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못다 부른 나의 귀거래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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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못나 결단을 못 내리고 있을 때, 모든 것 뿌리치고 훌훌히 떠나 내려가 사는 사람들이 내게는 그렇게도 우러러 보일 수가 없다. 이현보는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농암가’를 부르며 경상북도 예안 땅, 그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지난 여름 강원도 인제의 개인산방(開仁山房)엘 다녀왔다. 내가 경애하는 산방주인 미산 신남휴(美山 申南休)는 마침 부재중이었지만, 있는 동안 내내 그를 부러워만 하다가 돌아왔다. 신영복(申榮福)·신경림(申庚林)의 「더불어 숲 학교」가 이 개인 산방 안에 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서울을 떠나 산 좋고 물 맑은 곳이나, 제가 태어나 자란 고향에 터 잡아 사는 사람들의 그 개결한 인품에 반하기 시작했다. 원주의 터줏대감으로 살면서, 오갔던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향훈(香薰)을 많이 뿌려 만인의 추모와 존경을 받고 있는 청강(淸江) 장일순(張壹淳)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면식이 거의 없는 한승원·김성동·이철수·김봉준·김용택·이원규·박남준 같은 시인 묵객들의 결단과 그 삶은 나를 여지없이 열등감과 부끄러움에 빠트리고 만다. 교통부장관을 지냈던 손수익(孫守益)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그의 고향인 전남의 장흥(長興)에 내려가 ‘장흥학당’을 차리고 거기서 당주(堂主)노릇을 하고 있다. 실제로 나는 그들의 자연과 그리고 사람과 어울려 사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언젠가는 장흥읍내의 거리에 “장흥이 없었더라도, 과연 호남이 있었을까”하는 내용의 현수막이 높이 걸린 것을 본 적이 있다. 대단한 자부심이었다. ‘호남가’라는 노래가사에 “태인(泰仁)하신 우리 성군(聖君) 예악(禮樂)을 장흥(長興)하니”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과연 장흥에서는 그에 걸맞는 문인, 일사(逸士)가 많이 나왔다. 단순히 내려가 산다는 것 위에 보람을 창조하는 삶이 거기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내게는 돌아갈 고향이 있는 것도 아니요, 황폐해 가는 전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어릴 적 자랐던 상자지향(桑梓之鄕)은 도시개발로 말 그대로 상전이 벽해로 변했으며, 함께 뛰놀았던 동무들은 천지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고향인 옛날의 자취도, 사람도 없다. 나는 고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고향을 사기당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언젠가는 돌아갈 고향을 가지고 있는 실향민보다 내가 더 참담한 신세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내려가 꾸릴 삶에 남다른 특별한 목적이나 까닭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서울의 잡답(雜沓)을 떠나 이것저것 안 보고, 안 듣고 싶기야 하지만, 그렇다고 꼭꼭 숨어 은둔하자는 것도 아니다. 챙겨주는 이 없어도 찬물에 물을 말아 된장에 풋고추 찍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으면 족하고, 찾아오는 친구 있어 밤새 도란도란 청담(淸談)을 나눌 수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내 부르고 싶은 귀거래사가 고작 이런 것인데도, 막상 떠나기가 이렇게 어렵다. 아내가 두려워하고 아이들이 반대하니, 아무래도 멀리 가기는 틀린 것 같다. 그러나 저러나 나 언제나 돌아갈 수 있을꺼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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