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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 (2006. 06.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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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제자 이강회의 나라 걱정
안 대 회(명지대 국문학과 교수)
다산이 유배지 강진에서 가르친 제자 가운데 이강회(李綱會, 1789~?)란 분이 있다. 무명의 시골 학자이지만 실은 뛰어난 학자다. 그의 저서는 최근까지도 베일에 싸여 있다가 근자에 흑산도에서 발견되었다. 나는 우연히도 남들에 앞서 그의 저서를 볼 행운을 얻었다. 『유암총서(柳菴叢書)』와 『운곡잡저(雲谷雜著)』를 비롯한 몇 종의 저서를 볼 때 먼저 본 기쁨에 앞서 처연한 느낌이 들었다. 시골에 묻혀 사는 학자의 너무도 큰 걱정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때나 지금이나 강진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다. 그러나 강진 토박이 이강회의 학문과 생각은 시대에 뒤처지고 어설픈 촌학구(村學究)의 그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천하의 대세를 이해하고 시대의 급선무를 아는 선각자의 그것에 가까웠다. 큰 스승에게 배운 결과는 분명 남달랐다.
지식인이 기술을 무시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어 그의 저술에서 눈에 번쩍 뜨이는 주제는 선박 제조법이다. 유구, 마카오, 중국, 필리핀의 조선술(造船術)과 서양 선박의 특징을 우리나라의 조선술과 비교하여 상세하게 서술해 놓았다. 이런 유의 저서를 조선시대 학자들에게서 찾기는 정말 힘든 일이다. 배를 만드는 기술서를 선비가 쓰는 것은 관습과 상식을 벗어난 것이라고 해야 할 정도다. 하지만 천하 백성을 구제하는 중요한 기술에 뛰어난 학자가 관심을 기울이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힘없고 비천한 상인이 아무렇게나 만들도록 내팽개치는 나라가 조선이라고 비판한 그다. 지식인이 기술을 무시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어 자신이라도 써야겠다고 이유를 댔다.
하지만 저술의 더 중요한 동기는 다른 데 있었다. 배는 단순히 물건과 사람을 운송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한 말을 직접 보면 이렇다.
“당당한 만승(萬乘)의 나라로서 삼면에 바다를 끼고 있고, 밖으로는 강성한 이웃나라가 버티고 있건마는 안에는 나라를 보위할 방폐가 없다. 어쩌면 이다지도 심하게 계획이 없는 것일까? 우리는 늘 한산도 대첩을 사방의 나라에 요란하게 뻐긴다. 우리의 배는 투박한데 저들의 배는 정교하고 부드러워, 투박한 배로 부드러운 배를 부딪치면 도처에서 부서져서 승리를 거뒀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지덕(智德)을 겸비한 이충무공(李忠武公)께서 출현하여 출기입신(出奇入神)한 전략으로 적의 예봉을 꺾은 것이다. 어찌 전선(戰船)의 공이겠는가? 원균(元均)의 패배는 우리 전선으로 초래한 것이 아닌가? 나는 일찍이 한스럽게 여겼다.”
임진왜란 당시의 해전을 그는 떠올렸다. 거칠게 만든 조선 배를 가지고 연약한 왜적의 배를 충돌하여 물리쳤다고 사람들은 승전의 이유를 들이댄다. 지금도 그렇게 아는 사람이 많다. 조선 배의 튼튼함을 자부하며 외국배의 성능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좋은 사례다. 하지만 이강회는 논점을 뒤집었다. 배가 튼튼해서 이긴 것이 아니라 이순신 장군의 출기입신한 전술 때문에 승리한 것이라고. 원균 역시 우리 배로 전투했으나 전멸하지 않았는가? 결국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해전에 이기려면 배를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배를 잘 만드는 것은 ‘국가를 경영하는 자의 큰 정사’ 이강회는 이런 이유까지 덧붙이며 배를 잘 만드는 것은 ‘국가를 경영하는 자의 큰 정사’라고 말했다. 기술이라 무시하고 넘어가서는 안 될, 한 나라의 중대한 정책이라는 것이다. 배를 튼튼하게 만드는 것이 해전에서 승리하기 위한 길이요, 주변의 강성한 나라가 우리를 노리고 있다고 했다.
남보다 앞서 배와 수레를 견고하게 만들고 기술의 진보를 주장한 동기가 여기에 있다. 그는 1816년 진도군 도합도(
哈島)에 출몰한 영국 군함의 위용과 대포의 위력을 목도한 일이 있다. 또 이태 뒤에도 부근 바다에 표류한 중국 배에 승선하여 관찰하기도 했다. 그는 기술과 규모의 엄청난 차이를 보고서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적극 대처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피부로 느낀 그에게 조선의 기술은 너무도 낙후하였다. 기술은 나라의 운명이 걸린 일이었다. 그는 국가가 의도적으로 기술자를 우대하고 적극적으로 양성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하지만 이름없는 시골 학자의 주장을 귀 기울여 들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우려하던 위기는 몇 십 년을 넘지 않아 참혹한 현실로 나타났다.
구한말, 일제시대를 거쳐 지금껏 그의 저서는 흑산도의 한 어부 집에 고적하게 묻혀 있었다. 그가 간절하게 주장하던 조선업이 지금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게 되었다. 선각자의 주장을 외면하고 가혹한 역사적 고초를 겪은 후에야 도달한 결과다. 시대를 앞서 조선술의 발전을 주장했던 이강회가 무덤 속에서 어떤 감회에 젖어있을지 그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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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안대회 · 명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후기 소품문(小品文)의 실체』, 태학사, 2003 『조선후기 시화사』, 소명출판, 2000 · 국역 : 『단원풍속도첩』(박지원 외 지음), 민음사, 2005 『산수간에 집을 짓고』(서유구 외 지음), 돌베개,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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