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뒤로한 채 남녘의 천리 타향으로 귀양가는 다산에게 같은 유배객으로 동행하는 형 약전이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었다. 정약용 형제는 동작나루를 건너고 갈재(노령)를 넘어 나주의 [밤나무정이](栗亭店)에 이르렀다. 나주 구시가지 북쪽 5리 지점에 있던
주막거리 밤나무정이는 지금 흔적도 없고 그 자리에 파출소가 들어서 있다. 이곳 3거리에서 형제는 서러운 이별을 해야 했다. 다산은 이 때의
심정을 "그리운 정 가슴에 품은 채 묵묵히 두 사람 말을 잃어 억지로 말을 꺼내니 목이 메어 오열이 터지네" 하고 읊고 있다. 두 형제는 이날의 이별 후 다시는 상봉하지 못한다. 동시대의 인물 가운데 다산의 학문을 그 누구보다 평가했던 형 약전은 16년간 흑산도에서 동생을 그리워하며 귀양 살다가 사망했다. 훗날 다산은 귀양에서 풀려 밤나무정이를 지나면서 『살아서는 증오한 율정점이여! 문 앞에는 갈림길이 놓여 있었네…』(??)라는 시를 읊으며 눈물을 뿌렸다.
앙칼진 바위들이 도봉산의 산세와 닮아 유배객 다산에게 향수를 불러 일으켰던 영암 월출산을 오른쪽으로 끼고 얼마간 달리면 강진 땅이다. 교통의 요지 성전을 지나 동남쪽으로 향하면 다산초당에서 생활하기 전까지 8년여 동안 유배생활의 근거지였던 강진읍이 소박한 시골모습을 하고서 지친 나그네를 반긴다. 백발의 村老와 나눈 먹음직스런 정담으로 노곤한 심신과 시장기를 달래고서 다산 동상을 보러 길을 재촉했다. 강진읍내 들머리길가의 널직한 공원에는 다산의 동상과 그의 [부채시](扇子詩)를 적은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부채시는 예문관 즉 한림에 선발되어 함께 근무했던 정을 잊지 않고 먼길을 달려와 위로하고 떠나는 친구 김이교(1764-1832)가 쥐고 있던 부채에 이별의 정을 적었던 칠언율시이다. 이별을 슬퍼하는 자신의 심정인양 내리는 빗속에서 옛 벗과 헤어져야 하는 유배객의 외로움과 쓸쓸함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옥당(홍문관)과 함께 관리들의 선망의 대상인 한림(예문관)에 선발되었을 때 반대파들이 선발과정에 의혹을 제기하자 사직서를 제출하고 물러났다가 이후 정조의 여러차례의 부름에도 나가지 않아 결국 충청도 海美縣(서산)로 귀양갔던 경술년(1790년)의 일을 회상하고 있다.
驛亭에 내리는 가을비 벗을 보내기 더디게 하네
이 외로운 땅 찾아줄 이 누가 다시 있으랴
벼슬자리 다시 오를 것을 어찌 바랄 수 있겠는가
李陵도 고향엘 가고 싶었지만 끝내 이룰 수 없었네
酉舍에서 글쓰던 날 아직도 생각하노니
庚戌年에 칼 떨어지던 때를 차마 말할 수 있으랴
외로운 대나무 두어 떨기와 새벽 조각달만 날 지켜주니
옛동산 그리워 머리 돌리고 눈물 줄줄 드리우네
형과 헤어져 유배지 강진에 도착한 다산을 맞이한 것은 살을 에는 찬 겨울바람과 삭막한 인심뿐이었다. [사학을 믿은 대역죄인]이 귀양을 오자 마음사람들 모두가 전염병환자를 보듯 다산을 피했다. 가는 곳마다 문을 부수고 담장을 무너뜨리고 달아나며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외가 쪽에서도 다산을 모른 체했다. 오직 주막집의 늙은 할머니 한사람만 뒷방 한칸을 내어 주었다.
유일하게 유배객을 맞아 주었던 동문 밖 주막집은 지금의 군청 · 경찰서 앞을 지나 동진하여 4거리 하나를 지나고 다음 3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조금 올라가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있었다고 한다. 이제는 흔적조차 사라지고 정자목 아래에 정약용 선생이 거처하던 곳이라는 표석만이 세워져 있다. 선생은 주막노파의 허름한 뒷방 한칸을 사의재(四宜齋)라 이름한다. 맑은 생각과 엄숙한 용모, 과묵한 언어와 진중한 행동, 이 네가지를 義다에 맞도록 마땅히 해야 할 방이라는 뜻이다. 다산은 1805년 겨울까지 여기에서 머무는데, 이제야 공부할 겨를을 얻었다고 기뻐하며 학문연구와 저술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사의재에서 다산은 주로 상례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강진읍 서문에서 2.5km를 달려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1805년 봄 백련사에서 만남이래 두터운 교분을 쌓아온 백련사 혜장의 주선으로 잠시 머물렀던 고성암이 나온다. 다산은 1805년 겨울부터 강진읍 뒷산인 보은산에 있는 고성암에 거주하게 된다. 제자 황상이 머물던 궁벽한 곳이었지만 동문 밖 주점보다는 쾌적한 곳이었다. 사의재에서 주로 상례를 연구하였다면 고성암의 보은산방에서는 주역을 주로 공부하였다.
[보은산방] 터를 묻는 나그네에게 산사의 스님은 칠성각이 있는 쪽을 가리킨다. 절 입구에 수령이 5백년이라는 팽나무 하나가 서 있다. 고성암에서는 다산을 만난 유일한 존재인 셈이다. 절 뒤로는 다산이 올라가 형 약전이 유배생활 중이던 흑산도 쪽을 바라보면서 오열했다는 소머리 형세의 牛頭山의 정상 형제봉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