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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1762-1836)과 문산 이재의(李載毅 : 1772-1839)와의 관계처럼 멋지고 재미있는 관계는 많지 않습니다. 다산은 남인(南人)에 속하는 명문 집안 출신이고, 문산은 노론(老論)의 명문 출신이어서 당파도 다르고 사유체계 또한 현격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나이도 다산이 10세의 연상으로, 더구나 사학죄인으로 유배살이에 찌든 생활을 하던 처지였습니다.
14년 째 다산초당에서 귀양살이하던 1814년 음력 3월 4일, 영암군수이던 아들의 관아(官衙)에 기거하던 문산이 이웃고을 강진의 다산초당으로 다산을 찾아오면서 두 사람의 만남은 시작되었습니다. 『이산창화집(二山唱和集)』이라는 책에 보이듯, 처음에는 서로 시를 지으면서 대화가 시작됩니다. 시문에 넉넉한 두 선비는 아름다운 봄 3월에 아름답고 찬란한 경치에 매료되어 뛰어난 시작품으로 말문을 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로 대화가 열렸던 그들은 당파를 떠나고 서로의 삶의 처지를 떠나 학문에 몰입하는 학자의 입장으로 돌아가 일치할 수 없는 학문적 견해를 심도 깊게 토로하면서 바로 학술논쟁으로 들어갑니다. 만나던 그해부터 3년에 이르는 편지글을 통해 심성(心性)과 인성(人性)에 대한 대 학술논쟁을 벌렸습니다. 고관대작의 가문에서 태어나 비록 자신은 진사(進士) 시험에서 합격하고 일체의 벼슬살이는 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생애를 바쳤던 문산은, 다산과 같은 대학자를 만나 생애를 건 학문논쟁에 온 정력을 바쳤습니다.
인간적으로는 형제처럼 다정한 사이가 되고 정말로 가까운 벗이 되었지만 학문이론에는 끝내 견해를 일치시키지 못했습니다. 1818년 다산이 고향으로 해배되자, 문산은 본디 고향이던 죽산(竹山)과 서울을 오고가면서 다산의 여유당을 찾아가 우정과 학문의 벗이 지녔던 정을 계속했습니다.
1836년에 다산이 세상을 뜨고, 다산의 부인 홍씨(洪氏)는 1838년에 세상을 뜨는데, 문산이 그 홍씨 부인의 죽음에 만사(輓詞)를 지은 것으로 보면, 다산의 서거 이후까지도 우정을 이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관계가 바로 그들의 관계라 여겨집니다.
박석무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