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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이면서 야당을 비호하거나, 야당이면서 여당을 지지하는 일은 쉽지도 않고 또 문제를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여당이 하는 일은 의당 야당은 반대하고, 야당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여당은 반대하기 마련입니다. 지금처럼 민주주의 시대여서 유권자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때에도 그렇거늘, 항차 전제군주시대이자, 국민의 눈치야 살필 필요도 없던 조선시대에는 얼마나 더 심했겠습니까. 서인과 동인으로 다투다가, 다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고,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려서 이전투구의 당쟁을 계속하던 시절에는 정말로 가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정치적 견해나 학문과 사상의 절대적 반대는 말할 것 없이, 서로의 내왕이나 상종도 없었고 혼인조차 하지 않는 적대적 관계로만 살았습니다. 더구나 강자의 위치를 독점했던 노론에 대해서는, 약자인 소론과 남인이 더러는 연합전선을 폈지만 당해내지 못하여, 노론에 대한 반감은 정말로 심해서 노론과 소론, 노론과 남인은 원수처럼 평행선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시점에 남인이던 다산 정약용은 일반적인 당쟁의 무리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당파로 나뉜 이후에 사대부들은 아무리 뛰어난 재주가 있고 큰 선비라는 호칭을 받더라도, 대부분 문호에 얽매여 주장하는 논리가 편파적이었다. 오직 다산만은 마음을 평탄하고 넓게 먹어 착한 것만을 본받을 줄 알았다. 그래서 선배들에 대해서는 전혀 애증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남인들이 아주 싫어하고 무시하였다.” (士大夫分黨以來 雖稱通才大儒 類皆拘攣門戶言議偏頗 惟茶山 心期坦蕩 惟善是師 於先輩絶無愛憎 由是大爲午人厭薄 : 黃玹『梅泉野錄』)
‘매천필하무완인’(梅泉筆下無完人)이라 하여 칭찬보다는 폄하하는데 일가를 이룬 매천 황현의 주장이었으니 믿어도 될 이야기입니다. 특히 18년의 유배살이 뒤 고향에 돌아와 노론의 대가이던 대산 김매순, 홍석주 3형제들과 학문 논쟁을 펴고 세상없이 다정하게 지낸 점은 그런 사실을 증명해주기에 충분합니다. 노론 벽파에 몰려 그만한 유배의 고생을 경험하고도 노론들과 그렇게 친했던 다산은 분명히 당파를 초월한 학자였습니다. 아무리 잘해도 남의 당이면 반대하고, 아무리 못해도 자기 당이면 두둔하는 오늘의 정쟁, 조금이라도 변해보면 어떨까요.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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