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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산책] CI 유감 / 심경호

문근영 2010. 4. 24. 09:22

CI 유감


심경호(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금년 4월 2일, 이번 정부의 청와대가 새 도안을 발표했다. 아침 시간에 케이블 TV의 모 방송국 뉴스로 그 사실을 들으면서, 청와대 발표자가 CI란 말을 계속 사용하는 것을 들었다. 기자들도 그 용어에 대해서는 아무 질문을 하지 않았다. 당일 뉴스나 인터넷, 신문을 훑어보았으나, 그 용어에 대한 풀이를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국민 대다수가 알고 있는 말이기 때문에 풀이할 필요가 아예 없었는지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영문학이나 언어학을 전공하시고 외국에서 오래 살다온 분들에게 물어보았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명쾌하게 말씀해주시는 분이 없었다.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경제용어 사전에 “CI(Corporate Identity)는 기업 이미지의 통합, 기업문화 등을 말한다.  CI는 자기기업의 사회에 대한 사명, 역할, 비전 등을 명확히 하여 기업 이미지나 행동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역할을 한다. 운운”하는 설명이 나와 있었다.


혹, 외국에서는 국가 기관의 이미지를 알리기 위한 도안을  CI라고 부르는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교양수업 시간에 질문을 던져보았다. 그러자 한 학생이 메일로, 청와대 홈페이지 및 주요 일간지에서는 VI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고 답하여 왔다. 그렇다면 당초 기자회견 때 CI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 잘못이었거나 부적절한 것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4월 7일에는 다시 문화재청이 전통 건조물의 기와지붕과 사람人자를 형상화한 도안을 CI라는 명칭으로 발표하였다.


학생들의 조사에 의하면, CI는 ID의 하나이며, ID에는 그밖에도 특정 브랜드의 BI, 행사 이미지의 EI, 그룹 이미지의 Gl, 병원 이미지의 Hl, 대학 이미지의 UI, 개인 이미지의 PI 등등이 있다고 한다. 그것들을 포괄하는 용어가 VI라고도 한다. 정말 이런 말들을 전부 약어(略語)로만 표시한다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을 듯하다.


청와대나 정부를‘기업’과 동일시할 수 있나

 

청와대의 CI 발표를 보면서 두 가지 문제점을 생각하였다.


우선 청와대나 정부를‘기업’과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만일 CI가 경제사전에 나와 있는 것처럼‘기업 이미지의 통합’을 뜻한다고 한다면, 청와대는 국가 기관을 기업으로 생각한다는 속내를 내비친 셈이다. 정부기관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기업의 경영 원리를 각 기관에 도입하려 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정책 방안일 수 있기에 굳이 탓할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국가 지도자의 집무처를 기업처럼 인식하였다면 그것은 문제가 달라진다.


『맹자』의 가장 맨 앞에는 ‘하필왈리(何必曰利)’장이 있다. 위나라 군주인 양혜왕이“선생께서 천리를 멀다 않고 오셨으니 역시 장차 우리나라에 이로움이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기대에 부풀어 물었을 때, 맹자는 "왕께서는 하필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의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서 맹자는 경고하였다. “만일 의를 뒤로 하고 이를 먼저 하면,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 국가가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 이념을 표방할 경우,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이를 취하는’상하교정리(上下交征利)의 ‘열세계(熱世界)’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정조는 국가가 이를 취하는 것을 우선할 경우의 병폐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규장각 초계문신들에게 낸 조문(條問)에서, ‘하필 이를 말씀하십니까’는 『맹자』의 제일 첫째가는 의리이거늘, 맹헌자(孟獻子)의 설에서 ‘의(義)로써 이(利)를 삼는다’라고 말한 것 자체도 ‘이심(利心)으로 인의를 하는 데 가깝지 않겠는가?’라고 의심하였다. 이에 대해 규장각신은 ‘패자(覇者)들이 거짓으로 하는 것처럼 이심(利心)으로 의를 하는 것을 말한 것과는 다르다’라고 대답하였다.


부국강병이 한 나라의 가시적인 목표임에는 틀림없다. 그렇기에 『맹자』의 ‘하필왈리’장을 풀이한 옛 지식인들도, 맹자가 결코 이익, 이로움의 중요성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고 단서를 달았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의 결과일 뿐이지 참된 목표는 아니다. 서로가 자기 자리에서 안정되고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공동의 진정한 목표일 것이다. 정조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우리들이 흔히 실학자라고 부르는 그 시대의 진보적 지식인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실학은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려는 근원적 사유를 지니고 있었다.


알파벳 약어의 사용을 조장하는 것 아닌가


청와대 관계자의 CI 발표를 보면서, 정부가 앞장서서 알파벳 약어(略語)의 사용을 조장하는 것은 아닐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즈음 우리 사회에는 알파벳만으로 표기한 약어가 너무 범람한다. 그 약어를 사용하는 집단에서는 그 뜻을 금방 알 수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뜻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다. 물론 언어는 언어대중에 의해 변화해가는 것이고, 복수의 표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에 의해 도태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당시는 초등학교) 때는 유네스코(UNESCO) 등등 세계기구를 가리키는 여러 알파벳 약어들의 뜻을 묻는 시험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썩은 일이 있다. 지금 초등학교 학생들은 대개 그 뜻을 알을 것이다. 인터넷 문화와 게임 산업이 발달하면서 알파벳 약어 사용의 범위가 넓어졌기 때문에, 그러한 문화와 산업에 친숙한 저연령층 혹은 청소년층은 알파벳 약어 사용에 그다지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지 모른다. 우리말의 긴 어휘들을 뚝뚝 잘라서 약어만으로 말놀이를 즐기게 된 것도 그러한 문화가 확산되는 것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하지만 이즈음의 약어 사용은 정도가 지나치다. 더구나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어휘들의 첫 음절만 잘라 이어서 특정 집단이나 개념을 표시하고는 하는데, 나로서는 조금 유치하다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알파벳만으로 조합된 알파벳 약어를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마구 사용하고 있으므로, 이제부터는 알파벳 약어 학습을 위해 별도로 시간을 내야할 형편이다.


청와대측 발표자는 기존 도안이 낡고 권위적인 이미지를 지녔던 데 비하여, 이번 도안은 국민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단순화하고 명징화하였다고 했다. 도안은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새 도안을 공표하는 회견을 보면서 나는 명징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소외감과 불안감을 느꼈다. 신문이나 방송은 왜 대응어를 만들어 사용하거나, 아니면 간략한 설명어만이라도 덧붙여주지 않는 것일까, 조금 야속하였다. 


일상의 사물 하나도 바른 이름을 대응시키고자


다산 정약용은 해배 뒤에, 한강에는 옛날부터 농어가 많았지만 어떤 것이 농어인지 몰랐다가 『본초강목』과 옛 사람들의 시구를 고찰하고, 또 석천 신작에게 물어본 뒤에 그 이름을 바로잡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장난삼아’ 장편 시를 지었다. 「한강에는 예부터 농어가 많았는데 내가 식견이 거칠어서 어떤 것이 농어인지 미처 몰랐다가, 이제 『본초』 및 고인의 시구를 상고해 보고서야 비로소 그 이름을 바로잡았는바, 해거 도위가 급히 그 고기를 보고자 하므로 겨우 한 마리를 잡아 회를 쳐 놓고 장난삼아 장구를 짓다[洌水故多로魚 … 戱爲長句]」라는 긴 제목의 장편시이다. 진정한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일상의 사물 하나도 바른 이름을 대응시키고자 하였다.


시그니피앙(기호표현)과 시그니피에(기호의미)의 관계를 되물어보고, 그 관계의 배후에 놓인 사유양식까지도 바로잡으려 한 것이 이른바 정명(正名)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CI의 발표를 보면서, 왜 정치하는 분들은 고전의 교훈과 실학자의 언설에서 정명의 사상을 배우지 못하는가 씁쓸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쓴이 / 심경호

·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김시습 평전』, 『한국한시의 이해』, 『한문산문의 내면풍경』, 『한시의 세계』, 『한학입문』, 『한시기행』, 『간찰 : 선비의 마음을 읽다』, 『산문기행 : 조선의 선비, 산길을 가다』 등

· 역서 : 『불교와 유교』, 『주역철학사』, 『원중랑전집』, 『금오신화』, 『한자 백가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