寶白堂과 黙溪書院
- 만휴정은 김계행의 정자 -

묵계는 안동시에서 안포선을 따라 동남쪽으로 24km를 가면 길안면 소재지[천지리]가 나온다 거기서 국도 35번을 거슬러 올라가면 6km 지점에 위치한다. 천지갑산의 비경을 지난 맑은 물은 마을 한 가운데를 갈라 지나가고 천 북쪽이 원 마을로 여기를 묵계라 한다.
묵계의 소지명은 <서낭댕이>, <구마이> 두 가지가 있다. 서낭댕이란 말은 성황당[동신당]이 있는 마을이란 뜻과 기지(基地)가 절묘(絶妙)하여 신선(神仙)의 터란 의미(意味)에서 선항당(仙巷塘)이라 했다고도 한다.
구마이는 구만리(九滿里)라고도 한다. 옛날에 어떤 도사(道士)가 이곳에 아홉 가구(家口)만 살면 모두 잘 산다고 말하여 구만(九滿)이라 했다고도 한다.
그후에 또 한 선비가 이르기를 늦도록 국화꽃이 피는 따스하고 살기 좋은 곳이란 뜻으로 국만리(菊晩里)리로 개칭하였다. 영가지는 이곳의 지명을 거무역(居無驛)이라 기록했으나 조선조 연산군6년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이 벼슬을 물러 나와 우거(寓居)하면서 묵계(黙溪)라 했다. 이는 보백당이 송암폭포(松巖暴布)위에 만휴정(晩休亭)을 짓고 정자앞을 흘러가는 물을 보고 묵계(黙溪)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마을 뒤 계명산(鷄鳴山)은 진산(鎭山)이고 앞에는 금학산(金鶴山)과 황학산(黃鶴山)이 첩첩으로 에워싸여 그 옛날에는 골이 깊고 물이 맑아 묵계동천(黙溪洞天)은 도원경(桃源境)을 연상하리 만치 호젓하고 청정(淸淨)한 비경이었다.
지금은 현대문화의 파도에 밀려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아직도 주변의 천지갑산 게곡을 따라 흐르는 폭포수와 이어진 천곡(川谷)의 숲속은 여름만 되면 피서객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다.
묵계 마을에는 김계행의 구택이 있는데 보백당이라 편액하였고 종가에는 선생의 교지와 유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사림에서 선생을 향사(享祀)하던 묵계서원(黙溪書院)과 만휴정(晩休亭)이 있어 문한(文翰)의 고장(故庄)임을 말해 주고 있다.
묵계가 문한의 마을임을 알게 하는 일화가 있으니 곧,구한말 어느해 여름날 문장가라고 자부하는 영천(永川)에 사는 이량산(李浪山)이란 선비가 글시합 행각(行脚)을 나서서 청송을 지나 안동으로 가는길에 이 마을앞을 지나 가다가 때마침 소나기를 만나서 어느집 처마밑에 들어가 비를 피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마을의 김매기하던 농군들도 같이 있었다. 그는 시(詩)짓기를 하자고 마을 사람들에게 운자를 내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운자가 떨어지기 바쁘게 저마다 모두들 시 한 수를 읊어내었다.
흙탕물에 옷이 젖어 저토록 보잘 것 없는 촌농군의 입에서 시가 술술 나오자 선비는 그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하! 여기가 바로 문한(文翰)곳이로구나! 감탄하면서 <산촌의 농사꾼이 이만한 수준이라면 안동이란 곳은 과연 대단한 고장이 아니겠는가! 하면서 기(氣)가 질려 안동으로는 가지를 못하고 되돌아 가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보백당(寶白堂, 1431~1517) 선생은 조선조 초기의 정치(政治)가 영광(榮光)과 혼미(昏迷)를 거듭할 때 양심적인 관료(官僚)이며 기절(氣節) 있는 유학자로 국가발전에 몸바친 우리 고장이 낳은 명현이다.
선생의 휘는 계행(係行),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이며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으로 고려 태사 김선평(金宣平)의 후예(後裔)다. 세종 13년 2월 9일에 탄생하였다. 선고는 휘(諱)를 삼근(三近)이라 했으며 현감을 지냈다.
자라면서 성질이 침착(沈着) 과묵(寡黙)하여 같은 또래의 친구와 어울리어도 뛰어난 점이 많으므로 어른들은 하나같이 “장차 이 아이는 큰 그릇이 되리라”라 하였으며 윗대 현감공은 “앞날에 우리 문호를 일으킬 아이이며 학문은 염려할 바가 없다” 라고 크게 기대 하였다. 10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14세에 현감인 아버지의 임지에있는 비안향교에 입학하였다
15세에 사서를 다 익혔고 16세에 생원시, 17세에 생원회시에 합격했다. 그해에 장가들어 부인은 이천 서씨를 맞이 했다. 1452년(임신)에 증광동시(增廣東試) 제2인자로 뽑혔으나 이듬해에 부인 서씨를 사별하였고 그 다음 해에 의령 남씨를 재취로 맞이했다.
32세 때는 성주향교의 교수로 재임했는대 그때 국사[나라에서 내리는 스님의 가장 높은 칭호]의 자리에 있던 장질(長姪) 학조(學祖)스님이 성주에 왔다. 숙부가 향교의 교수로 있으니 찾아가 뵈오려고 했다.
그때 목사(牧使)가 사람을 보내어 관아로 불렀으나 선생은 가지 않았다. 학조가 숙부에 대한 불공을 뉘우치고 찾아 뵈오니 “너는 임금님의 은총만 믿고 교만을 함부로 한다”라고 꾸짖고 출혈(出血)에 가깝게 세도있는 조카를 다스렸다.
이윽고 학조는 “숙부님께서는 과거가 뜻과 같지 않으신가 본데 벼슬에 뜻이 계시오면 제가 힘써 드리겠습니다” 하였다. “그만 둬라 너 힘으로 벼슬을 얻어 무슨 얼굴로 다른 사람을 대하겠느냐?”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학조(學祖) 국사(國師)는 세조(世祖)조에서 연산(燕山)조까지 있었던 스님이다. 불경의 국역과 대장경(大藏經) 3부의 간인(刊印), 남명집(南明集)의 언해(諺解) 등 우리 나라 불교문화 발전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보백당은 50세란 늦은 나이에 급제하여 출사이래 여러 관직을 거쳤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과도 도의(道義)로 맺은 깊은 교분(交分)이 있었다고 하여 연산군(燕山君) 사화(士禍)때 여러번 옥고와 고문을 당하는 변이 있었다.
벼슬에 나아가서는 내외직(內外職)에서 청렴(淸廉)과 공직(公直)을 일관하였으며 정언(正言)에 재임시 직언으로 시폐(時弊)를 논박(論駁)하여 권신(權臣)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후 4년만에 다시 육조(六曹)의 관직을 거쳐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 등 삼사(三司)의 청직(淸職)을 모두 거치면서 충간(忠諫)으로 일관(一貫)했다.
70세가 되던 해에 연산군은 지난 사건을 들추어 다시 구금(拘禁) 하였다. 5개월만에 방면(放免)되었는데 그길로 환향(還鄕)하여 묵계에서 은거(隱居)했다. 그후 6년 뒤 연산군이 폐위(廢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는 분명히 국가대계(國家大計)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10년이나 섬겼던 그의 신하로서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87세에 운명(殞命)하면서 자질(子姪)에게 이르기를 “청백을 가법(家法)으로 이어가고, 공근(恭謹)을 대대로 지켜가며, 효우(孝友)와 돈목(敦睦)하라” 하고는 이어 “교만(驕慢)이나 경박(輕薄)으로 가성(家聲)을 떨어뜨리지 말라, 상제는 정성과 경건(敬虔)을 다하고, 낭비나 허례를 말라” 하였다.
그리고 유훈을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내집에는 보믈이란 없다, 있다면 오로지 청백뿐이다고 했으니 후인들은 선생을 일러 보백당 김선생이라 높이 우러렀다.
시호(諡號)는 정헌(定獻)이다. <純行不夾 曰定, 嚮忠納德 曰獻> 즉, 순행하여 어긋나지 않았으니 정(定)이요, 충성을 다하여 덕을 쌓았으니 헌(獻)이다. 뒤에 조정에서 증직(贈職)을 내리시니, 이조판서(吏曺判書), 양관(兩館)대제학(大提學) 이요 부조전(不祧典)의 칙령(勅令)이 내렸다.
이와 같이 묵계 입향조 보백당은 벼슬에 재임 당시 임금에 직간으로 섬겼으며 연산군의 훈구파 권신(權臣)을 가차(假借)없이 규탄하여 여러차례 곤욕(困辱)을 겪었다. 벼슬에서 물러나 이 마을에 은둔(隱遁)하여 후진의 양성과 덕행(德行)으로 일관했다.
그로서 후예들은 이곳에서 500년 세거하며 선조(先祖)의 유훈(遺訓)을 받들어 권세(權勢)에 가까이하질 않았다 하는데서 문향묵계(文鄕黙溪) 사람의 긍지(矜持)를 지켜왔다.
▣ 묵계서원(黙溪書院)
숙종13년에 영남 사림(士林)의 발의(發議)로 묵계서원(黙溪書院)을 창건하였다.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17), 응계(凝溪) 옥고(玉沽, 1382~1436) 선생의 위패를 봉안(奉安)했다.
<享祀祝文>
◉ 응계(凝溪) 옥고(玉沽)
維淸玉雪 剛金直失
俎豆享之 於千萬祀
맑기는 옥과 구름같고 굳세고 바르기는 곧은 화살 같았으니
제향(祭享)의 성미(盛美)함이 천만년(千萬年)을 갈지어다.
◉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淵源正學 砥礪淸節
編蒙廉頑 百世芬苾
정학의 연원이요 힘써 갈고 다듬었던 맑은 절개는 청렴과
굳셈을 깨우치고 열었으니 백세를 분향 하오리라.
사당(祠堂)은 청덕사(淸德祀), 강당은 입교당(入敎堂), 루는 읍청루(悒淸樓)이며 문은 진덕문(進德門)이고, 재는 극기재(克己齋)이다. 이서원은 고종6년(1869) 서원철폐령에 의거 훼철되었다가 1997년에 유림(儒林)이 다시 현위치에 복원(復元)하였다. 서원의 남쪽 언덕에 정헌공(定獻公) 보백당(寶白堂)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 만휴정(晩休亭)

선생[寶白堂]이 만년에 벼슬을 물러나 이곳 산수 아름답고 경치좋은 곳을 택하여 정자를 짓고 독서와 사색(思索)하던 곳이다.
정자의 규묘는 검소(儉素)하며 자연과 잘 조화(造化)를 이룬다. 그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는 정말 장관(壯觀)이다. 만휴정 소(沼) 아래 바위에는 <보백당만휴정천석(寶白堂晩休亭泉石)>이란 큰 글씨가 새겨져 있다.
정자에는 선생이 유훈(遺訓)으로 남긴 말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이란 액자(額子)을 걸어 두었다. 그리고 정자에는 류도원(柳道源), 김굉(金宏), 김도행(金道行), 정박(鄭璞), 이돈우(李敦禹) 김양근(金養根) 등의 명현(名賢) 시판(詩板)이 걸려 있다.
[傳說] : 길안면 고란리에 만휴정이란 한 정자가 있으니 이 정자가 세워진 내력은 이러하다. 옛날에 고란동리에 민씨라는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과객이 하룻밤을 묶어가기를 청한다. 주인은 쾌히 승낙하고 과객을 맞아 들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과객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또 사흘이 지나도 도대체 떠나려 하지를 않았다. 그로 인하여 과객이 민씨집에서 식객 노릇을 하게된 지도 어언 삼년이 지났다. 꼭 삼년이 되던 그날 비로소 과객은 짐을 꾸려 떠날 채비를 하면서 “이제 떠나겠오, 그동안 신세가 너무 많았소이다” 인사를 건내면서 “그동안 신세를 끼쳐드려 미안합니다. 내가 지내다 보니 집이 낡아 새로 지어야 할 것 같은데 그 보답으로 집터 하나를 잡아 드리리다”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새로운 집터를 찾던 중인 민씨는 매우 반가워했다. 이에 주인은 과객을 따라 이리저리 좋은 집터를 찾아 헤매게 되었다. 과객은 한곳에 이르자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피더니 ‘좋은 곳이긴 하다만…….’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얼핏 과객의 말을 들은 민씨가 “이곳이 명당이요?”라고 물었다. “예, 썩좋은 자리이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민씨의 복(福)에는 합당치 않을 것 같소이다.” 과객은 섭섭하다는 뜻을 보였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요?” “하여간 이곳은 명당이긴 하지만 민씨네 집에는 합당치 않으니 다른 자리를 찾아 봅시다” “아니오 나는 이곳에 집을 짓겠소.” 민씨는 자기가 보아도 앞이 훤하게 터진 곳이 명당인 듯 싶어 과객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 이런 좋은 자리를 남에게 빼앗길 순 없다. 누가 뭐라해도 나는 이 터에 집을 짓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하고 과객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군요. 주인의 원이시라면 낸들 어찌 하겠소, 마음대로 하시구려” 하고서는 어디론지 가버리고 말았다.
그후 민씨가 그터에 주초를 놓고 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하루는 텁수룩하고 눈치가 이상한 과객 하나가 지나가면서 “음……. 민씨가 김씨집을 짓는구나” 하는 것이다. 민씨는 과객의 말이 매우 기분 나쁘긴 했지만 흘려 버리고 계속 집짓는 일을 계속했다.
사흘 뒤에 또한 과객이 지나가면서 “김씨집을 짓는구먼” 하고 지나갔다. 이제는 기둥을 세우고 상량을 하는 판인데 또한 과객이 지나가면서 “음……. 김씨집을 세우나 보다” 하는 것이었다. “뭘! 별 소릴 다하네 그려. 엄연히 민씨집인데 뭐라고! 김씨집을 짓는다? 고약한 놈 같으니라고……” 하면서 또 그 말을 묵살하고 이번에는 기와를 덮고 초벽을 하였다. 이 무슨 사연인가 ? 또 한 과객이 지나가면서 “허허……. 김씨집을 짓는구나!”라고 똑같은 소리를 되풀이 한다. 그러나 민씨는 아예 듣지도 않은 채 결국 집을 완성하여 새집으로 이사해 살게 되었다.
그런데 새집에 살기 시작한 민씨는 차츰 가산이 기울어지기 시작하더니 몇해 못가서 폭삭 망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민씨는 집을 팔기로 하였다. 그러나 망한 집터라 아무도 사려고 하지 않았다. 그 소문을 들은 김씨 문중에 어떤 하인이 보백당에게 민씨의 집을 살 것을 권했다. “그건 안돼. 망해가는 집터를 샀다가 우리집도 망하면 어쩔려고!” “그렇지 않습니다. 그 집은 지을 때부터 이상한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 집을 사면 분명하게 부귀가 자손만대까지 이어져 번창해질 것입니다.” 하인은 주인에게 간곡히 졸랐다.
그래서 보백당은 별로 내키지도 않았지만 하인의 그같이 조르는 바람에 마음이 동하여 민씨의 집을 사기로 결정을 내렸다. 집을 샀으나 두 집[기존 집 포함]을 다 혼자서 쓸 수가 없어 우선 하인을 시켜 그집에 살도록 하였다. 며칠 뒤에 보백당집에 불이 나서 몽땅 타버리고 말았다. 숟가락 하나 건지지를 못한 알거지 신세가 되었다. 그로 인해 보백당은 하인을 준 그집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다.
보백당이 새집으로 옮기고 난 뒤로는 어쩐지 차차 산림이 늘기 시작했고 자손들이 번창하여 문호가 활기를 띠게 되었고 벼슬길에 오른자도 많았다는 것이다. 이런 전설 때문에 문중 사람들은 그 자리 고란에 만휴정이란 정자를 세워 보백당을 받들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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