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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조(正祖)시대 유감 / 박현모

문근영 2010. 12. 27. 11:25

제8호 (2006.07.26)


정조
(正祖)시대 유감


박 현 모(한국학중앙연구원)


정조(正祖)로 박사논문을 쓴 후, 내 마음 한켠에 늘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정조시대의 ‘정치’에 초점을 맞춰 비판하다보니, 그 시대의 풍부함이랄까 사회의 역동성을 충분히 그려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그것이다.

역동하는 사회, 그러나 정치권은 답보상태

그랬다. 그 시대는 변화와 희망이 꿈틀대던 때였다. 서울 등 대도시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주변 지역에 채소 과일 등 상업적 농업이 발달했고, 금난전권의 혁파로 신흥 상업세력이 부상했다. 서얼과 아전 등은 자신들에게 씌워진 신분적 제약을 타파하기 위해 통청(通淸)운동을 전개했으며, 15만 여 명이 과거를 보겠노라며 하루 동안 도성 안을 가득 메우던 ‘과거열풍’의 시대였다. 그런가 하면 과거시험과는 무관하게 자신만의 전문분야에 몰두하는 마니아가 등장했고, 소설을 목판으로 찍어 돌려야 할 만큼 문화가 번성하던 시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권은 여전히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노론이니 소론이니 남인이니 당파로 나뉘어 “상대편은 무자비하게 짓밟고 자기편은 무조건 감싸는[出奴入主]” 풍토가 계속되었다. 소론의 인물들이 중용되면 노론들은 “소론의 세상이 되었다”며 돌아앉았고, 남인의 몇몇 인물이 숙청되자 남인은 “노론이 남인을 삼제(芟除: 낫으로 베어냄)하려 한다”고 저항했다.

천주교문제와 같이 국가적인 사안에 대해서조차도 이들은 철저히 당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접근하고 오로지 정적을 제거하는 계제로만 이용하려 했다. 정조가 분열과 대립의 정치를 종식하고 “서로 협력하고 효과를 거두는” 정치, 즉 ‘탕평의 정치’를 천명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백성과 지식인 기대 모은 정조의 꿈

“노량진 나루장터의 활기찬 모습, 청년 정조의 열정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경기도 문화의 전당에서 공연한 뮤지컬 ‘화성에서 꿈꾸다’를 본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나는 그렇게 말했다. 빙허각의 손에 이끌려 백성들의 생활세계로 나온 정조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아버지가 자식을,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어두침침한 궁궐의 정치와 달리, 백성들의 삶터 그곳에는 웃음과 해학, 사랑과 꿈이 넘쳤다. 내 마음 속에 남아있던 정조시대에 대한 아쉬움을 뮤지컬은 성공적으로 살려내고 있었다.

그런데 잠깐의 휴식 후에 계속된 제2막이 문제였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제1막에서 묘사된 청년 정조의 ‘피우고 싶은 꽃’이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좌절되었는지 내심 궁금해 했다. 이미 역사의 결론은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시대의 미덕을 그 시대 안에 들어가 확인해보고 싶어했다.

사실 나는 요즘 『정조실록』을 여럿이 함께 읽으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역사적 사실’보다는 오히려 ‘역사 속의 이야기’에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일을 했으며, 그와 관련된 장애물은 무엇이었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또는 좌절)했는가 하는 점이 그것이다. 특히 정약용 등 그 많은 지식인들을 매료시키고, 숱한 백성들로 하여금 ‘풀잎처럼 일어서게’ 했던 국왕 정조의 꿈과 비전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싶어했다.

안타깝게도 뮤지컬의 제2막은 우리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다. 화성건설과 관련한 위기와 그 극복과정에 초점을 맞춘 것은 좋았다. 하지만 불필요한 것들이 너무 많이 섞여 들어갔다. 혜경궁홍씨의 긴 넋두리며, 다른 데서도 볼 수 있는 진찬례 등을 재연하면서 관심이 분산되었다.

마치 정조의 정치적 실수를 반복하는 것만 같았다. 정조는 그 당시 많은 지식인과 백성들의 기대를 한껏 모으고 꿈을 꾸게 했다. 학벌이 아닌 학력을, 신분이 아닌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 지배자가 최소화된 정치, 민생이 안정되고 노비조차도 ‘동포’로 인정받는 나라.... 바로 그런 나라를 사람들은 꿈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은언군이나 화완옹주 등 종친문제로 재 위 후반부의 결정적인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뮤지컬이 그래야 했었던 것처럼, 그 때 정조는 온 힘을 집중시켜 자신이 꿈꾸던 세상을 펼쳐보였어야 하지 않았던가.

‘서두만 잘 쓰고, 정작 본론엔 흐지부지하니…’

“요즘 사람들은 글의 서두만 잘 쓰는 경향이 있다. 정작 본론엔 흐지부지하니 이것은 눈을 빼고 용을 그리는 것과 다를 게 무어냐?” 재위 중반에 정조가 유생들의 과거시험 답안지를 보고 한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이 비단 그 시대만 해당되는 것 같지는 않다. ‘대학생들은 대학 입학 할 때가 제일 낫고, 학자들의 공부는 박사논문으로 끝이 나는’ 것이 우리 대학의 현실이 아닌가.

안타깝게도 이것은 나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 동안 국왕의 리더십을 얘기하고, 정조와 세종의 정치를 가르쳐왔는데, 그래 당신의 본론이 뭐요”라고 물으면, 뭐라 대답할까? 아직 나는 40대 초반에 지나지 않는다며 변명하면 괜찮을까? 뮤지컬의 첫 장면에 나오는 “유처사 형원(유형원)도 30대 초반에 집필을 시작해 18년 만에 『반계수록』을 완성했지 않느냐”며, 좀더 기다려줄 수 없겠느냐고 말하면 될까? 그런데 과연 나는 내 공부의 본론을 쓸 수 있기나 한 것일까?


글쓴이 / 박현모
·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전통연구실장
· 저서 : 『정치가 정조』, 푸른역사, 2001
           『세종의 수성(守成)리더십』, 삼성경제연구소, 2006 등
· 역서 : 『몸의 정치』, 민음사, 1999
           『휴머니즘과 폭력』, 문학과 지성사, 2004 등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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