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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나 스타로보이토바(1946-1998)와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1958-2006), 한국 독자들에게는 그들의 성이 너무 길어서 기억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들도 스스로 가족의 이름이 아니라
그들 개인에게 고유하게 붙여진 이름,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이름만으로 불린다 하더라도 섭섭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그냥
갈리나와 안나라고 부르기로 하자. 이 두 러시아 여성은 소수자들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용감히 싸우다가 비운에 쓰러진 사람들이다. 최근에
보도된 안나의 죽음이 몇 년 전에 일어난 갈리나의 죽음까지 상기하게
한다.
정치인 갈리나, 소수민족 인권과 권익 옹호에
앞장서다 우랄 산맥 부근에서 태어난 갈리나는 소련 학술원 산하 민족인류학
연구소에서 사회인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였다. 소수민족들의 삶과 문화를 연구하는 데 전념하던 갈리나는 1980년대 중반 소련에서
개혁(페레스트로이카)운동이 시작되자 자신이 평소 품어온 사회적 이상을 펼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개혁파와 뜻을 함께하는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989년에는 당시 소련에서 처음으로 일반국민들의 민주적 선거로 구성된 인민대표자회의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정치인으로서 갈리나의 관심도 다민족국가인 소련-러시아 연방 내 소수민족들의 인권과 권익을 옹호하는 일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소수민족들이 러시아인들의 패권주의로 인해 정치 경제적 불이익을 당하고 문화적 언어적 자율권을 잃는 일이 없도록 그들의 권리를 앞장서서
대변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슬라브인이었지만 인민대표자회의에는 카프카즈 산맥 지역에 위치한 아르메니아 공화국(당시에는 소련의 한 공화국)을
대표하는 대의원으로 참여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소수민족 문제의 탁월한 전문가였기에 옐친 대통령의 소수민족 정책 자문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91년 말 소련이 해체되면서 체첸인들의 독립문제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체치니아(체첸)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일자 갈리나는
러시아와 체치니아 양편의 중재인으로서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필사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녀의 노력에도 러시아 정부가 체첸인들을
공격하면서 제1차 체첸전쟁이 시작되었고 이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치달았다. 그러나 갈리나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민주 러시아당’이라는
정당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민주적인 정치세력의 기수로 신망을 얻은 갈리나는 학자로서 국제적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1995년에는 러시아 연방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96년에는 여성 정치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갈리나가 소속한 정당은 세력이 크지 않았으나
그녀는 대선후보라는 위치를 활용하여 자신의 개혁적 주장을 알렸고, 국내정치세력의 부패, 심화되는 사회적 양극화, 정보기관의 전횡에 맞서 몸을
사리지 않고 싸웠다. 러시아 여성 정치인으로는 드물게 국제적인 신망과 기대를 모으던 갈리나였지만, 사회적 혼란을 틈타 개인적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던 신구 특권층에게서는 미움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그녀에게 비열한 세력의 손길이 뻗친 것은 1998년 11월이었다.
경호원과 함께 페테르부르크의 자기 아파트로 돌아가던 그녀는 계단을 오르다가 숨어서 그녀를 노리던 청부살인자들의 저격에 쓰러졌다. 범인들은
잡혔지만, 배후가 누구였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나는 갈리나를 만난 적이 있다. 1992년 8월 독일의 한 작은 도시에서 열린
하계 세미나에서였다. 40대 중반이던 갈리나는 넉넉한 몸매와 얼굴에 서글서글하고 인자하면서도 결단력 있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머뭇거리며 다가갔지만, 내가 자기소개를 하고 보도를 통해 당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말하자 그녀는 반가워하며 개방적인 자세로 대화에 응해
주었다. 당신의 앞날에 좋은 일이 있기를 빈다는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던 우리는 그 후로 다시 만나지 못했다. 다만 그녀는 당시 내가 찍은 사진
속에서 청중들을 향해 열띤 강연을 하는 모습으로 여전히 살아
있다.
언론인 안나, 체첸전쟁의 진상을 알리다
살해돼 안나는 뉴욕에서 유엔 주재 소련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러시아로 돌아와 모스크바 대학에서 공부한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이즈베스챠> 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했다. 안나가
세계적으로 이목을 끌게 된 것은 체첸전쟁의 진상을 알리는 기사를 쓰면서였다. <노바야 가제타>지 기자로 체첸을 방문하여 취재하던
그녀는 체첸 전쟁의 잔혹상에 주목하였고, 특히 러시아군대가 체첸인들에게 저지르는 가혹행위, 불법행위와 러시아 정부의 전쟁정책을 비판하는 기사를
여러 차례 작성하여 신문에 게재하였다. 그녀의 활동은 어느 한 쪽을 일방적으로 편드는 것이라기보다, 무고한 사람들이 야만과 폭력의 희생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용감한 노력을 의미하였다. 그렇기에 2002년 모스크바의 극장에서 체첸인들이 인질극을 벌였을 때 중재자로 나섰던 안나는
러시아인을 비롯한 인질 가족들의 법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안나의 명성이 국제적으로 높아가는 데
비례하여 그녀가 체첸 전쟁을 옹호하는 세력에게서 살해협박을 받고 실제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빈도는 나날이 잦아졌다.
결국
2006년 10월 초 안나는 갈리나가 그랬던 것처럼 아파트 건물 안에서 청부 살해자로 추정되는 인물의 습격을 받고 죽음을 맞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발견된 안나의 시신 옆에는 피스톨이 놓여 있었으나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런던에서 안나 살해범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다는 사람들의
말을 믿고 그들과 접촉하려 했던 망명 러시아인마저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갈리나의 죽음 때와 마찬가지로 안나의 죽음에
대해서도 국제사회는 체제 전환 후 러시아에서 정치인, 언론인들이 여러 차례 청부 살해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며 안타까움을
표할 뿐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에서 지켜볼 뿐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들의 죽음이 결코 헛된 일은 아닐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면서 그들을
추도하고 있다.
다른 사회의 경우나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도 여성들은 오랫동안 순종과 희생의 삶을 살아 왔다. 러시아 혁명기에는 여성
운동도 치열하게 전개되어 한 때 소비에트 러시아의 여성관계 법률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이었다. 그러나 스탈린 시대에 들어서서 여성은 다시 전통적
역할을 강요받았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 자체는 활발했지만, 그들이 뚜렷한 목소리를 내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 같은 침묵의 세월을 딛고 여성들이 활발한 공적 발언을 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가장 돋보이는 지도자로서의 활동을
하던 두 여성이 몇 년의 차이를 두고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비극적 죽음을 맞았다는 것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안타까움을 안겨준다. 어쩌면
안나와 갈리나는 그들 스스로가 사회 내 약자인 여성으로서, 기득권 세력에 편입되어 있지 않았기에 거침없이 인권의 수호자로서 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삶의 마지막 날까지 염원했던 대로, 무고한 사람들의 힘없는 눈물이 부패한 자들의 폭력을 이기게 되는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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