집중은 다른 말로 하면 커다란 침묵의 세계입니다.
그 안에 시간과 공간이 전혀 없는 바다 속 같은 아주 깊은 침묵입니다.
거기에는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성서로운 영원한 것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 누구도, 설사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깨달음을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은 이미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서 빛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과일에 씨앗이 들어 있듯이 우리의 심성 가운데
깨달음의 빛이 들어 있어요.
우리 자신이 그것을 찾아내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움을 틔우지 않고 묵혀두고 있을 뿐입니다.
크다란 침묵과 함께 하나가 될 때 내가 사라지고 어디에 순순히 몰입할 때
무아의 경지 즉 삼매의 경지에 들어갑니다.
침묵과 하나가 될 때 "나"라는 존재가 사라집니다.
내가 없는 무한한 공간 속에 강물처럼 끝없이 흐르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늘 우리가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자유가 있지만,
궁극적인 자유는 자기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자기 하나의 무게를 어쩌지 못해서 이 세상을 도중하차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결국 자기 문제입니다. 자기로부터의 자유는 본질적인 자유입니다.
무엇인가에 집중하는 것은 현재를 최대화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불안과 슬픔에 빠져있다면 그는 이미 지나간 시간 앞에
아직도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 이 시간에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과거나 미래에 살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는 강물처럼 이미 지나 가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불확실한 시간입니다.
과거나 미래에 한눈팔면 현재의 삶이 소멸됩니다.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이미 지나간 과거사를 가지고 홈을 팝니다.
그러면 괴로워요. 불행합니다. 그러면 현재가 없습니다.
현재에 최선을 다해 산다면 거기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집중력이란 바로 그것입니다. 침묵의 세계란 바로 그것입니다.

불행에서 벗어나려는 길은 맞부딪쳐야 합니다.
집안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그것을 회피하지 마세요.
절에 가서 기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려운 일에 맞부딪쳐야 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묻고 들여다보는
그 침묵의 과정에서 문득 떠오르는 빛이 있습니다.
실마리가 보여요. 이것이 지혜의 삯이고 새롭게 열리는 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집안에 어려움이 있다고 회피하지 마세요.
술 마신다고 잊혀지는 것도 아니고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정면으로 맞닥뜨려야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누구인가 물어야 합니다.
왜 우리 집안에 이런 문제가 닥쳤는가 맞서야 됩니다.
그걸 화두로 삼아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극복하고 뛰어넘을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생깁니다.
그것을 회피하니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회피하니깐 도중에서 뛰어내리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 삶의 과정이라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삶의 과제들이 주어져 있습니다.
어떤 집안에서는 앓는 일도 어떤 집안에서는 재산적 손해도
어떤 집안에서는 정신적 갈등으로 다 과제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걸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의 연륜이 쌓입니다.
나이만 먹어서는 동물적인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고난을 딛고 일어남으로서 정신적인 연륜이 한층한층
쌓이면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옛 선사의 법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불교를 배운다는 것은 곧 자기를 배웁니다.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잊어버립니다.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은 자기를 텅 비우는 일.
자기를 비울 때 모든 것이 하나가 된다"
물론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지만,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
온갖 집착에서, 조그마한 명예에서 사소한 이해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아무 것도 없었다.
자기를 비울 때 모든 것이 하나가 되며 자기를 비울 때
그 어떤 것이라도 대립되지 않는 자유로워진 자기 자신이 드러납니다.
이것을 불교적인 표현을 하면 진공묘유(眞空妙有),
텅 비울 때 오묘한 것이 있다는 것이지요.
모든 고난으로부터 해탈된 자기, 모순과 갈등으로부터 벗어난 자기,
이러한 개체인 자기로부터 전체인 자기로 탈바꿈한다고 하지요.

흔히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 말을 명심하십시오.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얼핏 들으면 모순된 것 같지만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자기 자신이 몸소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길입니다. 자기 실현의 길입니다.
자기 형성의 길입니다. 부처는 단지 먼저 이루어진 인격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자기 탐구를 하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자기 탐구의 종교입니다.
불교는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종교입니다.
자기 탐구의 과정에서 수많은 자기를 만나게 됩니다.
곧 이웃과 중생들의 존재를 인식하게 됩니다.
초기 불교에서 자가 자신을 강조한 것은 자기로부터 시작하라는 뜻에서입니다.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이웃과 세상에 도달하라는 것입니다.
자기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개체에서 전체로 변신입니다. 이것은 질적인 변화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갇혀있으면 불교도 아니고 종교도 아닙니다.
참된 지혜란 함께 살고 있는 이웃의 존재를 찾아내는 따뜻한 눈길입니다.


갈수록 우리 환경과 상황은 아주 어려워지고 나빠지고 있습니다.
흔히 기상이변을 말하고 있지만 사람이 불러들인 재앙입니다.
아시아고 유럽이고 할 것 없이 정상적인 기상상태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보다 잘 산다는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 작년 여름 기온이 올라가니깐
5천명이나 죽었다나 봐요.
그곳은 그렇게 심히 덥지 않아 집이나 차에 냉방시설이 없습니다.
물론 노약자들이 희생당한 거죠.
이건 두려운 일이에요. 어떤 지역에서 일찍 없었던 더위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남의 일이 아닙니다. 지구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구에 대한 책임은 신이나 우주에 있지 않습니다.
지구인들 자신에게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에게 있습니다. 사람만이 책임을 질 수 있는 생물입니다.
일반 동물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지구환경시간이란 것이 있습니다.
각국의 환경전문가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건데 해마다 환경시간을 발표합니다. 일본 '아사이재단'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 국내환경단체에도 결과를 알려왔습니다.
금년의 지구환경시간은 9시 15분이랍니다.
사상유래가 없는 매우 불안한 시간이랍니다. 지구파멸의 시간은 12시입니다. 그러니깐 파멸 2시 45분전이지요.
건성으로 듣지 마십시오.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 대책을 세우지 않습니다.
정부이건 환경단체이건 믿고 따를 수 있는 곳에서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습니다.

설마 어쪄랴, 지구가 어찌 파멸될 수 있을까,
우리 속담에 설마가 사람잡는다라는 말이 있지요.
아무리 환경전문가들이 떠들어도 구체적인 개선이 없으면 허사입니다.
내 자신부터 우리집에서부터 덜 쓰고 덜 버려야합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살 산다는 것은 미국식생활방식 즉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
이것이 하나의 악순환입니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지구라는 우주공간이 한정되어있는데 지구차체가 자정할 수 없도록
너무 과중하게 허물고 소비하고 버리고 하지 않습니까.
하도 인간들이 못살게 구니깐 털어 내는 거예요.
지진이 일어나서, 물 것을 털어 내듯이, 기상이변을 초래해서 솎아내는
것이지요. 예고입니다.
나 한사람 그런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겠는가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모두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미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영적인 세계에서는 반드시 그 울림(메아리)이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영혼이 덜 쓰고 덜 버리는 생활을 실천해 나간다면
그 힘이 지구 전체로 번질 수 있습니다.
{원각경}에 그런 법문이 있지요.
"한 마음이 청정하면 온 법계가 청청해진다오"

크고 작고는 물을 것 없이 자신이 약속한 일은 지켜야 합니다.
신의 문제입니다. 약속을 지킴으로서 자기 책임을 다하고 성실성과
신의를 키우게 됩니다.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합니다. 믿을 신(信)이란 무엇입니까.
사람 인(人)변에 말 언(言)자, 사람의 말이 곧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옛날에는 문서 같은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문서가 나오면서 사기, 횡령 등이 생겼습니다.
말로서 받았으면 받았고 갚았으면 갚았고 끝났습니다.
그런데 문자, 숫자가 나오고 그런 매체가 나오면서 속임수가 생겼습니다.
사람의 말은 곧 믿음입니다.
어떤 말을 할 때마다 개인의 성실성계좌에 예금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
약속은 남하고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자신과도 약속을 합니다.
이것은 자기 질서이고 자기관리입니다.
자기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중들이 늙어 가지고 나설 때 안 나설 때 나서가지고
남의 비난을 받지 않나요. 자기관리를 철저히 해야 되요.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면 멍들지 않습니다.
자기관리를 소홀히 하기 때문에 정치꾼들처럼 자기관리를
소홀히 하기 때문에 몇 십억 원 씩 먹고 들어가고 나가고 하지 않습니까.
못해먹겠다 내놓겠다 하고, 자기만의 문제인가요.
자기관리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삶의 질서예요. 자기자신의 신뢰는
생각이나 말의 실천에 옮기는 일에서 비롯됩니다.
자기가 말했으면 그대로 행해야 됩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몇 시에 일어납니까. 각자 다르겠지요.
될 수 있으면 일어나는 시간을 정해 놓으십시오.
일찍 일어날수록 많은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잠이란 무엇입니까. 일종의 휴식입니다.
어지간히 휴식했으면 털고 일어나야 합니다.
저는 어제 오후에 일을 하다가 '커피를 안 마시는데'
무심코 커피를 한 잔 마셨지요.
커피나 홍차를 마시면 저녁에 잠을 잘 못 자거든요.
잠잘 시간에 맹송맹송 잠이 안 오더라구요.
잠이 안 올적에 억지로 잠들려고 하지 마세요.
좋다, 이 시간에 깨어 있어야한다.
옛날에 구해놓은 '톨스토이' 단편을 한두 시간 읽었어요.
그런 짜투리시간을 활용하세요.
때로 시간이 없기 때문에 억지로 잠자려고 하는 것, 그것이 병이라니깐.
사람은 그 사람에게 필요한 잠은 언제 어디선 자게되어 있어요.
꼭 8시간 6시간 잘 필요는 없어요.
선방에서 용맹정진하는 분들, 7일 동안 잠 안자고 버티거든.
습관이에요. 관념, 어이쿠, 잠 못 자서 근무 어떻게 하나
이런 것 자체가 병이에요.
우리가 충분히 잠 잘 시간은 이 다음에 다 있어요.
살만큼 살다가 숨이 멎으면 고이 잠드소서 하지 않아요.
그때 가서 모자라는 잠 충분히 자고 깨어있는 시간을 가 져야 합니다.
일찍 죽어 이 자리에 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깨어있는 시간을 가질 수
없어 긴 잠에 빠지는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일찍 일어나는 것이 좋습니다.

또 신문이나 방송 같은 것도 규제해야 합니다.
저는 밖에 나가 있으면 속이 편하더라구요.
국내 있으면 정치꾼들이 얼마나 해먹었다는 둥, 국민들에게 얼마나
많은 부담을 줍니까.
밖에 나가 있으면 그런 소리가 전혀 없으니 태평성대라. 그
런데 비행기에서 내려 신문 같은 것을 보니깐 또 그 모양 그 꼴이더라 구요. 변화가 없어요.
될 수 있으면 신문, 방송을 멀리 하십시오.
물론 필요한 것은 있겠지만 거기서 얻어들은 것은 10퍼센트 밖에
없고 불필요한 것은 90퍼센트일 것입니다.

하루에 1시간이라도 자기 점검하는 시간, 좌선이나 명상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우리가 정신이 있기 때문에 이 복잡한 세상을 살다보면 자기자신이
산산이 흩어져버리지 않아요.
하루 24시간 중에 한 시간이라도 자기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게 사람이 할 일이에요. 꼭 신앙 생활하는 사람만의 몫이 아닙니다.
누구나 해야할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금연, 금주 모진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정월초하루부터 이르지 말고 생각 있으면 그 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술도 적당히 마셔야 되는데 지나치게 마시면 독이 되지 않습니까.
한국에서 40대, 50대 간암, 간장, 위 탈이 나서 일찍 가시지 않아요.
평생 쓸 오장육부를 그 독한 술에 담구니깐 어떻게 그것이 배겨내겠어요.
쉴 시간도 주어야지요.
자기 자신도 필요하다면서 잠도 자면서, 오장육부도 쉬게 해야 합니다.
저녁에 많이 먹으면 부풉니다.
낮에는 활동하니깐 소화가 되는데 저녁에는 자니깐 부풀지요.
이차삼차 다니는 사람 치고 병원신세 안지는 사람이 없지요.
병원과 가까워지면 병원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생을 마쳐요.

그리고 일주일에 적어도 하루나 이틀은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시간을 가지세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웃으로부터 아는 듯 모르는 듯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고 있습니까.
적어도, 자기가 건강했을 때 그런 도리를 알고 일주일에
하루이틀 봉사할 수 있는 기관에 가서 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진 빚을 갚을 수 있어야 해요.
그리고 한번 마음먹고 시작한 일은 어기지 말아야 합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당초부터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 하나 약속을 지켜 나감으로서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겨요.
자신감이 생깁니다. 성실성계좌에 액수가 그만큼 늘어나는 것입니다.
삶의 질이 그만큼 향상하는 일입니다.
법구경에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일깨워라
스스로 자신을 되돌아 보라
자신을 일깨우고 되돌아보면
그대는 마침내 안락하게 될 것이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게 될 거라는 그런 소리이겠지요.
자기와 약속을 지키는 일이 타인과 약속을 지키는 성실성을 키워줍니다.
자기자신이 스스로 한 맹세, 자기자신에 책임을 지지 못하면 남과 약속도
성실히 이행할 수 없습니다.
자기자신의 성실성의 결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크다란 장애가 됩니다.
약속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신뢰감이 생기지 않아요. 가령 아무게 엄마하고
장에 가기로 약속했는데 이 여편네가 번번이 약속을 어기면
믿음이 가지 않지요.
일상적인 약속을 어기면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과 사귀면 오염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그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시간과 능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혹은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시간과 능력을 탕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가치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게 되면 그의 인생이 녹슬게 됩니다.
쇠만 녹이 스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도 녹이 습니다.
'빠삐용'이라는 영화가 있었지요.
'빠삐용'이 살인을 하지 않았는데 살인혐의로 갇히지요.
무인고도에 갇혀 몇 번 탈출시도를 하지만 실패하지요.
며칠째 혼수상태에서 재판을 받지요.
재판관에게 자기는 살인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옥살이를 하고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고 풀어달라고 하니깐,
그때 재판관이 '너는 인생을 낭비한 죄다"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과 능력을
무가치한 일에 낭비한 죄라는 거예요.
'빠삐용'에게만 해당되는 소리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에요.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과 건강을 무가치한
일에 낭비하게 되면 그 인생이 녹슬 뿐만 아니라 어디인가 갇히게 됩니다.

우리는 잠시도 이 대지를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하루 한 가지라도 이 대지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 땅이 아니면 우리가 무엇을 먹고삽니까. 어딜 딛고 다녀야 합니까.
대지가 있어야 집을 짓고, 지(地), 수(水), 화(火), 풍(風) 이 사(四)대
은혜가 말할 수 없습니다.
전혀 그런 고마움을 모르고 땅을 짓밟고, 허물고 침 뱉고 그래선 안돼요.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이 대지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이 대지가 아니면 우리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어요.

이웃에게 착한 일을 하는 것도 대지에 대한 보답을 하는 것도 됩니다.
조그마한 선이라도 소홀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부드러운 말 한마디, 웃음, 그것이 모두 선한 일입니다.
미미하다고 해서 소홀히 생각하지 마십시오. 방울물이 고여서
항아리를 채웁니다.
일상적으로 그렇게 익혀야 됩니다.
새로운 좋은 업을 쌓아야 해요. 내가 조금만 마음을 열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가하면 되요.
내가 길을 물었는데 모른 체 한다거나 살살 맞게 그냥 돌아서 간다거나
또 뭘 마주 대하는데 모른 체 한다거나 하면 불쾌하거든.
마찬가지로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마찬가지이지요.
상대편을 태도 즉 거울을 통해서 내 자신을 들어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작은 성의라도 소홀히 생각하지 마십시오.
방울물이 고여서 항아리를 채웁니다.

{숫타니파타} '성인의 장'에 보면 , 모두 따라 해봅시다.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말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남에게 이끌려 가지 않고, 남을 이끄는 사람이 되라.

자기 확신을 가지고 어디에도 꺼리낌 없이 살라는 교훈입니다.

혹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항상 내 등뒤에서
나를 지켜보는 눈길이 있어요.
그는 누구입니까. 시작도 끝도 없는 아득한 전생부터 밤이고 낮이고
나를 지켜보는 그 눈길의 주인은 누구예요.
가끔 그런걸 경험할건데 저도 가끔 그런걸 경험해요.
저가 가끔 고단해서 일하는 시간을 벗어나면 "스님!"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있어요. 이건 누구나 경험할 거예요.
"아무게 엄마!"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있다고요. 그게 누구입니까?
그 누구의 말의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하지 마십시오.
나를 지켜보는 그와 떨어져 있지 말고 순간순간 그를 의식하면서
그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는 붙잡으려하면 멀어지고 찾으려하면 사라져요.
눈을 밖으로 팔지 말고 안으로 돌이켜야 됩니다.
그 안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자신의 목소리 속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와 같은 제 말을 들을 줄 아는 또 그는 누구입니까.
헛눈 팔지 말고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고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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