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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국노래자랑`과 민족통일 / 박호성

문근영 2010. 10. 13.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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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노래자랑’과 민족통일


내가 거의 유일하게 즐겨 보는 TV 프로그램이 있다면, 그것은 일요일 낮마다 어느 TV에서 방영하는 〈전국노래자랑〉 하나 뿐이다. 이른바 '허드렛 사람들'이 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가 잦다.

이 가설무대에는 오랜만에 읍내 미용실에라도 다녀왔음직한 농부의 아내도 출연하고, 일터에서 잠시 나들이 나온 듯한 더벅머리 총각도 나타난다. 이곳에는 몸으로 부딪치며 사는 사람들이 몸으로 부르는 노래와 춤이 있다. 무말랭이처럼 볼품없고 괄시받는 사람들끼리 한데 어울려 서로의 처지와 형편에 맞게 애환을 나누고 달래기 위해, 그들은 강제동원도 없고 막걸리 선심공세도 있을 턱이 없는데도, 말없이 이곳으로 백사장처럼 모여든다.

평범한 사람들의 노래와 춤이 있는 ‘전국노래자랑’

이리 채고 저리 쫓기며 한 평생을 잡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설무대를 에워싸고 현수막을 휘날리며, '이 고장의 명 카수, 이 고을의 인간문화재 OOO'를 응원하기 위해 열심히 손바닥을 두들겨대는 것이다.

'50대의 영원한 귀염둥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중년 양복장이의 춤과 노래도 있고, 모녀가 함께 나와 늙은 엄마가 부르는 노래에 멋들어진 춤으로 장단을 맞추는 처녀도 있다. 75세라고 밝힌 할아범이 나와 '꼬집힌 풋사랑'을 숙연히 부르기도 한다. "땡 해도 좋응께 최선을 다해라"라는 현수막을 흔들어대는 응원단의 표정이 훈훈해서 즐겁고, "출연 직전까지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여 물론 자신만만하다"고 기염을 토하긴 했으나,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땡' 소리의 기습공격을 받고서는, 그래도 그저 씽긋 웃어버리고 마는 생선회처럼 싱싱한 웃음이 소탈해서 좋다.

한번은 과거를 헤아릴 길 없는 81세의 할머니가 가설무대로 올라와서는 "거어친 꿈이 기이펐나"로 끝나는 '선구자' 노래를 두 손을 깍지낀 채 눈물을 글썽이며 열창해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또 눈물을 글썽이게 만들기도 했다. 운전복을 그냥 입고 돈주머니는 놓칠 새라 한 손에 움켜쥔 채 무대로 뛰어오르는 택시기사도 있고, 깊숙한 돈주머니가 두 개 달린 비닐 앞치마를 걸치고 비늘처럼 번쩍거리는 이를 드러내며 등단하는 생선장수 아줌마도 있다. '시청 위생과 소속 청소부'라고 자기 신분을 밝힌 어떤 노인은 "타향살이 몇 해던가 …"를 울부짖듯이 토해내고는, 먼지 쌓인 황색 근무복을 털며 무대를 떠나기도 한다.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라든지, "사랑이 꽃이라면 다시 피겠지" 하는 타령들은 또 얼마나 절묘한 표현법을 구사하고 있는지 …. 한 겨울의 꽃은 얼마나 귀중할 것이며, 다시 피는 꽃처럼 다시 피어나는 사랑은 또 얼마나 애틋할 것인가. 이처럼 허드렛 무리들의 염원은 가슴 찡하다. 어디 그뿐인가.

"어차피 혼자 왔다가 어차피 혼자 가는데, 원망도 미련도 다 버려라. 오늘이 지나면 태양은 뜨는데, 내일을 위해 건배를 하자"거나 "세상살이 어렵고 서러울 때면 너털웃음 한번 웃고 술 한잔에 취해보자. 꽃잎이 진다고 청춘이 간다고 한탄말고 아쉬워 마라"는 가사에 깃들여 있는 이들의 절규는 또 얼마나 가슴 사무치는 다짐으로 가득 차 있는가. 이들은 한 많고 설움 많은 인생살이 속에서도 너털웃음을 웃으며, 내일 다시 떠오를 태양을 두 주먹 불끈 쥐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모인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들은 흔히 '밑바닥 인생'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참으로 눈물겹도록 선량한 우리 사회의 모든 '초민'(礎民)들이다.

온갖 더러운 오물들을 말끔히 세척해내고는 스스로 허드렛물로 전락하는 깨끗한 물처럼, 사실 이 '허드렛 사람들'이야말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우리에게 입을 것, 먹을 것을 장만해주기 위해 묵묵히 땀흘리는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거드름 피우지 않고 공장에서건 들판에서건 과묵한 소처럼 자신의 일에만 매달리는 사람들, 바로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이끌어 가는 원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내세울 게 있다면 질박한 몸가짐과 투박한 말투밖에 없는 사람들, 보살펴줄 사람이 없는 탓에 스스로 보살필 수밖에 없는 이 '허드렛 사람들', 이들은 사실 낙타들이다. 이를테면 항상 무릎 꿇고 엎드려 무거운 짐 싣고 뜨거운 모랫길을 떠날 채비를 차리고 있어야 하는 '인간낙타'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지닌 사람들이다.

언제쯤 북녘땅에서 ‘전국노래자랑’이 펼쳐질 수 있을지

하지만 정부 당국은 이러한 허드렛 사람들의 수고에 보답하고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한번쯤이라도 정책적 배려를 아끼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우리의 삶과 우리가 누리는 번영을 가능케 해주는 이 소박한 허드렛 인간들의 노고에 머리 숙여 감사하기 위해, 농촌 구석구석이나 노동현장 곳곳에 단 한번만이라도 가령 '문화 위문단' 같은 것을 파견할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정부가 바뀌어도 이 허드렛 사람들은 바뀌지 않고, 오직 그들의 주인만 바뀌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른바 '일선장병 위문 공연단' 같은 것은 빠짐없이 만들어졌다. 아울러 보다 여유 있는 사회계층들을 위해서라면 정부 당국뿐만 아니라 막강한 사회단체들이 수 억 원 정도 뿌리는 것쯤은 예사로 여긴다. 그래서 로열 발레단이나 베를린 필하모니, 볼쇼이 오페라단도 모셔온다. 허나 이 모든 게 우리 허드렛 무리들에게는 진열장 속의 보석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전국노래자랑〉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건너뛰기도 하고 충청도 산골에서 강원도 바닷가로 내닫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분단의 쓰라림은 어김없이 찾아든다. 진도에서는 노인네들이 더덩실 춤을 추며 진도 아리랑을 부르는데, 몽금포 타령은 마냥 입을 다물고 있다. 언제쯤이면 황해도 사리원이나 함경북도 명천 또는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 쯤에서 〈전국노래자랑〉이 펼쳐질 수 있을지, 갯지렁이 같은 주름이 옹골차게 박힌 황토빛 얼굴을 들고 몇 몇 노인들은 간혹 휴전선으로 가로막힌 북녘 땅을 촉촉한 눈길로 응시하기도 한다. 통일이 그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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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호성
· 서강대 사회과학대 학장 겸 공공정책대학원 원장(정외과 교수)
· 한겨레 신문 객원 논설위원
· 학술단체협의회 대표간사
· 미국 Berkely 대학 및 캐나다 뱅쿠버 대학(UBC) 객원교수
· 저서 :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전망>,<우리 시대의 상식론>,
           <21세기 한국의 시대정신> 등 다수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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