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아산의 신도비 2- 죽창 강주

문근영 2010. 12. 8. 13:51

아산의 신도비 2- 죽창 강주 우리동네이야기

2006/12/06 10:07

http://blog.naver.com/kimdh7716/140031899770

신도비는 대체로 묘에서 좀 떨어진 입구 쪽의 길가에 세우는데, 신도(神道-귀신 혹은 혼이 드나드는 길 또는 통로)가 동남방이기 때문에 묘의 동남쪽에 세우게 된다. 신도비는 보이는데 무덤이 안 보인다면, 좀 무식하게 말하자면, 대체로 서북쪽을 향해 찾아가면 된다. 조선시대의 규정으로는 실직(實職-실제로 역임한 벼슬)이든 사후 증직(贈職-죽은 뒤에 나중에 추증한 벼슬)이든 2품 이상의 고위 문무대신의 묘 앞에만 세우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신도비는 ‘가문의 영광’의 상징물 중의 한 가지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비교적 크고 웅장하게 세우게 된다. 기본적으로 받침돌(“귀부” 형태나 네모난 돌)과 몸돌(“비신-碑身”), 그리고 머릿돌(지붕돌 또는 “이수”)로 구성되며, 나름대로 예술적인 조각 솜씨와 당대에 일가견이 있는 글과 글씨체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우리 아산시에는 이순신, 홍가신, 이간 등 모두 8기의 신도비가 있으며, 오늘 본 이 강주(姜籒)의 신도비는 그 중 세운 연대가 가장 빠른, 즉 가장 오래된 것이다. 숭정후 갑오, 그러니까 조선 효종 5년, 서기 1654년에 세워진 것이다.
  이 신도비는 네모난 받침돌을 썼는데 앞과 옆의 면에 각각 두 개와 하나씩의 안상을 조각했고, 윗면은 복련 무늬를 새겼다. 비의 몸돌은 길이가 162센티미터이고 맨 위에 앞뒷면에 걸쳐 전서체로 ‘贈左議政竹窓姜公神道碑銘(증 좌의정 죽창 강공 신도비명)’라 새기고 그 아래로 비문을 새겼다. 머릿돌(지붕돌)은 말 그대로 ‘이수’ 형태다.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 상당한 솜씨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천천히 들여다보면 아주 볼만하다.
  강주는 본관이 진주(비문에는 진양)이고, ‘가정 병인에 태어나고 숭정후 경인에 졸하였으니 향년 85세였다’고 한다. 가정(嘉靖)은 명나라 세종 때의 연호다. 그 중 병인년이면 우리나라로는 조선 명종 21년이고 서기로는 1566년이다. 숭정(崇禎)은 명의 마지막 황제의 연호인데, 명이 망한 뒤에도 ‘숭명반청’을 했던 조선 후기의 집권 사대부, 특히 충청 지역이 중심이었던 서인들의 경우에는 더욱더 청의 연호 사용을 거부하고, 그 뒤부터는 ‘숭정’ 또는 ‘숭정기원’에다가 ‘후’를 붙이면서 연호를 대신하는 경향이 강했다. 어쨌든 숭정후 첫 번째 경인년이면 효종 1년, 서기로 1650년 된다. 이 신도비는 사후 4년 뒤에 세워진 것이다.
  죽창(竹窓)은 그의 호다. 진사시와 문과에 합격했고, 여러 중요 관직을 거치며 홍문관 교리와 이조 정랑(모두 정 5품) 등까지 지냈다. 광해군 때에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서기 1623년) 후 다시 관직에 나간 것으로 보아 붕당으로는 서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그의 차남인 백년(栢年)이 원종공신이 되었고, 그가 졸할 당시 ‘호서(충청도)관찰사’로 있었으니 강주는 그 뒤 여러 차례 증직이 되고 마침내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신도비의 비문은 김시국이 짓고, 유심이 썼으며, 김광욱이 전(篆-비신의 전서체 글씨 쓰는 것)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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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평리 방미 마을의 길가에 있는 ‘강주’의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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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 옆에 있는 오래 된 은행나무 아래쪽부터 가지가 퍼져 있어서 아주 풍요롭게 보인다.



  묘를 찾아간다. 신도비 오른쪽 대나무 사이의 골로 들어간다. 작년 추석 때 파인 것인지 길이 좀 불편해도 갈만하다. 다만 묘소가 높다랗고 주변이 넓은데 풀이 많아서 다니기 어렵다. 뱀을 한 마리 봤다. 겁도 나고 반갑기도 하다. 못 보던 꽃(사초과의 풀인데 꽃은 처음이다.)도 봤고 며느리밥풀꽃하고 무릇꽃도 많다.
  묘 앞에는 묵중한 느낌의 문인석과 선이 굵으면서도 좀 화려하게 조각된 망주석이 양 옆에 각각 세워져 있고 가운데 봉분 바로 앞에는 상석과 그 뒤의 갈(碣) 형태의 묘표(墓表)가 있다. 역시 조선 효종 5년, 서기 1654년에 세웠다. 묘표의 글은 맏사위인 조상우가 짓고, 차남 백년이 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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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姜籒)의 묘. 상석과 묘표에서 오랜 세월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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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姜籒)의 묘 좌우에 있는 석물. 문인석과 망주석을 양 쪽에 세워 놓았다.


 

 

 

 
출처 : 이보세상
글쓴이 : 이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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