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최충성이 만든 한증막과
자명종
이 종 묵(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최충성(崔忠成, 1458-1491)은 나주 태생으로 세종 때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최덕지(崔德之)의 손자다. 신진사류의 한 사람으로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 출입하여 소학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은 사람이다. 훗날 조부를
따라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되었지만, 생전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고 벼슬에도 오르지 못하였으며 내세울 만한 저술도 남기지 못한 채
34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호를 산당서객(山堂書客)이라 하였는데 산당은 산속의 집이라는 뜻으로, 젊은 시절 산사를 돌아다니면서 책을 읽었기에
스스로 호로 삼은 것이다.
산당서객(山堂書客)
최충성
최충성은 정말 열심히 책을 읽고자 하였다. 졸음을 쫓기 위하여
겨울에도 불을 피우지 않은 산속의 방에서 기거하면서 책을 읽었다. 그러다 보니 몸이 병들었다. 기침이 심해지더니 마침내 중풍에 걸렸다. 사지가
뻣뻣하여 바깥출입이 힘들게 되었다. 그 형의 극진한 보살폈지만 병이 완쾌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증실(蒸室) 곧
한증막이다.
최충성이 만든 증실은 이러하다. 사방 벽을 두껍게 발라 틈이 전혀 없게 하고 바닥에는 구들을 깔되 모래로 틈을 완전히
메운다. 그리고 불을 때어 뜨겁게 하고 아궁이를 막아 새지 않도록 한다. 창포(菖蒲)와 도꼬마리, 질경이, 쑥 등을 구들 위에 올려놓고 물을
붓는다. 증실 속으로 들어가면 너무 뜨거워 수건으로 코를 막아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최충성은 고통 속에서 땀을 비 오듯 쏟으면서 한유(韓愈)의
<원도(原道)>를 외울 때까지 버텼다. <원도>를 다 외울 때쯤 되면 오장육부가 다 타는 듯하였다. 급히 마저 외우고
증실을 뛰쳐나왔다. 소금을 푼 물에 몸을 씻은 다음 두꺼운 솜이불을 덮고 미음을 먹으면서 한참 쉰 다음 다시 증실로 들어갔다. 최충성은 9일
동안 매일 4-5차례 증실로 들어가 이렇게 한증을 하였다.
한증은 당시 널리 유포되어 있던 치료방법이었다. 세종 때 서민을 위해
만든 활인원(活人院)에도 한증막을 두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따르면 한증은 예맥 지역의 풍속이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서북 지역에 크게
유행하였다 한다. 병의 증상과 관계없이 무턱대고 한증을 하다가 죽은 사람이 많아 사회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최충성 역시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오히려 형의 구완으로 조금 나은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버렸다.
실학, 선비가 불면의 밤을 보낼 때 만들어낸
학문
최충성은 병으로 더 이상 바깥출입이 어렵게 되었다. 온갖 사념이 일어
불면의 밤이 이어졌다. 사념을 떨쳐야 병에 차도가 있을 것이라 여겨 최충성은 묘한 물건을 하나 만들어낸다. 제도는 이렇다. 벽 높다란 곳에 2장
길이의 시렁을 둘 올리고 그 위에 길이 한 자 남짓 되고 너비 6촌쯤 되는 각판(刻板)이라 이름 붙인 작은 판자를 깐 다음, 상수리와 밤 껍질을
부수고 체로 걸러 분말로 만든 각말(刻末)을 뭉쳐 판자의 네 모서리를 따라 성 모양의 각성(刻城)을 만든다. 각말을 퍼 담기 위한 나무숟가락을
각시(刻匙)라 하고, 각말을 뭉치기 위하여 엄지손가락 굵기의 나무를 반으로 자른 파이프 모양으로 만든 되를 각승(刻升)이라 한다. 각성을
5등분하여 초경에서 5경까지 표시를 하고 각 경에 나무못을 박는다. 점토로 탄환을 15개 만들어 실로 매다는데 1경에서 5경까지 그 숫자만큼
단다. 그 아래 국자 모양의 환두(丸斗)를 만들고, 여기에 6척 길이의 대통을 세 번 꺾어 환도(丸途)를 만들어 연결하고 그 입구 끝에 놋그릇을
받쳐둔다.
이렇게 하여 저물녘에 시작 부분의 각성에 불을 붙이면 각말로 된 각성이 타들어가서 초경이 되면 초경 자리에 매어놓은 끈이
끊어지면서 각환(刻丸)이 환두로 떨어졌다가 환두에 연결된 환도를 따라 구불구불 내려가서 놋그릇에 굴러 떨어지게 된다. 각환이 판자로 된 환두로
떨어지는 소리, 대나무를 된 환도를 따라 구르는 소리, 다시 놋그릇에 떨어지는 소리를 차례로 들을 수 있게 된다. 오경이 되면 다섯 개의 탄환이
굴러 떨어지는 그 소리가 더욱 커진다. 최충성은 이러한 장치를 경려분각(警慮焚刻)이라 이름하고, 분각에 떨어지는 탄환의 소리를 들으면서 불면의
밤을 보내었다. 이렇게 하여 스스로 시각을 알리는 자명종을 만들게 된 것이다.
최충성은 분각이 독서를 하는 선비들이 시각을 알게
하는 데도 유용하다고 생각하였다. 몸이 건강하여 산사를 오가면서 독서를 할 때에는 생각지 못하다가 몸이 곤궁해지고 나서야 이러한 장치를 만들게
되었다고 탄식하였다. 조선후기 실학이라는 것도 결국 몸이 곤궁해지고 나라가 피폐해져 이로 말미암아 선비가 불면의 밤을 보낼 때 만들어낸 학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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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종묵
·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의 문화공간』(전4권), 휴머니스트, 2006
『한국한시의
전통과 문예미』, 태학사, 2002
『누워서
노니는 산수』, 태학사, 2002
등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