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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 근현대사 라이벌 - 김구 VS 이승만, 행동주의자와 외교론자

문근영 2010. 6. 25. 09:55

한국 근현대사 라이벌 열전 1. 김구 VS 이승만, 행동주의자와 외교론자

 

 

Posted at 2009/12/11 20:51 | Posted in 사회 | Posted by 애비로드

 


   1876년,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현재까지의 모든 역사를 우리는 대한민국의 근, 현대사라고 정의한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140여년은 절망과, 희망과, 고통이 공존하는 역사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단군이래로 반만년동안 지켜오던 나라를 36년간 처음으로 일본에게 빼앗기며 치욕의 역사를 기록하기도 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나라가 둘로 갈리는 아픔을 겪었으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많은 국민들이 자신의 피를 바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한국 근현대사의 한시대를 풍미했던 서로 경쟁했던 라이벌들은 누가 있을까? 물론 많은 사람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한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했던 라이벌이 바로 대한민국의 국부(國父) 김구와 이승만 선생이라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부(國父) 백범 김구 선생님과 이승만 대통령. 이 두분은 한국사 최고의 라이벌이다( 사진 네이벼 뉴스)


   대한민국 국민들은 김구와 이승만을 극과 극으로 평가하곤 한다. 현재 대한민국의 고등학생들이 보는 교과서인 한국 근현대사에서는 김구를 애국 독립운동가로, 이승만을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쇠퇴하게 만든 장본인으로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김구를 애국독립운동가로, 이승만을 ‘권력욕에 눈이 먼 대통령’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하지 못할까?

   우리가 생각하는 백범 김구 선생님은 “상하이 임시정부를 이끌어나감과 동시에 항일무장독립투쟁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김구는 1919년부터 상하이 임시정부를 대한민국이 광복할 때까지 지도해나간 광복 전의 위대한 지도자임에 틀림없다. 또한 광복 후에도 남북의 통일을 위하여 죽기전까지 목숨바쳐 희생하셨던 분이다. 만일 육군 소위 안두희가 김구를 쏘지 않았더라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조금더 민주적인 국가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의문을 제기하고 싶은 점은 바로 김구와 상하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정책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것이다.

   1931년, 잇단 지도층들의 분열로 고초를 겪고 있던 임시정부의 활력을 되찾기 위하여 당시 임시정부를 총괄하던 김구는 고심 끝에 한인 애국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일본의 주요요인들의 암살과 테러를 시작한다. 결국 두 젊고 패기넘치는 한국인. 이봉창과 윤봉길에 의하여 거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필자는 이 점에서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과연 의거나 암살같은 극단적이고 단순한 거사가 대한민국의 독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까?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이유가 어떻든지 테러라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오사마 빈라덴과 그의 테러단체인 탈레반이 벌인 9.11테러처럼 무고한 시민들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의 상황은 9.11테러와 다르다. 일본군 요인이나 천황을 향해 던졌기 때문에 일반인에 대한 살상의도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장소에서 폭탄을 던졌을 때 전쟁과 전혀 상관없는 무고한 일본인이나 중국인(윤봉길의사가 도시락폭탄을 던졌던 곳은 바로 중국 훙커우 공원이다)이 맞았을 경우가 있기 때문에, 어느 이유에서든지 의거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또한 의거라는 단순한 암살이나 살상으로 독립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 윤봉길 의사가 던진 도시락폭탄이 많은 일본 고위장교들을 살상했다 하더라도 일본이 그것 때문에 항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김구는 의거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하여 잠시나마 해이해졌던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들을 각성시키려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의거 이후에 우리나라의 국민들은 안전했을까? 일본은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이후 더욱 더 조선인 탄압정책을 강화했다. 9.11 테러로 무고한 아프가니스탄의 백성들의 미군의 무차별 폭격아래 목숨을 잃었듯이 조선의 국민들은 더욱 더 지독한 탄압을 받았을 것이다.

 

 

인 애국단의 두 열사 이봉창과 윤봉길. 대한민국 독립투쟁사의 커다란 업적을 남기며 순국한 위인들이다. (사진제공 네이버 뉴스)


  
   또한 나는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기도 했던 이승만을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승만을 비판하면서 ‘미국에서 몸을 숨기며 비겁하게 숨어지내다가 광복후에 독립운동가라며 생색낸 기회주의자’라는 말을 한다. 필자도 근현대사 교과서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과연 이승만이 숨어만 지내며 기다렸을까? 아니다.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활동에 대하여 많은 공헌을 하였다. 백범 김구 선생님이 ‘행동으로 보여준 행동주의자’의 표본이라면, 이승만 대통령은 ‘외교활동을 통하여 대한민국의 광복을 앞당긴 외교론자’이다. 물론 겉으로 보기엔 이승만의 업적은 김구에 비해서 엄청나게 초라해 보인다. 기껏 한다는 일이 미국에 있으면서 말로만 독립을 외치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승만은 뛰어난 외교수완으로 대한민국의 현재 상황과 독립의 간절한 바람을 전세계에 외교로써 알린 사람이다. 그당시 영어로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겠는가. 그런면에서 보았을 때 이승만은 노련한 외교론자였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몸으로 직접 부딪히며 일본과 대립한 반면, 이승만은 외교로 세계 각국에 알린 사람이다. 비록 외국에서 활동하던 터라 구체적이고 자세한 기록은 부족하지만, 이승만이 없었더라면, 나카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일왕 히로히토가 항복을 선언하더라도 대한민국의 독립은 불투명했을 것이다.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다정히 서있는 이승만대통령. 기회주의자라는 오명도 있었지만, 그또한 진정한 애국자이다(사진제공 네이버) 
 
 

   김구 선생님과 이승만 대통령, 방법은 달랐지만 두분 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비록 이승만이 대통령 당선 후 독재로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면도 있겠지만, 독립운동에서 외교론자였던 그의 비중은 매우 크다. 따라서 김구와 이승만이야말로 대한민국 근현대사, 아니 대한민국 역사에 있어 최고의 라이벌 아닌가 싶다.

 

by 애비로드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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