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 멈추고

[스크랩] [작가 임동헌의 우리 땅 우리 숨결]신안군 자은도

문근영 2011. 1. 22. 11:34
[작가 임동헌의 우리 땅 우리 숨결]신안군 자은도
서해바다 물결따라아침 햇빛 일렁이고…
 ◇한운리 임도에서 내려다본 일출 무렵의 자은도. 고깃배 한 척이 붉은 기운을 뒤로 한 채 항해에 나서고 있다.
전남 신안군청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1004 ISLAND’다. 천사섬이란 뜻이다. 언뜻 생각하면 1004개의 섬을 가진 곳으로 여겨지기 십상이지만, ‘진실’에 가깝다. 신안군은 3000 개 수준의 우리나라 섬 중에서 800개가 넘는 섬을 지니고 있으니 국내로 치면 섬의 약 25%에 가까운 독과점(?)에 해당되고,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1개 행정지역이 1000개 가까운 섬을 지닌 경우는 없다. 그나마 800여 개의 섬을 지니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은 수많은 섬들이 다리와 다리로 연결되어 섬의 수가 많이 줄었기 때문이다.

◇자은도의 명물로 꼽히는 분계 해수욕장의 여인송. 자은도의 몇몇 섬은 소나무숲이 방풍림 역할을 하고 있어 더욱 이채롭다.

그 중에서도 자은도는 우리나라 섬 중에서 11번째로 큰 매머드급이다. 하지만 섬은 텅 비어 있다시피하다. 한때 2만명에 이르렀다는 인구는 지금 2000여명에 불과한데 그나마 젊은 처자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다. 넓디넓은 해수욕장은 아홉 개나 되는데 휴가철이 왔는데도 해변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다. 이만큼 한적한 동네가 있을까. 기네스 북에 오르고도 남을 일이다.

하긴, 그래서 자은도는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섬이니 이 한적함이야말로 복권 맞은 것처럼 기분 좋은 일이기도 하다. 곱디고운 외기 해수욕장에 들어선다. 역시 한밤중처럼 조용한데, 해변 저 앞에 사람의 움직임이 나타난다. 노인 두 명이 천막처럼 세워놓은 그물 앞에서 숭어를 잡아내고 있다. 자은도 사람들은 밀물 때는 물에 잠기고 썰물 때는 해변에 드러나는 그물을 양쪽 장대 사이로 걸어놓는데, 썰물이 되면 그물에 걸린 숭어를 잡으러 해변에 나오는 것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나온 노인 부부는 그물에서 떼어낸 숭어를 비닐봉지 속에 넣고 돌아갈 채비다.

“많이 잡으셨어요?”

“많이 잡기는. 이만큼이야.”

박원균씨(70)가 비닐봉지를 허리춤까지 들어 올려 보이는데 곁에 선 박씨 아내의 눈빛이 사납다.

“누군 줄 알고 이름을 알려주고 그래쌌소?”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데 박씨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저 그물, 엊그제 8만원 주고 사다가 쳤지라. 요거,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기도 모지러지라.”

◇자은도는 크고 작은 해수욕장 9개를 거느리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이 몽돌해변은 가장 작으면서도 가장 아늑한 원시의 공간이다.

그런 식으로 그물 치는 게 합법이냐 불법이냐 따위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데 박씨의 아내는 미심쩍은 표정을 거두지 않고, 박씨는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으려고 숭어 몇 마리 잡는 게 무슨 문제냐는 듯 해명부터 하기 바쁘다.

“어서 갑셔잉?”

아내가 재촉하자 박 노인은 담배 한 대를 꺼내 물고 오토바이에 시동을 건다.

“내가 여그서 국민핵교 1학년 때 해방을 맞았지라. 6학년 때는 전쟁이 터졌뿌꼬. 맥어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 한다고 전함을 몰고 가는 것을 이 두 눈으로 직접 봤당게.”

“또 옛날 얘그. 어서 가더랑게요잉?”

박 노인은 오토바이 안장에 궁둥이를 얹고 아내가 뒤에 타자 액셀러레이터를 잡아당긴다. 오토바이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모래밭에 뒷바퀴가 빠진 것이다.

“내려서 밀어!”

◇자은도 외기리 주민 박원균씨 부부. 모래에 바퀴가 깊이 잠기는 바람에 오토바이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자 남편은 ‘밀어보랑게’를 외치고, 순박한 아내는 안간힘을 다해 밀어보지만 요지부동이다.

박 노인이 아내를 향해 툭 던지자마자 아내가 짐받이를 붙들고 안간힘을 써 보지만 오토바이는 요지부동이다. 할 수 없이 박 노인도 안장에서 내려선다. 그제서야 오토바이는 서서히 움직이고, 부르릉, 아내를 태운 박 노인이 해변을 빠져나간다. 박 노인의 아내는 남편 허리춤은 본 체 만 체 숭어 봉지만 꽉 끌어안고 있다.

외기 해수욕장을 나와 자은도에서 제일 먼저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는 한운리를 향해 간다. 길 옆으로는 대파밭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전국에서 대파와 양파가 많이 나기로 유명한 섬이 바로 자은도다. 논이며 밭이며 가릴 것 없이 대부분 모래땅인 자은도에서 사람들이 대파 양파를 키우는 데는 일종의 벤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어느 해인가 대파 흉년이 들었을 때 자은도 대파 농부는 트럭 한 대에 2000만원이 남는 대박을 터뜨렸다. 트럭 한 대에 대파를 실어 보내면 중형 승용차 한 대 값이 남았던 것이다. 어느 해인가 대파 풍년이 들었을 때 대파 농부는 단돈 백만 원을 받고 트럭 한 대에 대파를 실어 보냈다. 인건비도 못 건진 ‘부도 농사’였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은도 사람들이 대파 농사에 실패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경우의 수는 언제나 섬 밖에서 발생하는 셈이다. 그러니 자은도에는 사계절 내내 푸른 기운이 감돈다.

◇분계 해수욕장 입구 언덕에서 만난 흰염소들. 정작, 가장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대상은 바로 이렇게 놓아 먹이는 짐승들이다.

한운리 임도에 오른다. 자은도 임도는 바다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비포장 도로의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서남해안에 자리하고 있어 일출은 일출대로, 일몰은 일몰대로 볼 수 있는 것도 한운리 임도에서의 값진 추억이다. 뿐이랴. 일자형으로 늘어선 소나무 숲이 방풍림 작용을 하는 한운리 해변은 썰물 때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노둣길 끝의 옥섬도 거느리고 있다. 임도 아래 곳곳에는 거의 원시 때 모습을 유지한 몽돌 해변과 자연동굴이 나타난다. 잔잔한 파도가 수천 년을 두고 철썩이며 만들어 낸 공간이다. 오죽 폼이 났으면 일제치하 때 일본은 이 몽돌 해변에서 수없이 돌을 실어 날랐을까.

한운리 임도는 몽돌 해변을 거쳐 외기 해변에 이르기까지 자은도를 끼고 빙빙 돌아간다. 4륜구동 자동차가 털털거리며 달리는 길에는 바다에서 길을 잃고 올라온 게들이 솔찮게 보인다. 장마전선을 타고 온 비바람이 몰아치지만 인적 드문 섬 일주의 멋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이다. 그 멋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느림이다. 혹은 자연 그대로의 원시성이다. 백길 해수욕장 한 군데만 빼면 모든 해수욕장이 맨땅 그대로의 주차장이니 그게 곧 멋이다.

자은도는 암태도 안좌도 팔금도와 다리로 연결돼 있지만 네 개의 섬 중 유독 해변의 모래가 곱다. 해변만 그런 것이 아니다. 밭도 모두 모래 지층이다. 모래가 하도 고우니 한때는 해변 옆에 유리 광산이 들어섰을 정도였지만 고운 모래가 재산이라는 데 눈을 뜬 섬 사람들의 반대로 광산은 철수했다. 자은도의 콘텐츠나 다름없는 모래는 대체 어디서 생성된 것일까. 지도를 보면 자은도는 온전히 중국 쪽 서해를 향해 열려 있다. 그러니 수천 년 동안 중국 쪽에서 모래 바람이 날아와 자은도에 안착했다는 가정이 성립한다. 그 모래들을 잔잔한 파도들이 해변으로 밀어올려 해변을 만들고, 밭을 만들었다는 가정도 성립한다.

한운리에서부터 시작해 섬 전체를 아우르는 임도을 일주하고 나니 다시 비바람이 몰아친다. 서울살이를 접고 귀농해 텃밭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의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작물은 주인의 발짝 소리 듣고 큰다길래 밭에 물 주려고 했는데 비가 오니 참 잘됐네.”

소설가

출처 : 이보세상
글쓴이 : 이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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