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 ] |
2002년10월31일 제43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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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함을 좇는 ‘시대의 우상’
얄팍한 상혼에 놀아나는 착한 텍스트들… 성찰 가로막으며 감수성의 감옥에 내몰아
일러스트레이션/ 방기황.
늦가을, 쌀쌀하면서도 쾌적한 바람이 잉잉댄다. 때가 된 것이다. 착잡하면서도 매혹적인 여행의 액셀러레이터를 밟을 만한 최적의 온도. 그리하여 신문을 뒤적인다. 단풍에서 낙엽으로, 늦가을 산행을 재촉하는 기사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놀랍다. 일간지의 여행 안내기사들은 여전히 저 40년대의 박목월, 그 ‘나그네’의 서정을 반복하고 있다.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산사의 그윽한 풍경 소리, 그리고 마치 옛날 이야기의 한 대목을 되감기한 듯한 산장지기의 등장, 도시인의 강퍅한 마음을 녹이는 녹차 한잔의 여유 익숙한 정경, 차마 거절할 수 없는 맑고 따뜻한 정서.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기사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낡고 닳은 상투어를 동원하여 실체를 과장하고 그 과장된 실체를 무생물처럼 취급한다는 점에서 놀랍다.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정형화. 지친 도시인들이 떠난다. 그곳에는 착한 골짜기가 있다 운운. 여기에 주남 저수지의 철새를 가리키며 생태의 소중함과 영겁의 우주까지 더하면 금상첨화. 갑자기 떠나기 싫어진다. 신문을 접는다.
착한 문화가 거대한 소비시장 형성
‘착한 글’들은 우리를 괴롭힌다. 그 문자들은 우리를 낡은 ‘감수성의 감옥’으로 몰아세운다. 함부로 거절하기에는 민망하다. 착하고 고운 단어들이 겨우 지탱하고 있는 연약한 육체를 대놓고 훼손하기는 어렵다. 물론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큼 어려운 지상 명령도 없다. 착하다는 것이 반드시 어떤 순진무구한 상태를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선악의 경계는 언제나 모호하고 주관적이다. 입장의 상이함에 따라 착한 심성과 고결한 종교 정신이 적대적으로 갈등하고 투쟁하는 것이 세상의 냉혹한 현실이다. 대체로 응전의 방식은 두 가지. 먼저 성찰의 힘이 있다. 응시하고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힘든 공부가 필요하다. 다음으로 ‘선한 의지’에 호소하는 것이다. 모두가 착한 마음만 가진다면 세상은 얼마나 좋아질 것인가. 실은 이것이야말로 대단히 어려운 결단이다.
그런데 요즘의 양상이란 첫 번째를 버리고 두 번째를 ‘손쉽게’ 택한다는 것이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착한 문화’들을 대대적으로 소비하는 양상이 두드러지고 있음은 최근의 주목할 만한 양상이다. 소설 <아버지>였던가, 그 이후 <가시고기>까지 이어졌다. 문화방송 ‘오락’ 프로그램 <느낌표!>에서 선정한 책의 목록표는 지금 이 시대가 어떤 정서를 원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백범일지>와 신경림 시인의 책을 제외한다면 대부분 ‘사적인 기억의 골짜기에서 건져올린’ 언어들이다. 낱낱을 떼어놓고 보면 그 책들은 거대한 상혼이 판치는 출판의 대세 속에서 알찬 성과로 간추릴 만한 것이지만 그것들이 동시에, 대대적으로(물론 오락 프로그램과 대형 서점의 ‘협찬’ 때문이지만) ‘소비’되고 있는 이 경향성은 별도의 검토를 요하는 일이 된다.
무한경쟁 속에서 개인의 현실은 답답하고 어렵다. 제국패권의 위력 속에서 세상 또한 갈등과 폭력의 재현이 염려된다. 이 현실 속에서 따뜻하고 착한 이야기를 원하는 것은 인지상정의 일. 그러나 그것의 대대적인 소비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작고 소중한 메시지’를 오히려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것들은 대체로 ‘좋았던 옛날’을 겨냥한다. 그 시절이 반드시 좋았느냐고 정색을 하면 누구나 고개를 저을 일이지만 어쨌든 ‘그때 그 시절’에는 인정이 있고 사람살이의 훈풍이 깃들었다는 추억이다. 그 힘들고 가난한 시절에도 인정은 메마르지 않았고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의지 또한 완강했었노라고 증언하고 있지만 대체로 ‘기억의 당의정’ 역할 이상이 되지 않고 있다. 뼈저린 후회와 각인이 상실된 기억들, 성긴 채로 걸러낸 이미지의 교합, 과거의 상처를 기억할 만한 추억으로 재생하려는 뇌신경의 작용을 제어하지 못한, 일종의 ‘사이버 기억’들이 문자 사이를 지배한다.
현실 망각의 기제… 작위적 연성화 전략
사진/ '착한 문화'들이 세상과 적당히 소통하고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문화방송 에서 권하는 책들도 이런 시대의 정서를 보여준다.
또한 그것들은 ‘탈속의 경지’를 동경한다. 중세의 수도원, 그윽한 산사, 숭엄한 티베트가 주요 소재가 된다. 그 자체로 종교의 영역이거나 종교의 속성을 지닌 공간을 지향하는 것이다. 때로는 생태 탐사조차 지나친 종교성의 덧칠로 본래의 계몽성을 상실하는 경우마저 있다. 이러한 산문의 일부 저자들은 대체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쓴다. 문화·인종·언어의 갈등에 더하여 특히 종교의 대립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는 인도는 잠시 열외가 된다. 오로지 사원 속의 인도만이 ‘인도 기행’의 목적이다. 저자의 마음속 인도를 위해, 혹은 출판사가 요구하고 독자가 바라마지 않는 것으로 착각한 ‘사이버 인도’를 위해 현실의 인도가 외면당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이다.
주요 일간지들이, 특히 문화면에서 아주 친절한 존댓말, 그러니까 공경어체 기사를 남발하는 것도 동일한 경향으로 묶을 수 있다. 영어를 비롯한 대개의 언어가 문맥 속에서 공경의 뜻이 내포된 것과 달리 한글은 그 자체로 ‘공경어체’가 뚜렷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일간지에서 공경어체가 빈발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인데 일단 문화면에서 뚜렷하다. 일종의 소통장치라는 측면이 있을 수 있다. 무미건조한 스트레이트 기사와 권위적인 훈계조의 논설에 짜증이 난 독자들에게 공경어체로 새로운 소통의 인사를 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무한 경쟁에 돌입한 일간지들이 독자들에게 ‘어필’하려는 연성화 전략의 일환이라는 점이다. 주요 일간지들의 금요일자 ‘주말판’이 사실은 구매력이 강한 층을 겨냥한 ‘광고성 소비상품 소개’에 지나지 않는 점, 더구나 경쟁적으로 신설한 ‘경제 섹션’이 경제 동향의 분석과 전망이 아니라 부동산과 금융상품 등의 재테크 위주라는 점, 그리하여 그 두 축이 독자가 아니라 실은 광고주들의 입맛에 맞는 기사로 기능한다는 점을 더불어 환기한다면 문화면의 ‘달콤쌉싸름’한 공경어체 기사들 또한 영 거북한 심정이다. 문화팀장, 영화팀장, 출판팀장들의 이름은 딴 ‘…레터’ 식의 박스 기사들은 매우 나긋나긋하고 육감적인 공경어체를 구사한다. 공경어체는 그 문장구조의 특성상 어떤 준밀한 판단보다는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식의 논조를 회피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그 기사들은 다양한 영화 ‘상품’과 온갖 출판 ‘상품’을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역할 이상을 하지 못한다. 유명 연예인과의 인터뷰는 거의 ‘팬클럽’ 게시판 수준이다. 독자라는 이름의 ‘대중’들이 온갖 문화 상품을 어떤 이유에서 대대적으로 소비하는지에 대한 분석과 비판은 찾아볼 수 없다.
언어적 유희로 착함을 강요 말라
왜 ‘착한 문화’들이 소비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착한’ 것일까. 그것은 일종의 제스처, 그러니까 타자와의 본질적 삼투를 회피하면서도 적당히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장치는 아닐까. 비판과 성찰의 힘보다는 얼핏 보기에 선악을 손쉽게 판별해주는 듯한 종교적 언어로 자신을 둘러싸려는 심리적 보호본능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나는 다시 신문을 펴든다. <느낌표!>가 선정한, 전우익 선생의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에 대한 소개가 실려 있다. 기사는 친절하고 공손한 말의 성찬으로 얼룩져 있다. 그런데 내 기억이 맞다면 전우익 선생은 세상에 도통한 포즈로 도시인들에게 ‘다 버려라’ 하면서 언어의 마사지나 해주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올해 초 문화방송 <시사매거진 2580>이 취재했을 때 “아직도 내 질투와 욕망이 부글부글 끓어. 사람들이 우우 몰려왔다가 갈 때는 외롭고 힘들어”라고 토로한 적 있다. 그의 생애가 증명하듯이 요컨대 술익는 마을에서 소요하고 있는 도인이 아니다. 저런 분도 마음의 욕망과 갈등을 삭이느라 연마 중인데 우린 너무 쉽게 착한 언어에 길들여지는 것은 아닌지. 착한 것처럼 보이는 문화 상품들과 기사에 취해 있는 것은 아닌지. 서로 위로할 때가 아니라 채찍으로 등짝을 쳐가며 살아가야 하는 때가 아닌지, 거듭 생각한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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