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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산책] 실학시대의 최고 역사가 안정복과 <동사강목> / 신병주

문근영 2010. 6. 23. 10:15


실학시대의 최고 역사가 안정복과 <동사강목>

신병주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안정복(安鼎福:1712~1791)은 조선후기 실학의 호수와 같은 역할을 했던 이익의 제자로서 그 영향을 받아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동사강목(東史綱目)』은 역사전문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저술로서,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우리 역사를 바라보고자 했던 그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대실학자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다

안정복의 호는 순암(順庵),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원래 그의 가계는 광주 안씨 중에서도 문장이 뛰어나고 벼슬이 높아 손꼽히는 명문가로 일컬어져 왔다. 그러나 안정복이 살았던 시대는 노론이 정치권력을 독점하면서 남인이었던 그의 집안은 점차 가세(家勢)가 기울었다. 조부가 울산부사로 재직 중 노론의 배척을 받아 파직을 당한 후 부친은 일평생 처사로 일관했으며, 안정복도 15세의 어린 나이에 조부의 비운을 목격한 후 38세 때까지 과거는 물론 일체의 출사도 하지 않았다.

1726년(영조 2)부터 무주(茂朱)에 은거하던 안정복 집안은 1735년 조부 사망 후 고향인 경기도 광주 덕곡리로 돌아왔다. 안정복이 광주에 정착하게 된 것은 그의 인생과 학문에 큰 전환점이었다. 서울 가까이에서 새로운 학문과 서적을 손쉽게 접할 수 있었으며, 가까운 안산 첨성촌에 실학의 대종(大宗)인 성호 이익(1681~1763)이 살고 있었던 까닭으로 그의 제자가 되어 성호 실학의 중요한 계승자가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마련되었다.

안정복은 어릴 적부터 성리학의 경사(經史), 시문, 예학 이외에 음양, 천문, 복서(卜筮), 병서, 패관소설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였다. 그리하여 ‘책이 생긴 이래 문헌상 고증할 만한 것들은 보지 않는 것이 없다’고 자부할 만큼 해박하였다. 젊은 시절 실학자로서 안정복의 자질이 엿보이는 저술이 바로 『하학지남(下學指南)』이다. 『하학지남』에서 안정복은 이기심성 위주의 형이상학적인 성리학이 아니라 수기치인(修己治人)과 관련된 실천적 성리학을 중시하였다. 박학(博學)을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된다고 보고, 박학에 근거한 실용, 무실(務實), 실리(實利), 실심(實心) 등의 개념을 강조한 것이다. 안정복은 『하학지남』을 통해 이미 실학자로서의 기초를 확립했던 것이다.

안정복은 35세라는 늦은 나이에 이익에게 나아가 제자가 되기를 정식으로 청하였다. 이때 이익은 65세의 노학자로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을 창도하여 남인 실학파의 중심인물이 되어 있었고 첨성촌에서 여러 제자들을 키우고 있었다. 안정복이 이익의 문하에 들어갔을 때 윤동규(역사, 지리), 신후담(병학, 산학), 이병휴(경학), 권철신(서학) 등 쟁쟁한 학자들이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안정복은 이들과의 경쟁 속에서 학문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고, 성호학파의 정통을 수립하기 위해 끊임없이 학문에 정진하였다.

정통론적 역사인식과 고증적 학문태도

안정복의 저술 중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동사강목(東史綱目)』은 이러한 열정의 산물이었다. 『동사강목』은 안정복이 45세 되던 해인 1756년 집필에 착수하여 3년간의 몰두 끝에 일단 초고를 완성하였고, 20여년 뒤 목천현감으로 있을 때 다시 이 초고에 손질을 가하여 최종적인 작업을 끝내게 된다. 조선후기 개인에 의해 쓰여진 기념비적인 역사서가 완성된 것이다.

『동사강목』은 상고시대부터 고려말까지를 다룬 역사서로,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기존의 역사인식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였다. 안정복은 서문에서 ‘대개 사학의 방법은 정통을 밝히고 시비를 바로잡아 충절을 칭찬하는 것과 제도와 문물을 상세히 하는 것’이라 하여 기존 역사서의 오류를 지적한 후, 계통(系統)을 바르게 밝히고 사실 고증에 충실한 역사서를 저술하고자 하였다. 계통을 밝힌다는 것은 정통론(正統論)의 문제를 올바로 해명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이는 강목체(綱目體)라는 서술방식을 택한 것과도 연관이 있다. 주요한 역사적 사실을 간추려 강(綱)을 내세우고, 이것을 일일이 다시 설명하는 목(目)을 붙이는 강목체 역사서술 방식은 역사에 대한 전체적인 식견이 없이는 그 집필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그만큼 안정복이 우리 역사를 보는 관점과 논리에 치밀했으며,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역사전문가였음을 보여준다.

『동사강목』은 단군에서 시작하여 기자, 마한, 통일신라, 고려를 정통으로 취급하고 삼국시대를 무통(無統)의 시대로 한국사 체계를 구성하였다. 이처럼 안정복이 정통론에 충실했던 것은 우리 역사에도 정통이 있음을 강조하여 중국 중심주의적인 역사관에 대응하여 우리 역사에도 독자성이 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깊이 배어 있었다. 또한 사실고증을 철저히 하여 보다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방향으로 우리 역사를 서술하려고 한 흔적들이 『동사강목』 곳곳에 나타나 있다. 그가 역사전문가로 불릴 수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안정복은 단군에서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실들을 새 자료에 의해 보완하고 나아가 이설(異說)들을 새롭게 고증하고, 보충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는 주를 달아 기록하여 자신의 견해를 나타냈다. 부록의 「고이(考異)」, 「지리고(地理考)」 등은 역사지리에 대한 그의 고증학적인 학문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동사강목』의 저술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과 같은 기본적인 서적은 물론이고 개인의 문집, 비문 등을 광범위하게 활용하였으며, 중국서적들도 상당수 참고하였다.

『동사강목』은 17세기 이후 축적된 국사연구의 성과를 계승 발전시켜 역사인식과 서술내용 면에서 가장 완성도 높은 저술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역사인식의 측면에서는 앞서 시도된 강목법을 한층 세련되게 하고 정통의 부각이라는 측면에서 우리 역사를 재구성하였다. 이와 함께 서술내용 면에서는 한백겸의 『동국지리지』 이래로 활기를 띠기 시작한 역사지리 연구 및 사실 고증의 성과들을 집대성하고 재해석함으로써 역사전문가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하였다.

안정복은 『동사강목』 이외에도 정치, 경세, 사회에 대해 탁월한 견해를 밝힌 『만물유취(萬物類聚)』,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러 가지 잡다한 사항을 모아 정리한 백과사전적인 저술 『잡동산이(雜同散異) 53책, 그리고 정무(政務)의 긴요한 사항에 대해 목민관(牧民官)의 임무와 개혁정책을 제시한 『임관정요(臨官政要)』 등 다양한 저술을 편찬하였다. 이중 『임관정요』는 후배 실학자 정약용의 『목민심서』의 편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동사강목』을 비롯한 안정복의 저술들은 18세기를 풍미했던 ‘실학’의 시대사상을 반영해 주는 한편, 조선후기의 최고 역사전문가 안정복의 이름을 널리 기억하게 하고 있다.


글쓴이 / 신병주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학예연구사
· 저서 : 『제왕의 리더십』, 휴머니스트, 2007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돌베개, 2005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