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부석사-소수서원 답사자료집

문근영 2010. 8. 17. 08:11

 

2003년 11월 2일 

 

 

순흥과 소수서원

금창영

 소백산 능선엔 여러개의 봉우리가 있습니다. 연화 1봉, 연화 2봉에서부터 주봉인 비로봉까지. 이러한 명칭들은 사실 부석사에서 바라보면서 이야기하면 그 말에서 느껴지는 불교의 향기를 금방 느낄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망봉은 조금 다릅니다. 이건 우리가 산을 다니면서 자주 듣는 봉우리 이름이 아니지요. 여기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전 순흥에 이황이 풍기군수로 와 있었지요. 그때 천민 제자인 배순이 국상이 나자 삭망 때마다 그 봉우리에 올라가 북쪽을 향해 곡을 했고, 그래서 이 봉우리를 국망봉이라고 했답니다. 원래 각 지방의 관아에 있는 객사에서 삭망때마다 군주에 대해 제례를 올렸으니 그걸 본딴 것이겠지요. 대장장이였던 배순은 이황을 오래 모시지 못한 안타까움에 쇠로 이황의 상을 만들어 계속 글을 잃었고, 이황이 죽은 후에는 그 철상을 모시고 3년간 상복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럼 이정도로 사설은 그만하고 본격적으로 순흥과 소수서원에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순흥  

 

어느 지방에 가더라도 우리는 먼저 그 지방에 대한 예전의 명칭을 살펴봅니다. 순흥도 역시 이름이 여러번 바뀌었습니다. 고구려의 급벌산군이었다가 신라땅이 되었고, 고려 때에는 흥주습니다. 고려 충령왕과 충숙왕・충목왕의 태를 연이어 묻은 곳이 되면서 마침내 순흥부로 승격되었고, 1413년에는 지방읍으로는 상당히 격이 높은 ‘도호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조선 세조 3년(1457)에 금성대군을 중심으로 한 단종 복위운동이 이곳에서 일어난 것이 발각되면서 부가 폐지되었고 땅덩어리는 풍기・예천・봉화로 뿔뿔이 나뉘어졌습니다. 그러다 200여 년이 흐른 뒤인 숙종 9년(1683)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니, 순흥은 정치적인 사건이 지역에 미치는 영향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이곳은 방금 이야기한 부석사를 비롯해서 초암사, 비로사, 희방사 등이 있어 불교의 흥성을 집작해 볼수 있게 합니다. 더구나 소수서원의 터가 예전 숙수사였답니다. 어떻게보면 이데올로기적으로 불교와 유교가 같이 강성했던 곳이라고 보여집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소백산이 품고 있는 지역은 능선이 국경역할을 하면서 삼국시대부터 고구려와 신라의 힘이 부딪치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순흥의 읍내리에 남한에서 유일한 고구려계 고분과 벽화가 있는 것이고 부석사도 그러한 신라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곳은 또한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결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합니다.

97년 겨울에 혼자 배낭을 메고 이곳 순흥을 지도하나 들고 이곳저곳 걸어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참 눈이 많이 왔었지요. 직접 맞으면 아플것 같은 그 큰 함박눈 눈송이를 맞으며 거닐던 순흥은 참 아늑한 동네였습니다. 그때 제 옆에 봉고차가 하나 서더니 문을 열고 타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알고보니 그친구가 고등학교 동창녀석이더군요. 차를 세워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는 그냥 걸어가겠다고 말하고 그녀석은 명함을 하나 주고 떠나갔지요. 지금 기억에 무슨 가든의 사장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럴것 까지 없이 같이 차를 타고 근처에 가서 식사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때는 무슨 자존심이 그리 있었는지. 하긴 그친구는 그때 벌써 운전면허증이 있었는데 전 아직까지 없으니 그때 기분이 전혀 이해가 안되는것은 아닙니다만.

순흥은 참으로 아기자기한 동네입니다. 순흥 면사무소 안에 있는 순흥박물관은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박물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순흥박물관에는 순흥의 역사와 유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진열되어 있어 순흥을 한바퀴 돌아보기 전에 가보면 좋습니다. 특히 읍내리 고분벽화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어 미리 보고 참고할 만합니다. 나막신이나 워낭(소방울)・손다리미・쇠망치 같은 민속자료들이 많이 있어서 가족들이 함께 와서 즐거운 한때를 보낼수 있습니다. 예전 휴일에 한번 찾은 적이 있는데 그때도 옆에 있는 사무실에 이야기하니 친절하게 열어주면서 별것 아닌데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시는 아저씨의 미소가 지금도 기억나는군요.

면사무소 들어서면서 보이는 누각은 고을 남쪽에 있던 흥주도호부 관아의 정문인 봉서루로서, 1930년에 이곳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현판 ‘興州都護府’는 공민왕의 글씨라 합니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글씨도 그의 글씨라고 합니다. 당시 공민왕은 참으로 명필이었답니다. 요즘도 나라의 대통령들이 여기저기 자기 글씨를 걸어 두곤 하니 그것들을 생각하면서 바라보는 것도 좋겠지요. 그 옆에 있는 ‘鳳棲樓’는 누각의 이름입니다. 순흥에는 주산인 비봉산에서 봉황이 날아가면 마을이 쇠퇴한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때문에 고을 남쪽에 누각을 지어 앞쪽에 봉황이 깃들어 산다는 ‘鳳棲樓’(봉서루), 뒤쪽에는 봉황을 맞이한다는 뜻으로 ‘迎鳳樓’(영봉루)라고 쓰고, 누각 주변에 봉황의 알로 여겨지도록 흙봉우리를 군데군데 만들어 놓았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면사무소 뜰 한켠에는 석불 인왕상과 척화비를 비롯한 각종 비석도 다른 곳에서 옮겨 놓았으니 한번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순흥의 청다리와 금성단

이제 순흥에 대해서 간단한 개관을 살펴보았으니 순흥에서 살펴보아야 할 몇가지 문화유산을 보겠습니다. 순흥에서 제일 재미있는 문화유산은 청다리입니다. 소수서원 북쪽으로 500m정도에 있는데 다리 옆에는 최근에 세워진 것 같은 다리에 어울리지 않게 제법 세월의 옷을 입은 비석이 보입니다.

거기엔 ‘康熙庾寅霽月橋’ 곧 숙종 36년 1710년(유인년)에 세운 제월교라는 이야기가 적힌 비석입니다. 하지만 이곳에선 모두들 청다리라고 부릅니다.

어릴 때 어른들이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놀리는 말을 한두번 듣지 않고 자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서울 같으면 흔히 ‘염천교 밑에서 주워왔다’고 하는데 실은 그 원조가 바로 이곳 청다리입니다. 저도 어렸을적 세상을 알아가면서 제일 궁금했던 것의 나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지요.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인간은 어째서 이렇게 고통속에 살고 있는 것일까?’ 머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자랐습니다.

그러면서 그때 이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아버님께 ‘저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아버님은 ‘순흥에 가면 청다리가 있단다. 그리고 그 밑에 가면 호떡파는 아주머니가 있을 거다. 그 사람이 바로 너의 진짜 어머니시다. 넌 지금도 내가 니 아버지로 보이냐?’라고 말씀하셨지요.

지금생각하면 그때 저의 친모를 찾아 갔어야 하는데 왜 그리 용기가 없었는지. 사실 그러한 고민들을 친구들에게 했을때 친구들은 거의가 자신의 고향도 순흥 청다리라고 한 기억이 납니다. 그 이유는 이런겁니다.

서원에 공부하러 온 젊은 유생들이 넘치니만큼 연사(戀事)도 많았을 것입니다. 피끓는 남녀가 만났는데 그러지 않는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지요. 이 청다리 근방에는 서원에 공부하러 온 유생들을 뒷바라지하는 종들이 살았는데, 유생들이 그 종이나 마을 처녀와 정분이 나서 그만 아이를 낳게 되면, 어떤 유생은 처녀와 짜고 부러 청다리 밑에 아이를 버리라 해놓고 자기가 우연히 다리를 지나다 그 아이를 주운 것처럼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본가에 데려가서는 자기 아이임을 감추고 ‘다리 밑에서 불쌍한 아이를 주웠다’며 기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주었기에 그런 말의 진원지가 되었을까요?

본래 청다리는, 1966년 시멘트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두해마다 새로 놓는 나무다리였습니다. 이 청다리를 밤에 건너려면 동백꽃을 입에 물고 소꼬리를 붙들고 건너야 한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동백꽃은 청다리에 나오는 귀신이 붉은 꽃을 보고 해꼬지를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고, 소꼬리는 무서워서 제대로 걸음을 떼어놓지 못하는 사람이 붙잡고 가기 위한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훨씬 역사적인 사연이 있습니다.

청다리 조금 못미처 왼편 원단촌 마을 쪽으로 금성단(錦城壇)이 있습니다. 금성단은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세조의 동생인 금성대군(1426~1457)을 제사지내는 곳입니다.

금성대군은 사육신의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처를 떠돌다가 마침내 이곳에 귀양오게 되었는데, 그때 단종은 바로 태백산 건너편 북쪽 오지인 영월 청령포로 위리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금성대군은 순흥 부사 이보흠과 함께 모의하여 고을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경상도의 사족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단종 복위운동을 꾀하였습니다. 그러나 밀고로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였는데 그에 동조했던 많은 선비들 또한 희생되었습니다. 이곳 죽계천이 붉게 물들어 40리 아래쪽인 동촌리까지 피가 흘러내려 지금도 그 마을은 ‘피끝’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이 일로 순흥은 ‘도호부’가 폐지되었고 많은 순흥사람들이 죽어갔으며 그 원혼들이 청다리 근처를 떠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속설이 생겨 났던 거지요.

금성단은 단종이 복위된 뒤인 숙종 37년(1711)에 순흥부사 이명희가 왕의 윤허를 얻어 설치했는데 모두 3단으로 상단은 금성대군, 우단은 순흥부사 이보흠, 좌단은 모의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제사지내며 해마다 봄・가을에 향사를 지냅니다. 지금도 평소에는 문을 닫아 둡니다만 부탁하면 문을 열어주고 간단한 설명도 해줍니다.

단종이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다고 영월사람들이 믿었으니, 억울한 혼백이 힘없고 불쌍한 이들을 보살펴주리라고 믿었던 당시 사람들의 소박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한편, 공식적인 제사와는 별도로 열리는 단산면 옥대리의 두렛골 서낭당 서낭제는 정월대보름에 금성대군을 당신으로 모신 동제입니다.

이곳 두렛골에는 신당이 두개 있는데 하나는 산신각으로 ‘산신지위’라는 위패를, 하나는 소백산 신당으로 그성대군의 피가 묻었다는 ‘혈석’을 신체로 모시고 있습니다. 서낭당은 지금까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관아에서 관리하는 관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 두렛골 서낭당에서 우리는 독특하게 동제를 초군청이라는 집단에서 제사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초군은 원래 관청에서 쓸 땔감을 산에서 모으는 나무꾼을 말합니다. 이 초군은 19세기 1862년 농민항쟁에 빈번히 등장하는 주도 세력이었습니다. 이곳 서낭당에서 지내는 제례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당시 관아과 초군의 조직, 그리고 지주들과의 관계를 알수 있답니다.

또 순흥부가 부활된 것을 경축하고자 순흥사람들이 벌인 줄다리기는 이곳 사람들의 민속행사로 자리잡아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또하나 순흥에와서 한번 맛보아야 할 음식이 있답니다. 순흥사람들은 별것 아니라고 하는데 도회지 사람들은 색다르게 생각하지요. 그건 메밀묵에 조밥을 비벼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태평초라는 것이 있습니다.

묵조밥은 이곳 사람들은 식사라기 보다는 그저 간식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전 겨울에 출출할때 간단하게 비벼먹던 기억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다른 지역 사람들이 묵조밥에 관심을 나타내면 오히려 어색해하지요. 그 묵조밥은 이런겁니다. 메밀묵을 먹기 좋게 자른 다음 뜨거운 육수에 잠깐 담았다가 꺼낸다음 김장김치를 잘게 썰어 조금 올려놓고 또 한쪽에는 무우생저리를 조금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참기름을 듬뿍 뿌린다음 김가루를 그릇 가득 담습니다. 그런다음 조밥 한그릇과 다른 반찬 한두가지를 냅니다. 예전에는 순전히 조로만 밥을 했을텐데 요즘은 그러면 너무 팍팍해서인지 쌀도 제법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조밥을 탁탁털어 큰 그릇에 담은 다음 삭삭 비비면 아래에 있던 참기름 냄새에 벌써 입안에 침이 가득고입니다. 그리고 묵을 낼때 바닥에는 제법 육수가 들어 있어서 비비는것도 팍팍하지 않고 제법 실하게 비벼지지요. 그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메밀묵을 자신이 먹기 좋게 숫가락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다음 한숫가락 입에 가득 넣으면 언제 내가 씹었냐싶게 금방 꿀떡 넘어가지요. 그렇게 한그릇 뚝딱 해치우면 제법 배가 든든합니다.

묵조밥은 이곳 순흥에 있는 식당 몇곳에서 팔고 있으며 제 기억에 박달재에 있는 식당과 안양 유원지에 있는 식당에서도 이 메뉴가 있더군요.

태평초는 이름이 무슨 풀같은데 사실 별건 아닙니다. 이것도 메밀묵이 주 원료인데 이 음식에서 중요한 것은 가능하면 여러사람이 둘어 앉아 먹어야 한다는 것과 부르스타를 가운데 두고 음식냄새를 맡으면서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태평초는 먼저 큼직큼직 썰은 돼지고기를 넣고 몇번 뒤집은 다음 김장김치를 넣습니다. 이때 김장김치는 썰지 않은 포기김치가 제격입니다. 이렇게 몇번 볶다가 배추잎을 먹기좋게 손으로 쭉쭉 찢어서 같이 넣습니다. 이렇게 어느정도 야채가 풀이 죽기 시작하면 메밀묵을 넣고 묵이 헤쳐지지 않게 살살 뒤집어 준다음 먹는겁니다. 그러면 고기보다는 배추잎과 김치, 묵을 같이 싸서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수가 없습니다. 우죽하면 이 음식을 먹으면 사람이 태평스러워진다고 이름이 태평초겠습니까? 이 태평초는 서울 압구정역에서 한국통신방향으로 나와 왼쪽골목으로 들어서면 만날수 있는 식당에서 맛보실수 있습니다.


어숙묘

먹는 이야기는 이정도로 하고 순흥의 청다리와 금성단을 살펴 보았으니 순흥에 있는 두개의 고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풍기에서 순흥에 거의 다 도착하였을 무렵 마을 입구에 무덤이 하나 보입니다. 이것은 어숙묘와 함께 신라의 것인지 고구려의 것인지 확정되지 않은 벽화가 있는 고분입니다. 그리고 조금 지나면 추원제라는 현판과 함께 큼직큼직한 비석들이 보입니다. 무덤 봉분도 몇개 보이지요. 이곳은 순흥안씨들이 매년 제를 올리는 곳입니다. 순흥에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두개의 고분이 발굴되었습니다. 먼저 어숙묘라는 이름을 가진 고분은 사적 238호로 1971년 8월 이대 박물관팀에서 조사하였습니다. 이미 1930년대 일인들에 의해 도굴되었기 때문에 내부의 부장품은 거의 발견할 수 없었고 내부에 ‘乙未年於宿知述干’이라는 글이 씌여있습니다. 그래서 ‘술간’이라는 관직을 가진 ‘어숙’이라는 사람의 묘로 여겨져 ‘어숙묘’라고 부릅니다. 네벽과 그 앞에 드리운 장막에는 채색의 벽화가 있었으나 인위적인 손상이 많았다고 합니다. 잔존하는 벽화는 회칠한 벽면 위에 그려졌고 천장에는 홍・황・흑의 3색으로 너비 60cm의 연화가 그려졌고, 석비외면에는 인물상으로 보이는 그림이 전면에 그려져 있으나, 면회의 탈각이 매우 심하여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일반에 개방되지 않고 위치도 산 중턱에 있으며 모형관도 없습니다.


읍내리 고분벽화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덩그러니 앉아 있는 고분은 사적 313호로, 1985년 1월 문화재관리국과 대구대학교가 발굴조사한 고분입니다. 현실의 크기는 동서 3.5m, 남북2.02m로서 평면이 긴 장방형을 이루었고 높이는 2.05m입니다.

 

 

벽 안쪽면에는 두께 0.8cm~1.5cm 정도로 석회를 발랐으나 지금은 서쪽 천장돌에만 남아있습니다.

현실의 동쪽에 동서 2.01m. 남북 2.02m. 높이 0.67m의 시상대가 있고 아울러 규모가 작은 보조관대도 현실의 서북모서리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동벽엔 중앙부가까이에 도굴 구멍이 나 있고 벽면에 바른 석회가 많이 떨어져나갔습니다. 동북구석에 반쯤남은 먹선 원안에 위로펼친 한쪽 날개와 부리를 벌리고 북벽을 향해 있는 봉황또는 까마귀를 연상시키는 새의 그림이 남아 있습니다. 새의 날개 아래에는 산모양의 그림이 간신히 남아있습니다.

남쪽벽에는 서쪽의 현문 가까이 묵서명과 왼손에 어행기를 쥐고있는 인물상의 일부가 남아있습니다. 묵서명은 ‘己未中墓像人名○ ○’이라 적혀 있으며 인물상은 먹석으로 그림을 그리고 붉은색을 칠한 동체의 일부와 깃대를 쥐고 있는 왼손의 일부, V자형으로 구부러진 왼팔이 남아있습니다. 어행기는 바람에 나부끼는 모양이고 고기꼬리모양의 끝은 두가닥으로 갈라져있습니다.

북벽은 석회가 잘 남아있어 비교적 선명한 벽화를 볼 수 있는데 동북벽 모서리 가까운 곳에 수평선위에 3개의 산을 그린 山岳圖가 그려져 있습니다. 중앙부 벽면에는 면위에 꽃송이가 먹선으로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는 구름무늬와 두 마리의 새가 그려져 있으며 서북벽 모서리에는 뭉게구름무늬와 활짝 핀 연꽃 다섯송이가 그려져 있습니다.

서벽은 흙탕물이 스며들어 가운데 부분에 가옥 한채가 보이고 남쪽 끝에 力士圖는 매우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力士圖의 力士는 잠방이 차림의 반나체로서 오른손으로 뱀의 목을 쥐고 왼손으로 꼬리부분을 쥐고서 현문으로부터 연도쪽으로 달려나가려는 힘찬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몸체는 먹선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붉은색으로 칠하였고 뱀은 갈색으로 칠하였습니다. 연도 동북벽엔 반라인물의 상반신상이 그려져 있는데 머리에 흰수건 같은 것을 감고 눈을 부릅 뜬 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고분 옆에는 고분 안을 보고자 하는 사람은 전화를 하라고 전화번호가 하나 적혀져 있습니다. 그리로 전화를 하면 조금 후 면사무소 직원이 자전거를 열심히 타고 와서 열어주면서 한마디 합니다. ‘머 별거 없고, 잘 보이지도 않아요’라고. 이 말은 사실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그림들을 보려면 차라리 처음에 이야기한 순흥 면사무소안에 있는 박물관에 전시된 벽화 사진이 훨씬 좋습니다. 그리고 이 고분은 원래 그 고분이 아니고 사람들을 위해 모형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원래의 고분은 다시 입구를 막아 두었습니다.


석교리 석불상

이제 고분을 살펴 보았으니 불상도 하나 보아야지요. 순흥면 시내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면 두갈래 길이 있습니다. 왼쪽은 영주시내로 나가는 길이고 오른쪽길은 풍기로 나가는 길이지요. 이중 왼쪽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다 죽계천을 넘어 사과과수원으로 한참 들어가면 과수원 안에 한 전각이 있다. 그리고 이 전각안에는 석불상이 하나 있는데 이 지역이 석교리라 이름을 석교리 석불상이라고 부릅니다. 동네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거의 잘 모르고 사진을 보여주면 연세 드신분들이 조금 알 뿐인 그런 찾는 이 없는 석불상입니다. 더구나 과수원입구에는 송아지만한 개 두마리가 지키고 있어 더욱 잘 찾지 못하는 곳입니다. 국가에서는 이 석불상을 보물 116호로 지정해 표지판을 하나 세워두었습니다. 높이 2m. 광배는 결실되고 왼팔이 짤려나갔으며 얼굴 각 부분과 귀에 약간씩 손상을 입었으나, 얼굴은 둥글고 살이 올라 풍만하게 보이는데, 눈썹・코・입 등의 조각법은 명확하고 힘이 든 것으로 느껴지며 굵직한 나발, 큼직하게 솟은 육계 등 생동감나는 모습입니다. 목에는 머리부분과 절단된 것을 다시 보수한 흔적이 보이며, 삼도가 굵게 표현되어 있다. 몸체는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 양감있는 허벅지등 신체의 굴곡이 강조되었고 전체적인 비례도 좋은 편이지만, 몸에 꼭 붙여 옷자락을 잡고 있는 오른팔이나 처진 어깨등은 다소 어색합니다.

흐린 얼굴과는 달리 옷주름은 매우 깊어 양어깨가 다 옷을 걸치고 있음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옷이 몸에 밀착된 이러한 형상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중엽 이후에 많이 조성되었습니다. 불상을 많이 보신분들은 위의 설명을 보시면서 대략 통일신라시대란 것을 아셨을텐데 8세기를 넘어서면 불상들은 탑과 같이 정형을 벗어나 있는 것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무릎아래가 유달리 깨끗한 것은 근래에 전각을 세우면서 하반신을 파내어 세웠기 때문인데 보기에도 돌의 색깔이 틀려 쉽게 알아볼수 있습니다. 마모가 심한 윗부분과 달리 모습이 온전한 발쪽으로는 예쁘고 긴 발가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전각 주변에는 자그마한 탑의 지붕돌로 보이는 돌조각들이 있어 이 주변이 절터였음을 짐작케하며, 가는 길 죽계천위엔 징검다리가 아담하게 놓여있으니 아이들에게는 책이나 TV에서만 보았던 이 징검다리를 건너 가는 것도 색다른 맛이 될 것입니다.


소수서원

 

 

이정도로 간단하게 순흥에 대해 살펴보았으니 소수서원에 대해 살펴보아야지요. 소백산 비로봉로부터 흘러내리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맑은 죽계천가에 자리한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사립교육기관의 첫 발자취입니다.

소수서원은 주세붕(朱世鵬, 1495~1554)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선구자 문성공 안향 선생이 젊어서 공부하던 이곳 백운동에 중종 37년(1542)에 영정을 모신 사묘(祠廟)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중국에서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을 본떠 양반자제 교육기관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습니다.

이때 주세붕은 목사 안휘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임한 후 며칠만에 옛 순흥부에 이르렀는데 한 마리 소가 울고 있는 숙수사 옛터가 있어싿. 이곳은 문정공 안축이 ‘죽계별곡’을 지은 곳으로 신령한 거북 모양의 산 아래에 죽계가 있으며, 구름에 감싸인 산, 소백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물 등 진실로 백록동서원이 있는 중국의 여산에 못지않다. 흰 구름이 항상 골짜기에 가득하므로 감히 이름하여 백운동이라 하였다. 그리고 감회에 젖어 배회하다가 비로소 사당 건립의 뜻을 갖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말은 이렇게 멋있게 했지만 실은 풍기 사림을 교화하고자 백운동 서원을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명종 5년(1550)에 왕에게 진언을 올려 ‘紹修書院’(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당시 이황이 소수서원의 사액을 청하는 글을 보면 당시 서원이 가지는 의미를 알수 있습니다.

“은거하며 뜻을 구하는 선비와 도를 강론하며 학업을 익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세상에서 시끄렇게 다투는 것을 싫어하여 전적을 짊어지고 넓고 한적한 들판이나 고요한 물가에 나아가 선왕의 도를 노래하고 고요히 천하의 의리를 살피면서 그 덕을 쌓고 인을 익혀 이것으로 즐거움을 삼고자 하였기 때문에 즐겨 서원에 나아가는 것이다. 국학이나 향교가 사람이 많이모이는 성곽 가운데 있어서 한편으로는 학교에 관한 법령에 구애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일(과거)에 마음이 옮겨 가고 빼앗기는 것과 비교해 볼 때, 그 효과를 어찌 같이 말할 쑤 있겠는가. 이러한 관점에서 말한다면 단지 선비가 학문을 함에 서원에서 힘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어진 이를 얻는 데에도 또한 서원이 국학이나 향교보다 나을 것이다.......

서적을 내려 주시고 편액을 내려 주시고 전토와 노비를 하사하시어 그 재력을 넉넉하게 하시고, 또 감사와 군수로 하여금 다만 그 진흥 배양의 방법과 돕기 위해 나누어 준 비품을 관할 검찰하는 일만을 강구토록 할 뿐, 가혹한 법령과 번거로운 조목으로 구속을 못하도록 청하고자 합니다.“

사실 이글에서도 보여지듯이 이황은 당시 시대를 세상의 도가 쇠미해지고 선비의 올바른 풍습이 없어졌다는 생각을 갖고 흐트러진 당시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올바른 학문 참다운 성리학을 하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사액을 요청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러한 소수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살아남은 47개소에 들었으며 사적 제55호입니다.

조선시대의 사립대학이랄 수 있는 서원은 그렇게 탄생되었고, 조선 중・후기에 걸쳐 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학문과 정치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서원이 생기기 전의 교육기관으로는 중앙의 성균관과 4부학당, 지방의 향교가 있었습니다. 관립기관인 향교는 사립교육기관인 서원이 생기면서부터 사실상 교육의 기능을 서원에 내주고 문묘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역할이 줄어들었습니다. 서원은 특히 경상도에 많이 세워졌는데, 조선 중종대부터 철종대까지 세워진 417개소 중 40%가 넘는 173개소가 경상도에 집중돼 있으며 전국적으로 200여 곳인 사액서원 가운데 56개소가 경상도에 있었습니다. 경북 북부지방이 아직도 ‘추로지향’(鄒魯之鄕), 곧 공자의 맹자의 고향이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이러한 내력 때문입니다.

본래 서원은 교육을 하는 곳이지만 서원마다 받드는 분이 있어 제사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때문에 서원의 공간은 크게 교육공간과 제사공간으로 나뉘게 됩니다. 이 두가지 일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 선현의 정신과 뜻을 새기며 학문을 닦고 자신의 인격을 도야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나중에는 경쟁적으로 서원이 세우지면서 당쟁의 소굴이 되고, 선현을 존숭하는 제사의 일도 가문과 학파의 성세를 자랑하는 것이되고 향촌에 대한 교화를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민폐의 본산이 되었으며, 세금과 부역 등을 면제하는 국가의 지원으로 국가 재정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소수서원은 사묘에서 출발하여 교육기관이 된 만큼 그 배치가 엄격한 규칙에 의하기보다는 매우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다른 서원과는 다른 조금은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합니다.

서원으로서의 격식을 가장 먼저 깨는 것은 소수서원을 들어설 때 만나게 되는 당간지주 한 쌍입니다. 소수서원 자리는 본래 숙수사(宿水寺)라는 절이 있던 곳이란 이야기는 주세붕의 글에서도 나왔습니다. 절의 흔적은 이 당간지주나 소수서원 사료전시관 마당에 모아놓은 석등・석탑의 부분으로 남아 있는데, 1953년에는 손바닥만한 금동불 수십 구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 당간지주는 높이 3.65m로 두 지주가 마주보며 곧게 뻗어 있는데 바깥면 중앙에 세로로 띠선을 새긴 것 말고는 아무런 조각이 없습니다. 이 지주는 기둥 끝으로 갈수록 조금씩 가늘어지다가 맨 끝을 곧게 둥글렸다. 당간을 받도록 원호를 새긴 댓돌이 지주 가운데에 길게 남아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여겨지는데 사찰마다 있는 당간지주 특히 바로 윗쪽 부석사에 있는 당간지주와 비교해보면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라 느낄수 있습니다. 보물 제5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당간지주 옆에 있는 경렴정(景濂亭)에 올라보는 맛도 좋습니다. 건너편 개울을 보면 문득 바위에 새겨진 ‘白雲洞’이란 흰 글씨와 붉은 칠을 한 ‘敬’자가 보입니다. ‘白雲洞’이야 이곳의 명칭을 새긴 것이겠으나 ‘敬’자는 무엇일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敬以直內 義以方外’를 ‘敬’이란 한 글자로 드러낸 것입니다. 곧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는 뜻이니, 그 글자를 보며 행동을 바로 잡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런 본뜻과는 달리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숙수사를 폐찰하면서 불상들을 죽계천에 모두 버렸더니 밤마다 울음소리가 들려와서, 퇴계 이황이 ‘敬’자를 새겨 공경하는 뜻을 나타냈더니 그제야 소리가 그쳤다는 얘기며, 단종 복위운동에 스러져간 선비들의 혼백을 달래려는 것이라는 얘기 등이 그것입니다. 이황은 이 바위 주변에 소나무, 잣나무, 대나무를 심고 정자를 지어 취한대라고 하였습니다. 경렴정을 세운 사람은 주세붕인데, 경렴정은 맞은편 연화봉의 이름이 송대 성리학의 비조라 할 수 있는 주렴계가 살던 염계의 연봉과 같아서 주렴계의 뜻을 경모하기 위해 이름을 붙인 것이랍니다.

정문을 들어서면 먼저 강당인 명륜당과 마주하게 됩니다. 강당은 유생들이 모여서 강의를 듣는 곳으로 넓은 마루를 중심으로 온돌방이 달려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白雲洞’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는 이 강학당은 동향을 하고 있는데 규모가 정면 4칸 측면 3칸이며 팔작기와집입니다. 강당 안의 대청 북쪽면에는 명종의 친필인 ‘紹修書院’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니 바로 서원의 중심건물임을 말해줍니다. 서원에서 중요한 건물 몇가지는 바로 사당과 강당, 그리고 그 뒤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와 같은 선비들의 기거공간인 동재와 서재입니다. 현판은 둘 있지만 집은 이어진 한채이다. 명륜당이 동서로 길게 앉아 있는 데 비해 이 집은 남북으로 앉아 있습니다. 가운데에 각각 한 칸짜리 대청이 있고 양옆으로 벌어져 온돌방이 있는데, 좁은 툇마루를 앞에 두고 칸칸이 나뉜 한 칸짜리 방들이 매우 아담합니다. 집중하여 공부하기에 큰 방이 필요치 않다고 여겼던 옛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오른편 개울 쪽으로는 ㄱ자로 앉혀진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가 있습니다. 지락재는 개울을 마주한 담장에 연해 있으니, 많은 유생들이 이곳에서 자연의 기운을 만끽하며 호연지기를 기르고 학문을 연마했을 것입니다. 이 소수서원의 작은 방과 마루를 모두 4천여 명의 유생들이 거쳐갔다고 합니다.

서원의 또 한가지 중요한 역할은 제사를 드리는 기능입니다. 서원마다 어떤 선비를 모셨는가에 따라 그 서원의 품격과 세력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서원들마다 앞다투어 영향력 큰 선비를 모시려고 했습니다. 소수서원은 처음에는 안향을 모시는 사묘로 출발하였는데, 사당공간은 강당 왼편으로 담장 안에 있으며 이 서원 안에서는 유일하게 단청을 칠했습니다. 이 사당안에는 안향 선생말고도 뒤에 안보(安輔)와 안축(安軸)-고려말의 문신인 안축(1287~1348)과 안보(1302~1357)는 형제지간입니다. 이들 형제는 고향 순흥에서 세력기반을 가지고 중앙정계에 진출한 신흥유학자들로 모두 학문에 힘써 글을 잘하였답니다. 안축은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흥녕군에 봉해진 뒤 죽었으며, 경기체가인『관동별곡』과『죽계별곡』을 남겼지요. 안보 역시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치다 어머니 봉양을 위해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과 가까운 동경유수를 제수받았습니다. 항상 청렴한 생활을 하였으며 역시 형과 함께 학문 높은 인물로 숭상받았습니다. 이후 주세붕을 함께 모셔 배향하고 있습니다. 사당 바로 뒤 나무판자벽으로 된 자그마한 집은 책을 보관하는 서장각(書藏閣)이고 그 뒷 건물은 전사청(典祀廳)으로 제사 때 음식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소수서원에서 배향하고 있는 안향(安珦, 1243~1306)은 안유(安裕)라고도 하는데, 고려시대 사람으로 흥주 죽계 상평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를 추모하여 그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하여 호를 회헌(晦軒)이라고 지을 만큼 주자학에 대한 경도가 깊었답니다. 원나라에 가서 그곳 학풍을 직접 느끼고 주자서를 베껴와 우리나라에 보급하는 노력을 기울여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불립니다. 그가 원나라에 가게 되었던 것은 우리나라 왕과 원나라 공주이기도 한 왕비를 호종하는 직책을 맡아서였습니다. 원나라의 지배를 받는 현실을 헤쳐나갈 새로운 사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던 때 명분을 중시하면서 주지적인 주자학을 만난 안향은, 주자학이야말고 새시대를 열어가기에 합당한 사상, 새로운 철학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안향의 노력 덕분이었는지 백년여 뒤에는 마침내 주자성리학을 수양과 치세의 원리로 삼은 성리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고 유교를 통치원리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와서 안향을 받느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안향이 죽은 뒤인 1318년, 충숙왕은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궁중의 원나라 화공에게 명하여 그의 영정을 그리게 하였습니다. 현재 영정각에 모신 안향의 영정은 그 이모본을 조선 명종 때에 고쳐 그린 것으로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사후에 그려진 영정이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에 따라 그린 것이니만큼 영정에서 그의 품성이 엿보이는데, 온화하면서도 결단력이 있어 보이는 매우 단단한 인상입니다. 아울러 두건을 쓰고 붉은 겉옷을 입은 모습에서는 당시 학자의 풍모도 느껴집니다. 영정각 안에는 보물 제485호로 지정된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도 있습니다. 이는 공자를 향하여 여러 성인과 제후를 그리되, 문묘와 향교의 대성전 동・서무에 위패를 배향하듯이 인물을 배치한 그림입니다.

최초의 서원이니만큼 간직한 문화재도 많고 연구할 거리도 많아 소수서원은 전속 연구원을 두어 연구를 하게 하고 있습니다. 유물전시관에서는 강학 모습, 제향 모습의 모형을 갖추어 옛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 영정도 있는데 반신상에 사모관대를 한 모습이다. 사전에 소수서원에 연락을 하면 연구원이 나와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을 해줍니다.

소수서원 주변의 더없는 풍광과 더불어 이곳이 ‘영귀포란형’(靈龜抱卵形) 지세라서 이곳을 다녀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결혼을 앞둔 남녀가 사진촬영을 많이 한답니다.

이상의 서원에 대한 부족한 설명은 마지막에 첨부한 남지대선생의 조선의 서원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영주시

경북 북쪽 끝에 있는 시.


Ⅰ. 개관

면적 668.51 km2. 인구 13만 4,774명(1999). 동쪽은 봉화군, 남쪽은 안동시, 서쪽은 예천군, 북쪽은 충북 단양군과 강원 영월군과 접한다.

시의 북쪽에서 서쪽 경계선을 따라 뻗은 소백산맥과 여기서 갈라진 지맥들이 동 ・남으로 이어지면서 분지상의 지형을 이룬다. 소백산맥에는 선달산(1,236 m)・어래산 ・형제봉 ・국망봉 ・소백산(1,439 m)・제1연화봉(1,394 m)・제2연화봉 ・도솔봉 등의 험준한 산봉들이 솟아 있고, 그 고개인 죽령(竹嶺)을 통하여 기호지방과 교통이 이루어진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동쪽과 남쪽에는 비교적 낮은 산지가 분포한다.

하천은 소백산맥에서 발원한 남원천 ・금계천 ・죽계천 ・단산천이 남쪽으로 흘러 낙동강의 지류인 서천(西川)으로 모인다. 또 낙화암천 ・오울천을 받아들인 내성천(乃城川)이 서천과 나란히 남류하는데 이들 두 하천과 각 지류 유역에는 비교적 비옥한 침식분지가 발달해 있다.

기후는 내륙분지이기 때문에 기온의 연교차가 심한 대륙성기후의 특성을 나타내며, 연평균기온은 11.6 ℃, 1월평균기온 -4.6 ℃, 8월평균기온 25.8 ℃이다. 소백산맥의 바람그늘지역으로 강수량은 993.7 mm로 전국 평균에 미달이다.


Ⅱ. 연혁

영주시는 고구려 때는 내이군(奈已郡), 신라 때는 내령군(奈靈郡)이던 지역이다. 고려시대에는 강주(剛州)・기주(基州)・순흥(順興) 등으로 개칭되고 1143년(인종 21) 강주가 순안현(順安縣)이 되었다. 1413년(태종 13)에는 영천(榮川)으로 개칭되었고 구성(龜城)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1914년 영천 ・풍기 ・순흥 3개군을 합하여 영주군(11개면)으로, 1940년 영주면이 영주읍으로, 1973년 풍기면이 풍기읍으로 되었다. 1980년에는 영풍군(榮豊郡)으로 개칭하고, 영주시와 분리하였다.

1995년 1월 영풍군과 영주시가 합쳐 도농복합형(都農複合型)의 통합시가 되었다. 현재 영주시는 구(舊)영주시의 상망 ・하망 1~3・영주 1~4・휴천 1~3・가흥 1~2의 13개동과 풍기읍 및 단산 ・문수 ・봉현 ・부석 ・순흥 ・안정 ・이산 ・장수 ・평은의 9개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Ⅲ. 산업

영주시의 주요농산물은 쌀 ・보리 ・감자 등의 식량작물과 무 ・배추 ・오이 ・참외 ・수박 ・복숭아 ・사과 등의 채소와 과일 등이다. 특히 풍기사과는 맛과 질이 좋아 유명하다. 특용작물로는 고추 ・마늘 ・참깨와, 약용작물로는 지황 ・모란 ・백작약 ・황기 등이 생산되며, 풍기인삼은 예로부터 한국의 3대 인삼으로 유명하다. 가축으로는 한우와 젖소 ・돼지가 사육되며, 광업으로는 규석 ・고령토 ・장석 등이 생산된다.

섬유공업은 1934년부터 시작된 풍기 인견직(人絹織)이 아직까지 생산되고 있으며, 가흥농공단지와 적서농공단지에서 섬유 ・화학 ・기계 ・식료품 공업이 발달하고 있다. 산악지대로서 임업도 발달하여 목재 ・펄프 ・제재업이 성하다.


Ⅳ. 교통관광

영주시는 영주동을 중심으로 중앙선 ・경북선 ・영동선 철도가 통과하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다른 중소도시에 비하여 상업 ・서비스업의 비중이 크다. 1961년 삼척 ・안동철도국이 영주철도국으로 통합개편됨에 따라 이와 관련된 산업이 발달하였다. 남북으로 이어지는 중앙고속도로와 동쪽으로 봉화 ・울진, 서쪽으로 예천 ・문경, 남쪽으로 안동 ・대구, 북쪽으로 단양 ・제천에 이르는 국도 및 지방도가 이어져 있다.

관광명소로는 부석면(浮石面)・단산면(丹山面)・순흥면(順興面)・풍기읍 일원이 소백산국립공원에 속해 있는데, 예로부터 한국 십승지지(十勝之地)의 첫째로 꼽히는 풍기읍을 중심으로 명승지와 사적지가 산재한다.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부석면의 부석사(浮石寺)를 비롯하여 유서깊은 사찰들이 있으며, 순흥면의 소수서원(紹修書院:사적 55)은 한국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이다. 풍기읍의 희방사(喜方寺)와 희방폭포, 흑석사 ・진월사 ・영전사 ・금성단 ・금성전 ・신선바위 등이 주요 관광지이며, 소백산맥 제2연화봉 기슭에는 국립소백산천문대가 있다. 영주동의 구성(龜城)공원, 풍기 인삼포(人參圃)와 순흥면 신라 고분벽화도 관광자원으로서 가치가 있다.

소백산국립공원의 서쪽에 월악산국립공원이 인접해 있어 이들 지역을 연계한 관광개발이 진행중이다. 부석사 경내에는 무량수전 앞 석등(石燈:국보 17), 무량수전(국보 18), 조사당(祖師堂:국보 19),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45), 조사당 벽화(국보 46) 등 국보 5점과 보물 4점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이 밖에 순흥면 소수서원의 회헌영정(晦軒影幀:국보 111), 이산면 흑석사의 목조아미타불좌상 병복장유물(幷腹藏遺物:국보 282) 등 보물 17점, 사적 3점, 도지정 지방문화재 24점이 있다.<두산세계대백과사전>


 죽령

경북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

높이 689 m. 대재라고도 한다. 소백산맥이 영남과 호서를 갈라놓는 길목에 해당하며, 삼국시대 이래로 봄 ・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죽령사(竹嶺祠)라는 산신사당이 있었다. 대강면 용부원리(龍夫院里) 죽령역에서 풍기읍 희방사역(喜方寺驛)으로 빠지는 중앙선 철도가 길이 4,500 m의 똬리굴(죽령터널)을 통하여 죽령 산허리를 통과한다. 단양~풍기 간 국도가 지난다. 용부원리 쪽 죽령터널 입구 부근에 제2단양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죽령폭포가 있다.<두산세계대백과사전>  

 백두대간 상의 고개(기존산맥도에 표시함)


죽령(竹嶺)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각 문헌에 그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아달라왕(阿達羅王) 5년(158) 죽죽(竹竹)에 의해 길이 처음 열리고, 고구려의 전성기인 광개토왕때 죽령을 경계로 신라와 고구려가 대치했으며, 신라 진흥왕이 백제와 연합하여 거칠부(居柒夫)등으로 고구려를 쳐서 죽령 이북~고현(高 ) 이남의 땅을 차지하는 등 죽령은 이미 삼국시대 매우 중요한 사회・경제・군사적인 곳이었다.

죽령은 당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 였으며 삼국 군사들간의 불꽃튀는 격전지 였다.

조선시대가 되면서 죽령은 그 역할이 전시대보다 더욱 확대된다. 조선시대 죽령의 역할을 살펴보면 먼저 조령(문경세재), 추풍령과 함께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이어주는 3대 관문으로서 이름이 높았다.

특히 죽령은 왜인(일본인)들의 사신경로로 이용되기도 했다.

세종 14년(1432) 염포에 도착한 왜인 사신은 울산-영양-경주-안동-영천(영주)-죽령-단양-제천-원주-양근-평구를 거쳐 서울에 도착했었다.

또한 세종 20년(1438) 부산포와 염포에 닿은 객인(왜인)을 한길로 합쳐서 영천-신령-의흥-의성-안동-영천(영주)-기천(풍기)-죽령-단양-충주-여흥-양근-평구를 거쳐 서울에 도달하게 했다.

이렇듯 죽령은 왜인들이 서울로 올라오는 주요한 길목이었다.

죽령은 옛부터 명산이었기에 세종 19년(1437) 죽령산 소사(小祠)로 묘의 위판(位判)은 “죽령산지신(竹嶺山之神)이라 쓰고 죽령산 기슭에서 제사지내게 했다. 또한 세조 2년(1456) 양성지(梁誠之)의 건의로 죽령산을 명산(名山)으로 삼았다.

성종 25년(1494)에는 좌부승지(左副承旨) 강귀손(姜龜孫)이 “종묘, 사직, 소격서와 경기 근처에는 모두 제사를 지내는데 전국의 명산대천에도 이와함께 제사를 지내게 하여야 한다고 상소하여 교리(敎理) 정적(鄭積)을 죽령산에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는 등 죽령의 영험함과 명산으로서의 가치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죽령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그 군사적 중요성이 절실히 표출된다.

1592년 전국이 왜군의 발아래 짓밟히고 선조가 의주까지 몽진을 가는 처지에 처하면서 영남의 3관문인 죽령, 조령, 추풍령의 험한 산세는 왜적을 방비하는데 가장 좋은 지세를 지닌것으로 논의되어 죽령에 관(關)을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시기마다 등장한다.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이 한창일때 선조는 “죽령에 나무를 베어 목책을 설치함으로서 후일 관(關)을 설치하는 기반으로 삼고 파총관을 파견하여 지키게 하고 화공 한 두 사람을 중국에 파견하여 그곳에 설치된 진(鎭)과 성지(城池)를 그려오게하여 그것을 토대로 죽령에 관을 설치하려 하였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같은해 또한 죽령의 높고 좁은데 굴곡이 잘된 것을 택하여 길한복판에 중관(重關)을 세우고 옆의 작은 길은 모두 담을 쌓아 막아서 왕래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반드시 관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통행하고 하고 관(關) 밖에는 모두 참호와 갱도(坑道)르 만들되 모든 수목을 베어 버릴것이며 관의 안에는 덮개 있는 영방(營房)과 혹은 우묵한 토굴을 만들어서 만명 정도가 들어갈수 있게하고 관문(關門)은 가급적 높고 견고하게 하되 중국의 월성(月城)의 형태와 같게하고 이중문을 설치하여 돌아서 들어가게 할것이며 여장타구(女墻?口)를 사람키와 같은 높이로 세우고 수구(水溝)와 총쏘는 구멍도 안배하고 둥근 나무와 많은 돌을 포치하여 한 사람이 관을 지키면 만명의 군사라도 올려다 볼수 없게해야한다고 논의되었다. 그리고 남쪽에 있는 군사를 징발하여 왕을 위하여 이곳을 지키게 하겠다고 하였다. 이후에도 선조 27년(1594) 충청도 관찰사 윤승훈(尹承勳)이 죽령에 관방설치를 건의하고  비변사에서도 죽령방비를 논했으며 1595년에는 죽령을 지키는 군사를 단양, 청풍, 영춘, 제천, 풍기의 군사로 하였다.

이와함께 비변사에서는 죽령의 영상(嶺上)에 토성을 쌓거나 목책을 설치하여 위급한 일이 있을 경우, 단양, 청풍, 풍기의 군사가 합세하여 지키게 해야한다고 논의하기도 했다.

또한 유성룡(柳成龍)은 죽령에 험새(險賽)를 설치하면 철관(鐵關)을 둔 것과 같다고 하면서 험새설치를 주장하기도 했다.

1596년 11월 정원이 비변사에서 요새지 죽령에 복병을 두자고 하였다.

이원익(李元翼)도 죽령을 미리 방비하야 한다고 주장했다.(선조 29년, 1596) 1597년(선조 30) 비변사에서는 안동과 광주(廣州)에서 죽령을 거쳐 파발을 비변사로 보내게 하는 등 죽령을 파발을 서울로 보내는 중심길로 삼았다.

또한 죽령은 군량을 선운( 運)할 만한 곳이 없어 영남좌도(左道)는 죽령을 통해서만 군량의 수송이 가능하였다.

(선조 31년, 1598), 1607년(선조 40) 사헌부에서는 죽령은 사람의 목구멍과 같은 곳인데 임진난이후 명나라 군사가 내왕하는 외가닥 길이 되어 공사(公私)가 모두 탕패되고 있다고 하면서 죽령의 중요성을 선조에 아뢰기도 했다.

임란때 죽령이 얼마나 험한 재로 알려졌는지 왜적들도 죽령이 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여, 죽령아래의 풍기, 영주, 예안, 봉화, 청송, 진보등이 병화(兵火)를 당하지 않았다.

임란 이후에도 죽령은 국가의 중요한 요새로 인정되어 숙종 12년(1686) 무신 최숙(崔 )이 죽령 방어를 위해 풍기의 군병을 오로지 죽령방어에만 전념할수 있게 청하였다.

영조때(4년, 1728)에는 충주목사 김재로(金在魯)가 죽령의 중요성을 들면서 죽령을 방비할것을 주장하였고, 정조때 18년(1794)에는 영남 위유사 이익운(李益運)이 죽령이 관방으로서의 중요함을 들면서 “죽령원근의 사람들이 죽령의 수목을 집을 지을 재목이라 칭하고 날마다 도끼로 찍어 대는데 관리들이 금지하지 않으니 벌거숭이 산이 되었으며 소나무, 회나무, 잡목 등을 찍어 내지 않은것이 없고 심지어 불을 질러 밭을 개간하기까지 했다”고 하면서 죽령에서의 도벌방지를 건의하기도 했다. 순조때 8년(1808)에는 호군 신대현(申大顯)이 죽령에 산성을 축조해 유사시에 대비하고자 건의하기도 하는 등, 죽령은 실로 군사적 요충지로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까지 그 역할을 다해왔다. <인터넷에서>


우리는 지금 부석사로 가고 있다.

부석사란 이 말에는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느낌들이 있다.

그곳에 가면 왠지 사람이 커지는 것 같고 가슴이 후련해지고 그런 반면에 가람배치에선 아기자기함과 주도면밀함도 느낄수 있다.

우리는 지금 부석사로 가고 있다.

부석사가 위치한 영주는 명목상으로 철도와 교육의 중심지이다.

동쪽은 봉화군, 서쪽은 예천군, 남쪽은 안동군, 북쪽은 단양군과 영월군에 닿아 있으며 청량리를 출발하는 중앙선, 강릉까지의 영동선, 김천까지의 경부선, 그리고 서울역에서도 영주역에 도착하는 기차가 있다.

 

 

                                           부석사 주변지도

 

죽령을 바로 넘어 만나는 풍기의 금계리는 정감록에 전쟁을 피하는 십승지지이고 이곳에서 멀지 않은 예천에 또한 십승지지의 하나인 금당실이 있다.

영주를 찾는 이들이 처음 느끼는 감정은 역이 참 크다는 것이다.

버스나 승용차로 서울에서 오려면 큰 고개인 죽령이나 예천쪽의 이화령을 넘어야 하지만 기차로는 죽령의 터널을 이용하니 좋고, 서울에서 영주까지의 차창밖 풍광은 한시도 눈을 뗄수 없을 정도이니 가능하면 열차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이제 대구와 영주와의 중앙고속도로 공사는 1차적으로 마무리되고 대구와 춘천까지의 개통도 2000년이 들어서면 완결될 것이다. 그리고 이화령과 죽령터널공사도 한창 진행중이다.

개발이라는 이름하에 인간이 편리하고자 자연을 파헤치고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지만 자연을 걱정하는 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는다.

관광도시로의 개발, 교육의 중심지로의 발전, 주변 공업단지의 활성화, 이러한 것들이 지금 영주란 곳을 뒤덥고 있다. 불과 십여년 전만해도 도심 옆을 흐르는 서천에선 가재가 잡히고 아이들이 발가벗고 수영을 하곤 했지만 지금 그런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고 매일 소백산 산삼물을 먹는다고 즐거워하던 수돗물도 이젠 소독약 냄새가 진동한다.

이런 곳이지만 우리가 찾으려는 소수서원과 부석사 등지를 돌아보면 아직 계발되지 않고, 그러기에 장삿속이 보이지 않는 그런 관광지임을 느낄 수 있다.


사과나무와 부석사

많은 이들이 부석사라는 말에서 사과나무를 연상한다.

영주의 특산물로 이야기되는 사과는 얼마전 대선후보자의 시장에서 행하는 생활체험에서도 등장할 만큼 유명하다. 영주의 사람들은 대구사과는 옛말이라는 말을 곧잘 하고 과주원 주변엔 능금쥬스공장도 종종 보인다.

도로표지판을 통해 부석사가 가까워진다는 생각이 들면 유난히 길 옆으로 과수원이 눈에 많이 들어온다.

풍기에서 가든, 영주에서 가든 부석사 가는 길은 한마디로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이다.

쉽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런 모습.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꽤나 넓은 주차장을 가지고 있지만 기념품 가계나 음식점, 민박집은 그리 많지 않은 곳이 부석사이다.

 

요 몇 년 사이 많은 사람이 찾아 주말이면 번잡하긴 하지만 아직까지 자신의 명상을 간섭받을 정도는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다.

오히려 부석사의 계속되는 중창불사가 마음에 걸린다고 함이 옳을 듯하다.

주차장을 지나 표지판 바로 뒤로 다리를 건너면 이제 부석사에 들어서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당간지주아래까지 길 옆으로 아주머니들이 사과를 비롯한 과일, 산나물들을 조금씩 내와서 팔고 있다. 신선하고 믿을 수 있는 물건들을 싸게 살수 있다. 이들에게서 장사꾼들의 야박스러운 모습이 보인지 않는건 경내를 들어서서 마음이 경건해지고 넓어져서는 아닌지.

점점히 돌이 박힌 길을 조금 가다 보면 오른편에 평화식당이 보인다.

새벽 3시가 되면 예불을 시작한다.

절에 있는 온갖 기물들, 범종․운판․목고․법고가 울리고 나면 이제 본격적인 새벽예불.

그러면 잘생기거나, 자애롭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 무량수전의 아미타부처님도 나를 향해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음을 본게된다.

하긴 그것은 각자의 느낌일테고 다시 돌아와서 입장권을 끊고 멀리 일주문을 보며 걸어가 보자.

힘들진 않지만 몸을 긴장하게 만드는 알맞은 경사. 점점이 돌이 박히고 사계절 어느때 찾아와도 그 나름대로 자기 멋을 가진 은행나무 가로수들, 그리고 정말 제멋대로 자란 사과나무, 절로 가는 괜찮은 길 중의 하나이다.

절이란 말의 어원은 삼국시대 아도화상이 모례의 집에 숨어 살았을 때 그 ‘모례(毛禮)의 집’이 우리말로 ‘털례의 집’이고 그 ‘털’이 ‘덜’로 바뀌었다가 다시 ‘절’이 되었다고도 하고, 사찰에 와서는 ‘절’을 많이 해야 하기에 ‘절’이라 했다고도 한다. 사찰(寺刹)의 ‘찰’이 ‘절’이 되었다고도 하는데 그냥 여담으로 이야기 하고 왼쪽 멀리 한 번 바라보자.

그곳에 제법 울창하고 멋진 소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일반적으로 사과나무들만 보고 그냥 지나치는기도 하는데, 방풍림이나 아니면 절터의 기운이 빠져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기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는 부석사 경내의 두 기의 삼층석탑이 있는 곳에 1994년에 옮겨온 3기의 불상이 그 소나무 너머 북지1리에서 가져온 것인데 그곳은 땅의 형세가 뱀의 머리모양이어서 그 기를 누르기 위해 불상을 세운 것이라하니 그렇게 추측해 볼만하다 하겠다.

조금 지나다보면 ‘太白山 浮石寺’란 1980년에 이루어진 일주문을 만나게 된다.

일주문을 조금 지나 오른편엔 제법 넓은 잔디밭을 만나는데 이곳엔 따뜻한 날이면 인근의 유치원이나 가족들끼리 어린아이들을 데리고와 노는 것을 볼 수 있다.

해맑은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서 나도 웃어주다보면 어느덧 왼편에 삐죽이 솟은 당간지주를 만난다.


부석사 당간지주

당간지주 조금 못미쳐 부석사 중수기적비가 있으나 최근에 세워진 것이고 모양도 썩 시선을 끌지 못한다. 그러고 보면 돌 깍는 것이 요즘처럼 기계로 깍아대면 돌이 제맛을 드러내지 못하는게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일단 기계를 사용한다보니 아무래도 정성이 덜 들어갈 것이고 그래서 그런지 그 결과들도 매끄럽긴 하지만 둥글둥글 우스꽝스런 결과들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멀리에서 찾을 것도 없이 바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당간지주와 비교하면 된다.

 

 

본인은 이 당간지주와 앞으로 볼 소수서원의 당간지주가 우리나라의 당간지주 중 가장 아름다운 것들 중의 하나일 것이라 생각한다.

높이는 4.28m, 두 지주와의 간격은 1m.

그냥 기둥 2개를 세워 놓았지만 실용적인 면 이외에 드러나지 않게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이 당간지주를 보면 양각된 선, 끝부분의 굴곡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강릉 굴산사지의 거대한 당간지주를 볼 때 느끼는 장중함이 결코 무거워 보이지 않고 듬직해 보이며 이곳 당간지주가 세련되 보이고, 소수서원의 당간지주가 날렵해 보이는 건 주변과 어울림을 생각하는 당시 석공들의 배려와 돌을 다룸에 있어서 피와 땀과 노력의 결합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또 한가지. 여기에 서서 당간지주를 보면 문화유산을 보는 것이 사진이나 그림이 아니라 그 유물이 원래 있던 곳에 놓여진 걸 보아야 한다는 답사의 기본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 단순하게 기둥을 두 개 세워놓았지만 결코 돌출되어 보이지 않고 자연속에 그저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런 모습 아닌가?

그럼 당간지주가 무엇인가?

어느 절터를 가든지 그나마 원형대로 잘 남아 있는 2개의 돌기둥.

풀어보면 절집을 대표하는 당(幢). 그리고 그 깃발을 게양하는 당간. 그리고 그 당간을 버텨주는 것이 당간지주인 것이다.

멀리에서도 이 곳 당간지주에서 휘날리는 깃발을 보이게 당간을 높이 세워야 하니 그를 받쳐줄 지주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자세히 보면 당간지주는 당간을 세우기 위한 부분들이 존재한다.

이곳 부석사의 당간지주처럼 밑부분에 받침돌이 있고 그 위에 당간을 세우는 경우과 구멍을 지주 중앙 부분에 2개 뚫어 엇갈리게 당간을 끼워 지탱하는 두가지 방식이 있다. 이곳 부석사를 중심으로 남아 있는 당간지주들은 받침돌이 있는 방식이 많으나 좀전에 이야기한 굴산사지나 전라도 지역의 당간지주는 중앙에 구멍을 뚫은 방식이 많다.

절에는 당간지주와 괘불지주가 존재하는데 부석사의 경우 괘불지주는 범종루 뒷편 너른 마당에 있다. 괘불지주는 같은 방식이나 용도가 괘불을 걸기 위해 만든 지주이다. 이것은 보통 규모가 작고 쌍으로 기둥 4개가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양쪽에 기둥을 세우고 가로로 두 개의 대를 가로지른 후 그 사이에 불화를 내거는 것이다.

당간지주에 당을 거는 방식은 괘불지주와는 달리 철당간이나, 돌당간을 쓴다. 또한 나무당간이더라도 지금 청주 박물관이나 호암미술관에 남아있는 모형처럼 끝부분에 용머리 장식을 하고 그 목부분에 도르래를 설치하여 당을 올렸을 것으로 보인다.

당간지주는 가람에서 전면으로 약간 나와 일주문 밖에 세워지는 것이 일반적이며 괘불지주는 경내 너른 터에 세워지는 경우가 많다. 이곳의 경우 일주문 안에 당간지주가 있는 것은 일주문이 나중에 세워지며 당간지주 밖으로 나온 것으로 보여진다.

괘불지주에 불화를 내거는 경우는 그 절에서 큰 법회를 하게 되어 법당에 사람들 모두를 수용할 수 없는 경우 밖에다 단을 쌓고 법회를 하게 되니 불상을 내올 수는 없고 대신에 이렇게 불화를 내와 그 역할을 대신한 것이다.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 보이듯이 사람이 죽은 후 스님들이 와서 염불을 해주는 것을 법석이라고 하는데 이처럼 밖. 즉 들에다 단을 쌓고 법회를 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시끌시끌 하다고 야단법석이란 말이 생겨났다 한다.

이곳 당간지주의 체감율을 비롯하여 주변과의 어울림을 보고 절로 들어가 보자.

한가지 여담으로 이곳 당간지주 앞에서 밤하늘 별을 보면 참으로 아름답고 별이 가까이 보인다는 걸 이야기 해둔다.


천왕문

당간지주에서 절로 눈을 돌리면 일부분이긴 하지만 석축이 보이고 천왕문이 있다.

어느절에나 흔히 있는 천왕문이고 이곳 천왕문은 세워진지 오래지 않으니 한 번 둘러보도록 하자.

돌계단에 올라 천왕문에 들어서면 양쪽으로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방위

천 왕 명

쥐고있는 물건

피부색

얼굴특징

서                    원

오른손

왼 손

지국천왕

주먹

푸른색

다문입

선한이에게 복을, 악한이에게 벌을 줌

광목천왕

삼지창

보탑

하얀색

벌린입

악한이에게 고통을 주어 착한마음을 갖게 함

증장천왕

여의주

붉은색

노란눈

만물을 소생시키는 덕을 베품

다문천왕

비     파

검은색

드러난 이

어둠속을 방황하는 중생을 제도한다.

 

사천왕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이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의 천왕문에 이 사천왕을 봉안하고 있다. 원래 사천왕은 고대 인도종교에서 숭상했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그들은 수미산의 중턱 지점에서 각각 그들의 권속들과 살면서 동서남북의 네방위를 지키며 불법수호와 사부대중의 보호를 맡게 되었다. 또 사천왕과 그 부하 권속들은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세간의 선악을 늘 살핀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매월 8일에는 사천왕의 使者들이, 14일에는 太子가, 15일에는 사천왕 자신이 제석천(帝釋天)에게 보고하는 것이 중대한 임무의 하나가 되고 있다. 사천왕 중 동쪽을 수호하는 이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이다. 그는 安民의 신으로서 수미산 동쪽 중턱의 황금타(黃金埵)에 있는 天宮에서 살고 있다. 16善神의 한분이기도 한 지국천왕은 선한 자에게 상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어 항상 인간을 고루 보살피며 국토를 수호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얼굴은 푸른빛을 띠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칼을 쥐었고 왼손을 허리를 짚고 있거나 또는 보석을 손바닥위에 올려 놓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그의 휘하에는 팔부신중의 하나로서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향기만 맡는 음악의 신 건달바(乾達婆)를 거느리고 있다. 서쪽을 방어하는신은 수미산의 중턱 백은타(白銀埵)에 살고 있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이다. 그는 흔히 잡어(雜語)·비호보(非好報)·악안(惡眼)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그의 남다른 모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그의 몸은 여러 가지 색으로 장식되어 있고 입을 크게 벌린 형상을 함으로써 웅변으로 온갖 나쁜 이야기를 물리친다고 한다. 또 눈을 크게 부릅뜸으로써 그 위엄으로 나쁜 것들을 몰아낸다고 하여 안악·광목이라 하는 것이다. 광목천의 근본 서원은 죄인에게 벌을 내려 매우 심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가운데 道心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다. 그의 모습은 붉은 관을 쓰고 갑옷을 입었으며, 오른손은 팔꿈치를 세워 끝이 셋으로 갈라진 삼차극(三叉戟)을 들고 있고, 왼손에는 보탑을 받들어 쥐고 있다. 그의 권속으로는 龍과 비사사(毘舍闍)등이 있다. 남방을 지키는 증장천(增長天)은 수미산 남쪽의 유리타(瑠璃埵)에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위덕을 증가하여 만물이 태어날 수 있는 덕을 베풀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구반다 등 무수한 귀신을 거느린 증장천은 온몸이 적육색이며 노란 눈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그의 모습은 대개 갑옷으로 무장하고 오른손은 용을 잡아 가슴 바로 아래에 대고 있고, 왼손에는 용의 여의주를 쥐고 있는 경우가 많다.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多聞天)은 달리 비사문천(毘沙門天)이라고도 하는데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면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 하여 다문이라고 한다. 그가 맡은 역할은 암흑계의 사물을 관리하는 것인데 한때 불법에 귀의하여 광명신이 되었으나, 본래 자신의 원을 지킨다 하여 금비라신(金毘羅神)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다문천은 왼손에 늘 비파를 들고 있다. 그는 수미산의 북쪽 수정타(水精埵)에 살며, 그의 권속으로 야차와 나찰을 거느리고 있다. 현재 이 사천왕은 천왕문에 많이 봉안되지만, 달리 불보살의 후불탱화에도 외호신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상의 사천왕이 밟고 있는 발밑의 악귀들의 모습도 모두 제각각이고 그 얼굴모양도 독특한 경우가 많으니 어느 절을 찾던지 그걸 눈여겨 보는 것도 또다른 묘미가 될 것이다. 그 예로 선운사의 사천왕상 밑에는 특이하게 아낙네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는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 하여 벌을 받는 것이라 한다.


대석축

천왕문을 지나면 약간의 경사가 있는 길 위로 대석축이 보인다. 이것이 부석사를 찾는 이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맛인 석축이다. 석축은 산지가람이 세워지는 신라하대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부석사 이외에도 불국사, 원원사, 망해서등에도 보이나 부석사의 석축은 그 규모나 짜임새가 보는이를 놀라게 한다.

석축을 건설하면서 규모도 그렇거니와 그 큰 돌을 하나하나 골라가면 짜 맞추어 간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고 그 길을 오르면서 답답하다거나 지루하지 않고 즐겁게 오르게 한다는 건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이 대석축도 무량수전 앞의 석등, 조금 전 본 당간지주와 함께 창건당시를 전후하거나 약간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석축의 의미에 대해 각자에 따라 해석하는 방식이 다르나 일반적으로는 석축이 가르는 큰 경계선 셋이 다시 낮은 경계들로 갈라지면서 아홉단을 이루는데, 이것이 극락세계에 이르는 구품만다라를 표현한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천왕문까지가 하품, 천왕문에서 범종루까지가 중품, 범종루에서부터 안양루 누각 아래까지 상품이라 보고 안양루에서 무량수전에 이르면 극락에 이른 것으로 보기도 한다. 혹은 천왕문에서 범종루까지가 하품, 범종루를 지나 안양루까지가 중품, 안양루아래서 무량수전 앞까지가 상품이며, 무량수전안에 들어서야 아미타여래가 주재하는 극락에 이른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하여간 그것은 짜맞추기 좋아하는 우리들 몫일 지도 모르겠고 전체적인 경내 건물배치를 화엄종찰이란 의미에서 석축과 더불어 빛날 화(華)자형으로 표현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일단 석축을 만나면 무언가 막연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곳에서 숨을 한 번 고르고 발길을 보며 여유를 가져보자.


유물전시각

천왕문을 지나면 오른편으로 근래부터 만들기 시작하는 건물이 보인다. 규모는 제법 크나 용도는 아직 모르겠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요즘 어느 절을 가든 중창불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부석사도 이곳뿐만이 아니라 얼마전에 유물전시각과 그 뒷편의 지장전 건립을 끝내고 요즘은 이곳과 조사당 옆의 옛 취현암터에 새로운 건물을 세우고 있다. 사찰에서 새로운 건물을 세우는 사실에대해 우리가 왈가왈부할 일도 아니고 자세한 사정도 모르나 왠지 썩 내키지 않음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석축을 올라서면 제법 아담한 두 기의 삼층석탑을 만나게 된다. 이 두탑은 원래 부석사에 있던 것이 아니라 절의 동쪽 약사골 절터에서 1966년에 옮겨온 것이다.

원래 쌍탑으로 건립된 듯 두 탑의 크기와 양식이 동일하다. 2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은 것으로 무량수전 동쪽에 있는 신라시대 3층석탑과 기본적으로 같은 형식이다.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 규모가 작고 아담하여 왜소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탑 뒤편에 조금전에 이야기한 인근 북지 1리에서 1994년에 옮겨온 불상 세분이 모셔져 있다. 이 불탑을 중심으로 오른편에 해우소가 왼편에 종무소가 있다. 부석사 해우소는 썩 좋진 않으나 한 번 둘러봄 직 하다.

탑을 뒤로 해서 조금 더 나아가면 범종루 조금 못비쳐 오른편에 유물전시각이 1996년에 마련되어 있다. 신을 벗어 한쪽에 치워두고 전시각안으로 들어서면 입구에서 오른쪽으로부터 범천, 다문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 지국천왕, 제석천의 순으로 조사당벽에서 떼어내어 벽 그대로 이곳에 옮겨 놓았다. 범천과 제석천은 사천왕과 같이 인도의 고대 신화중의 여러 토착신이 불교에 흡수된 예이다. 범천은 모든 욕심을 끊고 청정하여 부처가 세상에 나올 때마다 가장 먼저 와서 설법을 듣는 이이다. 제석천은 도리천 즉 수미산꼭데기에 있는 33천의 주인이며 석가모니의 생전부터 그를 돕고 옹호하였다고 한다.

이 벽화들은 1377년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혹은 1493년에 개체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어쨌든 600여년의 세월동안 빛이 바랜모습이나 우리나라 벽화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고려시대 회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꼽는다. 혹시 어쩌다 안내인이 불화에 대해 천연안료를 썼다거나, 프랑스에서도 복원하기 힘들어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또 한가지 이 불화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이 불화가 원래 조사당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그림은 佛대신 부석사의 창건주이자 화엄종의 祖師인 의상조사를 수호하는 신장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의상조사가 높이 존숭됨을 알 수 있겠다.

벽화를 보고 왼쪽 계단을 오르면 2층 유물각을 볼 수 있다. 이곳에는 무량수전 닫집에 있었다는 용조각상, 무량수전 바닥으로 사용되었다는 녹유전, 퇴계가 부석사에 와서 지은 시의 각판,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그리고 13세기 원응국사가 있을 때 새긴 대방광불화엄경 각판등이 있다.

 

 

인도에서 만든 불교 성전(聖典) 전체를 일컬어 삼장(三藏)이라고 하는데 그 삼장은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이다. 경장이란 부처님의 말씀으로 ‘권위있는 책’이라는 뜻이다. 대화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같은 의미라도 대화자에 따라 그 내용의 수준이 다르다. 율장은 불교도들이 지켜야할 실제 생활에서의 규범과 교단의 규약이다. 논장이란 경이나 율을 해석하거나 논술하는 모든 것을 총칭하여 일컫는 말이다. 삼장과 더불어 중요한 모든 경을 대장경이라 한다. 이러한 대장경 간행작업은 초기에는 순수하게 보존을 목적으로 하였을 것이나 나중에 보존과 더불어 불사로 기원과 포교의 의미로까지 확대된 듯하다.

무량수전 바닥에 있었다는 녹유전은 다섯가지 색을 가졌다고 오박석(五箔石)이라고 한다. 이것은 무량수전을 극락으로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미타경」에 극락의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다고 하여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유리를 벽돌에 붙이는 기술 자체가 지금도 쉽지 않은 것이라 한다. 하지만 엎드려 절하는 풍조가 일반화된 조선시대에 들어서서는 이것을 걷어내고 마루를 깔았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이 파손․분실되고 지금은 몇장이 남아있다. 지금 무량수전은 마루위에 카펫을 덮었다.

무량수전 닫집에 있었다는 용조각은 역동적인 모습을 보이며 나무를 여러조각 덧대에 만든 것인데 실재로 무량수전 닫집을 보면 그곳 어디에 있었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범종각

유물전시각을 둘러보고 다시 범종각으로 이동을 해보자.

범종각은 원래는 범종을 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종의 누각형태로 건물 자체가 종을 달기에 적합치 않은 구조로 보아 당호만 범종각이라 한 것 같다.

정면 3칸, 측면 4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다. 우리나라 건물은 정면이 측면보다 길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인데 측면이 정면보다 길므로 이 건물을 지은 목수는 전면은 팔작 형식으로 후면은 맞배 형식으로 지음으로 그 특징을 살렸다. 이 범종각은 건물의 오른쪽 뒷편에서 다시 바라보면 지붕의 처마선이 결코 예사롭지 않으니 이는 측면이 정면보다 긴 건물을 팔작과 맞배의 결합으로 해결한 목수의 사려깊음을 느낄 수 있게 한다.

현재 이 범종각에는 운판, 목어, 법고가 자리하고 있다.

 

                       범종각

운판은 구름모양의 넓은 청동판으로 두들겨 청아한 소리를 내게하는 일종의 악기이다. 원래는 부엌에 달아두어 대중에게 끼니를 알리는 기구로 사용되었다. 재료는 주로 청동이며 죽이나 밥을 끓일 때는 세 번 치므로 화판(火板)이라고 하고, 끼니때에 길게 치므로 장판(長板)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아침․저녁 예불 때의 의식도구로 쓰인다. 중생교화의 상징으로 운판은 유독 허공에 날아 다니는 짐승을 위하여 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목어는 목어고(木魚鼓)․어고(魚鼓)․어판(魚版)이라고도 하며, 나무로써 긴 고기모양을 만들어 두드리는 법구(法具)이다. 고기모양을 취하게 된 것은 물고기가 항상 눈을 뜨고 깨어 있으므로 그 형체를 취하여 나무에 조각하고 두드림으로써 수행자의 분발을 일깨웠던 것이라는 이야기와 옛날 한 승려가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옳지 못한 행동을 하다가 죽어 물고기로 태어났는데 등에 나무가 한 그루 나서 풍랑이 칠 때마다 그 나무가 흔들려 피를 흘리는 고통을 받았다 한다.

 

 

마침 스승이 지나다가 그 제자였던 물고기의 모습을 보고 그를 해탈하게 하자 물고기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등의 나무로 고기모양을 만들어 목어라 하여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사용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창고나 식당 앞에 두어 끼니때는 길게 두 번 치고, 대중을 청할 때는 길게 한 번 두드렸으나 지금은 예불때나 큰 행사때 사용하여 물속에 살고있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그 형태도 용머리를 취하기도 한다. 이곳 부석사의 목어도 용머리에 여의주를 문 형상을 하고 있다.

법고, 범종, 목어, 운판은 사물이라 하여 불교의식에서 중요시되는 기물들이다. 범종은 지옥중생(地獄衆生)을 위하여 치고, 쇠를 재료로 하여 구름모양으로 만든 운판은 허공중생(虛空衆生)을 위하여, 나무를 재료로 하여 물고기 모양으로 만든 목어는 수중중생(水中衆生)을 위하여, 법고는 세간축생(世間畜生)을 위하여 친다고 한다.


안양루

범종각을 지나면 이곳 부석사에서 제법 넓은 곳을 만난다. 왼편으로 실제 범종이 있는 범종각, 그리고 조사당 동쪽에서 옮겨와 지금은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로 쓰이는 취현암, 그리고 그 맞은 편에 다시 스님들이 거처하는 응향각이 있다. 제법 넓은 이곳에 오르면 위편으로 안양루와 무량수전이, 가까이엔 괘불을 거는 괘불지주가 있다.

괘불지주의 쓰임에 대해서 조금 전에 살펴보았고 여기선 괘불에 대해 잠깐 살펴보자. 괘불은 탱화와 구별된다. 탱화는 보통 불상의 뒷편에 있으며 어느 전각에 있느냐에 따라 대웅전 후불탱화, 극락전 후불탱화, 약사전 후불탱화 등으로 나뉜다. 그림이 아닌 조각은 탱이라고 이른다. 그러나 괘불은 야외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할 때 모시는 신앙의 대상불인 것이다. 따라서 괘불은 크기가 상당히 큰데 큰 것은 높이 15m, 폭 10m가 되는 것도 있다. 이러한 불화들은 원근감이 없고 시공을 초월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순흥읍지󰡕�의 기록에 보면 괘불지주가 있는 바로 윗단에 법당이 있었다고 전한다.

 

 범종각 밑에서 바라본 안양루

 

그렇다면 이 법당은 화엄종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일 것이고 방금 살펴본 범종루가 범종을 걸기 위한 건물이 아니고 누각으로 쓰인 만들어진 건물이고 보면 얼추 맞아떨어지는 걸 느낄 수 있다.

이치상으로도 비로자나불을 통한 득도 이후에 극락으로 통하는 안양문을 통해 무량수전에 이르는 것이니 눈여겨 볼 기록이다.

이곳에서 조금 왼쪽으로 이동하여 무량수전을 올려다 보면 팔작지붕의 묘미인 선의 미학을 느낄수 있다.

다시 무량수전을 향하여 발을 옮기다 보면 대석축 위로 날렵한 지붕을 가진 안양루를 만난다. 누각 중앙에 걸린 浮石寺 현판은 1956년 이승만이 이곳을 방문하여 적은 것이라 한다. 정면으로 올라갈때는 안양문이고 올라가 다시 돌아보면 안양루라는 현판이 있다. 이 안양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집이다.

안양이라 함은 극락이니 극락에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쓰인 목재는 바닷물에서 진을 뽑은 엄선된 재료를 썼다고 한다.

안양문을 지나면서 일반적으로 중요한 두가지 사실을 쉽게 지나친다.

한가지는 몸을 약간 숙인다는 것이다. 강진의 백련사를 가보면 본당에 가기위해 본당 앞의 강당을 돌아서 가게 된다. 선운사도 마찬가지. 본당 앞마당의 만세루를 거친다. 옛날 양반집의 솟을대문을 보면 문턱이 유난히 높게 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 이 문턱을 넘을 때는 누구나 몸을 약간 숙이게 된다.

몸을 경건하게 하고 조심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곳 안양문을 지날때도 무량수전에 이른 흥분보다는 마음을 가라 앉히고 경건히 하라는 의미는 아닐런지.

 

      안양루 밑에서 바라본 무량수전

 

또 하나는 안양루 밑에서 바라보는 석등과 무량수전이다.


안양루밑의 입구에서 석등과 무량수전의 위치를 자세히 보면 석등과 무량수전이 대칭구조가 아니라 석등이 왼쪽으로 약간 치우쳐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만일 석등이 중앙에 위치하게 되면 무량수전이 중심이 아니라 석등이 중심이 되버려 보는 이들이 갑갑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안양루밑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며 석등을 보면 차츰차츰 왼쪽으로 이동하며 종국에는 무량수전에 그 중심을 내어주는 뛰어난 공간효과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세심하게 볼 부분이다.

이제 무량수전 앞마당에 올라서서 안양루를 다시보면 사람들이 왜 그리 부석사를 이야기하는 지 새삼 느낄 수 있다. 정말 이리도 좋은 자리에 안양루가 자리잡고 있고 부석사가 자리잡고 있구나. 하는 그저 잣신도 모르는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부석사에서 풍광을 감상할 곳은 이곳 안양루와 무량수전 동편에 있는 삼층석탑자리, 원융국사비가 있는 자리, 동부도자리가 있다. 그리고 요즘에 새로 각광받기 시작하는 자리가 최순우 선생의 말처럼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그 기둥도 한 번 쓰다듬어 보고 그 기둥을 등에 지고 눈앞에 펼쳐진 세상을 보는 것이다.

정말 ‘세상에서 아웅다웅 소유하기 위해 살아온 지금까지의 삶이 덧없어 보이고 인간필설의 한계가 여기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저 가슴속에 간직하기 위해 눈으로 보지 말고 가슴으로 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이곳의 모습을 컴퓨터 바탕화면으로 놓으면 컴퓨터를 켜는 것이 즐거울거란 생각을 잠시 해보며 예전의 방랑시인 김삿갓의 한탄도 들어볼 만하다.


평생에 여가없이 이름 난 곳 못봤더니

백발이 다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그림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 있고

천지는 부평같이 밤낮으로 떠 있구나.

지나간 모든 일이 말타고 달려오듯

우주간에 내 한몸 오리마냥 헤엄치네.

이간 백세에 몇번이나 이런 경관 보겠는가.

세월이 무정하네 나는 벌써 늙어있네.

무량수전과 무량수전 앞 석등

아직 부석사에서 필설로 이야기하면 구차한 것이 두가지 남아있다.

무량수전 앞 석등 

그중 하나는 무량수전이고 또 하나는 무량수전 앞 석등이다.

먼저 기존의 석등을 이야기한 내용을 살펴보자.

읽다가 재미 없거나 머리아프면 바로 뛰어넘어가자.

높이 2.97m , 국보 제17호.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으로 상한비례의 교묘함이나 조각의 정교함에서 신라시대의 석등 중에서 손꼽히는 걸작이다. 4매로 짠 방형의 지복석(地復石)위에 1석으로 된 지대석(地臺石)이 놓였는데 지대석의 네 면에는 각각 2구씩의 안상(眼象)이 장식되었으며 상면에는 팔각의 하대석(下臺石) 받침 2단이 마련되었다. 하대석은 모서리를 향하여 한 잎씩 복판복련(複瓣覆蓮)이 조각되었고 꽃잎 끝은 말려서 귀꽃이 되었다. 특히 복련 중심에는 높은 3단의 받침이 있어 연꽃 속에서 간주(竿柱)를 받쳐 올리는 듯이 표현하였다. 간주는 전형적인 팔각주(八角柱)로서 굵기나 높이가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고 있다. 상대석(上臺石)은 통식에 따라 평박(平薄)하나 여기에 조각된 8엽의 앙련(仰蓮)은 상당한 입체성을 보여주고 있다. 화사석(火舍石)은 팔각으로 네곳에 장방형 화창(火窓)을 내었고 화창 주위에는 작은 구멍을 돌려 뚫었으며 나머지 네 면에는 앙련 위에 보살입상 1구씩이 조각되었는데 조각 수법이 매우 정교하다. 옥개석(屋蓋石)은 낙수면이 우뚝하고 추녀 밑에 약간의 반전(反轉)이 있고 정상에는 복련이 조각되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보주(寶珠)가 남아있다.

 

다음은 무량수전에 관한 부분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고려시대의 목조 불전(佛殿). 국보 18호.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무량수불인 아미타여래를 본존으로 봉안하였다. 현존하는 건물은 1916년 해체, 수리 때 발견된 묵서명에 1376년에 재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조사당이 1377년에 재건된 것과 비교하여 학계에서는 일찍부터 건물양식으로 보아 조사당보다 100년 내지 150년은 더 앞서는 건물로 추정하여 왔으며 앞서 말한 묵서명은 그 뒤의 보수를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건물에는 배흘림으로 많은 기둥모리에 외1출목으로 된 공포를 올렸다. 가구양식은 2중량인데, 변주 위의 공포가 고주의 주도 밑 기둥머리에서 나오는 퇴보를 받치고 있다. 이 평주 위에서는 다시 퇴보 끝 부분에 놓인 포작이 있어 고주 공포의 대첨차의 끝에 덧퇴보형으로 된 부재의 끝을 받으면서 주심도리를 받고, 그 퇴보 위에 놓인 포작의 첨차는 앞으로 뻗쳐 위의 변주 대첨차 위에 놓인 퇴보 끝 위쪽으로 외목도리를 받는다. 그리고 퇴보 중앙에는 고주 위의 공포 대의 첨차를 지탱하는 사다리꼴로 된 대공을 놓고 있다. 고주는 기둥머리에 퇴보가 끼고 이 퇴보 끝에서 나온 헛첨차 밑에서 받치고 있으며, 주도 위의 공포는 대들보 끝을 받고 있다. 대들보 끝의 고주 몸에는 다시 1구의 포작을 두고, 이 포작의 첨차가 앞으로 덥어 고주 위 공포의 첨차 위에 있는 포작위에 이르러 내목도리를 받친다.

또, 대들보 양끝 가까이에서 사다리꼴의 대공 위에 공포로 된 포작이 있어 이것이 마루보의 끝을 지탱하는데, 공포의 두 첨차는 역시 앞으로 뻗어 고주 위 대들보 끝에 놓인 포작 위에 도달하며, 그 중 윗첨차 끝이 하중도리를 받게 된다. 마루보 끝에는 그 위에 다시 1구의 포작이 놓여 중도리를 받게 되었으며 마루보 가운데에는 하단이 수직으로 꺾인 사다리꼴의 부재 위에 포작을 두고 마루도리를 지탱하게 된다. 마루 내부 바닥은 전돌을 깔고 남향하는 건물의 서쪽에 불단을 만들고 그 상부에는 궁전형의 보개를 두었다. 이 건물이 양식상 중요한 점은, 이것이 주심포집의 기본형식을 잘 남기고 있으며, 또 가구방식이나 세부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장식적인 요소가 적다는 점이다. 즉, 전체 가구재는 모두 직선재를 사용하였으며, 공포의 첨차 끝과 보 또는 퇴보 등의 끝에 간단한 곡선으로 된 장식이 있을 뿐이고, 또 주두위의 공포나 기타 부분에 있는 포작에 주두나 소로굽의 단면이 내반된 곡을 가지고 굽 밑에 굽받침이 남아 있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상은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이다.

어느정도 이해하신 분도 계실것이고, 전혀 그렇지 못한 분도 있으리라. 유적앞의 표지판이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온 후부터 요즘에 세워지는 안내문들은 많이 쉬워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쉽게 쓰이는 것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걸 가끔은 느낀다.

본인은 석등이나 무량수전을 안내하는 안내판이나 위의 글을 쓴 사람을 생각해보며 그 글을 쓰면서도 그 사람은 무지 답답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떻게 쓰긴 했더라도 분명히 아쉬워 했을 것은 분명한 일이니 이 석등과 무량수전의 참맛을 아는 건 그저 가서 보고 또 보고 하는 것밖에는 없는 것이다.

처음엔 본인도 그 대단함을 잘 몰랐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곳 무량수전을 찾는 횟수가 더하던 언젠가 갑자기 무량수전과 석등이 정말 아름답고 치밀하게 만들어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10분이고 20분이고 석등과 무량수전이 본인에게 무어라고 이야기하는지 귀를 기울이길 바란다.

여기선 이 두가지를 보는데 참고할 것들 몇가지만 적어본다.

석등을 볼때는 먼저 높이를 생각해보자. 2.97m라는 높이. 전체적인 각 부분이 차지하는 조형미와 더불어 알맞게 우러러보게 만들고 그러면서도 안양루 밑에서 보았을 때 무량수전을 드러내주는 배려. 이러한 것들이 2.97m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또 한가지 세련된 조각기법이다.

각 부분에 새긴 연꽃문양․안상․그리고 보살입상. 보는 이로 하여금 가까이 다가가서 손으로 쓰다듬고픈 마음을 절로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문양들이 결코 화려하지 않지만 그 화려하지 않음이 오히려 미적감흥을 불러일으킨다고 하겠다.

무량수전은 아미타여래를 본존으로 모시는 곳이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을 적멸보궁․금강계단이라하고, 석가모니불을 모신 곳을 대웅전―마귀의 항복을 받아낸 위대한 영웅이란 의미―이라 한다.

이외에도 석가모니의 일생과 그 행적을 나타낸 영산전, 석가모니불을 모시면서도 그 제자들에 대한 신앙세계를 함께 묘사한 응진전과 나한전.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 그리고 여기처럼 아미타불을 모신 곳을 무량수전, 극락전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무량수전이 이곳 부석사에만 있다는 오해는 마시길 바란다.

무량수전이라는 현판은 순흥의 봉서루에 있는 홍주도호부(興州都護府)를 쓴 공민왕이 쓴 것이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머물면서 쓴 것이라 하는데 이때 생겨난 민속놀이가 공민왕의 왕비를 강에서 건네주기 위하여 행한 놋다리밟기라는 말도 있다.

무량수전이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냐 아니냐는 논쟁은 이렇다.

1916년 발견된 묵서명에 1376년 원응국사가 고쳐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다른 最古의 건물인 봉정사의 극락전에서는 1363년에 고쳐지었다는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본래 건물에서 중수는 보통 100~150년 후에 하는 것인데 그도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니 무량수전이냐 극락전이냐가 확실하게 정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전체적으로 건물방식자체가 극락전이 좀더 오래된 방식이지 않느냐는이야기가 있다는 걸 밝혀둔다.

그렇다면 무량수전이 건축학적으로 무엇 때문에 그리 유명한가?

그것은 보는 이들에게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기 위해 행해진 몇가지 방식이다.

그 첫째는 누구나 알고 있는 배흘림양식이다. 배흘림이 없으면 기둥 뒤쪽이 더 굵게 보여 기둥이 앞으로 쏟아질 것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것을 배려한 것이 배흘림이다.

또 한가지. 기둥 높이를 중앙의 것보다 모서리의 기둥을 조금 더 높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수평으로 얹은 부재들의 끝부분이 아래로 쳐져 보이는 현상을 막아준다. 이를 귀솟음이라 한다.

여기에 더하여 기둥 위쪽을 건물 안쪽으로 약간 경사지게 세우는 것이다. 이를 안쏠림이라 하는데 이것은 건물의 상부가 아래보다 벌어져보이는 현상을 수정하고 안정감을 주기위해서이다. 그리고 이와 연관지어 귀부분의 처마끝을 가운데보다 더 튀어나오게 하여 처마선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을 그려 안정감을 주는 현상을 안허리곡이라 한다. 무량수전의 경우 안허리곡과 안쏠림이 공포와 벽면에까지 적용되어 마치 평면이 오목하게 휘여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상의 의식적으로 보지않으면 눈에 잘 보이지않는 배려들이 무량수전을 바라보는 이에게 감동으로 다가오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건축의 묘미는 건물안으로 들어서서 천정과 벽면을 보아도 느낄수 있으니 한번씩 경험해 보시기 바란다.


소조아미타여래좌상

 

 

 

아무래도 건물안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이 부처의 위치가 다른 절집처럼 건물의 가운데에서 남쪽을 바라보지 않고 왼쪽으로 조금 치우쳐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원융국사비문」에 따르면

일승(一乘) 아미타불은 열반에 드는 일이 없으며, 시방정토(十方淨土)를 체(體)로 삼고 생멸상(生滅相)이 없다. 󰡔�화엄경󰡕� 「입법계품」(立法界品)에 이르기를, 혹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보거나 관정(灌頂)하여 수기(授記)를 받은 자는 모든 법계(法界)에 충만하여 처소와 빈자리를 보충한다고 하였다. 불타는 열반하지 않고 비는 때도 없다. 그런 까닭에 보처보살을 조성하지 않으며 탑도 세우지 않으니 이것이 일승의 깊은 뜻이다.

 

의상은 아미타불을 열반에 들지 않고 생멸상이 없는 現在佛로 파악하였다. 곧 의상은 우주를 포섭하는 화엄이라는 사상적 배경위에 극락정토의 현실화, 신라의 정토화를 생각한 것이다. 의상이 화엄사상의 요체를 깨달아 제자들에게 가르쳤으나 현실적으로 그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이는 얼마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기에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며 정토에 나서기를 원하기만 하여도 왕생할 수 있는 구도행을 택한 것이다. 하여 이곳에 화엄경에서 이야기하는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시지 않고 아미타불을 모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곳에 모신 소조아미타여래좌상은 흙으로 빚은 것에 금칠을 입힌 것이다. 높이는 2.78m. 자상하기 보다는 눈꼬리가 치켜올라가고 콧날이 날카로우며 입술이 두터워 엄숙한 인상을 풍긴다. 수인은 석가여래의 수인인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뒷편의 3.8m의 나무광배는 화려한 당초문과 화염문이 조각되어 정교한 미술미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소조상으로는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부석

무량수전 왼편으로 부석(浮石)즉 뜬 돌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량수전 오른편의 조그마한 선묘각과 함께 부석사 창건과 관련된 선묘설화를 만난다.

의상은 원효와 함께 중국에 건너가 새로운 불법을 배우고자 했다. 그러나 가는 도중 흙무덤 속에서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당나라에 가는 것을 포기하여 의상 혼자만이 서른여섯의 나이에 초지를 관철하여 중국에 건너갔다. 산동반도에 도착한 그는 그곳 유지의 집에 묵으면서 자신이 공부해야 할 마땅한 스승과 지역을 알아보고 있었다. 준수한 용모에 번득이는 총기를 지닌 이 기품있는 이방의 수도자는 금세 인근의 화제거리가 되었다. 여러 여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음도 물론이다.

 

 

그런 사람 중에 선묘라는 주인집 딸도 있었다. 그녀는 옷을 곱게 꾸며 입고 온갖 교태를 부려 의상의 눈길을 끌고자 했으나 의상의 구도 일념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의상의 태도에서 크게 감명을 받은 선묘는 마음을 돌이켜 새로운 생각을 일으켰다. 이 생이 다하고 또 다음 생이 이어져도 대사께서 대업을 이룰 수 있도록 자신이 그 지원자가 되어 뒷바라지하겠다는 서원이었다. 이성으로 보고 가졌던 애욕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자 그에 대해 서운한 마음을 대신 도심으로 이를 승화시킨 것이다.

의상은 이내 종남산으로 가서 지엄을 스승으로 모시고 중국불교철학의 진전과정에서 얻어 낸 최고의 사상 체계인 화엄학의 진수를 체득하여 스승의 인가를 받는다. 그래서 신라에 돌아와 그 뜻을 널리 펴고자 10년 만에 귀국길에 올라 다시 뱃길이 떠나는 산동반도에 와서 예의 그 신도집에 들렀다. 그 동안 이역 땅에서 공부하는 데 필요한 후원을 해 준 데 대해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는 신라로 가는 배편을 찾아 귀국길에 올랐다.

실제 뒷바라지를 했던 선묘는 돌아가는 의상을 위해 옷가지가 든 바구니를 마련하고 있다가 그가 배에 탄 뒤에야 소식을 듣고 달려나갔다. 이미 배는 선창을 떠나 바다로 멀어져 가고 그의 모습 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서운함만 가득 차 온다. 그러나 그녀가 본래 가졌던 서원대로 도심을 되찾아 본 마음이 대사를 공양하는 데 있음을 확인하고 옷가지가 든 상자를 바다에 던져 의상이 탄 배에 가 닿기를 빌었더니 질풍이 갑자기 불어와 가볍게 상자를 배 속에 넣어 준다.

선묘는 한걸음 더 나아가 수천 리 험한 뱃길이 위험하지나 않을는지 걱정되어 이 몸을 던져 용이 되게 하여 저 배를 보호하리라 맹세하고는 바다에 뛰어들었다. 이런 지극한 마음에 바다도 감동하여 과연 그녀의 뜻대로 용이 되게 하여 의상이 탄 배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보호하여 무사히 신라 땅까지 인도하여 갔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선묘의 이적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의상이 절터를 찾아 이곳에 자리를 잡으려 했으나 이미 이곳에 자리잡고 있던 ‘500의 이단의 무리’가 그러한 작업을 방해한다. 그러자 선묘아씨는 의상앞에 나타나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고 의상대사는 그 의견을 받아들인다. 의상이 뭇 사람들 앞에 나타나 설법을 하고 거대한 바위를 가리키니 선묘는 계획대로 그 바위를 신통력으로 떠오르게 만든다.

그리하여 이단의 무리들도 의상에게 귀의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선묘룡은 석룡으로 화하여 무량수전 안의 아미타상 밑에서 앞마당의 석등부분까지 몸을 묻고 불법을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니 지금도 그 석룡이 사찰자산대장(寺刹資産臺帳)에 올라있다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를 그저 선묘아씨의 지순한 사랑으로만 볼 것인가?

이 이야기를 조금 발전시켜보자.

일단은 이 설화를 바탕으로 의상의 뒤를 받쳐주는 신심이 있었다는 것, 또한 그런 선묘설화를 널리 유포시킬 만큼 의상에 관한 신비화와 절대화가 이루어졌고 그것이 또한 의상의 영향력이 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다시 부석사의 창건당시를 한번 더듬어 보자.

「삼국사기」에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670년 당나라가 신라를 침범하려는 소식을 가지고 의상이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국한다. 신라는 668년 고구려를 정벌한 이후에도 계속되는 전쟁속에 있다. 이때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의상은 670년 귀국한 그해 지금의 낙산사의 관음굴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하고 다음해(671) 낙산사를 창건한다.

그러면 이러한 파편적인 몇가지 사실들을 가지고 당시를 추리해 보자.

먼저 의상의 신분에 관한 부분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의상은 아버지가 한신(韓信)이고 성은 김씨라 한다. 19세에 경주 황복사에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문무왕가 의상의 관계를 알려주는 몇가지 사살은 의상의 위치를 짐작케 한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하고 당군을 축출한 이후인 681년에 새로이 왕도에 성을 쌓으려 하자 의상이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 의견을 개진한다.

왕의 전교가 밝으시면 비록 풀만 난 언덕에 금을 그어 성(城)이라 하여도 백성들이 감히 이것을 넘지 못하기에 재앙을 씻어 깨끗이 하고 모든 것이 복이 될 것이나, 정교가 진실로 밝지 못하면 장성(長城)이 있다 하여도 재해를 없애지 못할 것이옵니다.    ― 「삼국유사」 권2 문호왕 법민조

비록 풀밭과 초막에 살더라도 바른 도를 행한다면 복스러운 세업이 장구할 것이요, 만약 그렇지 못하면 비록 사람을 수고롭게 하여 성(城)을 만들지라도 또한 유익을 없을 것입니다.

                                                  ― 「삼국사기」 권7 문무왕 21년조

의상이 보낸 이 글을 본 문무왕은 곧 역사를 중지시켰다 한다. 이러한 의견을 보낼 수 있는 의상의 위치를 한번 상상해 보자는 것이다.

또한 의상의 서신을 받은 문무왕은 그의 높은 덕에 감복해 부석산 골짜기에 빈한하게 생활하고 있는 의상의 처지를 개선해 주려 전장(田莊)과 노비를 보냈는데, 의상은 문무왕의 호의를 다음과 같은 말로 거절하였다.

우리의 법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평등히 보고 신분의 귀하고 천함을 없이 하여 한가지로 합니다. 󰡔�열반경󰡕�에서는 여덟가지 부정한 재물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 내가 전장과 노복을 소유하겠습니까. 빈도는 법계를 집으로 삼아 발우를 가지고 밭갈이를 하며 익기를 기다립니다. 법신의 지혜로운 생명이 이 몸을 빌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 󰡔�송고승전󰡕� 권4 「석의상전」

라고 하였다. 여기서 의상이 빈한하게 살았다는 것은 신분에 대한 측면보다는 종교적 측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의상의 신분에 대한 부분은 의상이 문무왕 16년에 왕명에 의해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사실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그렇다면 결국 의상은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의상이 낙산사를 창건하고 부석사를 창건하는 시기가 당나라와 계속해서 전쟁을 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그런 긴박한 시기에 국가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이―일설에 의상이 당나라에서 귀국한 것이 당나라의 침공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라는 것이 있다.―가 지금의 낙산사 관음굴에 들어가 7일동안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자신의 뜻을 펼칠 절터를 찾아 몇 년간 돌아다닌다는 것은 일면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렇다면 이 선묘설화를 다시 해석해보면 결국 의상의 뒤를 받쳐주는 신심은 왕실이 되는 것이고, 의상의 신비화와 절대화에 왕실도 깊이 관여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곳곳에―팔공산 미리사, 가야산 해인사, 가야현 보원사, 계룡산 갑사, 삭주 화산사, 금정산 범어사, 비슬산 옥천사, 무악산 국신사 등의 화엄 10찰 이외에도 불영사, 삼막사, 초암사등의 수많은 절을 바로 왕실의 세력확장을 위해 건설해나갔던 것이고 이단의 무리 500은 당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지역토착민이며 선묘 설화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의상의 신비화․절대화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선묘설화는 우리나라보다는 오히려 일본에서 유명해지는데 이는 13세기 일본의 전란기에 대거 발생한 전쟁 미망인들의 정신자세 수련에 기본이 되어 널리 유포되었다.

조선 후기 이중환이 이곳을 찾아

불전(佛殿) 뒤에 큰 바위 하나가 옆으로 섰고, 그 위에 큰 돌 하나가 지붕을 덮어놓은 듯하다. 얼른 보면 위아래가 서로 이어진 듯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두 돌 사이가 서로 눌려져 있지 않다. 약간의 빈 틈이 있어, 새끼줄을 건너 넘기면 나고 드는 데에 걸림이 없으니, 비로소 떠있는 돌인줄 알게 된다. 절이 이것으로써 이름을 얻었으나, 이 이치는 자못 깨달을 수 없다.  ―이중환 󰡔�택리지󰡕�

고 한 부분도 알아둘 만 하다.


산신각

부석을 보고 일반적으로는 무량수전 오른편에 있는 선묘각으로 이동을 하나 부석옆의 조그만 길을 내려가면 삼보전과 삼신각을 볼 수 있다.

삼보전은 1980년 신축하여 주지실로 사용하고 있으며 삼신각은 수명을 연장시키는 칠성, 말세에 중생을 에게 큰 복을 준다는 나한으로 흰머리에 눈썹이 긴 나반도자인 독성, 그리고 산신 이 세분을 모신 곳이다.

현재는 불단 중앙칸에 미륵반가사유상을 봉안했고 후벽에는 칠성탱화를 모셨다. 왼쪽칸에는 산신도를, 오른쪽 칸에는 독성을 모시고 독성탱화를 걸어 두었다.

삼신각에 모신 분들을 보고 우리나라 불교의 특징이 토착종교와의 결합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어찌보면 인도의 경우에도 사천왕이나 제석천․범천에서 이야기했듯이 토착신앙과의 결합이 있었고, 중국에서도 도교와의 결합이 있었으며, 일본에도 절안에 신사가 존재하는 걸 보면 그것을 우리만의 특징이라고 이야기하기 보다는 불교가 융합적 측면이 강하다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고 보면 과연 우리 민족을 특징짓는 것은 과연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무량수전을 지나 그 오른편 삼층석탑으로 옮겨가보자.


부석사 삼층석탑

이곳엔 석탑과 함께 석등의 일부분도 남아 있다. 전형적인 신라 불탑의 모습을 보이는 이 석탑은 높이 5.26m. 2층 기단위에 3층으로 쌓아 석가탑을 본뜬 모양이다. 하층기단이 넓어 안정감을 보이는 반면, 지붕돌은 다소 무거운 느낌을 준다. 상층부는 노반과 복발만이 남아 있다. 문제는 이 탑의 위치인데 앞서 말한 것처럼 의상때는 탑을 세우지 않았으니 고려말 무량수전이 중창될 시기에 신라양식대로 만들어 이곳에 놓았다고 보거나 인근에서 옮겨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탑의 모양을 보다보면 감은사지나 고선사지 탑처럼 크진 않지만 그곳에서 받았던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곳에서도 잊지 말고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을 보고 뒷편으로 난 길을 따라가보자.


자인당과 응진전

지금까지의 거침없이 펼쳐진 모습과는 달리 전형적인 산길의 모양을 하고 있다. 그 길을 따라 조금 오르다 보면 왼편과 오른편으로 두갈래 길이 나타난다. 여기서 왼쪽으로 돌아들면 자인당과 응진전을 만난다.

그중 왼편에 있는 자인당은 원래 선방의 용도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이후 동쪽 폐사지에서 석불을 옮겨오며 자인당이라 고쳐썼다.

자인당 안에 모신 세분의 부처님은 모두 동편의 폐사지에서 옮겨온 것들이다.

좌우에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 2구와 가운데는 석가여래로 여겨지는 좌상1구이다. 동편 불상은 갸름한 타원형의 얼굴에 코와 귀가 짧고 두터운 인중과 입술을 지녔다. 안면이 제법 마모되었다. 서쪽 불상 역시 광배와 대좌의 세부조각에서 약간 차이가 날뿐 동쪽불상과 유사하다. 그래서 이 두 좌상을 같은 조각가의 작품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중앙의 좌상은 항마촉지인에 광배가 존재하지 않는다. 둥글고 원만한 얼굴, 약간 좁은 어깨와 양감과 긴장감이 줄어든 신체, 평행으로 흐르는 옷 주름선등은 8세기 사실주의 양식에서 벗어나 9세기 신라하대의 불상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 자인당에 있는 비로자나불로 해서 부석사가 화엄종찰임을 새삼 한번 느껴본다.

비로자나불은 불교의 진리자체를 상징하는 불이니 그분의 수인 지권인―오른손은 불계를 왼손은 중생계를 나타내 두가지가 일체라는 의미―은 번뇌를 없애고 부처의 지혜를 얻는다는 수인이다.

자인당의 옆에는 같은 남향의 응진전을 만난다. 이곳에는 석가삼존불과 십육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나한은 소승의 수행자중 세상사람의 공양을 받을 만한 공덕을 갖춘 성자를 말하는데 여기에 모신 십육나한상은 무언가 어색하고 고졸한 느낌이 든다. 

                    단하각

응진전 뒷편엔 그냥 보아 넘기기 쉬운 조그마한 단하각이 위치해 있다. 사리를 얻기 위해 목불을 쪼개어서 땠다는 단하천연선사를 모신 곳으로 보인다. 여느 절에선 잘 볼수 없는 이 단하각을 보며 이절에 계신 어느 스님이 단하선사를 존경하여 지었던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부도군을 비롯하여 조사당, 응진전, 단하각등으로 대표되는 선종의 것들을 보면 이미 고려시대에 선종과 교종의 의미가 없어지고 결국 화엄종찰의 의미도 쇠퇴해져감을 알 수 있겠다.


조사당

 

                                                                    조사당

 

 단하각을 보고 왔던 길을 돌아나가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바로 조사당이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작은 규모이지만 건축사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시되는 건물이다. 이곳은 이름 그대로 이 절의 창건자인 의상을 모셔놓은 곳이다.

의상은 화엄종의 개조로 일컬어지며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선사를 찾아가 화엄종을 깨우쳤다. 신라로 돌아와 부석사를 창건한 후에도 검소하고 진지한 수도인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의상의 수행 태도는 이런 웅장함과는 상대적으로 검소하고 진지한 수도인의 전형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가 지은 법계도의 학습을 통해 사상을 전파하면서 제자들과는 주로 문답을 통해 간곡하게 묻고 자상하게 가르쳐 주어 의심쩍은 구석 하나 남겨둠이 없이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했다. 강론하는 장소도 반드시 부석사 큰 도량뿐이 아니라 태백산의 미리암굴, 대로방 그리고 소백산의 추동 등 자연 조건을 그대로 이용하여 검소한 환경 속에 높은 수준의 이치를 깨치도록 이끌었다. 한번은 홀어머니를 모시다가 출가하여 제자가 된 진정(眞定)의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는 소백산에 초암을 짓고 3천명의 제자들과 90일간 화엄경을 강의하여 추모해준 일도 있었다. 이런 형편이니 사제간의 일치감도 대단했을 것이다. 의상은 화엄경 일승교지의 심오한 뜻에따라 경내에 탑도 세우지 않았고 보처도 없이 소조로 만든 아미타불살만을 모시고 있었다. 대석단을 쌓고 터를 마련한 현재의 무량수전 자리는 경문왕때에 한꺼번에 이루어진 것으로 의상 당시에는 넓은 산정과 동굴을 이용하여 도를 닦았으니 초창기의 부석사의 모습을 짐작케한다. 실제로 의상은 의복과 병, 발우 세가지외에는 아무것도 몸에 간직하지 않았다한다.

조사당 내부에는 의상대사의 일대기를 그린 탱화가 그려져 있고 사천왕과 보살을 나타내는 벽화―원래의 것들은 유물전시각에 모셔져 있다.―를 새로이 그려두었다.

 

조사당 동편창 앞에는 철조망으로 가려진 조그마한 나무 한그루가 있다.

신라 대에 중 의상(義湘)이 도를 깨치고, 장차 서역 천축국(天竺國)에 갈 참인데, 거처하던 방문 앞 처마 밑에다 지팡이를 꽂으면서,『내가 간 뒤에 이 지팡이에서 반드시 가지와 잎이 날 것이다. 이 나무가 말라 죽지 않으면 나도 죽지 않은 줄로 알아라』하였다. 의상이 간 후에 절 중은 의상의 상(像)을 빚어서 그가 거처하던 데에 안치하였다. 나무는 창 밖에서 곧 가지와 잎이 나왔으며, 비록 햇빛과 달빛은 비치나 비와 이슬에 젖지 않는다. 늘 지붕 밑에 있어서, 지붕을 뚫지 아니하고 겨우 한 길 남짓한 것이, 천년을 지나도 하루 같다. 광해(光海) 때에 경상감사 정조(鄭造)가 절에 와서 이 나무를 보고,『선인(仙人)이 짚던 것이니 나도 지팡이를 만들고 싶다』하면서 톱으로 자르게 하여 가지고 갔다. 그러나 나무는 곧 두 줄기가 다시 뻗어 나서 전과 같이 자랐다. 인조(仁祖) 계해(癸亥)년에 정조는 역적(逆賊)으로 몰려,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나무는 지금에도 사시에 늘 푸르며, 또 잎이 피거나 떨어짐이 없는데, 중들은 비선화수(飛仙花樹)라 부른다. 옛날에 퇴계(退溪)가 이 나무를 두고 읊조린 시(詩)가 있다.

 

이를 본 이중환은


옥을 뽑은 듯, 정정(亭亭)하게 절 문에 의지했는데,

중의 말은 지팡이가 신령스런 나무로 화했다 한다.

지팡이 꼭지에 제대로 조계(曹溪:중국 광동성에 있는 냇물)물이 있는가,

건곤(乾坤)이 내리는 비와 이슬의 은혜를 힘입지 않는구나.               ― 이중환 󰡔�택리지󰡕�

라 이야기하고 있다.

이 나무는 학명으로 골담초(骨曇草)라 한다. 골담초는 대략 1.5m정도 자라며 꺽어서 꽂아두면 뿌리가 내리는 성질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아이를 못낳는 여자들이 이 나무를 달여 먹으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하면서 1957년부터 철책을 둘러놓았다.

철책이 둘러쳐져 조사당을 제대로 볼 수 없다거나 보기 흉하다는 문제는 또다른 차원의 문제일 것이다.

아이를 낳아야만 하는 처지는 어떠한 처지일까? 그것을 강제하는 조건은 과연 어떤 것일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조사당 옆에는 취현암이 있었던 곳임을 알려주는 조그만한비석이 하나 있다. 이중환도 이곳 취현암에 와서 좋은풍광을 노래했으나 일제때 큰 인물이 난다고 하여 자리를 범종각옆으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하지만 그 옆에 지금은 다시 다른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요 근래는 이곳 부석사에 사람이 많이 찾아들고 중창불사 중이라 출입에 제한을 많이 받다. 일요일의 경우 응진전과 자인당의 경우 수도를 위하여 출입을 제한하는 경우가 많고 조사당을 지나 뒷편 동부도밭으로 가는 길도 건물공사 때문에 지나갈 수 없도록 해 두었다. 나중에라도 이것이 정리되면 조사당에서 동부도밭 가는 길은 또다른 맛을 주는 것이 될 것이다.

찾는 이도 얼마없고 조용하나 풍광은 결코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동부도밭 가는길.

오른편에 자그마한 해우소도 마련되어 있는데 앙징맞고 귀여운 느낌을 준다.

이곳 부도밭에는 석종형 부도 8기와 부재들이 좁은 공간에 모셔져 있다. 부석사에서 열반에 든 스님이나 관계가 깊은 스님들의 부도를 모신 것이다. 대흥사나 선운사, 송광사처럼 큰 규모는 아니지만 정말 좋은 자리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다.


원융국사비

동부도밭에서 다시 길을 따라 부석사 쪽으로 돌아들면 얕은 언덕위에 전각하나를 만나게 된다.

원융은 시호이고 명주(溟州)사람으로 속성은 김씨, 이름은 결응(決凝), 자는 혜일(慧日)이다. 1041년 부석사에 들어가 부석사의 중창을 주도하다 1053년 입적하였다.

비문에는 의상당대의 부석사의 모습과 이후 법손들이 주석하였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어 부석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비신은 상하귀퉁이가 파손되는 등 몹시 손상되어 있다. 귀부는 용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귀갑(龜甲)은 2중육각인데 그 안에 음각의 王자가 새겨져 있다.

원응국사의 옆에는 원래 고려때 세운 의상의 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최근에 한글로 새긴 의상국사비가 있다.


선묘정과 식사용정

원융국사비를 보고 부석사 경내로 다시 들어가면 유물전시각 뒤편에 철문으로 닫혀있는 옛 우물자리가 있는데 이를 선묘정이라 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가뭄에 기도드리면 감응이 있다는 식사용정(食沙龍井)은 종무소 안쪽에 있지 않을가 생각하고 있다.

용과 관계된 절이니 분명 우물터는 발달할 것이었겠지만 지금은 주목받지 못하고 또한 확인도 쉽지 않다.

 


출처 : 이보세상
글쓴이 : 이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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