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최명진(미래에서온교회 목사, 생명평화결사 문화홍보위원장)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는 1943년 초판이 발행되고, 1970년대에 한국에 소개되었으며 <성경>과 마르크스의 <자본론>다음으로 많이 번역되고 읽힌 책이다. 법정스님은 <어린왕자>는 단순한 책이 아니라 하나의 경전(經典)과도 같으며, 누가 자신에게 지묵으로 된 한 두 권의 책을 선택하라면 <화엄경>과 함께 선뜻 <어린왕자>를 고르겠노라고 했다.
보아뱀이 코끼리를 삼킨 그림을 처음 본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이다. 어려운 수수께끼를 풀듯 <어린왕자>의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그림이 모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내 비밀은 이런거야.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라고 속삭이는 여우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곳에 나타난 현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치 그럴듯한 옷을 차려입고 설명해야 믿고 이해하듯이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고 집착해서 살아간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작은 구멍이 셋 달린 조그만 상자 그림을 보면서 그 안에 양을 보는 것은 어린왕자만의 신비한 능력일까? “네가 원하는 양은 그 안에 있어.” 내게 이 말은 ‘네가 원하는 생명과 평화는 그 안에 있어.’라는 말로 들린다. 다른 옷을 입고 있지만, 피부색이 다르지만, 다른 말을 하지만, 남루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지만, 괴팍하고 고약한 성질을 갖고 있지만... 네가 원하는 것은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상자안의 양을 보지 못한다. 어른이 되어 갈수록 본질에 접근하지 못한 채 물질만능주의나 외모지상주의에 빠져 가고 있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할 때면 그들은 가장 긴요한 것은 물어 보는 적이 없다. “그 애 목소리는 어떻지? 그 애가 좋아하는 놀이는 무엇이지? 나비를 수집하는지?”라는 말을 그들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나이가 몇이지? 형제는 몇이고? 체중은 얼마지? 아버지 수입은 얼마야?”하고 그들은 묻는다. 그제서야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줄로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 턱에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는 분홍빛의 벽돌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 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상상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들은 “아, 참 좋은 집이구나!”하고 소리친다.
그렇게 이곳 지구별에는 숫자와 설명에 집착하는 grown-up people(이미 다 자라버린, 어른)들이 가득하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자신들이 보고 이해한 것으로 판단하고 정죄한다. 그렇게 만든 문명으로 자신을 증명하고, 다시금 그 문명의 수레바퀴 안에서 사람들을 교육하고 가두고 지배하는 일을 계속한다. 그래서 생텍쥐페리는 <어린왕자> 서문에서 어린시절의 레옹베르트에게 이 책을 헌사하고 있다. 어른이 되어버린 레옹베르트에게 동심(童心)을 일깨우는 것이다.
어린시절의 낯설음은 무엇이든 처음 보듯이... 그리고는 또 다시 못 볼 듯이 바라보는 일이다. 그렇게 인생을 신비와 경외로 살아가는 사람이 어찌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겠는가? 살던 별 B612를 떠나 여행을 시작하는 어린왕자에게 두려움이 없었을까? 하지만 자기(ego)를 떠나는 여행이야말로 자신(self)과 만나는 순례이고, 자기의 생각과 삶을 양보하는 평화의 행동이다. 사물의 본성은 첫 마음에서 발견된다. 습관에 물든 익숙한 눈길, 손길, 발길이 아닌 가난하고 서투른 어리숙함에서 찾아진다.
“아저씨 별의 사람들은 한 정원 안에 장미꽃을 오천 송이나 가꾸지만...”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들이 찾는 것을 거기서 발견 하지 못해...”
“그래, 발견하지 못한단다.” 내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찾는 것은 단 한 송이의 꽃이나 물 한 모금에서 발견될 수도 있어...”
“물론이지.” 내가 대답했다. 그리고 어린 왕자가 덧붙였다.
“그러나 눈은 보지를 못해. 마음으로 찾아야 해”
생명의 본질을 물질적인 것에서 갈구하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대목이 아닐까? 평화의 삶이 자본의 흐름에서 판가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말이 아닐까? 우리가 찾는 것은 대규모로 재배되는 농장이나 재빠르게 자동화된 공장에선 찾을 수 없다. 지극히 짧은 한 순간에 일어나는 작은 일 속에서 찾아지는 것이 생명이요 평화다. 성경에도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궂이 표현하자면 생명평화는 씨앗 하나를 심는 마음이요, 작은 텃밭 고추나무에 물주는 마음이요, 천리 길을 향해 지금 내 딛는 한 걸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천송이의 장미가 아니라 단 한 송이의 꽃, 단 한모금의 물에서 우리는 생명평화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시뻘건 얼굴의 신사가 살고 있는 별을 나는 알고 있어. 그는 꽃향기라고는 맡아본 적이 없어. 별을 바라본 적도 없고, 아무도 사랑을 해본 일도 없고, 오로지 계산만 하면서 살아 왔어. 그래서 하루종일 아저씨처럼 ‘나는 중대한 일을 하는 사람이야’라고 되뇌고 있고 그래서 교만으로 가득 차 있어. 하지만 그는 사람이 아니야. 버섯이지!”
어린 시절과 만나지 못하는 어른들... 그래서 다 자라버린(grown-up),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어른들에게 권한다. 삶(life)을 고정시키고 여행에 나서지 않는 당신을 향해 추천한다. 성서는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은 눕혀져 굽은 길이 곧아지며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평화)을 보리라.”고 전한다. 平(평평하다) 和(합치다)는 걸어야만 온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은은한 별빛을 따라 사랑의 노래도 부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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