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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어느 실학자의 세상보기 / 원재린

문근영 2010. 12. 5. 14:19

제12호 (2006.8.23)


어느 실학자의 세상보기

 

원 재 린(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실학자’로 불리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몇 가지 공통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세상에 대한 각별한 호기심이다. 그 중에서도 유별나게 다방면에서 걸쳐 세상사에 관심을 보였던 실학자로 성호(星湖) 이익(李瀷)을 꼽을 수 있다. 그는 40여년 동안 쌓아둔 일상의 관심을『성호사설(星湖僿說)』에 정리해 놓았다. ‘사설(僿說)’, 즉 ‘자질구레한 설명’ 속에서 그려진 조선후기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익의 설명을 쫓아가보도록 하자.

여인네 저고리는 짧아지고, 천하는 오랑캐가 차지했는데

이익은 자기가 보고 느낀 세상사를 천지·인사·경사(經史)·만물·시문으로 나누어 분류하였다. 그 속에는 3천 여 항목이 넘는 소주제들이 실려 있었다. 그 중 흥미로운 내용으로 ‘부인복(婦人服)’이 있다.

양란(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후 여인들의 저고리 길이는 어려운 경제형편을 감안하여 이전에 비해 짧아졌다. 그런데 물자절약의 차원에서 해 입던 짧은 저고리가 18세기에 이르면 어느덧 패션 트렌드가 되어 버렸다. 저고리 길이가 짧아질수록 이익의 걱정은 반비
례하여 커졌다. 야한 옷맵시는 유학자인 이익의 눈에 거슬렸고, 마침내 “말세가 되니 부인의 의복이 소매는 좁고 옷자락은 짧은 것이 요사한 귀신에게 입히는 것처럼 되었다”는 혹평을 낳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다음 말이다. “나는 이런 것을 비록 좋게 여기지 않으나 대동(大同)으로 되어 가는 풍속에는 또한 어쩔 수 없겠다.” 풍요로워진 경제여건 속에서 자태를 뽐내려는 여인네의 마음을 형세 변화로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익이 개인적인 비호감(非好感)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세태에는 또 무엇이 있었을까. 그 중 하나가 중화(中華)질서의 붕괴였다. ‘붉은 돼지’라고 폄하하며 사람 취급도 안하던 만주족이 어느날 명나라를 멸망시켰고, 언젠가부터 서양의 선진문물을 수용하여 진짜 천하의 주인이 되어 버렸다. 많은 유학자들이 만동묘(萬東廟)를 세우고 명나라 황제의 위업을 기림으로써 오랑캐에 당한 치욕을 씻으려 할 때 이익은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는 사설에서 명나라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쓰기 보다는 청나라를 인정하고 그들처럼 서학(西學)을 수용할 것을 권장하였다. 그리고 천문역법·세계지도·망원경·화포, 심지어 천주교 등과 같은 민감한 서학관련 주제들까지 사설 여기저기에 소개하였다.

변해도 너무 변해버린 현실 앞에서 실학자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더 이상 지난 3백여 년간 조선사회를 유지해 온 방식으로는 나라를 온전히 꾸려가기 어려웠 다. 이익은 난국을 해쳐갈 비장의 카드로 ‘손상익하(損上益下)’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자신을 버리고 함께 사는 방법을 모색하다

유학자라면 누구나 ‘윗사람의 것을 덜어서 아랫사람에게 보태준다’는 이 말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이 사자성어를 이익에게 국한시켜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앎의 차원을 너머서 사회적 실천으로까지 그 뜻을 확대·적용해 나아갔기 때문이다.

이익은 양반이었다. 그런 그가 학문적으로 고민했던 내용은 실은 양반의 고민이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국가의 근간을 이루면서도 여전히 신분제의 사슬에 얽매어 억압받고 차별받는 양인농민들의 것이었다. 양반이었던 이익이 떠안으려했던 농민의 고민은 무엇일까. 그것은 땅이었다. 많은 농민들이 피죽으로 연명하면서도 밤마다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짓고, 가족과 배불리 먹는 꿈을 꾸었다. 꿈이 실현되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였다. 그래서 이익은 한전제(限田制)라는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양반지주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면서도 균평을 이룰 수 있는 토지제도였다.

그런데 이 제도는 ‘손상익하’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양반들에게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적지 않은 자기희생이 수반되기 때문이었다. 실학의 역사성은 바로 여기에 들어 있다. 18세기 조선사회는 물이 끊어서 수증기로 변하듯 이전과 질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격랑의 한 가운데에서 난파되지 않기 위해 이익은 ‘성호학파’라는 배를 만들었고, 여러 사람들과 ‘실학의 노’를 저었다. 그 핵심은 상대를 인정하고 모두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법과 제도를 마련하고, 이를 뒷받침할 새로운 학문체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성호 이익은 사람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과 미처 해결하지 못한 고민만을 남겨두고 떠나갔다. 하지만 세상보기에 담긴 논리와 지향은 19세기 말 농민군의 함성 속에서 되살아났고, 1930년대 조국광복의 방편으로, 해방이후에는 식민사관의 해독을 씻어줄 정화수로 부활하였다. 그리고 지금, 여전히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갈등과 대립을 풀어줄 평범한 진리로 반갑게 맞아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언젠가 분단된 조국, 단절된 역사인식을 이어갈 구명줄이 될 것이다.


글쓴이 / 원재린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 논문 : 「영조대 후반 소론 남인계 동향과 탕평론의 추이」(역사와 현실 53호, 2004) 등
· 저서 : 『조선후기 성호학파의 학풍 연구』, 혜안, 2003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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