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안동 鶴峯 金誠一 종택 退溪학풍 이어온 항일독립운동 명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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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왜군을 맞아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 학봉 김성일 집안의 애국정신은 그 직계 후손들과 정신적 자식인 제자들에게도 어김없이 전해진다. 학봉의 퇴계학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제자이자, 학봉의 11대 종손인 김흥락은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해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제자만 60명이나 배출했고 그의 직계 후손들 중에서도 무려 11명이 훈장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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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cyh062@wonkwang.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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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의 어느 동양학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홍콩, 대만, 싱가포르를 포함한 아시아의 유교문화권 국가들 중에서 유교문화적 요소를 아직까지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라고 한다. 한국 다음으로 일본이고 그 뒤를 중국이 따른다고 한다.그렇다면 한국에서 유교문화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어디인가? 충청이나 호남보다는 상대적으로 영남지방을 꼽을 수 있고, 더 범위를 좁히자면 안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동 일대에 밀집되어 있는 수많은 고택과 종택들의 존재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안동 일대에 이처럼 유교문화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이퇴계 선생의 영향이 크다. 주자성리학을 한국에 토착화시킨 인물로 볼 수 있는 퇴계는 오늘날까지도 영남과 안동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마음속의 어른으로 자리잡고 있다. 퇴계의 양대 제자로는 학봉 김성일과 서애 유성룡이 꼽힌다. 안동 일대의 명문가는 퇴계에 그 연원(淵源)을 두고 있지만, 퇴계 다음으로는 거의가 서애·학봉과 직·간접으로 관련돼 있을 만큼 두 사람의 영향력이 크다. 양대 제자는 개성도 달랐다고 전해진다. 서애가 복잡한 현실문제를 조정하고 해결하는 데 주력한 경세가(經世家)로서의 측면이 강했다면, 학봉은 원칙과 자존심을 지키는 의리가(義理家)로서의 측면이 강했다고 한다. 유학이 추구하는 양대 날개가 바로 경세와 의리인데, 서애와 학봉이 각각 이를 담당했던 셈이다. 또 학봉집안과 서애집안은 오늘날 남아 있는 고택으로도 유명하다. 학봉집안의 고택으로는 학봉의 아버지인 청계공이 살았던 내앞(川前)의 대종택과 학봉 자신이 살았던 학봉종택이 유명하다. 한집안에 명성을 떨치는 종택이 두 채나 있는 셈이다. 서애집안도 그렇다. 하회마을에 가면 서애의 아버지가 살았던 양진당(養眞堂)과 서애 본인의 집이었던 충효당(忠孝堂)이 유명하다. 충효당이 있는 하회마을은 몇 년 전 영국 여왕이 다녀가면서 전국적으로 더 알려졌다. 물론 한집안에 종택이 여러 개가 있는 예는 이외에도 많이 있다. 집안의 중시조에 해당하는 인물이 살았던 대종택이 있고, 여기서 다시 갈라져 나간 파종택(派宗宅, 소종택)이 여러 개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대종택과 파종택 모두가 세간에 회자되는 경우는 드문 편인데, 학봉과 서애집안은 대종택과 파종택이 동등한 비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다. 아무튼 안동 금계마을에 자리잡은 파종택인 학봉종택은 역사적으로나 풍수적으로나 그리고 종택이 지닌 품격으로나 안동을 대표하는 고택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년)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왜군과 싸우다가 전쟁터에서 죽은 선비다. 임금 앞에서도 할말은 하고야 마는 강직함과, 임란전 일본에 통신사로 갔을 때 일본인들에게 보여준 조선 선비의 자존심과 격조 있는 태도는 오늘날까지도 영남과 안동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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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선 철로가 바뀐 사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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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에 대한 영남 선비들의 존경심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사건이 하나 있다. 중앙선 철도 노선을 우회하게 만든 사건이 그것이다. 중앙선은 서울 청량리에서 경북 안동까지 이어지는 철도 노선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중앙선 노선을 처음 설계할 때, 철로가 학봉의 묘소가 있는 안동시 와룡면 이하동 가수천을 관통하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설계대로라면 학봉 묘소의 내룡(來龍)이 끊어지게 된다. 풍수적인 가치관에서 볼 때 이는 학봉에 대한 엄청난 불경에 해당하는 사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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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학풍의 교두보 대곡서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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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과 누정의 차이는 무엇인가. 서원에서 토론했던 주제가 주로 철학이었다고 한다면 누정의 주제는 문학이라고 보면 된다. 이는 두 지역의 환경과도 연관이 있을 성싶다. 산이 많아 농토가 적은 경상도 지역에서는 아무래도 사색의 학문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상대적으로 농토가 많고 물산(物産)이 풍부한 전라도 지역에서는 풍요로움과 함수관계가 있는 문학이 발달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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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학통의 正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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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 후손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퇴계학통의 정맥(正脈)을 학봉집안에서 두 번이나 받았다는 사실이다. 학봉이 한 번 받았고, 그 다음으로 학봉의 후손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년)이 다시 이어받았다. 퇴계학통을 한집안에서 두 번이나 받았다는 사실은 영남사회에서 대단한 영광으로 받아들여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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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경에게 무릎꿇린 치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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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후반 김흥락이 안동 일대에서 지녔던 권위는 대단했다. 그 상징적인 예를 보자. 1890년 안동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신임 부사가 아전들과 짜고 읍민들을 착취하자 이를 견디지 못한 읍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그 해결방안으로 등장한 것이 김흥락의 중재였다. 김흥락은 유림사회와 민중들 모두가 신뢰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김흥락이 향청에 좌정하여 “무릇 민정은 순하면 따르고 역하면 뿌리치는 법이다. 모든 폐정을 고치게 할 터이니 그대들은 물러가서 기다리라”고 한마디 하니, 운집해 있던 읍민들이 “그 나으리께서 우리를 속이겠는가? 그만 집으로 가세나!”하고 모두 해산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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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락호로 위장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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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락이 종가 마당에서 포박당하는 사건이 일어날 때 이를 현장에서 지켜본 손자가 있었다. 당시 나이 10세였던 김용환(金龍煥, 1887∼1946년)이다. 학봉의 13대 종손인 김용환은 70세의 조부가 땅바닥에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는 21세 때에 이강계(李康秊) 의병진(義兵陳)에 참여하여 전투를 하는 등 일생을 항일운동에 바치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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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千年不敗之地의 땅 검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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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학봉고택의 지세가 어떤지 살펴보기로 하자. 대구에서 안동으로 가다보면 서안동 인터체인지가 나오고, 거기서 안동 시내쪽으로 들어가다가 왼편의 봉정사 쪽으로 방향을 틀면 금계(金溪)마을이 나온다. 금계의 순수 우리말 표현은 ‘검재’다. 학봉종택은 이 검재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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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의 상류층 주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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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종택은 조선후기 상류주택의 모습이다. 사랑채, 안채, 문간채, 사당, 풍뢰헌(風雷軒), 선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운장각(雲章閣)을 모두 합쳐 90여 칸, 2000평 대지의 규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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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자로 종손 잇기 작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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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설득하기 위해서 전체 문중사람들이 100리나 떨어진 지례의 생가에 가서 간청하였다. 아예 생가 인근마을에 집을 한 채 얻어 10명씩 조를 짜 생가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설득과 간청을 반복했다. 마치 사극에서 나오는 석고대죄(席藁待罪)를 연상시키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그 기간이 자그마치 7개월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끈질긴 설득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문중사람들은 보종을 위해서는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로 여겼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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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중받는 종부의 권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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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학봉종가에서 종부의 권위는 존중받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매년 정월 초하룻날 종가 사당에 설차례를 지낸 후 이루어지는 신년 세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배는 종가 안채의 마루에서 이루어진다. 학봉의 후손들 가운데 나이든 연장자 100여 명이 종가에 찾아와 종부에게 세배를 드린다. 대개 60, 70대의 갓 쓴 노인들이, 그중에는 종부보다 20년 연상인 노인들도 나이에 상관없이 정초에는 종부에게 세배를 드린다. 물론 종부도 같이 절을 하는 맞세배 형식이지만, 100여 명의 갓을 쓴 노인들이 대청마루에 줄 맞추어 앉아서 종부 한 사람만을 상대로 큰절을 하는 풍습이 학봉종택에서는 대대로 내려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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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봉후손들의 종손 키우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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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사람들 이야기로는 보종계(保宗契)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고 대학을 다녔다고 하는데, 보종계가 어떤 계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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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0명 이상 참여하는 집안 행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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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때 양자로 들어간 김종성의 장남은 김형호(金亨淏·21)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서울의 생부 집에서 살면서 양부(김종길)집을 왔다갔다 했지만, 대학만큼은 안동에 내려와 안동대학 국학부에 재학하고 있다. 일종의 종손수업을 위해서 서울이 아닌 안동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것이다. 종가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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