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臨水는 있으되 背山이 없다
집터의 입지 조건을 보통 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 한다. 그런데 최부잣집을 보면 임수(臨水)는 되어 있는데, 배산(背山)이 잘돼 있지 않다.
집 앞에 흐르는 모내(汶川)는 1300년 전 원효대사가 다리에서 미끄러져 옷을 적셨다는 유서 깊은 냇물로 임수에 해당한다. 동쪽인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의 낭산과 남산 사이로 흘러오다가 반월성 부근에서 각도를 꺾어, 반월성의 움푹 들어간 부분에서 한번 모였다가 다시 최부잣집 앞을 거쳐 서쪽으로 돌아 흘러간다. 최부잣집에서 보면 동출서류(東出西流)의 수국을 이루는데, 집 앞에 물이 흘러야 돈이 생긴다.
그런데 집 뒤의 배산이 제대로 보이질 않으니 이상하다. 대개 명택들은 뒤에서 내려오는 배산(背山, 풍수 용어로 來龍)이 튼튼한 편인데 이 집은 내룡이 확실치 않다. 야트막한 둔덕으로 내려와서 언뜻 보면 평지에 가깝다.
‘왜 그럴까’ 하고 지맥을 조사하기 위하여 집 뒤에 있는 밭을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았다. 거기에는 아름드리 괴목(회화나무)이 몇십 그루 들어서 있었다. 웬 나무들인가? 아마도 이 괴목들은 집 뒤가 허하니까 그 허함을 비보(秘報)하기 위하여 심어 놓은 나무가 아닌가 추측됐다. 나중에 장손인 최염씨를 만나 집의 내룡이 약해서 집 뒤가 허하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그의 답변이 필자의 추측과 같았다.
최염씨의 말에 따르면 형산강 상류의 원래 집터인 ‘게무덤’ 자리도 뒤의 내룡이 거의 없었고, 요석궁터인 이 집도 내룡이 야트막한 둔덕이라서 뒤가 허하다는 것이다. 그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요석궁터를 집터로 일단 잡아 놓고, 집을 짓기 수년 전에 미리 집 뒤에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나무 중에서도 수명이 오래 가는 수종인 괴목을 선택해서 심었다. 그러니 지금 아름드리 괴목의 고목들은 약 200년 전에 최언경이 집터에 대한 비보책으로 일부러 심어놓은 것들이다. 광복 전에는 괴목 숲이 빽빽하였으나 일제 말엽 일본인들이 괴목을 공출해 가기 위해 많이 베어버렸고, 광복 이후에도 많이 훼손돼 지금은 듬성듬성한 상태다. 빽빽하게 밀집된 괴목 숲이었다면 뒤에서 불어오는 북풍을 어느 정도 차단할 성싶다.
다른 집에서는 집 뒤에 대나무를 심어 놓은 경우가 많은데, 이는 내룡이 험한 바위산으로 되어 있을 때 바위산에서 풍기는 살기를 차단하기 위한 방살용(防殺用)이다. 괴목에 비해 대나무는 관리가 거의 필요없고 빨리 자라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괴목은 성장하는 데 오래 걸리므로 장기적인 투자와 관리가 필요하다. 그 대신 성장하기만 하면 대나무보다 훨씬 품격이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대나무보다 키가 크고 두껍게 자라 방풍 효과는 크다. 계림 숲도 모두 괴목이다.
한편 최부잣집의 터를 자세히 보면 바로 옆에 위치한 향교보다 약간 낮게 자리잡고 있다. 200년 전 공터였던 이곳에 집을 지으려고 할 때, 향교의 반대가 심해 향교보다 터를 낮게 깎아내고 지었다. 현재 주춧돌을 살펴보면 향교보다 2계단 정도 낮다. 안채 뒤를 보니 실제로 땅을 깎아낸 흔적이 보인다. 3m 정도는 원래의 자리에서 흙을 깎아내고 집을 지었음이 발견된다. 이는 향교보다 낮게 짓기 위해서이기도 하겠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내룡이 편평하게 내려와서 뒤에 떠받쳐주는 맥이 약하므로 터를 전체적으로 깎아서 바닥을 낮추어 자연히 집 뒤의 둔덕을 높이는 풍수적 효과를 얻기 위한 장치로도 해석된다.
그러나 내룡이 약하다고 이 집이 맥(脈)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집 앞의 문천을 건너 앞산에 올라가 이 집터의 국세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면 동쪽의 반월성 쪽에서부터 용맥이 구불텅구불텅 한참을 내려와 계림을 지나 최부잣집 근처에서 멈추었음이 확연히 나타난다. 내룡이 야트막한 둔덕으로 내려와 약하기는 하지만 맥이 이어져서 최부잣집에 뭉쳐 있음은 확실하다.
재물이 쌓이는 도당산
형산강 상류의 게무덤 자리에서 경주 교동으로 이사온 최언경부터 현재의 자손인 최염까지 계산하면 7대다. 12대 만석 중에 앞의 5대는 게무덤에서 하였고, 나머지 7대를 요석궁터였던 현재의 교동집에서 한 것이다.
교동집을 풍수적인 안목에서 볼 때 최대 강점은 집 앞의 안대가 아주 좋다는 점이다. 이 집의 좌향은 임좌(壬坐)로 남향집에 속한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경주에서 남향집은 남산을 향하게 되어 있으므로 최부잣집 역시 남산이 안대다. 이 집 대문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도당산’이라는 야트막한 야산이 바로 앞에 보이고 그 너머로 남산의 세 봉우리 끝부분이 멀거니 서 있다. 물론 도당산과 남산은 실제 상당 거리 떨어져 있지만, 이 집에서 쳐다볼 때는 거의 이중으로 겹쳐진 것처럼 보인다.
나는 최부잣집의 이중 안대를 보고서야 비로소 ‘안도감’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이 집이 만석꾼이 살던 집이라면 명당이 틀림없을 것이고, 명당이 틀림없다면 과연 어떤 점이 명당인가를 해명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는데, 안대를 보는 순간 그 부담감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200년 전에 터를 잡은 최언경도 앞산의 이중 안대에 매혹되었을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도당산 생김새는 재물과 관련이 있다. 도당산은 말발굽처럼 디귿(ㄷ)자 형태로 생긴 야산이다. 마치 곡식을 쌓아놓은 모양이라 하여 창고사(倉庫砂)로 보는데, 말발굽형 창고사는 그중 최고로 친다. 그리고 디귿(ㄷ)자의 터진 쪽이 최씨집 앞과 일치돼 있어서, 최씨 집에서 보면 재물이 새나가지 않고 쌓이는 형국이다.
그런가 하면 도당산 너머로 남산의 세 봉우리가 넘어다 보인다. 세 봉우리는 둥그스름한 금체(金體)에 가깝다. 금체에서는 귀인이 나온다고 간주한다. 아쉬운 점은 금체 봉우리의 모양이 약간 기울어져 있다는 점이다. 금체봉이 똑바로 서 있었으면 귀(貴)가 좀더 높았을 것이다. 어찌됐든 창고사 위에 금체가 겹쳐 서 있는 형국의 안대는 대단히 희귀한 안대임에 틀림없다. 재물과 귀(貴)가 겹쳐서 시너지 효과를 내는 안대가 바로 최부잣집 안대인 것이다. 행여나 교과서적인 이중안대(二重案帶)를 보고 싶거든 최부잣집 대문 앞에 서서 무한정 구경하시라! 관람료도 받지 않으니 몇 시간씩 보아도 공짜다.
최부잣집의 내룡과 안대를 보면서 양자의 상관관계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양택일 경우에는 안대가 더 중요하고, 음택일 경우에는 내룡이 더 중요하다. 최부잣집을 보아도 이 등식은 입증된다. 내룡은 땅속으로 전달되는 기이므로 음기(陰氣)이고, 안대는 땅 위의 공기를 통해 공중으로 전달되므로 양기(陽氣)로 간주한다. 죽어서 누워있는 사람은 뼈만 남아 있으므로 음기를 주로 받지만, 활동하는 산 사람은 양기를 주로 받는다고 본다. 물론 음양기(陰陽氣) 모두 받을 수 있으면 더욱 좋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양택을 볼 때는 일단 안대를 먼저 볼 필요가 있다.
이번에는 최부잣집 마당을 구경해보자. 사랑채에 놓인 화강암 주춧돌들을 바라보니 격조와 품격이 느껴진다. 사랑채에 올라가는 계단과 둥그스름한 기둥의 받침대가 모두 붉은색이 약간 감도는 경주 화강암이다. 민가에 이렇게 원형의 화강암 주춧돌을 사용한 사례는 처음 본다. 마치 큰 절터나 궁터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흔아홉칸의 민간 궁궐
원래 이 집은 아흔아홉 칸이나 되었고, 부지 2000여 평에 1만여 평의 후원도 있었다. 그 집에 살던 노비만도 10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최염씨의 부인인 강희숙여사(姜熙淑, 63)가 1961년에 시집왔을 당시에는 방앗간 외양간 등이 헐려 마흔일곱 칸으로 줄어 있었고, 노비들도 거의 자유로운 몸이 되어 살림을 난 상태였다고 한다. 지금은 더 줄어들었다. 사랑채도 화재로 (1970) 주춧돌만 남아 있고 안채와 문간채 창고만 남아 있는 상태다.
하지만 사랑채 터에 남아 있는 화강암 주춧돌은 최부잣집 전성기가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알고 보면 이 화강암 주춧돌들은 200년 전에 반월성에 있던 것을 집을 지으면서 옮겨 놓은 것이다. 원래 왕궁 기둥을 받치던 돌들인 것이다.
여하튼 이 사랑채에는 당대의 기라성 같은 손님들이 머물렀다. 그 면면을 한번 보자. 구한말에는 경북 영덕 출신의 유명한 의병장 신돌석(申乭錫) 장군이 이 집에 피신하여 집 주인인 최준(崔浚, 1884∼1970)의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그때 요석궁(최부잣집의 바로 옆집으로 종조부집이었다. 현재는 한정식집 이름)의 대들보를 혼자 힘으로 들어올려 설치했다는 일화가 있다.
구한말에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도 의병을 일으킬 때 수백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이 집을 방문하여 며칠을 묵었다고 한다. 그때 최부자로부터 상당한 거사자금을 받아서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면암은 충청도 기호학파라서 노론이었고, 최부잣집은 남인이라 서로 당색이 달랐지만, 국난을 당하자 당색에 관계없이 도움을 청하러 왔던 것이다.
강점기 때 스웨덴의 구스타프 국왕이 왕세자 시절에 경주 서봉총(瑞鳳塚)의 금관을 발굴하기 위해 경주를 방문하였는데, 이때 최부잣집 사랑채에 머물렀다. 서봉총이라는 명칭도 스웨덴의 왕세자가 발굴에 참여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외에 국내 저명인사로는 의친왕 이강, 손병희, 최남선, 정인보, 안희제, 여운형, 김성수, 장덕수, 송진우, 조병옥 등이 다녀갔다. 의친왕 이강공(李堈公)은 사랑채에 엿새 동안 묵으면서, 이 집 주인에게 ‘문파(汶坡)’라는 호를 적어주었다. 육당 최남선과 위당 정인보 두 사람은 이 집에서 1년 이상 머무르며 ‘동경지(東京誌)’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천도교의 손병희는 집주인인 최준이 존경하던 터여서 자주 와서 묵었다. 손병희와 최준은 보성학원 이사로, 동아일보 발기인으로 같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최린도 왔었다. 최린은 보성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때 천도교도 100명과 보성학생 100명을 인솔하고 수운선생 묘소를 참배온 적이 있었는데, 이들의 숙식을 모두 최부잣집에서 해결하였다. 최수운과 최부잣집이 같은 집안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아무런 부담없이 대인원을 데리고 와 묵어갔던 것 같다.
인촌 김성수도 1년에 꼭 한 번은 들를 정도로 자주 왔다. 인촌 집안과 최부자 집안은 교류가 빈번했다고 한다. 인촌 집안은 호남에서 제일가는 부자로 당시 10만석을 하던 집이었고, 최부잣집은 영남의 제일가는 부자로 만석을 하던 집안이라 영호남 부자끼리 통하는 부분이 있었을 성싶다. 그러한 인연으로 인하여 최준은 동아일보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인촌의 영향을 받아 교육사업에 전재산을 기부하였던 것이다. 인촌은 고려대를 세웠고, 최준은 대구대와 계림학숙을 세웠는데, 대구대와 계림학숙은 영남대의 전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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